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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진보적 교육이념 정립을 위한 몇가지 단상

2001.02.08 18:34

홍은광 조회 수:1803 추천:6

진보적 교육이념 정립을 위한 몇 가지 단상

진보적 교육이념 정립을 위한 몇 가지 단상

홍은광(교육 문화실)

 Ⅰ. 이 글의 제목을 결정하는데 많은 고민이 있었다. 제목대로라면 현재의 교육운동 진영에 있어서 아주 중대한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자신도 "진보적 교육이념"대하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다. 더구나 철학의 영역은 더욱 그렇다. 다만 평소에 답답한 고민들의 단층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단층들의 근거 또한 이론적으로 정교한 것이거나 교육현장에서의 실천을 통하여 체득한 것이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들이다. 하여 제목과 같이 거창한 내용을 내가 말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이 단층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답답한 부분들을 서로 해결해 나갔으면 하는 작은 바램에서 회보에 게재해 본다.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글이 매끄럽지 못하고 허점이 많다. 많은 질책의 필요를 느끼며 글을 시작한다.

 Ⅱ. 교육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교육에 있어서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답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서로가 진보를 자처하거나 서로가 보수라고 딱지를 붙이기도 한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득세와 이에 따른 구성주의 교육이론의 등장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우리를 혼란 상태에 빠뜨리고 있다. 신자유주의 교육이론의 등장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이전에 상대적 진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던 것들이 신자유주의 교육이론의 무기가 되어 되돌아오기도 한다. 신자유주의 교육이념은 이미 하나의 교육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음의 글을 보자.

 '세계화와 정보화 경쟁과 자율성 수요자 중심' 등을 구호로 내세우면서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교육'은 열린교육과 자기 주도적 학습, 지식기반사회와 신지식론 등의 교육 방법론과 사회상 인간상을 제출하여 어느덧 체계적인 교육이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중략)… 신자유주의 교육 페러다임은 '지식기반사회'라는 사회상, '신지식인'이라는 이념적 인간형, 그러한 지식기반사회 건설 및 지식기반사회의 토대가 되는 '신지식인 양성'이라는 교육의 기본 역할 및 방향 규정, 그리고 부가가치 중심의 지식관, 개체 중심적 인식론 및 발달 모형에 입각한 선택형, 개별화 교육과정 및 자기 주도적 학습 중심의 교육원리들로 그 뼈대를 짜놓고 있다.1)

 이미 신자유주의 교육이론은 총체적인 교육이론이 되어 있다. 그러나 진보적 교육 이념은 이에 비하여 부재(不在)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

 신자유주의가 나름의 사회관과 인간관에 터하여 체계적인 교육이념과 페러다임을 세워 나가는 반면 진보진영은 사실상 교육이념의 부재 상황에 있다. 기존의 민족, 민주 , 인간화 교육은 이미 그 실천적 의의를 잃어버렸다. 교육 이념으로서의 실천적 지위 상실의 문제는 무엇보다 그 동안 신자유주의 교육이념에 대해 교육운동이 빈번히 맞대응하지 못한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2)

 결국 우리는 진보적 교육이념을 체계적으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신자유주의적 교육이론에 대한 반대가 이전의 교육이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분명 새로운 교육이론은 말 그대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너무 요원한 일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안적 교육이념의 단초는 바로 지금부터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Ⅲ. 신자유주의의 교육 이론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교육은 이론보다는 실제가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와 주장, 교육의 변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후부터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어 왔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이론은 실제에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교육이론은 그 이론을 어느 수준까지 확보하고 있을까? 신자유주의적 교육이론은 가장 최근에 철학의 영역에서 특히 인식론과 지식관에 대한 문제에서까지 그 이론적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한숭희 교수의 "학습 혁명 보고서"이다.3) 학습 혁명 보고서에서는 이전의 지식 서열 층위에서 하위에 밀려 날 수밖에 없었던 비명시적 현장 지식이 있었으며, 이러한 현장 지식의 중요성을 신지식인라는 언명을 사용하여 주장한다. 신지식은 이러한 현장지식의 복권이라는 진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뒤에는 상대주의적 지식관과 구성주의적 인신론이 있다. 일면 진보적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신지식인론은 진보와 보수가 표면적인 형태의 변화 즉, 교육방법, 목적, 내용이 변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사회구성체를 극복해 나가는가 재생산하는가에 있다면 분명 보수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신지식인론은 현재의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재생산하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기반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관에 대한 대안적인 내용과 함께 교육과 사회와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Ⅳ. 신지식인론은 상대주의적인 진리관에 터하고 있다. 그리고 이의 구체적인 교육이론 중의 하나가 구성주의이다. 구성주의의가 처음 회자되었을 때 많은 긍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물론 이전의 전제주의적,  획일주의적인 교육 구조를 구성주의를 통하여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서 구성주의의 상대적 긍정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성주의는 이제 한편으로는 "몹쓸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일각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교육이론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구성주의를 "몹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기본원리는 좋은데...."라는 넋두리와 함께 하는 것도 현실이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이라는 영역에 보다 깊숙히 들어가 보고자 한다. 철학의 영역에서 새로운 교육이론을 위한 사유방식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특히 절대적 지식론과 상대적 지식론의 대립을 극복하면서 이 과정에서 진보적 교육이론의 지식관과 교육의 운영원리를 구성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여력이 된다면 교육과 관련한 개념의 명료화하고 교육 공공성과 공교육의 기본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물론 필자는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해 본 일이 없다. 그리고 필자가 이야기할 것들은 단지 사담에서 몇 번 이야기되었을 뿐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이야기된 바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단상에 그치는 경우도 많아서 글의 총체성을 기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하여 이하의 글에서는 부족함이 많을 수 있다. 이는 독자들이 따뜻한 질책과 깊은 고민으로 채워주실 부분이라 생각한다.

Section 1: 점근적 진리관

 1.흐름과 연속의 철학: 우리는 어떤 것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고정태(固定態)를 상정하는 경우에 익숙해져 있다. 고정태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고정된 상황을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사고할 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의 정의에는 어떤 상태의 완료와 완성의 개념이 주가 되고 흐름과 과정의 측면은 간과되기 일수이거나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개념들 중 결코 어떤 종결된 상태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는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 개념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을 만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고정태로서 인식 가능한 것인가? 어떤 고정된 상황이 마련되면 민주주의는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만일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고정태로 인식된다면 어떤 상황이 이루어지면 민주주의이고 그 이상의 변화와 발전은 전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위배된다. 민주주의는 개인과 집단간의 의사소통과 실천을 통해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고정된 상태의 완결로서의 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지향하는 과정적 개념으로 인식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향하여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고 주체와 제도를 갱신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 속에 붙박혀 있는 개념이지 어떤 종결된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유토피아(Utopia)는 것도 말뜻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지향사회이다. 즉 유토피아 또한 종결된 상태가 아닌 끊임없이 지향하는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사회주의"라는 것의 개념을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운영 테제의 완성으로 본다든지, 운동의 목적을 어떤 결과를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즉 운동이 더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사회주의나 운동의 개념을 고정태로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운동의 개념은 고정태로 파악할 것이 아닌 흐름과 과정으로 인식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근간 이념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확보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다. 그리고 운동의 근간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 확보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며, 운동은 계속되는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의 유목적적인 연속적 활동이다. 사회주의와 운동이라는 말 앞에 어떤 현실의 종결된 완성이라는 개념은 없다.4) 그것은 계속되는 연속을 낳을 뿐이며, 인간의 본성을 갈구하는 과정이다. 사회주의와 운동이 유의미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상황을 고정태로 파악하는 것과 연속태로 파악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유 방식을 필자는 점근(漸近)적 진리관 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진리관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2. 고정태와 연속태: 먼저 말하자면 진리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닌 연속태(連續態)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진리는 연속태로 파악 할 때만이 그 의미가 온전히 밝혀진다. 고정태로서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에서 시간 개념을 제외하고 인식하는 경우이며, 연속태라는 것은 완료된 상태가 없는 점근(漸近)의 상태를 말한다.

 연속태로서의 인식 방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살펴보자. y=1/x라는 함수가 있다고 하자. 이 때 X→∞의 상황 즉, X가 한없이 커지는 상태에 있을 때 Y→0, 즉 Y는 0에 수렴한다. 이 때 Y=0의 직선을 우리는 점근선이라고 한다. 물론 Y는 0이 아닌 것도 아니며 0이지도 않다. 만일 X라는 변수가 고정된 값을 가진다면  Y가 0인지 아닌지는 판명될 것이다. 하지만  X라는 변수를 고정시키지 않는다면 Y가 0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불가능하며,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판단 자체의 의미가 없다. Y는 0에 끊임없이 가까워지지만 0은 아니다. Y는 0에 가까워지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는 ∞라는 상태에서도 같은 경우이다. 무한대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끊임없이 커지는 상태에 있다. 필자가 이 함수의 시각적 모양을 들어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점근하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X라는 값을 고정시켜서 파악하면 안되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또 함수의 예를 들어보자. 이번에는 y=f(x)라는 함수가 있다고 하자. x가 a라는 값을 가질 때 y는 f(a)라는 값을 가진다. f(a)라는 값은 x=a라는 값에 대한 고정된 값이다. 하지만 우리는 f(x)'라는 이 함수의 도함수(1차 미분 함수)를 알고 있다. 이 도함수의 f(a)'의 값은 이 함수의 상태를 판별하는 정보를 제공한다. 즉, f(a)'가 양의 값을 가지면 이 함수는 증가하는 상태에 있으며, 음의 값을 가지면 음의 값을 가진다. 만일 x축을 시간으로 생각한다면 f(a)'라는 값은 이 함수의 심층에 내재되어 있는 시간개념상의 변화의 방향을 알려준다. 우리는 f(a)의 값을 구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f(a)'의 값의 의미를 찾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이 함수가 n차수 이상이 된다면 도함수는 n-1차 도함수까지 계속 존재한다. 함수의 가로축 x를 (시간 개념)고정된 값으로 볼 때에는 그 이면의 오묘함을 파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경우를 더 생각해보자. Black Hall은 질량이 너무 커서 빛조차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천체를 말한다. 이 Black Hall에는 빛의 속도로 탈출 가능한 구역과 그렇지 못한 구역의 경계가 있으며 이를 '사상의 지평선(Event Horizontal)'이라고 한다. 이 경계선에서 어떤 빛이 Black Hall의 수직방향의 밖으로 향해 있다면 이 빛은 영원히 그곳에서 머물게 된다. 왜냐하면 빛 입자를 끌어들이는 중력에 의하여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상의 지평선에서 조금 외부의 빛은 아주 낮은 속도를 가지며 사상의 지평선 외부로 나갈수록 그 속력은 조금씩 커지게 된다. 만약 외부에서 어떤 우주인이 Black Hall로 빨려 들어간 경우 Black Hall의 영향권 밖에서 볼 때에 그 우주인은 사상의 지평선에 계속해서 가까이 가지만 결코 도달하지는 못한다. 끊임없이 가까워지는 상태에 있을 뿐 도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우주인의 영상은 사상이 지평선에 도달하는가? 아니면 도달하지 못하는가? 고정태로서 파악한다면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연속태로서 파악한다면 "이 우주인이 끊임없이 사상의 지평선에 가까워지는 상태"에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위의 몇 가지 예를 통해서 필자는 진리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를 설명하고자 했다. 진리는 고정된 상태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 아미라 연속적인 과정의 흐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를 위에서 "점근적 진리관"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진리에 대한 문제에서 "점근적 진리관"으로의 인식 방법의 변화는 매우 중요한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3. 점근의 진리: 아주 오래된 질문 둘 "절대적 진리는 있는가 없는가? 진리는 도달 가능한 것인가 아닌가?"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우리는 전자의 경우 절대적(絶對的) 진리론과 상대적(相對的) 진리론 후자의 경우 가지론(可知論)과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나누어 부른다. 이 문제는 인류의 오랜 철학적 논제에서 가장 기초적인 물음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입장은 고정태로서 진리를 상정하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절대적 진리는 있고도 없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가 있고 없는가의 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를 보다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그림이 있다고 하자. 아래의 그림에는 원의 외부 표면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수많은 점들이 있다. 원에서 가까워질수록 점들은 원의 형태에 가깝게 되어 가고 있다. 점은 면적을 가지지 않고 다만 위치만 가진다. 원은 정의는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다. 수많은 점들이 모여도 원을 만들지는 못한다. 면적이 없는 점들은 두 평면을 구분하는 선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수많은 점들의 점근 대상으로서의 원은 있지만 실재하는 원은 없다.

img1.gif

 필자가 원을 향하는 수많은 점들과 원의 표면에 끊임없이 다가가고 있지만 결코 원을 만들지는 못하는 이러한 그림에서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진리의 점근적 성격이다. 이 그림에서 하나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각각의 점들이 일정한 지향을 가지고 원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점들은 왜 원을 향해 가는가? 이는 진리에 대한 인간의 탐구가 일정한 방향을 가지며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역사적으로 인간의 지식은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진리에 점근하여 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각적 표현이다.

 원래의 문제로 돌아와서 진리성의 문제에서는, 점근 대상으로서의 절대적 진리는 있지만 실재하는 절대적 진리는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절대적 진리의 존재유무보다는 진리를 향한 끈임 없는 점근의 상태의 유무(有無)가 중요한 것이다. 점근적 진리관에서는 진리에 대한 태도를 이전의 절대적 진리관 혹은 상대적 진리관과 근본적으로 달리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전의 중요한 논쟁지점중의 하나였던 전리성의 척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전혀 다른 태도를 요구하게 된다.

 우리는 여러 부분에서 절대적 진리관과 상대적 진리관의 대적을 경험하고 있다. 철학에서는 실증주의와 현상학의 대립에서, 사회학에서는 거대이론과 미시이론(포스트 모더니즘)의 대립에서 그리고 교육에서의 객관주의대 구성주의 교육이론의 대립까지 수많은 대적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대적 지점이 놓치고 있는 진리성의 심층에 대한 발견의 필요성을 요구받고 있다. 점근적 진리관은 이러한 절대적 진리관과 상대적 진리관의 양 극단이 보여주는 공통적 요소 즉, 진리성을 점근하는 것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간 정지 상태서 파악하는 공통적 특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진리관이다.

 4. 진리성과 유예적 판단: 진리성의 척도 즉, 어떤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기준은 크게 정합설, 대응성, 실용설이 있다.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정합설은 신념 혹은 판단이 하나의 체제 속에 있는 것으로서 그것이 다른 신념 혹은 판단과 더불어 일관성을 유지하고 조화를 이루면 그것이 진리라는 주장이다. 대응설은 우리의 신념 혹은 그것의 판단이 실재와 일치하면 그 신념은 진리라는 주장이며, 실용설은 어떤 신념이나 판단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우리의 행위가 목적하는 바를 만족시킨다면 그것은 진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위의 세 입장 모두 진리는 어떤 고정된 상태에서 그 진위가 판별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즉 어떤 명제가 진리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그 명제를 포함하는 신념, 이론 체제와 부합하는가? 그렇지 안는가? 또는 객관적 대상세계와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혹은 어떤 목적에 기능 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에 따라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 명제에서 시간 개념을 사장시켰을 때만 판단 가능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진리의 잠재적 가능성을 사장시키는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다. 진리는 점근하는 상태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진리성의 판단은 고정태에서 파악될 수 없는 성격의 문제이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진리성의 판단 자체의 개념을 다르게 파악해야 한다.

 연속태로서의 진리를 인정 할 때, 우리는 진리성의 척도에 끊임없는 "유예적 판단"의 자세, 즉, 점근의 과정을 포함해야 한다. 유예적 판단 과정에서는 현재의 상태에서의 진리성에 대한 판단을 "진리이거나 혹은 진리가 아니거나"라는 식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유예적 판단이란 점근의 과정을 진리성의 척도로서 삼고, 현재 시점에서의 진리성에 대한 판단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 계속되는 진리추구의 과정을 전제하는 판단 양식이다. 유예적 판단은 진리성의 판단에 시간 개념을 포함한다. 현재 시점에서의 유예적 판단은 이후 시점에서의 유예적 판단을 예비한다. 현재와 미래의 시점 사이에는 주체의 끝없는 진리 추구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진리 추구의 과정이 전제 될 때 현재 그리고 미래 시점에서의 유예적 판단은 진리성을 가질 수 있다.

 유예적 판단의 과정은 데리다(J. Derrida)의 차연(differance)과는 다르다. 데리다는 차연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사전을 예로 들어 사전에서의 한 기표는 기의(signified)의 의미를 고정시키지 못하고 끝없는 기표들의(signifier) 연속된 미끄러짐의 과정에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차연이라는 개념을 고안하여 말하였다. 이는 기표에 대당하는 기의의 의미를 결국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설명한다면 최초의 기표와 그 미끄러짐을 통해서 다시 그 기표로 되돌아왔을 때의 기표는 인식 주체에게 같은 것이 아니다. 즉, 일정한 출발과 회귀의 과정을 통해서 진리성에 점근한 것이다. 데리다는 인식과정의 발전과 주체의 의미를 사장시켰다. 사전이라는 인식 대상체와 인식주체의 협응 과정을 무시함으로서 진리는 없거나 혹은 대상세계에만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데리다에게는 진리란 판단할 수 없는 판단 유예의 대상일 뿐이다.

 인식 대상체에 대한 처음의 인식과정의 폭과 넓이가 두 번째 과정에서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면 더욱더 진리에 점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나선형으로 처음의 인식 대상체에 되돌아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인식과정을 "나선형 인식과정"이라고 하자. 나선형의 회귀 과정에서 처음의 인식 대상체에 다시 되돌아온 인식주체의 인식 내용은 처음의 것과 수준을 달리하는 인식이다. 이러한 나선형 인식 과정에는 그 깊이와 폭을 깊고 넓게 하고자 하는 인간의 인식 노력을 전제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진리에 대하여 점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바로 이러한 점근의 과정 속에 붙박혀 있다.

 진리성에 대한 유예적 판단의 과정은 자신의 인식내용에 대한 "회의적(skeptical) 질문"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자신이 인식한 내용에 대한 회의적 질문이 없는 유예적 판단은 판단 지체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예적 판단이 될 수 없다.

 5. 회의적 사고: 회의적 사고란 "의심하기"를 출발로 한다. 모든 것에 대해서 언제나 의심하고자 하는 자세를 회의적, 혹은 반성적 사고라 한다. 이는 진리성을 담보하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유예적 판단이 판단 지체 혹은 판단 유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회의적 사고가 필요하다. 진리를 점근하는 과정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점근의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회의적 사고이다. 유예적 판단을 "점근의 과정을 진리성의 척도로서 삼고, 현재 시점에서의 진리성에 대한 판단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 계속되는 진리추구의 과정을 전제하는 판단 양식"이라 할 때 "계속되는 진리추구의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회의적 사고이다. 유예적 판단이 회의적 사고를 필요로 하듯이 회의적 사고 또한 유예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

 회의적 사고는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진리 탐구의 논리적인 전제이다. 회의적 사고가 정치적인 지향을 가져올 때에는 회의적 사고의 결과로서 나타날 때이지 회의적 사고는 어떤 고정된 정치적 지향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회의적 사고는 지향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점근의 과정을 이끄는 주체의 끊임없는 과정이 바로 회의적 사고이며, 물신화(物神化)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와 극복의 과정이다. 질문하기를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물신화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바로 회의적 사고이다.

 "회의적 사고"라는 말은 마치 진리성을 개인의 내적 반추의 과정에 의해서만 추구하는 것으로 비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작용에 대한 이해는 회의적 사고가 개인 내적 사고의 작용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밝혀준다. 즉, 회의적 사고는 "내적 반추"와 "외적 검증"의 동시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내적 반추라는 것은 자신이 알0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진리성의 부결 가능성에 대한 인정 하에서 계속해서 그 진리성의 정도를 내적인 사고 과정을 통해서 발견하고자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외적 검증이란 각 인식 주체의 인식내용과 자신의 인식내용의 비교과정과 외적 인식 대상체에 대한 관찰과 탐구 과정을 통한 진리성의 정도를 판단하고자 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내적 반추와 외적 검증은 언제나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지 어느 것이 혼자서 진행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내적 반추는 진리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필요로 하며, 또한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요구한다. '외적 검증'의 과정은 인간의 지식획득 과정의 사회성을 밝혀준다. 한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체에 대한 인식을 경험하였으며 이의 유예적 진리성을 증거 하고자 할 때 그 주체는 타인을 통한 검증의 과정을 밟고자 한다. 타인을 통한 검증 과정이 없이는 인식 주체는 자신이 인식한 내용의 유예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즉 진리성의 획득과 유예적 판단 과정에는 타증(他證)의 과정이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과정이 교육을 불러일으킨다. 교육의 과정은 진리를 먼저 체득한 선지자(先知者)가 후발자(後發者)를 통하여 검증하고자 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한다.

 6. 진리(학문)와 교육: 진리에 대한 논의만으로 교육의 전체를 이끄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적절하지도 한다. 탐구의 대상은 진리이지만 교육의 대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점근적 진리관은 교육의 일부분을 설명할 수 있지, 교육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5) 또한 교육은 진리 탐구의 과정과도 일정하게 그 원리상 다른 속성을 가지기도 한다. 교육은 진리관을 포함하는 다른 논리로서 설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진리관은 교육의 속성 중 일부분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임은 분명하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학문이라고 한다. 교육은 학문 행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활동을 중심으로 한다. 하지만 학문의 논리와 교육의 논리는 동일하지 않다. 학문적으로 가지 없는 것이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학문에서는 상대적 진리성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교육에서는 상대적 오류성 또한 그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학문의 위치에서 볼 때는 가장 최첨단의 가장 진리에 가까운 것이 가장 의미가 있지만 교육의 원리에서 볼 때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적 원리가 더욱 의미 있는 것이다. 천동설은 학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분명한 오류이지만 교육적인 의미에 비추어 볼 때에는 인간의 지적 탐구과정에서의 오류와 이에 대한 극복의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교육이 최첨단의 지식이 아닌 고루한 내용만을 가르친다고 비판하는 것은 교육의 원리와 학문의 원리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데에서 오는 오류이다. 진리 추구의 과정적 원리를 중요시하는 교육의 원리는 점근적 진리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며, 점근적 진리관은 이러한 의미에서 교육의 원리에 보다 충실한 지적 태도이다.

Section 2: 점근적 진리관과 진보적 교육원리

 1. 사회화와 교육: 뒤르켐 이후로 교육은 사회화의 과정이라는 것은 상식적인 개념으로까지 우리의 의식 수준에 고정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화라는 개념과 교육이라는 개념을 구분해야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뒤르켐은 사회화를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인 존재인 개인이 집단의식을 내면화함으로써 사회적 존재가 되도록 하는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의 사회화는 현 사회의 능동적 변화와 진보의 에너지를 설명해내지 못한다.

 교육이라는 것이 정형화된 체제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포함한 보편적 인간행위로 규정된다면 우리는 역사적 변혁과 진보의 에너지를 생산해 내는 과정으로서의 교육의 개념을 필요로 하게 된다. 교육은 분명 사회의 변화의 역동적 에너지를 그 안에 가지고 있다. 교육이 중시하는 것은 현상태의 안주가 아니라 보다 나은 상태를 추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현상태의 고정태에서 안주하지 않고 잠재적 가능성의 영역을 향해서 경주하는 과정이 교육의 핵심을 이루며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교육이라고 개념화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화가 개인을 한 사회에 적합한 인간으로 기르고 길들이지만, 그렇게 길러진 인간이 도리어 그 사회의 적합성을 비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이다.6)

 필자는 이렇게 사회화가 아닌 사회의 변화의 역동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교육 개념의 인식론적 기반을 점근적 진리관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교육 내용에 있어서 중심적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지식 교육의 경우, 교육의 내용은 시간 정지 상태의 고정태의 지식체계이다. 하지만 점근적 진리관에 의거하는 교육원리는 현재의 교육의 내용 이면에 있는 잠재적 부정 혹은 긍정의 가능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는 유예적 판단과 그 다음의 유예적 판단의 의미성을 전제할 수 있게 하는 회의적 사고를 전제한다. 이러한 점근적 진리관에 터한 진리관은 교육의 진보적 가능성과 역동성을 인식론적으로 설명해준다.

 절대주의적 진리관에서는 이미 검증되고 진리성이 확실한 지식이 교육 내용을 이루며 이는 학습자에게 그 지식을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못하거나(혹은 거부하거나)의 선택만을 강요한다. 이미 검증되었다고 믿어지는 지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진리성에 대한 강요된 경로만이 선택의 영역으로 남겨지며, 이러한 과정에서는 진리의 기본적 특성인 부정 가능성 혹은 긍정 정도의 증가라는 잠재적 변화의 역동성이 사라진다. 상대주의적 진리관에서는 알 수 없는 혹은 안다해도 그 진리성을 판별할 수 없는 지식들이 교육내용으로 자리잡는다.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 표현되는 지식의 공유 원리는 그 과정 이후의 공유 과정을 향한 회의적 사고원리를 전제하지 않는 한 영원한 지식의 현상태적 공유에 다름 아니다.

 2. 문제 제기식 교육7): 회의적 사고를 하고자 하는 태도와 열정은 교육에 있어서 체득해야할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는 진리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지식교육의 근본적인 요구지점이다. 회의적 사고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은 "문제 해결식 교육"이 아닌 "문제제기식 교육"을 필요로 한다. "문제 제기식 교육"은 반성 없이 전제되어 온 신화를 거부하고 현상 이면에 놓여 있는 모순성을 지적한다. 문제 제기식 교육은 자아와 외부 세계에 놓여 있는 모순성을 제거하면서 자유의지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다. 문제제기와 모순성 제거는 그 보다 더욱 크고 넓은 문제와 모순성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생성하게 하며, 진리에의 점근이라는 길로 안내한다.  

 문제해결이라는 말속에는 종결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렇지만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그 문제 해결의 뒤에 학습자에게 남아 있는 것, 바로 그것이다. 문제의 해결 뒤에 남아 있는 바로 그것은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해 내고자 하는 열정과 발견해낼 수 있는 안목(眼目)이다. 진정한 문제 해결은 또 다른 문제의 발견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진리란 종결된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 제기식 교육은 점근적 진리관에 터할 때 가장 그 의미를 명확히 가질 수 있다.

 문제 제기식 교육은 학생들이 교육 현장으로 가져오는 경험과 학생들이 사용하고 잇는 언어를 열등한 경험, 언어로서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교육자료로서 인정한다.

 2. 교육 관계 - 유예적 존중과 진실성의 권위: 점근적 진리관에 의한 교육원리에서의 교육관계는 이전의 교육관계와 그 속성을 달리한다. 먼저 교수자(teacher)는 학습자(learner)에게 유예적 존중의 태도를 가진다. 유예적 존중이라는 것은 학습자의 현재의 상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다. 하지만 유예적 존중은 학습장의 현재 상태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학습자의 현재의 상태·수준에 대한 존중은 학습자의 잠재적 발달 가능성에 대한 존중이다. 학습자는 현실태와 가능태라는 두 가지 자기 수준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의 가능태는 이후의 현실태의 맹아로서 작용한다. 교육은 이후의 현재의 가능태를 현실태로 발현하게 하며, 이 또 다른 현실태는 그 안에 이전과의 수준이 다른 또다른 가능태를 가지는 것을 그 목적의 일부로 삼는다. 이러한 유예적 존중의 자세는 이후에 설명할 학습자의 흥미에 대한 자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학습자는 교수자에게 진실성의 권위를 부여한다. 진실성의 권위는 교수자 자신도 자신의 교수 내용에 대하여 절대적인 진리성을 부여하지 않고 회의적 사고를 전제하는 유예적 판단의 과정에 있는 진리에 대한 경건한 태도에 대하여 부여되는 권위이다.

 '유예적 존중과 진실성의 권위'라는 교육관계는 이전의 객관주의적 교육이론에서의 교육관계를 부정한다. 즉, 유일한 진리의 담지체이며 언제나 정(正)의 상태에 있다고 인정되는 교사의 '진리 독점적 권위'를 부정한다. 또한 학생의 흥미를 존중하지 않고 예정된 경로만으로 인도하는 교육 관계를 부정한다. 또한 구성주의에서의 학습자의 물신화된 흥미에 대한 존중의 자세 또한 경계한다.

 유예적 존중과 진실성의 권위는 문제제기식 교육 방식의 교육관계이다. 문제제기식 교육 방법에서는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가 더 이상 수직적이고 위계 질서적이지 않다. 교사와 학생은 상호 존중한다. 하지만 그 상호존중의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 내용과 형식이 다른 존중이다. 이를 필자는 유예적 존중과 진실성의 권위라는 말로서 표현하고자 했다.

 4. 흥미에 대한 '회의적 사고'와 '유예적 존중'

 "학습자 중심의 교육, 학습자의 흥미를 존중하는 교육"이라는 교육이론이 주장되면서 마치 학습자의 고정된 상태의 흥미에만 천착하는 교육만이 옳은 교육인 것처럼 주장되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학습자의 흥미라는 것에 대한 개념과, 학습자의 흥미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는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할 영역이지, 학습자의 고정된 흥미에 대한 집착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헤르바르트(Herbart)의 심리 이론 중 그의 흥미에 대한 논의를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헤르바르트는 흥미를 구분할 때 현상에 대한 이해와 관련한 흥미를 '이론적 흥미'라고 하며 이론적 흥미의 특성을 설명한다.

 이론적 흥미는 성격상 주의에서 시작하여 기대로, 가시 기대에서 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지만 그것은 점점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지면서 더 높은 단계로 승화한다. 그러므로 이론적 흥미에서는 충족이나 발산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끝없는 동경으로 이어진다. 헤르바르트에게 있어서 "교수의 직접적인 목적으로서의 흥미의 한 가지 특성은 그것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데에 있다.8)

 위의 헤르바르트의 흥미 이론에서 우리가 시사 받을 지점은 흥미를 고정태로서 바라보지 않고 연속태로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흥미를 고정된 것으로 파악할 때 우리는 학습자가 가지고 있는 역동적 잠재력을 사장시킬 수밖에 없다.

 흥미는 그 자체로 완결 무결한 상태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즉, 흥미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학습자가 가지고 있는 흥미에 대한 '회의적 사고'의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흥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습자의 흥미가 아니다. 따라서 학습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흥미에 대해서 반성적 사고를 언제나, 심도 있게 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또한 학습자의 흥미에 대한 회의적 사고의 과정을 돕는 과정은 교육자의 역할의 한 부분을 이룬다.

 흥미존중이라는 것은 현재의 학습자가 가지고 있는 흥미의 수준과 내용을 시종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학습자는 현재의 흥미 수준에서 영원히 고착될 수밖에 없다. 교사는 학습자의 흥미에 대해서 유예적 존중을 해야 하며, 또한 동시에 학습자 자신의 '회의적 사고'의 과정에 대한 조력의 위치에서야 한다. 교육의 과정에서의 흥미가 학습자의 흥미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바로 이러한 학습자의 '회의적 사고'의 과정이 이루어지고, 이를 돕는 교수자의 태도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5. 자기 주도성: 학습자의 자기 주도성이란 학습자가 학습 목표의 설정, 학습 진행의 과정, 학습 평가의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 주도성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경우 자기 주도성을 양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주도성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그 질적 내용, 그리고 진정으로 자기 주도적이기 위한 과정적 원리이다.

 완전히 자기 주도적인 상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자기 주도는 언제나 어느 정도 불완전한 상태에서의 자기 주도성이다. 학습자의 학습 동기조차도 학습자의 것이기보다는 외적 환경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거나 강제된 것일 경우가 많다. 그리고 완전히 외적 환경에 의한 영향을 제거한, 말 그대로 완전 무결한 내재적 학습동기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기 주도성은 사회경제 문화적 맥락의 제한 속에서 나타나는 자기 주도성이다.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대한 적응을 위한 자기 주도적 학습"이라는 모순적인 교육 어법이 사용되고 있다. 즉, 변화에 대한 적응으로서의 학습은 자기 주도성을 제한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제한적 영역 안에서의 학습 행위를 자기 주도적 학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 주도성은 그 자기 주도성을 제한하는 외적 환경에 대한 극복과 적응이 아닌 변화를 지향하는 자기 주도성이다. 이러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주도성을 확보하는 과정의 전제는 회의적 사고이다.

 현재의 제한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이 없는 상태의 자기 주도는 죽어 있는 자기 주도성이다. 자기 주도성의 핵심적 지향은 자기주도를 제한하는 요소를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Section 3: 교육과 사회

 1.교육의 공공성: 교육의 공공성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개념 즉, 교육 기회의 공공성과 교육 내용의 공공성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교육은 인간의 실존적 문제이다. 인간은 학습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학습 본능이 억제 될 때 인간은 실존적 위기에 처하게 되며 학습 없는 인간의 삶은 곧 죽음에 다름 아니다. 학습은 개인의 자기 발전과 진화를 위한 기본적인 전제이다. 그러나 학습자의 학습 능력은 그 자체로 자기 진화력과 갱신력을 충분하게 가지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학습자의 학습능력에 대한 조력의 과정이 필요하며 우리는 이를 교육이라 부른다. 따라서 인간은 실존적인 문제로서의 교육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권리에 대한 보장은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에 교육의 공공성은 사회적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한다.

 교육기회의 공공성은 기본적인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이 개인의 귀속적 요인에 의하여 침해당하지 않도록 교육에 대한 최대 접근 가능성(accessibility)을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은 자신의 계급적, 성적, 지역적, 신체적 등등의 제한 때문에 교육기회에 대한 접근성을 침해받지 않는 것을 말하며 이를 위한 보장적 평등을 전제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교육 내용에 있어서의 공공성의 원리란 개인이 자신의 근본적 자유의지를 확보하는 과정을 전제로 자신이 받고자 하는 교육 내용에 대한 선택권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는 학습자가 원하는 교육과정을 그대로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학습자가 자신의 학습 욕구와 그 학습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내용에 대해서 언제나 근본적인 회의적 사고의 과정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기회의 공공성과 교육내용의 공공성은 서로 관련을 가진다. 이를테면 순수학문이 경제적 생산성이 낮다는 이유로 배척되고 실용적인 학문을 위주로 교육된다면 이는 교육 내용상의 공공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설사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실용학문에 대한 욕구를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 욕구의 형성과정이 사회 경제적 맥락 속에서 강요되고, 학습자의 자기 자신의 욕구에 대한 회의적 과정을 방해는 사회 경제적 요구가 있다면 이는 교육의 내용적 공공성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러한 교육 내용적 공공성의 위배는 교육 기회의 접근가능성을 떨어뜨리고 만다. 왜냐하면 실용학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그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 자체의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예에서처럼 교육 기회의 공공성과 교육 내용의 공공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둘 중의 어느 한 영역의 공공성만을 추구해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 공공성을 추구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완벽한 수준의 교육 공공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를 위하여 한 사회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2. 평생교육과 교육: 평생교육이라는 단어가 제시된 이후로 교육과 평생교육, 학교 교육, 사회교육간의 개념 규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혹은 평생교육에 대한 강조가 학교 교육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교육과 평생교육 학교교육에 대한 개념 규정과 함께 학교 교육의 적절한 위상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이다.

 먼저 교육은 본질적으로 평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또한 교육은 학교라는 기간 교육체제만이 아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인간 행위이다. 따라서 개념상으로 교육은 평생교육과 같은 것이다. 평생교육은 학교교육, 사회교육, 가정교육의 상위 개념이다. 따라서 평생교육에 대한 강조가 학교교육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학교교육의 의미가 평생교육과의 대별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학교 교육의 의미는 교육의 공공성과 학습에 대한 학습, 학교 후 교육을 위한 준비라는 과정에서의 그 의미를 확보해야 한다. 평생교육을 교육이라는 개념과 동일한 것으로 바라봤을 때, 평생교육에서 학교교육과 가정 교육을 뺀 잔여 부분이 사회교육이다.

 평생교육이 학교교육과의 대별로 이해됨으로서 마치 평생교육은 사적 영역이며, 학교교육은 공적 영역인 것처럼 이분화된 이해를 가져왔다. 하지만 교육 공공성의 교육은 교육의 본래적 의미 즉 학교 교육의 상위개념의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생교육의 기본 원리는 교육 공공성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학교 교육의 필요성은 개인의 학습능력이 자기 진화력을 가질 수 있도록 기본적인 학습 능력을 배양하는 데 있다. 즉 학습에 대한 학습의 필요성이다. 이는 일정한 강제성을 가질 수 있다. 학습능력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과정을 통하여 형성될 수 있는 능력이다. 또한 학습에 대한 올바른 태도의 형성의 측면에서도 공적 교육과정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학교 교육은 교육의 종결이 아닌 인간의 전생애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학습에 대한 준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잇다.

 교육에서 학교교육, 가정 교육 이외의 영역을 사회 교육이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사회교육은 사적 영역으로 이해되며 그에 따라 교육의 공적 운영의 원리가 미흡하게 작용하는 영역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교육이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과정으로서 보장되어야 할 기본적 권리의 영역에 속한다면 사회 교육에 대한 공적 원리의 마련이 보장되어야 한다.9) 학교 교육이 일정한 강제성을 가질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사회교육은 학습자의 자발성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학습자의 자발성은 근본적으로 이해되고 추구되어야 할 것이지, 현상태의 고정된 자발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든 교육이 회의적 사고를 중심적 원리로 해야 한다"는 명제에서 사회 교육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3. 학교 교육, 국가 교육, 공교육: 학교 교육과 국가 교육은 같은 의미가 아니며, 또한 공교육 또한 국가 교육과도 그 개념은 같지 않다. 또 학교 교육과 공교육 또한 개념적으로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학교 교육과 국가 교육, 공교육을 같은 것으로 전제하고 이야기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학교교육, 국가 교육, 공교육에 대한 개념을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 국가교육에 대한 반대가 공교육에 대한 반대로, 혹은 공교육에 대한 주장이 국가 교육에 대한 주장으로 일변하는 경우가 있으며, 공교육에 대한 강조가 학교 교육만의 강조로 귀결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먼저 이 세 가지 교육에 대한 개념구분과 정의를 통해서 혼란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먼저 "국가 교육"이라는 말속에 담긴 '국가'라는 개념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국가 교육'이라는 말속의 '국가'는 역사적 산물로서의 국가이지 태고시절부터 존재해 온 국가의 개념이 아니다. 이는 본래적 의미의 '국가'의 개념과 '국가 교육'이라는 개념 속에서의 '국가'의 개념을 구분하여 생각해야 함을 뜻한다. 즉, '국가'라는 개념과 '교육'이라는 개념이 연결되어서 하나의 '국가교육'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을 때의 '국가'의 의미는 일반적 의미의 공적 체제와는 다른 공적 체제의 역사적 산물로서의 국가의 개념을 가진다는 것이다. 언제나 일반의지의 총합체라는 공적 운영 체제와 원리는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원리가 교육이라는 것을 주요한 체제의 일부분으로 포함하기 시작한 근대적인 개념의 국가는 이러한 공적 체제의 역사적 산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적 체제에서의 공(公)의 개념과 역사적 산물로서의 국가의 개념을 분리하여 인식해야 한다.

 공교육 또한 역사적 산물이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원래적 의미의 공적 운영원리의 체제와 연결되는 개념으로서의 공교육의 원리이다. 공교육에서의 공(公)의 개념과 국가(國家)의 개념은 같은 것이 아니다. 공(公)이라는 말에는 사(私)의 반대적 개념 즉, 사적 일반 의지가 승화되는 총합체의 영역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국가와 공의 개념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사회이론에서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하여 국가주의에 대한 반대가 모든 공적 개념의 파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로서의 교육의 역할과 인간의 교육권 보장을 위한 교육의 공적원리의 보장의 구분이다. 우리는 버려야할 국가와 지켜야할 공적 원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구분은 현재적 수준에서는 교육에 대한 국가적 책무와 국가적 통제의 구분으로 나타난다. 교육의 공공재적 성격에 대한 공적 보장의 원리가 보장되어야 하며, 교육 내용에 대한 국가적 통제는 제거되어야 한다. 교육내용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끊임없는 쟁투의 과정에 있으며 이에 대한 각 주체들의 전면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Ⅴ. 이 글을 시작하면서 제기했던 문제의식에 비하면 이 글의 내용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마치 화려한 용머리에 상처투성이인 몸통과 그리고 보잘 것 없는 뱀 꼬리를 가지고 있는 형상이다. 이 글에서는 우리 교육의 전반적 부분을 바라보지 못하고 일 부분만을 보았다.

첫 번째 내용으로는 철학의 영역에서 지식관에 한정하여 객관주의적 교육이론과 구성주의적 교육이론의 양자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새로운 지식관에 따른 교육 원리를 구성해 보았으며, 마지막으로는 교육과 사회와의 관련에서 그 동안 개념정립 없이 사용해왔던 여러 용어들에 대한 개념 정립을 시도하였다. 물론 이 개념정립 과정에는 첫 번째와 두번째의 철학적 관점과 교육적 원리가 서려 있다. 아직은 논리적 정합성이 많이 부족한 내용이기 때문에 보다 많은 토론이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Ⅵ. 우리는 이 글에서 나와 있는 진리의 문제만이 아닌 교육에서의 민주주의의 문제, 인간의 총체적 발달의 문제, 공동체성의 문제, 그리고 생태 지향적 교육 이념의 문제 등 많은 것들을 과제로 두고 있다. 필자는 우리 교육의 진보적 이념의 구호로서의 내용은 "민주, 공동체 생명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진보적 교육이념이 몇 가지 언명으로 구호화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실천을 전제로 하는 교육사상은 다분히 '구호화'를 필요로 한다. 앞으로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이론적 논의와 함께 실천적 논의를 기대해 본다. 이 글은 진보적 교육 이념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앞으로 여러 영역에서 진보적 교육이념의 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 참고문헌 ■

김환기, 1996, 통각과 교수이론, 교육과학사.
이홍우, 1992, 증보 교육과정 탐구, 전영사,
장상호, 1997, 학문과 교육(上), 서울대학교 출판부
천보선, 2000, "새 시대를 향한 교육이념 정립을 위하여" [진보교육 4호].
프레이리(성찬성 역), 1995, 페다고지: 억눌린 자를 위한 교육, 한마당.
하병수, 2000, "학습혁명 보고서에 침을 뱉으마", 교육비평.
한국교육학회 사회교육연구회 편, 1991, 사회교육학 서설, 교육과학사.
한숭희, 2000, 학습 혁명 보고서, 매일경제신문사.

주--------------------------
1
) 천보선. 2000. "새 시대를 향한 교육이념 정립을 위하여: 총체적 인간 발달과 민주공동체 건설" [진보교육 4호]
2) 상게서. pp.39.
3) 학습 혁명 보고서는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고 1부는 매일경제 신문사 지식부, 2부는 한숭희 교수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신자유주의적 교육재편의 실제적 재편을 제시하고 있으며, 2부는 신지식과 신지식인론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의 내용이 있다. 새로 개간된 교육비평에 나온 "학습 혁명 보고서에 침을 뱉으마"라는 서평이 1부 내용에 대한 비판만 있는 것에서 우리는 아직 까지 신자유주의적 교육논리의 이론적 부분에 대해서는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수준에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볼 수 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적 교육의 이론적 지반에 대한 이론적 싸움 또한 더 이상 늦출 수는 없는 상황임은 분명하다.
4) 나는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의 원인 중에 이러한 역사관 진리관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의 이념을 사회주의에 대한 테제 즉, 플로레타리아 독재, 사적 소유의 철폐와 소유의 사회화 등의 종결적 완성으로 이해함으로서 그 자체의 이념적 생명력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5) 실제의 교육 사태에서 일어나는 정의적 영역, 신체적 영역의 교육은 지식관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서 설명하기 힘들다. 이는 지적 탐구 행위와 교육행위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영역의 교육은 다른 원리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판단 즉, 총체적인 측면의 균형 있는 발달을 추구해야 한다는 교육의 다른 원리로 설명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6) 조용환, 1997, 사회화와 교육, 교육과학사
7) 물론 "문제 제기식 교육"이라는 말은 프레이리(Freire)의 교육론에서의 개념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이 글에서의 문제 제기식 교육이라는 개념과 프레이리의 그것은 중심적인 내용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문제제기식 교육을 점근적 지식관과 함께 설명하고자 하며, 이 때의 문제제기식 교육의 의미는 한층 더 값진 의미를 가지 수 있을 것이다.
    프레이리 교육이론은 그 교육이념, 교육관계, 교육내용과 경험, 교육의 목적 등에서 많은 부분 현재의 진보적 교육이념을 구성하는데 중요한 지점을 시사하고 있다. 프레이리 교육론은 진보적 교육이론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다시 한번 재조명 될 필요가 있다.
8) 김환기. 1996. 통각과 교수이론, 교육과학사
9) 이를 위해서 사회 교육 영역에서의 학습권(Voucher) 제도의 도입과 이에 대한 공공성의 원리에 의한 운영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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