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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아이가 공부 못하는 것은 나를 닮아서다?

 

이성우(구미사곡초)

 

자녀의 학업성취에 남달리 욕심이 많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자녀를 제가 담임하고 있었는데 아이는 기초학습력이 부진해서 어머니가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학업성적을 둘러싸고 아이도 어머니도 스트레스 속에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집 아이가 이웃집 아이들보다 공부를 못해서 속상했고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우울했습니다. 급기야 아이는 쪽지 시험에서 친구의 답을 훔치는 일탈을 범했습니다. 아이를 벌하기보다 안타까운 마음에서 어머님을 소환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마침내 어머니는 자신의 과욕으로 아이를 힘들게 한 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고해성사하듯 내뱉으셨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나를 닮아서입니다. 학창 시절 내가 공부를 잘 못해서 아이만큼은 잘하기를 바랐는데 결국 아이의 머리가 내 머리의 한계를 못 뛰어넘었습니다!”

 

늦으나마 아이의 학업성적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하기로 마음을 바꾸신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에 저도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아이는 다른 면에서 장점이 많으니 잘 키워보자는 격려로 화답했습니다. 하지만, 내심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부모를 닮아서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 하는 아이는 부모를 닮아서 잘하고 못 하는 것일까요? 누구나 이런 문제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이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대개 그렇다로 모아질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게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개인의 지적 성장을 좌우하는 요인에 관해 유전이냐 환경이냐?”하는 문제는 발달심리학의 오랜 이슈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고전적인 입장으로 생득주의nativism는 유전적 요인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반면, 행동주의behaviorism는 유전의 영향을 무시하고 환경의 중요성을 절대화합니다. 오늘날 이 양극단의 두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현재 지배적인 학설은 발달을 유전과 환경의 함수관계D=f(H*E) Development발달, Heredity유전, Environment환경로 보는 상호작용론입니다.

비고츠키 이론도 굳이 분류를 하자면 상호작용론에 속합니다. 하지만, 비고츠키가 여느 상호작용론자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가 환경의 문화적 측면을 중요시하는 점입니다. 비고츠키 이론에서 핵심 키워드 중의 하나가 정신도구입니다. 인간은 도구의 사용을 통해 동물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도구에는 기술도구technological tool와 정신도구psychological tool가 있습니다. 기술도구가 인간의 물질적 삶을 변화시켰듯이 정신도구는 정신 역량을 발전시켰습니다. 비고츠키는 정신도구의 예로서 언어, 다양한 수와 셈하기, 기억술, 대수적 상징, 예술 작품, 쓰기, 도식, 다이어그램, 지도, 청사진, 모든 전통적 기호 등을 들었는데C. Ratner et al., 비고츠키와 마르크스, 이성우 옮김, 살림터(2020), p.255, 이것 외에도 인간의 정신 작용을 돕는 모든 매개물은 정신도구에 해당합니다.

비고츠키는 타고난 본능에 의존하는 동물의 기초정신기능과 비교되는 인간의 탁월한 고등정신기능이 정신도구의 사용에 기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비고츠키는 자신이 이중자극 방법이라 일컬은 실험을 통해 이 이치를 논증했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피험자는 두 경로를 통해 자극(S)에 반응(R)합니다. 하나는 자극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것(R S)이고 다른 하나는 보조물(X)에 매개된 반응(R X S)입니다. 보조물 또한 자극이기 때문에 피험자는 두 가지 자극에 이중적으로 반응하는 겁니다. 여기서 어떤 낱말(S)을 기억하는 반응(R)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낱말을 직접적으로 기억하는 경로인 (R S)는 내적 기억 능력과 관계있고, 보조물을 활용하여 기억하는 경로 (R X S)는 외적으로 매개된 기억입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6183819644662558299_120.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16pixel, 세로 282pixel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겠죠? 이해를 돕기 위해 비고츠키의 동료이자 제자인 레온티예프W. Leontiev와 루리아A. Luria가 각각 수행한 실험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1931, 레온티예프는 4세 아동부터 28세 성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기억력을 테스트하는 두 차례의 실험을 했습니다. 1차 실험에서는 피험자에게 15개의 낱말을 읽어준 뒤 기억하게 했습니다. 2차 실험에서는 또 다른 15개 낱말들을 기억하게 하는데, 외적 기억 보조물로 이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그림이 있는 카드를 제공했습니다. 낱말을 들었을 때 해당하는 그림카드를 활용함으로써 낱말을 회상하기 쉽도록 한 것입니다.

실험 결과에서 4~5세 사이의 아동은 1차 실험과 2차 실험 모두에서 낮은 회상 능력(2~3개 낱말)을 보였습니다. 카드를 사용한 2차 실험에서는 1차 때보다 33% 증가했는데, 이 미미한 증가율은 아이들이 외적 기억 보조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음을 방증합니다. 비고츠키의 표현을 빌리면, 4~5세 아이들의 기억력은 선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성인의 회상 능력도 4~5세 아이들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물론 두 차례 실험에서 성인의 기억력은 유치원 아이들보다 훨씬 나았지만, 카드를 사용한 2차 실험의 결과는 1차 때보다 그저 약간 향상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인은 이미 내적 정신도구(기억술)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외적 기억 보조물이 회상 능력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1차와 2차 결과의 유의미한 차이는 7~12세 아동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이 아이들은 카드를 사용한 2차 실험에서 1차 때에 비해 93%가 늘어난 회상 능력을 보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기억할 낱말마다 해당하는 그림을 선택하고서 낱말과 그림 사이에 의미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를테면 극장이라는 낱말을 기억하기 위해 한 아이는 해변에 있는 게 그림을 선택하고선 게는 해변에 앉아서 물 밑에 있는 예쁜 돌들을 보고 있습니다. 게에겐 이게 극장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연령대의 아이들은 아직 자신의 기억을 매개할 효율적인 내적 정신도구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성인들이 제공하는 기억 작용을 돕는 보조물(외적 정신도구)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Karpov, 앞의 책, pp.35-37

 

루리아 또한 비슷한 맥락의 흥미 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상이한 두 연령집단(5~7세 아동과 11~13세 아동)을 대상으로 했는데 각각의 집단 속에 일란성 쌍생아와 이란성 쌍생아를 똑같은 인원수로 배치했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1차 실험에서는 모양이 다른 34개의 도형을 보여준 뒤에 9개의 도형 가운데 앞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도형을 골라내게 했습니다. 2차 실험은 앞의 레온티예프와 유사한 방식으로 낱말카드를 활용하여 15개의 낱말을 기억해내는 능력을 측정하였습니다. 1차 실험은 피험자의 선천적 기억력을, 2차 실험은 보조물에 매개된 기억력을 측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차 실험 결과는 두 집단 모두에서 일란성 쌍생아가 이란성 쌍생아보다 3배 유사한 기억 역량을 보였습니다. 이는 선천적 기억력은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반면, 2차 실험에서는 5~7세 아동 집단과 11~13세 아동 집단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5~7세 아동의 경우는 일란성 쌍생아가 이란성 쌍생아보다 2.3배 비슷한 기억 역량을 보인 반면 11~13세 아동은 두 쌍생아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 같은 결과는, 5~7세 아동의 경우는 아직 선천적인 기억력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외적 보조물이 별 도움이 못됐지만, 11~13세 아동은 정신도구를 활용할 수 있어서 유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음을 뜻합니다.Karpov, Vygotsky for Educators, 2014, p.205

 

레온티예프와 루리아의 연구 결과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고츠키의 주장이 옳음을 입증해주었습니다.

1) 선천적 기억력과 고등정신과정으로서의 기억력 발달은 그 기원이 다르며, 상이한 메커니즘과 상이한 발달 법칙에 따른다는 것

2) 기억력의 발달은 선천적인 기억에서 시작하여 외적 보조물에 매개된 기억을 경유하여 내적 정신도구에 매개된 기억으로 나아간다는 것

 

1)에서 선천적 기억력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억력으로서 시쳇말로 부모를 닮아서 아이의 머리가 좋으니 안 좋으니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고등정신과정으로서의 기억력이란 후천적으로 계발된 기억력입니다.

2)에서 외적 보조물에 매개된 기억(이것은 앞의 고등정신과정으로서의 기억력과 같은 겁니다)을 경유하여 내적 정신도구로 매개된 기억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처음에는 보조물의 도움을 받아 기억을 하지만 나중에는 보조물 없이 기억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아이들이 ‘3+2=5’를 익힐 때 처음에는 손가락이나 바둑알(외적 정신도구)을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하지만 나중에는 암산(내적 정신도구)으로 계산할 수 있게 되는 이치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정신도구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내적 정신도구 단계로 건너 뛸 수는 없는 점이니, 이는 후천적인 학습 혹은 교육의 중요성을 시사합니다. 결국, 1)2)는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유전적인 영향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정신도구 활용 능력을 기르면 선천적인 핸디캡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인지발달은 유전과 환경 둘 다의 영향을 받는다는 상호작용론을 막연히 신봉하면서도, 우리의 관점은 은연중에 생득주의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이 글 서두에서 말한 어머님은 물론이고 교사인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비고츠키의 문화역사이론을 알고 난 뒤로는 저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교육자에게 이론 공부가 그만큼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개인의 정신과정 발달에서 유전적 요인보다 문화역사적 환경의 요인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간단한 예로 우리와 우리 부모님의 삶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유전적 요인이 중요하다면, 같은 세대 내의 개인 간에는 차이가 있어도 세대 간의 차이는 없거나 극히 미미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정신과정이 발달한(머리가 좋은) 가계의 후손 A와 그렇지 않은 가계의 후손 B 사이의 차이는 있어도, A와 그의 부모 사이의 차이는 거의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BA보다는 둔해도 A의 부모님보다는 훨씬 똑똑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를테면, 정치적 이슈를 비롯한 어떤 일상적 주제(이혼이나 성평등 따위의 문제)에 대해 부모님과 대화를 하면 도무지 이성적인 토론이 불가능한 것은 왜일까요? 나는 멀쩡한데 나의 부모님은 왜 이렇게 사고가 콱 막힌 걸까요? 그것은 유전적인 문제가 아닌 문화적 경험의 차이라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같은 세대 내의 AB 사이에도 문화 환경에 따라 유전에 따른 결과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습니다. 관련해서, 일란성 쌍생아를 각기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을 때 인지발달 수준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는 많은 연구결과가 있죠.

그리고 비슷한 문화적 환경이라 하더라도 문화적 자극의 투입 방식(양육방식)에 따라 아동의 지적 성장 수준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부모의 교육적 식견이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아동의 인지발달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유아는 낱말에 관심을 품기보다는 사물에 관심을 품습니다. 요컨대 사물을 매개로 세계를 인식해가는데, 아이가 장난감 토끼를 향해 손을 뻗을 때 그냥 쥐여 주는 부모와 아이의 ZPD를 고려하여 서서히 토끼라고 발음하게 유도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의 지적 발달 수준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끝으로, 교사나 부모에게 생득주의적 관점이 해악한 보다 중요한 이유를 말하면서 글을 정리하겠습니다. 언젠가 특수반 담당교사로 한 해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어쩐 일인지 학교에 특수교사가 발령받지 않아 얼떨결에 제가 맡게 되었는데, 지적 역량이 결핍된 2학년 아이에게 1년 내도록 ‘3+2=5’라는 것밖에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아이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보려고 애태웠지만 그 벽을 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나의 교육열정이 좌절될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그래, 이게 아이의 한계다라는 자기최면이 찾아들었습니다.

14년 전의 일이지만 아이의 얼굴과 이름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비고츠키를 공부하면서 가끔씩 2+3=5를 놓고 아이와 씨름하던 그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지적으로 아이도 무능했지만 교육적으로 제가 더욱 무능했습니다. 더욱 나빴던 것은 아이의 무능을 나의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태만을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이에겐 어떠한 효율적인 문화자극을 투입하더라도 별로 나아질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비고츠키를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이에게 죄를 덜 지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사든 부모든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덜 갖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하며 자기 정신세계 속의 식민지를 혁파해 가야 한다는 외람된 말씀을 조심스레 덧붙이며 장황한 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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