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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아이>에서 <보헤미안 랩소디>까지

 

타라 (문화연구분과)

 

정말 위로는 이 사회가 바뀌어서 남아있는 사람들 목숨 지키는 게 위로가 되는 일입니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고로 숨진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가 지난 1224일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처리를 호소하면서 한 말이다. 아들이 일했던 열악한 노동 현장을 몸소 겪은 어머니는 아이 가진 부모 입장에서 이런 일 겪게 하고 싶지 않다""이 일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고 처참한지 그런 아픔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지 않다"고 결연하게 말한다. 컨베이어 벨트가 여전히 팽팽 돌아가고 낙탄이 떨어지는 위험한 현장에서 청년 노동자들의 손을 부여잡고 나오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국가와 정부는 한없이 무능하다.

 

2018년 가을과 겨울, 영화관에서 딱 한 편씩의 영화를 봤다. 신동석 감독의 <살아남은 아이>와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보헤미안 랩소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80%를 찍고 제작사와 불화로 결별했다고 하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이십세기폭스사 작품이다. 누적 관객 수로 보자면 <살아남은 아이>10,969(2018.12.8.)이고, <보헤미안 랩소디>8,765,944(2018.12.25.)에 이른다. 규모로 보자면 비교도 안될 정도로 두 작품은 전혀 다르다. <살아남은 아이>는 저예산의 독립영화이고 <보헤미안 랩소디>는 화려한 미장센과 퀸 음악으로 정교하게 편집된 상업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영화는 생존에 지친 한국사회 거주민들에게 대조적인 방식으로 위로의 손을 내민다.

 

 

위로를 찾는 사회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아,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너대로 살아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책들이 서점가에 즐비하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살아가기에 녹록치 않고 다친 마음들은 괜찮지 않은 거다. 무조건 괜찮아 라고 말하며 토닥토닥해주는 곳이 혹은 사람이 없는 거다. 누구랄 것 없이 먼저 위로의 손을 내미는 이가 흔치 않고 스스로들 먼저 움츠러드는 까닭이다. 사방은 무섭게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 뿐이고, 실수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잡을 손잡이 하나 없는 컴컴한 막장이다.

<살아남은 아이>는 아들을 잃은 부부의 이야기이자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아이의 성장 이야기이다. 18세 아들은 친구를 구하려다 익사했고 의사자로 지정된다. 인테리어 일을 하는 성철은 아들이 살린 아이 기현이가 학교를 자퇴하고 알바를 전전하는 걸 보고는 고용해서 도배 일을 가르친다. 아내인 미숙에게 기현이는 아들 은찬이를 죽인 아이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 점차 기현이에게 마음을 주며 가족처럼 지내게 된다.

그런데 기현이가 도배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세 사람이 함께 소풍을 다녀온 이후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죄책감을 느끼게 된 기현이는 은찬이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털어놓는다. 실상은 의로운 죽음이 아니라 집단 폭력에 의한 사망사고인 것이다. 은찬이는 절친이었던 준영이에게 가해지던 집단 폭행을 말리다 본인으로 타깃이 바뀌어 죽음에 이른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극복해가며 견뎌내던 성철과 미숙에게 진실은 충격적이고 아프다. 부부는 극심한 고통 속에 은찬이의 죽음에 연루된 아이들을 만나 진실을 규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들의 비호 속에 진실을 함구하고 외면한다. 법으로도 무력한 냉혹한 현실에서 성철의 울분은 극에 달하고 급기야 은찬이가 죽은 강이 보이는 언덕에서 기현이를 목졸라 죽이려고 한다.

성철은 발버둥치던 기현이 눈물을 흘리며 제 목숨을 자신의 손에 내맡기는 걸 보고는 행위를 멈춘다. 기현이는 강가로 내닫고 목놓아 절규하고는 주머니에 한가득 자갈을 주워 담고는 강물 속으로 들어간다. 넋 놓고 앉아있던 미숙이 그를 구하려고 강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성철이 다시 그들을 구하려고 강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세 사람이 물속에서 한 덩이가 되어 버둥거리다가 물 밖으로 헤쳐 나온다. 그런 중에 죄의 무게를 상징하는 돌멩이들이 하나 둘 빠져나오고 자갈밭에 누운 세 사람이 긴 숨을 토해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참던 숨을 토해내게 만들고 강렬하고도 먹먹한 여운을 주는 엔딩 장면이다.

 

 

<살아남은 아이>는 위로의 서사다. 그러나 영화는 섣부른 위로를 던지지 않는다. 쓰리고 아플지라도 진실을 직시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 고통에 함께 하려는 노력이 담긴 위로를 건네라고 말한다. 선택과 행동으로 말이다. “사실은 어떤 고통을 가진 사람을 위로한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 같다. 진심을 담지 않으면 어려운 일인데 그래도 가능하긴 한 거 같다. 위로는 가능하다. 작은 위로라도 누구에게 전할 수 있다고 하면 어려운 일일지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신동석 감독 인터뷰 중) 감독은 그런 선택과 행동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제 그만 하라며 보상금 운운하는 사회를 향하여 성철은 뭐라도 한 게 있어야지 그만 하지,“ 라며 오열한다. 진실을 외면하는 폭압적 현실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느꼈을 울분과 한없는 슬픔이 겹쳐서 먹먹해진다.

 

이에 반해 <보헤미안 랩소디>는 사람들을 퀸Queen의 노래로 매료한다. 팍팍하고 힘든 현실을 잠시 잊고 스크린을 따라 떼창을 하며 쌓인 것들을 토해내고 가라고 손짓한다. 잔지바르(현 탄자니아) 출신의 이민자이자 성소수자인 프레드 머큐리가 천재적인 음악성과 열정으로 아웃사이더의 삶을 극복하고 예술혼을 발휘하여 전설적인 밴드 싱어가 된다는 이야기는 일반적인 전기영화의 문법을 따르되 평이하게 제시된다. 밴드 멤버들과의 갈등, 성정체성을 인지하는 과정에서의 고뇌, 애인인 메리 오스틴이 떠나고 술과 파티에 취한 채 방황하는 장면들이 그저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들처럼 스쳐 지나간다. 영화는 갈등을 파고들고 고통을 헤집는 대신 그저 감싸며 위로하려는 편에 가깝다.

영화는 오히려 앞니가 툭 튀어나온 보잘 것 없는 외모의 파로크 불살라가 프레디 머큐리가 되어 우린 모두 아웃사이더들이라고 외치고, 세상의 모든 아웃사이더들을 위해 노래하는 모습에 포커스를 둔다. 마음이 쉴 곳 없는 세상에서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퀸은 바로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때 영화가 겨냥한 바는 명확하다. 영화는 아웃사이더인 다수의 관객들을, 그리고 스스로를 루저로 인식하는 혹은 루저가 될 불안에 떠는 한국사회 거주민들을 호출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공허함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사는 주인공을 보며 위로받는다. 라미 말렉이 분한 영화 속 주인공은 실제 프레디 머큐리에 비해 왜소하고 불안정하며 심약해 보인다. 의도적인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관객들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무대에서는 폭발적인 열정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지만 내면은 불안과 외로움으로 가득한 한 남자는 방황하며 타인의 사랑을 갈구한다. 일상에서는 더없이 찌질한 그에게 관객들은 쉽게 마음을 연다. 그런 그가 절규하듯 부르는 보헤미안 랩소디는 짜릿함마저 준다.

영화 속에서 매혹적인 퀸의 음악은 몽환적이고 슬픈 동화로 소비된다. 그것도 클라이맥스 부분만 짤막하게 편집되는 방식으로. 네 삶의 주인공이 되라는 직접적인 주문 속에서 그리고 1985년 웸블리 스타디움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 초대됨으로써 관객들은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용기와 위안의 세례를 받는다. 괜찮아 그만하면 됐어. 위로는 가벼운 터치로 쉽게 이루어진다. 싱어롱 상영관의 놀라운 흥행과 N차 관람의 열풍이 이를 증명한다. 삶이라는 투쟁에서 우린 모두 승리자라고 외치는 We are the champions 나 발 구르며 부르는 We will rock you의 떼창이 일종의 종교의식처럼 방황하는 한국사회 거주민들을 잡아끈다.

 

 

얼룩을 다루는 두 방식

 

<살아남은 아이>의 첫 장면은 성철이 도배하러 간 집의 벽과 천장의 얼룩을 보고 천장 속을 들추어 살피는 것에서 시작한다. 천장 위 빈 공간에는 곰팡이가 피어있고 빨강, 파랑, 노랑색의 세 갈래 전선들이 꼬여있다. 다음 씬은 건물 옥상이다. 얼룩을 따라 그 근원을 찾아가는 성철의 행동은 이후 전개될 아들의 죽음의 진실을 찾아갈 탐색의 여정을 복선처럼 제시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건물 아래로 기현이가 노란색 스쿠터를 타고 소리를 지르며 지나고 그 뒤에는 너댓명의 교복입은 남학생들이 한 아이에게 책가방 셔틀을 시키면서 껄렁거리며 지난다.

영화 속 성철은 꼼꼼한 도배장이이다. 도배는 헌 벽지를 다 뜯어내고 새 벽지로 집을 단장하는 행위이다. 성철이 헌 벽과 금간 벽에 새로운 벽지를 바르는 작업은 그가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기현이를 통해 채우는 방식과 유사하다. 아들에게 못다 해준 것들을 아들이 살렸다고 믿는 아이에게 해주는 것이다. 기현이 역시 점차 생겨나는 죄책감을 새 벽지로 말끔하게 덮어가는 의식을 치르듯 도배를 수행한다. 그러나 과거의 얼룩은 그리 쉽게 덮이지 않는다.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종이벽지 아래에서 배어나오는 곰팡이처럼 얼룩은 새 벽지 위로 솟아오른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던 기현이가 성철과 미숙의 온정적인 사랑을 받고는 죄책감 속에서 얼룩을 드러내는 장면은 윤리적이다. 그냥 덮고 가고 싶었을 수도 있으나 그럴 수 없는 아이의 죄책감은 즐거웠던 소풍날 먹은 음식을 다 게워내는 그의 몸으로 드러나고 나름의 속죄의식은 진실을 털어놓고 손을 씻는 행위로 표현된다. <살아남은 아이>는 얼룩을 실크벽지로 매끈하게 덮어버리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얼룩의 근원을 찾아 파헤치고 해결하려 하되 그 얼룩을 전시하지 않는다. 얼룩을 품고 그 위를 종이벽지로 바르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기현이의 진정한 속죄의식은 은찬이가 죽었던 강물 속에서 주머니를 가득 채웠던 돌멩이들이 빠져나가는 죽음의 추체험 속에서 이루어진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얼룩을 그대로 드러내고 소비한다. 영화 속 얼룩은 양성애자인 프레드 머큐리의 성적 취향과 파키스탄계 이주민인 그의 집안, 그리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AIDS이다. 영화는 실제 프레드 머큐리의 전기적 사실을 왜곡하여 뒤섞어 배치하면서 휴머니즘에 호소할 새로운 서사를 엮어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 프레드 머큐리의 얼룩들을 미장센으로 활용한다. 그러므로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드 머큐리의 전기를 음악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활용한 상업적인 음악영화이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하이라이트로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그 전개 과정에서 프레드 머큐리의 전기를 활용한다. 이 부분이 고전적인 퀸 팬들이 비판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프레드 머큐리가 AIDS 감염 사실을 알고 밴드 멤버들에게 알리는 것은 라이브 에이드 공연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퀸은 잠시의 휴지기는 있었으나 해체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영화에서는 20분간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 실황을 그대로 영화로 끌어들여 클라이맥스로 만들고자 사실을 왜곡하여 배치한다. 밴드와 독립하여 방황하던 프레드 머큐리가 멤버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과한 후 AIDS 감염 사실을 알리고 마지막이 될 공연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전개로 비장미 넘치는 서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절규하는 그의 노래가 탁월한 퀸의 연주를 타고 흐르면서 무르익은 관객들의 휴머니즘적 감정선을 건드리고 드디어 폭발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는 프레드 머큐리의 치부들을 별 거 아니라는 듯 드러내며 소비한다. 음악적인 천재성은 있으나 평생을 외로움에 방황하는 성소수자 주인공과 퀸 멤버들 간의 인간적인 유대관계는 배제되고 생략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를 그의 성적 취향과 AIDS가 대체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AIDS에 대한 현실의 막연한 혐오감을 그대로 끌어들여 프레드 머큐리를 AIDS 퇴치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린다. AIDS에 대한 편견과 동정을 그에게 투사하고 AIDS 퇴치를 위해 프레드 머큐리를 소비하는 방식이다. 매혹적인 퀸의 음악을 걷어내면 드러나는 이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처절한 용서 & 어른이 필요한 사회

<살아남은 아이>에서 아들의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된 부부는 가해자인 기현을 용서할 수 없다. 기현이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그리고 무엇보다 사건 정황을 밝힌 기현이와 성철이 부부가 친밀하게 지냈다는 주변의 진술 때문에 사건은 기소 중지되어버린다. 답답할 정도로 무표정한 성철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야.” 라는 말에는 그 울분이 향할 곳이 담겨있다.

그러나 아들이 죽은 그곳에서 기현을 단죄하려던 부부는 결국 스스로를 단죄하려는 아이의 목숨을 살림으로써 처절한 용서의 몸짓을 보여준다. 기현이는 비로서 살아남은 아이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의 맥락을 보자면 은찬이 때문에 살아남은 아이는 애초의 타깃이었던 은찬이의 절친 준영이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자 하는 미숙이를 외면하고 그녀와의 대면을 불편해하는 준영이를 영화는 그저 배경으로 화석화된 인물로 둔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가야지라고 읊조리며 진실을 외면해버리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사안의 무게는 다르지만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등장하는 프레드 머큐리의 사과와 퀸 멤버들의 가벼운 용서마저도 현실에선 보기 드물다. <살아남은 아이>는 속죄와 용서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나 그럼에도 진실을 대면하고 어떤 선택과 노력을 해야하는지를 깊게 성찰하게 만든다.

 

세월호 참극이 벌어진 2014<한공주>에서는 그녀를 도와줄 어른이 없다. 어른이 부재한 집에서 벌어진 사건 피해자인 공주가 기댈 어른이 없는 것이다. 집 나간 생모는 찾아오지 말라 하고 아버지는 합의금을 위해 합의서 싸인을 강요하는가 하면 공주에게 머물 거처를 마련해줬던 교사도 절박한 공주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다. “공주야, 네가 잘못하지 않은 거 다 알아, …… 그게 그런데 잘못한 개 없다고 또 잘못한 게 아닌 게 아니거든.” 이라며 어물쩍 넘어가버리는 어른들의 세계는 비겁하다.

그런데 <살아남은 아이>가 그래도 희망적인 까닭은 어른이 어른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철은 보호자가 부재한 기현이를 안쓰럽게 여겨 그에게 손을 내밀고 일거리를 주고 일을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멀찌감치 지켜보는가 하면 도움이 필요할 때 넌지시 다가와 도와준다. 그리고 자기의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해준다. 도배 기능사 수험서를 사주면서 자격증을 따라고 이끄는 성철이와 기현이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다. 분노의 극한에서 응징하려던 자기를 멈추고 결국은 처절한 용서의 노력을 보여주는 성철과 미숙은 살아남은 아이에게 기댈 곳을 주는 어른이다. 죽음은 아프다. 특히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의 애를 끓게 한다. 살아남은 자들과 연대하여 폭주하는 기관차를 멈추게 하라. 2019 한국사회 어른들이 감행해야할 지상명령이다.

 

 

Ich, der Überlebende

Bertolt Brecht

Ich weiss natürlich: einzig durch Glück

Habe ich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Hörte ich diese Freunde won mir sagen:

“Die Stärkeren überleben”

Und ich hasste mich

 

, 살아남은 자

베르톨트 브레히트

물론 나도 알아. 그게 행운이었다는 것을

내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말야

지난 밤 꿈에 친구들이 내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지

독한 놈이 살아남는 거야

그 때 난 내가 미워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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