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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7호 (2018.01.04. 발간)


[기획] 

2. 비고츠키 원전 읽기

 

은하수(진보교육연구소 회원)

 




   현재 비고츠키연구회에서 비고츠키 선집 번역을 이끌고 있는 켈로그 교수는 역사와 발달1권 역자 서문에서 비고츠키의 논의 전개 과정은 마치 강의 흐름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물의 흐름은 4대강처럼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수심을 동일하게 6m로 깎아 낸 강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고 덧붙인다. 즉 여기서 물의 흐름은 우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고 말할 때처럼 인공적 수로를 따라 정해진 길을 따라 조용히 부드럽게 흘러가는 물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물의 흐름은 마치 원시적 자연 속에서 물의 흐름과 같다. 높은 산의 시원에서 시작된 물이 모여 계곡을 이루고, 높은 절벽을 만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도 하며, 수많은 지류로 흩어졌다고 다시 큰 강을 이루고도 하고, 어딘가에 고립되어 호수나 연못을 이루기도 하고 급류 속에서 소용돌이를 만들기도 한다.

 

   비고츠키 글의 흐름이 단순하지 않은 표면적 이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어 보인다. 현재 한국어판 비고츠키 선집 중에는 비고츠키가 직접 잘 정리하여 정식으로 출판한 것이 아닌 글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비고츠키 선집 12011년 생각과 말

비고츠키 선집 22012년 도구와 기호

비고츠키 선집 32013년 어린이 자기행동숙달의 역사와 발달 1

비고츠키 선집 42014년 어린이 자기행동숙달의 역사와 발달 2

비고츠키 선집 52014년 어린이의 상상과 창조

비고츠키 선집 62015년 성장과 분화(비고츠키 아동학 강의 )

비고츠키 선집 72016년 연령과 위기(비고츠키 아동학 강의 )

비고츠키 선집 82017년 의식과 숙달(비고츠키 아동학 강의 )

 

   선집 1권인 대표작 생각과 말의 경우 2, 3장은 당대의 주요 이론가였던 피아제와 스턴 비판을 위해 따로 발표했던 글이고, 4(1929)은 생각과 말의 발생적 기원에 대해 그 이전에 별도로 발표했던 논문이고, 5장은 교사를 대상으로 한 (우편)통신강좌 교재의 일부였으며, 나머지 1,6,7장은 그로부터 수년후 죽기 얼마전 병상에서 비고츠키가 구술한 내용을 받아 쓴 것이라고 한다. 이 글들이 모여 완성된 것이 생각과 말이라는 책이다. 따라서 글들의 완성도나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4장의 경우 매우 체계적이며 정리가 잘 되어있고 뒷부분에는 비고츠키가 내용을 직접 요약하여 제시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생각과 말의 발달에 대한 자신의 직접적인 연구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5장과 6장은 서로 별로 연관이 없어 보여 독자를 당황시키기도 한다. 5장은 혼합체->복합체->진개념의 발달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반면, 6장은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에 기반한 교수-학습에 대한 논의가 주 내용을 이루며 그 이행에 대한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5장의 비고츠키와 6장의 비고츠키는 다른 비고츠키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고 한다.

   선집 2도구와 기호(1930년 저술로 추정)도 역자 서문에 보면 완성된 형태의 첫 장을 제외하면 이 글은 끝나거나 마무리되지 않았으며, 반복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고 너무 간결하다 못해 생략된 내용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선집 3,4권인 역사와 발달1,2는 비고츠키 사후 가족 문서고에 남아 있던 메모 형태로 쓰여진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선집 5권인 어린이의 상상과 창조는 한국어판 선집 번역자들이 상상과 창조를 주제로 비고츠키가 저술한 세 가지의 서로 다른 텍스트를 합한 모음집이다. 이 중 첫 번째는 텍스트인 유년기의 상상과 창조(1930)’는 비고츠키가 생전에 단행본으로 출판한 완성된 책이며, 두 번째 텍스트인 청소년기의 상상과 창조(1931)’는 비고츠키의 다른 책 청소년 아동학의 일부이고, 세 번째 텍스트인 유년기의 상상과 발달(1932)’은 비고츠키가 헤르첸 교육대학에서 사용한 심리학 강의노트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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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집 6,7,8권인 아동학 강의 3부작(성장과 분화, 연령과 위기, 의식과 숙달)도 한국어판 선집 번역자들이 아동학에 관한 비고츠키의 여러 글들을 세 군데서 모아 편집한 책이다. 비고츠키가 말년에 주로 연구한 것으로 보이는 아동학(Pedology)이라는 학문은 지금은 사라졌으며, 당시 러시아에서도 아동학은 잘못된 학문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고, 1936년경 정식으로 금지되었다. 그래서인지 비고츠키의 아동학 관련 글들은 논문이나 강의 속기록 형태로 여기저기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다. 이런 글들을 어린이 발달의 연령기 순에 따라 체계적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이 아동학 강의 3부작이다.

   첫째, 그 뼈대를 이루는 주 텍스트는 2001년 러시아에서 코로타예바가 출판한 아동학 강의라는 책이다. 코로타예바에 따르면 그녀의 아버지 코로타예프는 1929년부터 1936년까지 헤르첸 대학교의 레닌그라드 분원 아동학과 학부와 대학원 과정 학생이었고, 그 당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의 연구 책임자가 비고츠키였다. 1933년 레닌그라드에 있는 교육전문대학의 교사 양성 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한 코르타예프는 때마침 수련 교사들을 돕기 위해 비고츠키가 배포한 강의 필사본을 입수했다는 것이다. 코로타예바에 따르면 1,2부로 이루어진 이 필사본의 구조는 통일적이지 않다. 1아동학의 기초는 제목이 없는 7개의 강의로 이루어져 있는데, 7개의 강의를 7개 장으로 완역한 것이 선집 6권인 성장과 분화이다. 2연령의 문제8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4개의 글은 강의 필사본이 아니며 문단으로 나뉘어져 있고 문어체로 쓰인 것으로 보아 출판을 염두에 쓰고 쓴 글로 보이며, 뒤의 4개의 글은 1933년부터 비고츠키가 죽은 1934년에 행해진 강의 필사본이라고 한다. 이 중 앞의 4개 글은 연령과 위기에 포함되었고, 뒤의 3개의 글은 의식과 숙달에 포함되었다. 여기서 빠진 13세의 위기를 다루고 있는 이행적 연령기의 부정적 국면이라는 나머지 하나의 글은 청소년기를 다룬 후속 선집에 포함될 예정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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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타예바 아동학 강의(2001)

 

코로타예바 서문 (성장과 분화러시아어 편집자 서문)

1부 아동학의 기초

1강 아동학의 주제 (성장과 분화1)

2강 아동학 연구 방법의 특징 (성장과 분화2)

3강 유전과 환경에 관한 아동학의 입장 (성장과 분화3)

4강 아동학에서 환경의 문제 (성장과 분화4)

5강 어린이 심리적 발달의 일반 법칙 (성장과 분화5)

6강 어린이 신체 발달의 일반 법칙 (성장과 분화6)

7강 신경계 발달의 일반 법칙 (성장과 분화7)

 

2부 연령의 문제

2-1 아동학의 연령 개념 (연령과 위기1)

2-2 어린이 발달에서 연령기 구분의 문제 (연령과 위기2-1)

2-3 연령기의 구조와 역동 (연령과 위기2-2)

2-4 연령기의 문제와 발달의 진단 (연령과 위기2-3)

2-5 3세와 7세의 위기 (의식과 숙달2-2) 1933.4.16.일 강의

2-6 이행적 연령의 부정적 국면 (미간행 선집 9권에 포함 예정) 1933.6.26.일 강의

2-7 학령기 (의식과 숙달5-1) 1934.2.23.일 강의

2-8 학령기 어린이의 생각 (의식과 숙달5-2) 1934.5.3.일 강의(5.9일 쓰려져 6.6일 사망)

 

 

   두 번째 주요 텍스트는 러시아어와 영어판 비고츠키 선집이다. 한국어판 비고츠키 선집 번역자들은 코로타예바의 아동학 강의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이 텍스트를 이용했다. 이용된 부분은 영어판 비고츠키 선집 57장 유아기(신생아기 포함), 81세의 위기, 9장 초기 유년기, 103세의 위기, 117세의 위기이다. 이 중 7장 유아기의 맨 앞에 있는 신생아기에 관한 내용은 한국어판에서는 별도의 장으로 분리되어 포함되었다.

   셋째, 불행히도 앞의 두 개의 주요 텍스트 어디에도 전학령기에 대한 내용은 남아있지 않다. 이에 한국어판 비고츠키 선집 번역자들은 아동학 강의의 다른 글들과 성격이나 내용이 좀 동떨어진, 1933년경 범러시아 전학령기 교육 총회에서 발표된 전학령기 교수-학습과 발달이라는 보고서를 포함시켰다. 이 글의 원본은 비고츠키 사후 1935년에 출판된 교수-학습 과정에서 어린이의 정신 발달(잔코프, 쉬프, 엘코닌 편집)이며, 또 다른 판본으로는 레온티에프, 루리야, 기타 비고츠카야가 편집한 심리학 연구 선집(1956)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비고츠키 선집 7연령과 위기, 8의식과 숙달

 

7연령과 위기

1장 아동학의 연령 개념 (코로타예바 아동학 강의2-1)

2장 연령의 문제

2-1 어린이 발달에서 연령기 구분의 문제 (코로타예바 아동학 강의2-2)

2-2 연령기의 구조와 역동 (코로타예바 아동학 강의2-3)

2-3 연령기의 문제와 발달의 진단 (코로타예바 아동학 강의2-4)

3장 신생아의 위기 (영어판 비고츠키 선집 57-1)

4장 유아기

4-1 유아기 발달의 사회적 상황 (영어판 비고츠키 선집 57-2)

4-2 유아기 기본적 신형성의 발생 (영어판 비고츠키 선집 57-3)

4-3 유아기의 기본적 신형성 (영어판 비고츠키 선집 57-4)

4-4 유아기의 기본 이론들 (영어판 비고츠키 선집 57-5)

51세의 위기 (영어판 비고츠키 선집 58)

 

8의식과 숙달

1장 초기 유년기 (영어판 비고츠키 선집 59)

23세의 위기

2-1 3세의 위기(의 징후들) (영어판 비고츠키 선집 510)

2-2 3세와 7세의 위기 (코로타예바 아동학 강의2-5)

3장 전학령기 교수-학습과 발달 (범러시아 전학령기 교육총회 보고서)

47세의 위기 (영어판 비고츠키 선집 511)

5장 학령기

5-1 학령기 (코로타예바 아동학 강의2-7)

5-2 학령기 어린이의 생각 (코로타예바 아동학 강의2-8)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판 선집의 대다수 책들은 비고츠키가 잘 기획하고 정리하여 출판한 책이 아니라, 구술이나 강의를 기록하거나 여기저기 남아있는 글들을 모아서 편집한 책들인 것이다. 이렇듯 잘 정리되지 않은 글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비고츠키가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연구를 했다는 것,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 비고츠키에게는 그 많은 연구들을 정리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 비고츠키 말년에 아동학은 탄압받던 학문이라는 것 등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고츠키 글의 복잡한 흐름을 정리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피상적이다.

 

   비고츠키를 처음 읽을 때는 이야기가 두서없어 보이기도 하고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물의 흐름과 같이 이야기의 흐름이 여기저기로 튀거나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비고츠키를 읽고 익숙해지면 분명 비고츠키 논의의 큰 줄기와 구조가 드러난다. 오히려 그 흐름의 독특성은 비고츠키의 변증법과 유물론이라는 철학적 배경과 내재적 비판이나 발생적 단위 분석이라는 연구 방법론에서 찾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생각과 말2파아제의 가르침에서 어린이의 말과 생각의 문제 : 비판적 연구에서 잘 드러난다. 먼저 2장은 어떤 학설이나 사상을 그 전제가 되는 것을 일단 인정한 뒤에 그 내부의 자세한 것을 비판하는 내재적 비판이라는 연구 방법을 보여준다. 필자가 2장을 처음 읽었을 때 그 당혹감은 매우 생생하다. 지금 읽는 부분이 비고츠키의 생각인지 다른 사람의 생각인지, 그 생각이 옳다는 건지 틀리다는 건지 헷갈려서 마치 미로를 헤맨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고츠키는 피아제의 연구 결과를 따라 가면서 그 전제를 밝혀내고 그 모순을 드러낸다. 그 비판의 핵심은 피아제가 자기중심적 말의 근원을 어린이의 자기중심성에서 찾는다는 것인데, 비고츠키는 발생적으로 인간에 앞선 동물이나 성인에 앞선 어린이가 현실적 생각보다 자기중심적 생각에 차 있다면 생존이 불가능할 것이라며 이를 비판하는 것은 인상적이다.

 

   비고츠키는 많은 책에서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그만큼 방법론을 중요하게 취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연구 방법론은 총체성과 분석의 어우러짐, 발달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고정된 무엇이 아닌 발달 중인 무엇에 대해 탐구하는 철저한 변증법에 기반한다. 비고츠키는 자신의 주 연구 대상이었던 어린이, 의식, 생각, , 행동(놀이) 등 그 어느 하나도 고정된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비고츠키의 연구 방법이나 변증법적 사고 방식에 따르면 사물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발달) 중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저것이 되어 가는 것, 이런 면에서 같지만 저런 면에서는 다른 것, 다른 학자들의 옳은 면을 인정하면서도 틀린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비고츠키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전환, 발달, 변화, 위기, 혁명, 재구조화, 도약이라는 말은 이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비고츠키 글의 흐름이 더 잘 이해되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놀이에 대한 비고츠키의 논의를 살펴보자. 의식과 숙달1장 초기 유년기에서 비고츠키는 초기 유년기의 중요한 행동 유형의 하나인 놀이에 대해 분석한다. 초기 유년기에 분명 어린이는 인형을 안고 어르며 논다. 어른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놀이처럼 보이는 이 행동은 전학령기에 비로소 나타나는, 상상적 상황이 존재하고 의미의 전환이 일어나는 진정한 놀이와 구별된다. 이는 어떤 면에서 놀이와 같은 것이지만 아직 놀이가 아니다. 비고츠키는 이를 다른 학자들의 관찰에서 용어를 빌어와 유사 놀이, 실험적 놀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발달 단계 상 현실적 생각에서 상상적 생각의 단계로 완전히 넘어가지 못한 어린이에게 이는 당연한 것이다. 놀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원할 때 이는 우리를 더 당황시킨다. 초기 유년기의 놀이는 놀이이지만 놀이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계적 놀이 발달은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연할 수 있다. 또한 이 놀이 발달은 어린이의 의식 발달이라는 더 큰 발달 과정의 중요한 일부이자 계기이다. 비고츠키는 역사와 발달에서 어린이는 놀이를 통해 가상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대상에서 의미를 떼어내는 것을 배운다고 말한다. 대상에서 의미를 떼어내는 것은 말의 상징기능 발달의 중요한 계기이다.

 

   이러한 분석 과정에서 비고츠키 논의의 일반적 순서나 구조가 드러난다. 처음에는 보통 다른 학자들의 연구나 사람들의 일반적 경험 속에서 많은 사실적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때로는 다른 학자들의 이론까지 검토하고 분석한다. 여기서 다른 학자들의 해석의 일부는 받아들여지고 일부는 거부된다. 이는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는 변증법적 지양의 과정이다. 이 헷갈리는 논의 과정을 잘 쫒아가려면 비고츠키 논의 전개의 저변에 흐르는 생각을 알아야 한다. 비고츠키는 항상 발달의 과정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도 저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중간 단계에 큰 관심을 두고 논의를 전한다. 앞서 말했던 놀이이지만 놀이가 아닌 유사놀이는 놀이로 나아가는 과정에 존재한다. 따라서 비고츠키가 이야기 하는 많은 것들은, 특히 어릴 때 나타나는 것일수록 원시적이라는 접두어를 붙여도 말이 되거나 이해가 쉬워 지는 것들이 많다. 신생아기의 독립적 정신생활이나 유아기의 큰 우리는 원시적의식, 1세의 위기의 자율적 말은 원시적, 초기 유년기의 유사 놀이는 원시적놀이, 7세의 위기는 원시적자아 등으로 말이다.

 

   말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이다. 연령과 위기51세의 위기에서 비고츠키는 소위 자율적 말에 대해 길게 논의한다. 온전한 말과의 차이와 공통점에 대해 이러 저러한 측면에서 다채롭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자율적 말은 초기 유년기의 말로 나아가는 중간 고리의 단계이다. 말이면서 말이 아닌 것이다. 또한 비고츠키는 피아제의 자기중심적 말에 대해서도 긴 논의를 펼친다. 종국에 자기중심적 말혼잣말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고, 외적 말에서 내적 말로 나아가는, 생각의 도구를 아직 숙달하지 못한 중간 단계의 말이라는 의미를 얻는다. 혼잣말은 어떤 의미에서 원시적인 내적 말이다.

 

   이는 비고츠키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계기라는 말과도 관련이 있다. 계기는 영어의 moment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으로 보통은 순간이나 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비고츠키의 글에서는 보통 계기로 번역된다. 모멘트(moment)의 어원은 라틴어 모멘툼(momentum)이며, 원래 의미는 mouere('움직이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움직이고 결정하는 근거라는 의미로 쓰인다. 서양 철학에서 움직임이라는 개념은 변화라는 개념으로 발달한다. 특히 사물이나 현상을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는 형이상학과 달리 변증법은 사물이나 현상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변화에는 점진적이고 누적적인 양적 변화도 있지만 급격하고 도약적인 질적 변화도 있다. 이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서 어떤 중요한 단계나 매듭이나 지점에 해당하는 것을 우리는 계기로 파악한다.

 

   주의할 것은 단계를 생각하더라도 그 단계를 고정적으로 보는 것은 변증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존재하기 전에 생물학적 은 고정된 벽과 같이 경계가 명확히 지어진 개념이었으며, 종들은 서로 독립적이며 그 발생적 관계는 인정되지 않았다. 생물 종 간의 구별이나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너무도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과학 발달과 함께 그 경계는 계속 희미해지고 있다. 과학에서 생물을 무생물과 구분하여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움직인다, 대사한다, 자손을 낳아 번식한다 등을 생물과 무생물을 가르는 기준으로 제시하지만, 그 기준에 따라 어떤 때는 생물처럼 어떤 때는 무생물처럼 보이는 바이러스의 존재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바이러스는 생물에 기생하고, 세포 안에서만 증식이 가능한 미생물이라는 설명도 나오고, ‘단백질 껍질과 핵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자체가 어떠한 형태의 복제나 세포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생물이라는 주장도 나오며,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라는 주장까지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이러스를 생물과 무생물 어느 하나에 넣지 않는 것을 불편해하는 생각은 우리가 익숙한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 때문일 수도 있다. 무생물에서 생물이 탄생했다는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인 사고 속에서는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그 중간 단계의 존재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의 구분은 생식 가능한 자손을 낳을 수 있느냐로 모아지는 것 같다. 예컨대 현재 지구 상의 모든 인류는 같은 종이다. 흑인이건 백인이건 서로 결혼하여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아기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당나귀와 말의 교미로 태어난 노새나 호랑이와 사자 사이에 태어난 라이거는 자손을 낳아 번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노새나 라이거는 종이 아닌 그 무엇이다. 따라서 생물 속에는 종이 아닌 그 무엇이 존재하며 우리가 이를 어떻게 다룰지 모른다고 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발달도 그러하다. 유물론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은 동물에서 진화하였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여 명확히 정의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다. 인간만의 독특한 정신기능인 고등정신기능을 그 기준으로 삼을 수 있겠지만 인간은 육체적 존재이기도 하다. 분명 인간과 동물은 다른 존재이지만 완전히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린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많은 측면에서 동물에 가까운 측면들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어린이는 분명 인간이지만 우리와 같은 성인 존재와는 다른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구술했다는 생각과 말서문에서, 자신의 연구는 인간 의식에 대한 연구의 문턱에서 멈추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는 비고츠키는 죽기 한 달 전까지 아동학을 강의했다. 인간 의식은 발생적 방법을 통해서만 올바로 연구될 수 있다고 생각한 비고츠키가 인간 의식 발달 과정을 보여주는 어린이를 연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필연적이다.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인 이러한 역사관은 요즘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우주의 탄생부터 인간의 출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이미 고전이며, 빌 게이츠가 지원한다는 빅 히스토리프로젝트는 우주적 관점에서 과학과 역사를 통합한다고 말하며,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책의 맨 앞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 연대표가 들어 있다.

 

135억 년 전 물질과 에너지 등장. 물리학의 시작.

원자와 분자 등장. 화학 시작.

45억 년 전 지구 행성 형성

38억 년 전 생명체 등장. 생물학 시작.

6백만 년 전 인간과 침팬지의 마지막 공통 조상.

2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모 속진화. 최초의 석기 사용.

....

 

 

   끝으로 우리는 비고츠키를 읽으면서 항상 총체적 발달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비고츠키에 있어서 이 총체적 발달은 어린이의 인격세계관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의식 발달로서의 인격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의식 발달로서의 세계관이다. 이 둘 조차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린이 자신의 인격은 환경을 통해 발달하며, 어린이는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발달된 의식을 통해 능동적으로 환경에 적응하고 더 나아가 환경을 변화시킨다. 이 거대한 발달 과정을 인류 발달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 계통발생이나 사회발생이라면, 이를 어린이 발달에서 바라보는 것이 교육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개체발생이다. 인간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려면 이러한 발생적 접근은 필수적이며, 비고츠키의 발생적 접근은 그의 철학과 방법론에 기반한다. 우리는 이를 이해하고 비고츠키를 읽음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과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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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9 78-특집] 교육혁명의 의의와 현 시기(2020~2022) 과제. file 진보교육 2020.11.15 71
1318 78-특집] 미래교육 大戰이 시작되다 file 진보교육 2020.11.15 64
1317 <기고> 저출생/고령화 시대와 교육의 변화 file 진보교육 2020.11.15 90
1316 <번역> 심리학에서 도구적 방법 file 진보교육 2020.11.15 196
1315 78-담론과 문화> 결정론적 세계관의 기초 : F=ma 이해하기 file 진보교육 2020.11.15 88
1314 78-담론과 문화> 탈감정사회 감정 없는 인물들 file 진보교육 2020.11.15 166
1313 78-담론과 문화> 안녕, 클리토리스!^^ file 진보교육 2020.11.15 99568
1312 78-담론과 문화> 뽕짝 권하는 사회 file 진보교육 2020.11.15 91
1311 78-담론과 문화> ‘싹 없는 진보’가 타산지석 file 진보교육 2020.11.15 63
1310 78- 담론과 문화> ‘올해 읽을 시 여섯 편과 11월 읽는 시 한 편’ file 진보교육 2020.11.15 64
1309 [만평] 9화-코로나19 일기 '97년생 김교사' file 진보교육 2020.11.15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