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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1호 (2016.07.05. 발간)


[현장에서]

전임자 해직투쟁기

평범한 조합원에서 해직교사로


박세영 - 전교조 조직국장







     삼대가 덕을 쌓은 모양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셀프감금 5일차다. 하루 종일 집에 있다 보니 하다하다 할 게 없어 책을 읽게 되고, 이 바쁘고 엄혹한 시기에 편안한 침대에 누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다니, 엄청난 축복처럼 느껴진다. 합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인간이 있을 따름이다. 거리에서 고생하고 있을 동지들을 떠올리면 이렇게 합리화라도 하지 않고서는 긴긴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부당해고에 맞서는 48시간 집중행동 2일차 오전, 청운동사무소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청와대로 의견서를 제출하러 방향을 틀었을 때, 인도는 겹겹이 에워싼 경찰병력에 막혔고, 시민들의 통행권을 막은 경찰은 되려 집시법 위반이라며 협박을 해왔다. 집회를 위한 마이크와 앰프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우리의 분노는 정당했다. 각자의 손에 들린 의견서 한 장이 무에라고 솜털조차 가시지 않은 어린 경찰들로 우리 앞을 막는 것이냐... 처음으로 경찰에게 욕을 해봤다. 해고도 부당한데, 길까지 막아서는 너희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경찰이냐’...

     5월 내내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무사히 교사대회를 마쳤고, 곧바로 이어지는 집중행동이 버겁긴 했지만, 3명의 동지가 이미 오전에 연행되었고, 오후 들어 또 한명의 동지가 순식간에 경찰들 속으로 낚아 채여 갔다. 앞쪽에 있던 나와 몇몇 선생님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밀고 밀리기를 십여 분 했을까. 지탱하던 오른쪽 다리에서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았고, 생전처음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는 호사를 누렸다. 미이라가 되어 집에 오니 움직임도 불편하고 움직이지 않는 게 다리에 좋다하여 어쩔 수 없이 나와 직면하는 시간, 매일 아침이면 절규하고픈 마음이었다가 동지들의 위로에 마음이 녹았다가 그날 청운동사무소 앞 대치상황을 다시 반추하며, 혼자서 산에 갔다가 이지경이 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가 그야말로 미친년 꽃다발이다.

     

     교감이 내용증명으로 보내온 발령통지서를 받았다. 허벅지까지 반 깁스를 한 채로 직권면직 통보를 받고 보니, 어이없고 기가 막혔다. 해고된 자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구나. 오랜 기간을 해고자로 살아온 선배 선생님들의 지난하고 고단한 삶이 갑자기 내 것이 된 기분이었다.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정당하더니, 이제 교사로서의 삶까지 빼앗겼다.

 

     정말 평범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내가 전교조에 닥친 대량해직사태의 주인공이 되고 보니, 시간을 반추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전교조에 가입하게 된 것은 아마도 2000년쯤이었던 것 같다. 발령받고 1년쯤 지나서였는데, 당시 학교에서는 성과급 균등분배를 하고 있었고 전체 선생님 모두가 참여했던 것 같다. 그 즈음 학교에 회람이 돌았고, 내가 그 회람을 받고 이름 석 자를 적었을 때, 나는 그 학교에서 스물 몇 번째로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가 되었다. 그렇게 다수에 들고픈 심정으로, 전교조에 대한 막연한 호의로 가입을 하고 나서, 나는 그저 조합비만 내는 조합원으로 꽤 오랫동안 살았다.

     학교를 옮기면서 둘째를 낳았고 산후조리원에서 몸조리를 하던 때에 내가 분회장이라는 한통의 문자를 받았고 분회장이니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분노하게 되는 순간이 왔다. 지회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어려운 상황을 간신히 넘기긴 했지만, 홀로 조합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번번이 모욕적인 상황 속에서 이를 갈았던 것 같다. 불의와 부당함을 참을 수가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교무회의에서 발언도 자주 했지만, 대중성을 얻지도 못했고, 대의에 동의하는 교사들도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2009. 내 인생의 시계 중 하나는 2009년에 멈춰있다. 학교를 옮기고 6학년을 맡은 나는, 지난 겨울 해직된 7명의 선생님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해직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코 그런 시험 따위를 용납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반 아이들의 천진한 얼굴을 보면서 도저히 이런 시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섬에서 학교를 다니던 내 어린 시절, 웃옷을 바구니삼아 산딸기를 따고, 개구리를 잡으러 논두렁을 뛰어다니고, 방죽에 고무신을 띄우다 할머니에게 야단맞고, 겨울이면 허벅지까지 오던 눈길을 걸어 학교에 가면 바지가 흠뻑 젖었고 집에 와서는 비료푸대로 눈썰매를 타고, 햇살 좋은 날은 짚더미 위에 누워 겨울 볕을 쪼였다. 서울로 전학을 왔을 때도, 동네 아이들과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딱지치기에 여념이 없었던 내 어린 시절에 경쟁은 없었다. 99년에 발령을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던 당시에도 살벌하고 혹독한 경쟁은 없었다.

     3월 중순께, 학부모에게 시험 선택권을 알리는 가정통신문을 보내고, 331일 일제고사가 있기까지 아이들과 나는 2주간을 시달렸다. 지금도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그 해 3, 교육청 장학사들은 아이들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시험을 거부하면 담임을 바꾸겠다고 협박했고, 학교장은 체육관에 교사들을 모아놓고 나의 만행을 제지할 방법에 대해 강구했다고 한다. 시험 당일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집에 급파되어 아이들을 납치하다시피 학교까지 연행을 했으며, 주변 전철역에 교사들을 배치하여 학교가 아닌 곳으로 이동하는 아이들을 감시하기까지 했다. 교육청의 행태와 동료교사들의 맹목적인 충성, 가치판단 없이 명령에 따르는 관료들의 성실성에 소름이 끼쳤다. 교사로서 처음 감봉이라는 징계를 받고, 개인적인 일까지 겹쳐 나는 무척 피로했고, 참담한 심정으로 그 해를 보냈다.

     그 해에 우리 반을 촬영했던 영상 일부가 작년에 영화로 나왔고, 졸지에 영화에 출연하면서 영화를 보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조차 생겼다. 그 영화를 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내내 미뤄두다가 서울지부 사무실에 방문한 감독님을 뵙고, 용기를 내어 그 해 우리 반 아이들에게 깜짝 모임을 제안했다. 6학년이었던 아이들은 그새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너덧 명밖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이들과 영화를 보면서, 이제야 심리적 외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행이었다. 힘들고 고단했던 모습이 아니라 담담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의연한 교사의 모습으로 영화 속에 나오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이로써 두 번째 반복되는 역사는 희극이 되었고, 2009년을 반추하는 일은 엄청난 의지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후 일제고사에서의 투쟁력(!)을 인정받아 지회에서 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지회집행위원들을 빠짐없이 꾸린 뒤에 나를 지회장으로 세운 것이다. 하늘같은 선배들에게서 인정욕구를 채우던 그날은 직에 대한 부담감과 흥분 때문에 밤잠을 못 이뤘다. 1정 연수 때 만난 친구의 꾀임으로 지회집행위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고, 또 어쩌다보니 지회에서 참실부장을 하게 되었고, 총무에, 사무장까지 했었지만 지회장을 맡고 보니 그제서야 전교조에 두 발을 담근 기분이 들었다.

     이즈음 학교에서의 투쟁력도 최고였던 것 같다. 지회장이니 우리 학교부터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활활 불타올랐던 것 같다. 남의 가슴에 불을 지르려면 나부터 불타고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열정만 넘치던 나의 논리적 빈약성을 대신해주는 한 조합원 선생님이 전근을 오셨고 우리의 궁합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일단 내가 지르고 치고 나가면 이 선생님이 대중성과 합리성으로 나의 결함을 채워주었고, 이 학교에서 괴물로 시작한 나의 전력과 별을 단 이력 때문에 판판히 제2의 교장으로 등극하며, 운 좋게 업무정상화까지 이뤄내니, 혁신학교가 부럽지 않았다. 수업 혁신의 길은 멀고 험했지만 시스템을 바꾸고 바꾼 학교생활에 감동한 교사들의 신뢰까지 얻고 나니, 학교생활은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였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일은 없었고, 그렇게 천국에서의 3년을 보냈지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또 한순간이었다.

      근처 동네의 학교로 옮겼을 뿐인데, 토양이 너무나 척박했다. 전교조에 대한, 심지어 전교조 교사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도 없었을 뿐더러, 강남 한복판의 학교를 성동구에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와 교장의 정치력에 밀려, 교무회의에서 폭격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와신상담을 할 때쯤 서울지부 사무실에 총무 감사를 받으러 갔다가 전임 제의를 받았고, 수락해버렸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나라도 하면 되겠구나..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덜컥...

 


다른 길은 없다


     글의 마지막을 쓰는 지금은 부상당한지 보름째. 여기는 시간이 7배쯤 빨리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천천히 걷는 것, 끼니때마다 집에서 밥을 차려 먹는 것,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일을 이렇게 오랫동안 해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이번 인생수업은 아마도 성격을 통째로 바꿔놓을 모양이다. 꿈에서조차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던 십자인대파열로 내일 모레쯤엔 수술을 받아야 하고, 부당해고에 대한 싸움도, 평범한 근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이란 매우 주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건강을 회복해서 다시 출근할 수 있게 되기까지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한 합리화를 계속 하는 일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다만 그동안 학교생활을 하면서 얻은 정당한 부채를 이제는 갚을 때가 된 것 같다. 이름도 없이 해직된 1527, 그들이 대량해직 되며 지켜온 전교조, 그 열매를 따먹으며 이어온 학교생활. 내가 머물렀던 3년간의 천국. 조만간 재활을 마치고 다시 출근을 하게 되면 더 열심히 투쟁해야겠다, 라는 상투적인 표현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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