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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 담론과 문화> 전문가바보

2020.05.13 00:50

진보교육 조회 수:95

전문가바보

 

이성우(구미 도량초)

 

바보 혹은 백치를 뜻하는 영단어 ‘idiot’의 어원이 흥미롭다. “바보 같이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을 뜻하는 이 낱말은 그리스어에서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공동체의 문제 즉 정치에 대한 관심이 자유 시민의 중요한 자질로 생각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사회적 문제에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을 비하하는 용어로 ‘Idiotes(ΙΔΙΩΤΕΣ)’가 생겨났다. 이 낱말은 자기라는 뜻의 ‘idios’에서 유래한다고 하니, 결국 ‘백치(idiot)’는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을 지칭하는 경멸조의 말이 그 기원이라 하겠다.

이 말이 독일로 건너가서는 ‘Fachidiot’라는 단어를 파생시켰다. 독일어로 Fach는 ‘특별한 분야’, 혹은 ‘전문 분야’라는 뜻이고, idiot는 영단어 의미 그대로 ‘바보’이다. 따라서 Fachidiot는 “어떤 한 분야에만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나머지 분야에는 무지한 사람”을 일컫는 ‘전문가 바보’라는 의미의 말이다. 공교롭게도 일본어에도 ‘전문가 바보’라는 어휘가 똑같이 존재한다. 센몬바까専門バカ.

 

전문가바보라는 말은 ‘따뜻한 얼음’이란 수사처럼 형용모순을 이룬다. 문제는, 이 어처구니없는 역설이 현실 속에서 비극적으로 작용하는 점이다. 세상살이에는 무관심하고 인문학적 소양이나 정치적 식견이 백지 상태인 전문가의 전문성이 사회적으로 높은 권위를 얻을수록 그는 사회를 망칠 가능성이 많다.

그 전형으로 명문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공안검사가 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독재정권 치하에 이들은 민주투사들에게 고문을 해서라도 운동세력을 일망타진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이들의 빗나간 애국심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들 가운데는 그 고고한 전문성에 따른 권위의 날개를 달고서 검찰총장을 지낸 뒤 보수정당에서 지도자가 된 경우가 많다. 박근혜더러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라 하는가 하면, 이들 입에서 나오는 정치적 수사라곤 종북타령 뿐이다. “한 인간이 구사하는 어휘는 인간의식의 소우주”라는 비고츠키의 말에 비추어볼 때, 이들에게선 도무지 지성을 엿볼 수 없다.

이 나라 최고의 명문 법대를 나온 이러한 인물들이 전문가바보가 된 인과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공부라는 것이 학문적 소양보다는 입신을 위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사회에서 시험점수와 지성의 깊이 사이에는 별 상관이 없다. 치열한 생존경쟁사회에서 학생들은 돈 되는 공부에만 충실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외면한다. 법대생들은 사법고시 패스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법철학 따위의 강좌에는 수강신청을 기피하는 것이 현실이다. 진정한 법관의 자질은 철학에 있으련만, 우리 사회에서 그늘진 곳에 있는 이웃의 아픔에는 눈을 감고 법조문만 달달 외우는 이들은 법전문가바보가 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우리 교사들 또한 전문가바보로 전락할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혹 우리는 사회모순에 대한 고민은 없이 그저 현란한 수업기술로 학생들의 성적을 잘 올려주면 그만이라는 사고에 매몰돼 있지는 않은가? 이런 오류와 관련하여 비판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가 제기한 의미심장한 담론이 눈길을 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교사를 볼 때마다 슬퍼집니다.

“나는 수학을 가르칩니다. 수학은 나의 꿈입니다.”

아닙니다. 수학 자체가 교사의 꿈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수학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차별이 줄어들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된 꿈, 우리의 근본적인 꿈은 수학이 아닙니다. 수학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가치를 위해 쓰여야 합니다. 우리는 수학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길 원합니다.

- Paulo Freire, [Pedagogy of Solidarity]에서 인용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인인 정치제도를 말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시민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정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하는 태도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시민을 노예와 대비되는 의미로 ‘자유인’으로 규정했다. ‘idiot’란 말은 자유인이면서 공동체의 문제에 무관심한 부류를 일컬었을 것이다. 독일어적 의미의 ‘전문가 바보’ 혹은 그리스어 의미로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시민들은 정치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의 문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 교사들도 나눗셈만 잘 가르칠 것이 아니라 나눔에 대한 문제를 학생들과 함께 고민해가는 희망의 교육공동체를 경작해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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