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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를 넘어 자율로 가는 지름길

-학급당 학생수의 비밀

 

박연정(서울위례별초)

 

 

점심시간에 급식을 먹으러 식당에 갈 때는 아이들을 두 줄로 세운다. 그래야 빠른 시간에 좁은 복도를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한 줄로 서면 줄이 너무 길어서 복도 코너를 돌거나 꺾어진 계단을 내려올 때 줄 뒤쪽 아이들이 교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식당 앞에서는 다시 한줄로 세운다. 급식을 한명씩 차례로 받기 위한 줄이다.

체육시간에는 남녀로 나눠 키순서로 두 줄을 세운다. 신체를 만지면서 도와주는 활동이 많은 체육수업에서 서로 불편함 없이 활동하고 한눈에 아이들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교사가 시범을 보이거나 할 때도 뒤쪽에 선 아이들이 적어도 “누구 때문에 안보여요”라는 말은 못하게 된다.

모둠활동을 할 때 필요한 준비물을 가지러 나온 아이들은 한 줄로 물건을 받거나 반납하게 가르친다. 아이들은 대부분 자기가 필요한 것을 먼저 가져가려고 우르르 모여든다. 그러면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나는 한 줄로 서서 차례로 물건을 받으면 훨씬 빠르고 안전하다고 가르친다. 아이들은 곧 순순히 한 줄로 서서 준비물을 받고, 물건을 정리할 때도 차례를 지킨다.

수업 중에 너무 소란하거나 한꺼번에 모두의 집중을 필요로 할 때는 집중을 위한 손동작과 박수를 친다. 처음엔 ‘여러분~’하고 부르거나, ‘얘들아~’하고 부른 뒤 조용해지길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들은 좀처럼 집중을 잘 하지 못한다. 그러면 약속된 손동작을 하는데, 걔 중에 눈치 빠른 녀석들이 재빠르게 따라하면 나머지 아이들도 눈치를 채곤 따라하게 된다. 전체가 일순간 정적을 찾으면 그 때 필요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처음부터 무조건적으로 이렇게 손동작이나 박수치기를 잘 따라하진 않는다. 이 방법이 더 효과적으로 먹히려면 잘하는 아이들에게 칭찬을 듬뿍 해준다거나, 잘 못하는 친구에게 약간의 눈치를 주는 등의 강화가 필요하다. 이런 강화 덕분에 아이들은 나의 목소리보다는 손동작에 더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이것들은 교실에서 내가 자주 쓰는 통제의 기술들이다. 저 옛날 신규교사시절에 멋모르고 행했던 교탁을 꽝 내려치는 기술부터 시작해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온 끝에 현재까지 내가 갈고 닦은(?) 이 자잘한 기술들은 모두 다인수 학급에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까를 고민하여 얻은 답들이다. 가끔은 교사들끼리 모여서 마치 새로운 발명품을 연구하듯이 이런 기술들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하기도 하고, 후배교사에게는 “이런 게 바로 경력이야”하며 젠체하듯 이런 기술들을 알려주기도 한다.

슬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나는 어쩌다 이렇게 통제의 달인이 되었을까? 내가 무진장 게으르고 아이들을 경멸하며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밥벌이를 하기 위해서였을까?

교사의 노동 강도가 낮지만은 않으니까 업무의 수월성을 도모하는 측면이 없지는 않았음을 인정하더라도 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다인수 학급에 있다고 본다. 다인수 학급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고민을 지금처럼 이렇게 많이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소인수 학급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이다.

 

3년 전, 지금의 학교에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 우리반 아이들은 모두 8명이었다. 신도시에 아직 입주가 완료되지 않은 터라 개교와 함께 전학을 온 아이들이 4학년 전체 40여명. 그 아이들을 네 반으로 나누니 한반에 8명의 학생으로 3월 개학을 맞았다.

모두가 힘들고 두렵다는 3월. 거기에 개교학교. 초죽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나는 8명의 학생들과 함께 천국을 맛보았다.

우선 아침에 학교 가는 마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교사라면 늘 겪는 수업에 대한 부담이 “오늘은 애들이랑 뭐하고 놀지?”라는 신선한 물음으로 바뀌었다. 수업에 대한 부담은 주로 교사가 수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데서 온다. 아이들이 많으면 그들의 중구난방 요구를 들어주자니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들어 교사가 지레 포기하게 된다. 결국 교사가 일방적으로 이끌어가는 수업이나 학급운영을 하게 되고 세세한 아이들 각각의 요구는 무시된다. 그런데 아이들이 적으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모으기가 수월했다. 모든 수업과 학급운영은 아이들과의 대화로 이뤄졌다. 교사가 혼자 모든 수업을 준비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고 아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훨씬 창조적이면서도 학습자 중심의 수업이 가능해졌다.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제자리에 앉히는데 진을 빼는 대신 아이들 한명 한명과의 진지한 대화와 깊은 인간적 관계를 쌓는데 힘을 쏟았다. 교사와 아이들의 깊은 유대관계 속에서 아이들은 교사에 대한 신뢰와 학교생활의 안정감을 찾았고 그런 아이들로 인해 교사들도 교사로서의 자존감을 되찾아 갔다. 이렇게 관계를 쌓고 나니 그간 통제와 규제의 대상으로만 보이던 아이들이 각각의 개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들로 다가왔다. 그들의 의지와 자율성을 더 북돋워서 뭐라도 하게 만들고 싶어졌다. 실제로 학년 아이들이 전체 다같이 참여하는 회의를 통해 학년현장체험학습 장소도 아이들이 직접 정하고, 아이들이 수업 중에 배웠던 음악수업으로 학년말에 부모님을 초대하는 발표회도 스스로 준비했다.

교실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이 줄어들면 학교폭력이나 따돌림 등 아이들의 부적응과 반사회적 행동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부진아가 줄어든다. 단위 수업시간 안에 모든 아이들에 대한 평가가 가능해지고 이로 인해 피드백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보충지도도 쉬워진다. 제 때에 즉각적으로 보충과 피드백이 주어지므로 부진이 쌓이거나 방치되는 일도 줄어든다. 진단이니 평가니 한답시고 온갖 시험지로 아이들 괴롭히지 않고, 협력교사니 부진아지도니 하면서 따로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아이들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도움을 교사가 즉각적으로 줄 수 있다.

일전에 어떤 토론회에서 너무 적은 인원은 협력을 경험할 수 없으므로 20명 내외의 학생수가 적당하다는 의견을 내는 교사를 보았다. 그런데, 적어도 내 경험으론 학생 수가 적을수록 협력이 더 잘 일어난다.

우선, 한 학급내에서 학생수가 적으면 친구 한명 한명이 너무나 소중하다. 아이들은 그걸 말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알아서 특별히 괴롭히거나 싫어하는 친구 없이 모두가 두루두루 잘 어울렸다. 흔히 4학년쯤 되면 또래끼리 무리를 짓거나 소수의 아이들을 따돌리는 문화가 생기기도 하고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놀기도 하는데, 한반에 남, 녀 학생 모두 합쳐 10명 내외뿐이라면 간단한 놀이를 하더라도 모두가 어울려 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교실을 넘어서 동 학년 간 협력도 수월하다. 피구게임 정도를 하려고 해도 한반에 8명이면 두 반이랑 같이 하는 게 더 재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교실 간의 벽을 넘어서 다 같이 어울려 한반처럼 지내게 된다. 당연히 교사들 간의 협력도 더 많이, 자주 일어났다.

다인수 학급에서 일정정도 통제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안전 문제 때문이다. 좁은 공간에 여러 아이들이 어울려 지내다보면 예상치 못한 사건과 사고가 늘 벌어지고, 그 책임은 늘 담임교사에게 주어진다. 공간이 여유롭고 아이들이 언제 어디에 있든 내 시야에 있으므로 아이들에게 안전을 강조하지 않아도 언제나 안전했다. 복도에서 굳이 줄을 서지 않아도 여러 사람의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고 한 두 아이가 장난을 치거나 다소 개구진 행동을 해도 누구나 여유롭게 받아줄 수 있었다. 그전까지 교사들이 모이면 늘 다인수 학급의 아이들을 어떻게 조용히 시킬 것인가에 몰두했다면, 학급 아이들이 줄어들자 교사들도 어떻게 아이들의 인권과 자율성을 더욱 신장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안전에 대한 부담이 줄면 줄을 세우거나 호통 칠 일이 줄어드니까 교사들도 진짜 교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3년이 지난 지금 우리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는 그때의 약 4배가 되었다. 우리 학교의 많은 교사들이 ‘우리학교가 혁신학교라서’, ‘내(교사)가 변해서’ 가능했다라고 착각했던 많은 혁신과 긍정적 시도들이 모두 원점으로 돌아왔다. 다시 모두가 줄을 세우고, 안전하게(?) 통제하기 바빠졌다. 인권이나 자율보다는 안전이나 규제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쓰게 됐다. 학생수가 가진 힘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를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얼마 전 TV의 한 프로그램에서 우리나라의 연예인들이 유럽의 교육현장을 직접 가서 겪어보는 내용의 방송을 보았다. 직접 다녀온 연예인들과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그 장면을 보는 연예인들이 한결같이 그 나라의 교육제도와 선진 시스템을 칭찬하며 부러워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곳이 핀란드였는데, 조사해 온 단어를 아이들이 몸으로 표현하고 맞추는 놀이방식의 수업을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저런 수업이 과연 특별한 방식인가를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도 단어의 의미를 가르칠 때 몸을 이용하거나 연극적인 요소를 많이 활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왜 저런 수업을 자주 하지 않는지를 생각해보니, 통제가 어려운 다인수 학급에서는 활동적인 수업을 할수록 교사의 에너지가 배로 들기 때문에 꺼려질뿐더러 아이들도 정작 발표를 하거나 수업에 참여하는 시간보다 자칫 기다리거나 반복되는 지루함을 참아야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배로 산만해진다. 화면 속 수업장면에서 한 교실의 아이들은 고작 8~10명 내외였다. 체육수업을 할 때는 아이들이 20~30명 정도 됐는데, 교사가 2~3명 정도 함께했다. 결국 교사의 수업방식이나 교육내용도 어쩌면 학생수가 결정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방송에서는 아무도 그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저 유럽의 학교들이 가진 가장 큰 경쟁력은 바로 학급당 학생수라고 느꼈다.

 

우리나라는 현재 초등 23.4명, 중등 30명, 유치원(만 5세~8세) 28명~30명의 학급당 학생수를 유지하고 있으며 OECD 상위 국가들의 평균 학급당 학생 수는 초등 19.2명, 중등 20.9명, 유치원 15명 수준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초등보다 유치원에 학급당 학생수가 더 많다는 건 무슨 개그처럼 들린다. 게다가 이것은 전국적인 평균일 뿐, 내가 근무하는 신도시의 학교들은 평균 35명이 넘는 학교들도 많다. 교사校舍 등 공간의 부족 문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교사敎師가 부족하다. 학령기 학생 인구가 줄어들어 앞으로 교사들이 남아돌 거라고들 하는데, 오히려 학교 현장에선 교사들이 부족해서 최근 초등에선 교과전담교사의 비율이 매년 줄고 있다. 정부에서 그만큼 교사들을 더 채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아무리 아이들이 줄어도 학급당 학생수는 계속 제자리를 유지할 것이다.

곧 선거가 다가오면 정당이나 후보자들이 교육개혁이니, 학교혁신이니 하면서 앞 다투어 교육공약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때에, 나는 현장의 교육 실천가로서 한 초등학교의 담임교사로서 또 한 아이의 학부모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학급당 학생수의 감소를 누군가 이야기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적은 노력으로도 우리 교육을 크게 개혁하고 혁신하는 지름길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우리나라의 학급당 학생수가 크게 줄어들 때 나또한 비로소 좀 덜 부끄러운 교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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