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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담론과문화] 눈동자의 사랑과 정치 - 문학 산책 1

2015.01.12 16:08

진보교육 조회 수:283

[담론과 문화]3. 눈동자의 사랑과 정치


문학 산책 1
- 동아시아의 옛 책을 뒤적이며

눈동자(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


                                옛 소설들

  삼국지 : 3 세기 때 위촉오魏蜀吳 세 나라의 역사를 담고 있다. 거대 통일 제국인 진[秦: 기원전 221~기원전 206]과 한[漢: 기원전 206~기원후 220]이 무너진 뒤 위촉오 3국이 40여년 간 동아시아 대륙을 할거하다가 세 나라도 무너지고 진晉나라가 새로 들어섰다. 소설 삼국지는 진晉의 사관史官 진수가 지은 역사책 ‘삼국지’에다 민중 사이에 떠돌던 이야기, 곧 야사野史가 덧보태진 것이다. 소설의 모양새를 갖춘 ‘삼국지 통속연의’는 명나라 초기[14세기말] 나관중의 작품이다.
  삼국지는 처음에는 책으로 읽었던 것이 아니다. 송나라[960~1279]때 큰 도시에는 전문 이야기꾼이 있었다. 이야기책을 넘겨가며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긴박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노래도 섞어 불렀다. 책 위에는 그림이, 아래에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어른을 졸라 돈 몇 푼을 쥐고 모여든 아이들은 이야기꾼의 사설辭說에 귀 기울이며 울고 웃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원나라[1260~1368] 때는 잡극[雜劇]으로도 공연됐다. 이야기꾼이 소설책보다 먼저 등장한 패턴은 한국이든 유럽이든 다 마찬가지였다.
  삼국지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던 이야기였다. 근대 이전의 문명은 중국 것, 한국 것이 나뉘어져 있지 않았다. 사대주의[事大主義]라는 말은 신중하게 한정해서 써야 한다. 요즘의 한류韓流 열풍도 꼭 ‘한국의 것’이라는 관점으로 볼 일이 아니다.  
동아시아인 중에 그 주인공 유비와 조조와 제갈량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한국에서도 이문열이 다듬어 옮긴 ‘삼국지’가 무려 120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500만 부 넘게 팔렸고, ‘장길산’이나 ‘소설 동의보감’이 그 뒤를 이었다. 이문열은 유비를 편애했던 기존의 삼국지와 달리, 조조를 좀더 추켜세웠다.
요즘 영화 중에 천만 관객을 넘기는 것이 심심찮게 나온다지만 똑같은 ‘천만’이라 해도 그 무게가 다르다. 영화는 잠깐[2시간쯤] 빠져 들었다가 잊어버리는 것이지만 소설이 주는 기억은 오래오래 남는다. 학교 근처에도 가지 않은 대다수 옛 민중에게는 삼국지가 [세상일에 관해서 유일하게 얻어듣는] 일종의 교과서였다. 심지어 옛 군인들에게는 필독의 군사 교과서이기도 했다. 이것과 무게를 견줄 유럽의 교과서로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뿐이다.

  삼국지의 기본 대립구도는 한나라에서 실권을 움켜쥔 조조와 한나라 왕족의 후예 유비의 대립이다. 동아시아인 대부분이 유비를 심정적으로 편들었던 것을 반영하여 유비를 어질고 의로운 인물로, 조조를 사리[私利]를 앞세운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로 그렸다. 옛 동아시아의 제자백가[諸子百家] 가운데 법가가 진秦나라의 지배이념이 됐다가 사그라들고 한漢나라에 와서 유가[유교]가 지배이념으로 올라선 것을 반영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위나라[조조와 조비]의 힘이 훨씬 컸고 사실상 위나라로 통일됐으니 소설 삼국지는 충[忠]의 유교 이데올로기로 윤색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셈이다. 요즘 동아시아인들에게 충효의 이념이 뿌리깊게 남아있다면 그렇게 된 데에는 삼국지의 공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민중은 인의 仁義를 공자 맹자의 말씀을 통해 배웠다기보다 유비와 관우의 이야기를 통해 배운 셈이다.
  삼국지는 주요 인물들의 개성이 살아 있는 인간 드라마다. 경극 [京劇: 중국식 오페라]에서 관우 역할을 맡는 배우는 얼굴에 대춧빛 붉은 색을 온통 칠한다. 군주에 대한 충성과 의리로 들끓는 뜨거운 피를 나타낸다. 장비는 검은색 분장으로 표현된다. 곧이곧대로 제 감정을 드러내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캐릭터다. 이와 달리 조조는 흰색 얼굴로 표현된다. 이해타산에 밝은 교활한 캐릭터!
  한편 삼국지에는 갖가지 역사와 문화와 지리가 백과사전처럼 소개돼 있다. 문관[제갈량]과 무관[관우, 장비]들이 갈등한 이야기나 제갈량이 장수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줘서 지금의 윈난성 일대인 남만을 정벌한 이야기[고향음식 만두를 배불리 먹고 원정군이 힘을 냈단다], 기후와 지리에 밝은 제갈량이 적벽 대전에서 동남풍을 이용해 조조군을 무찌른 이야기 등등. 삼국지에는 ‘삼고초려’‘읍참마속’‘도원 결의’‘식자우환’‘계륵’‘백미’‘수어지교’ 등의 고사성어가 나온다.  
적토마의 주인이 잇따라 바뀐 얘기는 말이 고대의 전쟁에서 차지한 비중을 말해준다. 이 글은 ‘휴머니스트’사가 펴낸 ‘세계의 고전을 읽는다 1’을 많이 참고했다.

  조조는 어떻게 평가돼야 하는가? 그가 살았던 시대에도 영웅과 간웅[간사한 영웅]으로 평가가 엇갈렸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능력이 뛰어났다. 군사력을 뒷받침할 둔전屯田 제도를 들여왔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았다. 군사 지략가로서나 문학가로서 두루 재능을 발휘했다. 당나라와 북송[北宋] 때에는 나라를 통일해낸 영웅으로 칭송한 반면, 남송의 지배층은 그를 ‘간웅’으로 여겼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에 밀려서 남쪽으로 밀려난 탓에 자기들 처지를 한나라 왕족의 후예이면서도 변방에 밀려나 있는 촉나라 왕실과 동일시했다. 이런 동일시同一視 감정은 몽고족의 원나라 통치를 받던 한족漢族들에게 이어져 지금과 같은 ‘삼국지’를 탄생케 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조조는 다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그를 간웅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봉건 왕조의 정통성을 따지는 반동적인 생각”이라고 마오쩌둥이 비판했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 봐야 할까? 나관중의 소설책이 조조를 편파적으로 깎아내린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관중의 삼국지보다는 이문열이 다소 고쳐쓴 삼국지가 그나마 더 낫다. 공자의 ‘유가’뿐 아니라 관중과 한비자의 ‘법가’도 존중돼야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더 근본적이다. 인류가 계몽의 시대를 거쳐온 지금, 우리가 ‘[건국의] 영웅이냐, 간웅이냐’를 따져 물을 때인가? 중국공산당을 이끈 마오쩌둥[1893~1976]의 시대만 하더라도 그런 질문이 얼마쯤 필요할 때이긴 했다. 그들의 먼 꿈이야 ‘국가 자체가 사그러드는 유토피아’라 해도 당면 과제는 봉건적[반동적] 세력에 맞서 민중이 주도하는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봉건 왕국의 옛 나라든, 민주 공화국의 새 나라든 나라를 세우는 일이 눈앞의 과업인 때가 아니다. 민중이 어떻게 해야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느냐를 따져 물어야 할 시대다. 세상이 크게 달라졌는데 옛날 노래를 듣고 앉아 있어서는 사람이 바보 되기 십상이다. 우리 대다수가 세상 경영에 나서야 할 때에, 영웅을 찬미하고 있으라구?
  그러니까 냉정히 말하자면 ‘삼국지’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꼭 읽기를 권할 권장도서는 못 된다. 그것이 많이 읽힌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역동적으로 나아갈 징조가 되지 못한다. 물론 옛 역사가 풍부하게 담겨 있는 그 책을 읽고서 사람들이 배우는 바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까닭은 없고, 굳이 ‘읽지 마라’고 금을 그을 것도 없다. “옛 사람들은 이렇게 충효의 정서가 지극했구나!”하는 앎을 얻는 것도 유익한 공부이기는 하다. 하지만 꼭 삼국지를 읽어야 옛 역사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수호지 : ‘삼국지 통속연의’에 버금갈 만큼 동아시아인들의 인기를 누린 소설이다. 북송北宋[960~1127] 때 일어난 ‘송강의 난亂’과 관련돼 전해오는 갖가지 이야기를 14세기 중반[=원말 명초] 시내암이 예술적으로 각색했고[꾸몄고] 나관중이 더 다듬어서 펴냈다. 옛 소설이 다 그렇듯이 이것도 판본이 갖가지다.
  수호지는 양산박[산뚱성 지닝시 양산현에 있는 습지]에 똬리를 튼 도적떼의 이야기다.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 무려 108명이나 등장한다. 뒷골목 주먹패이거나 땡초[땡땡이 중]이거나 벼슬아치라 해도 죄를 짓거나 모함을 받아 도망쳤으니 너나없이 기성질서에서 비껴나 있는 사람들이다. 글줄이나 읽은 놈이든 아니든 다 자기 처지에 불만을 품고, 사회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다. 수호지가 큰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이런 아웃사이더들에게 공감하는 민중이 무척 많았다는 얘기다.
  그들을 ‘의적[의로운 도적]’이라 일컫기는 조심스럽다. 세상을 어찌 바꾸겠다는 목표도 없고, 오히려 남의 재물을 빼앗아 제 욕심을 채우거나 여인네를 겁탈하기도 하는 등 부도덕한 모습도 보인다. 아무튼 호탕하고 배포 있게 살아가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민중에게 큰 호감으로 다가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얘기에 달려들어 갖가지 복잡한 판본을 만들어냈다.
  수호전은 결국 도적의 무리들이 황제의 품으로 귀순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봉건사회에 대한 저항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소설이 앞서나갈 수 없었다. 어느 소설이든 결말은 왕에게 고개 숙이는 것으로 끝났다. 근대 소설에 와서야 여러 다른 결말이 선보였다.
여러 판본 가운데는 그러고서 그들이 오랑캐나 반란의 무리와 싸우는 것으로 이야기를 이어간 것도 있는데 그 결말은 문학적으로 의미가 없다. 지배층에 복속해서 살아가던 민중이 그 질서를 벗어나 ‘능동적인 존재’로 바뀌는 한에서만 그 이야기가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수호전을 만든 작가들은 두 부류로 봐야 한다. 그 주인공들을 억척스럽고 배포 큰 싸움꾼들로 그려낸 작가들은 기존 현실에 무슨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이야기에는 그 꿈이 깃들어 있다. 또다른 부류는 이 얘기를 근사한 예술작품으로 각색해서 책으로 엮어낸 이름 있는 작가들인데 작가 시내암과 나관중은 기성 사회의 지배이념을 단단히 받아들이고 있다. 기성 질서를 뒤흔드는 얘기로 결말을 맺었다가는 지배층의 비위를 건드려서 문자옥[붓을 잘못 놀려 탄압 받는 것]에 시달릴 수 있다. 그 사회는 지배층의 탄압을 이겨낼 만큼 탄탄한 시민계층이 형성돼 있지 못한 사회였다. 그러니까 수호전에는 민중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대목과 충의忠義 이데올로기를 확인하는 대목, 이 두 상반된 얘기가 뒤섞여 있는 셈이다. 삼국지가 7할이 사실이라면 수호지는 사실이 3할, 허구가 7할이 된다.

  수호지는 한국과 유럽의 여러 소설과 견줘볼 필요가 있다. 우선 홍길동전! 조선왕조 연산군때[1500년 무렵] 실제로 관군에게 붙들려 처형당한 화적火賊 홍길동 이야기를 100년 뒤 허균이 대감댁 서얼[서자] 얘기로 각색해서 홍길동전[첫 한글소설]을 써냈다. 조선조 때 괄괄한 젊은이들에게는 실제 인물 ‘홍길동’이 그들의 역할[롤] 모델이었다. 요즘도 은행에 가 보면 입금 서식을 견본으로 써놓은 것에 성명 항목이 ‘홍길동’으로 되어 있다. 한국인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숙한 한국인 이름이 ‘홍길동’이라 여겨서 그렇게 적었을 것이다.
  허균은 실제로 서얼 출신들과 가까이 지내 그들의 설움을 잘 알았다. 그런데 수호지가 여러 도적떼의 형상을 핍진하게 그려낸 반면, 홍길동전은 주인공 한 사람 얘기뿐이다. 도적떼의 인생보다는 대감댁 서자가 겪는 설움 얘기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활빈당’이라는 반란의 이념을 제시한 것이야 소중한[근대적인] 생각의 싹이라 해도, 그 반란 주체들을 문학적 형상으로서 핍진하게 그려낸 것은 못 된다는 얘기다.
  영국에는 13세기초부터 로빈후드 얘기가 갖가지 판본으로 전해 왔다. 그는 무법자 또는 부랑자의 대명사가 됐다. 대중문화에서는 그가 노팅엄셔의 셔우드 숲에 여러 무리와 함께 사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중세때는 누구든 지배세력의 울타리를 벗어나 살아간 사람을 로빈후드라고 이름 붙였던 것 같다. 그 얘기가 여러 신화나 민담, 시와 희곡에 등장하지만 수호지처럼 자세한 이야기로 나타낸 작품은 없다. 수호지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봉건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은 아니었다.
  독일의 쉴러는 프랑스혁명 직전[1781년] ‘군도[도적떼]’라는 희곡을 써냈다. 줄거리는 이렇다. 영주의 아들 칼은 동생 프란츠가 자기를 아버지에게 모함하자 집을 떠났다. 주먹패들과 어울리다 보니 산적 두목이 됐고, 똑똑한 머리로 영주의 군대를 무찌른다. 프란츠가 아비를 가둬두고 새 영주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비를 구출하지만 여러 영주들의 공격을 받고 부하들과 약혼녀를 잃은 뒤 결국 나라에 자수自首한다.
  이 희곡도 수호지보다는 홍길동전과 더 비슷하다. 여러 도적떼는 뒷전의 인물들이고 영주의 아들이 주로 부각된다. 그런데 길동이가 아비 및 기성사회와 화해하고 율도국으로 떠나 행복한 결말을 맞은 반면, 칼은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  
  쉴러는 장 자크 루소의 민주 혁명사상이 널리 퍼진 변혁의 시대를 살았다. 기성사회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높은 벼슬아치를 지낸] 허균보다 훨씬 컸다. 도적떼의 대장이 된 칼은 쉴러의 ‘상상 속 주체[곧 문학적 분신]’이다. 이 희곡을 발표하고서 자기의 주군[곧 영주]에게 미움을 사서 집필금지 명령을 받고는 달아나서 숨어 살았다. 이 희곡은 새 시대를 그리는 청년들의 열광을 표현한 질풍노도[Sturm und Drang] 문학운동을 대표하는 작품이 됐다.  
  도적떼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로는 홍명희의 대하[大河] 소설 ‘임꺽정’을 꼽는다. 이 소설은 식민지시절 10여 년간 신문에 연재돼 큰 인기를 누렸다. 임꺽정은 백정 출신의 청석골 화적패 우두머리로서 1559~1562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군과 싸우다 붙들려 죽임을 당했다. 홍명희의 소설에는 황천왕동이, 배돌석, 곽오주를 비롯해 일곱 두령이 나온다. 수호지의 108두령에 견주면 소품[小品]이지만 그 일곱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살아 있었음직한 사실적인 인물들로 그려졌다.
  홍명희는 허균이나 쉴러와 달리 주인공을 그럴싸하게 윤색해서 그리지 않았다. 꺽정이는 의적이 아니라 제 힘자랑을 일삼고, 난봉꾼 노릇까지 일삼는 무식한 놈이다. 민중의 모습을 미화[美化]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그 답답한 봉건사회를 벗어날 길이 가까스로 보인다. 소설 앞대목에는 개혁정치를 꾀한 사대부士大夫 조광조[1482~1520] 얘기가 실려 있기도 하다. 후세 사람들이 개혁군주 정조를 높이 받들었으나 그때 백성에겐 조광조가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율곡도, 퇴계도, 정약용도 기댈 언덕이 돼주지 못했다.
  ‘임꺽정’은 미완성 소설이다. 그런데 결말이 중요하지 않다. 그때 민중의 모습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것이 핵심이다.
  소설 ‘임꺽정’은 숱한 전래 설화와 속담, 민간 풍속 등이 다채롭게 실려 있어 우리 말의 보물창고라는 칭송을 받는다. 최남선의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나 이광수의 소설 ‘무정[無情]’에 보이는 낯선 번역 말투가 아니다. 우리 입말을 살려 구수하게 옛 이야기를 읊었다. 그러니 봉건시대의 민중적 저항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와 우리말을 제대로 배우고 싶은 사람은 수호지와 홍길동전이 아니라 홍명희의 소설을 읽어야 한다.
  1970년대에는 황석영이 ‘장길산’을 펴냈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숙종때[1697년] 여러 해 동안 장길산을 잡지 못해 고민스럽다는 기록이 나온다. 알려진 사실은 그것뿐인데 황석영이 상상력을 발휘해 소설을 지었다. 소설은 황해도 구월산과 금강산을 무대로 한다. 때는 신분사회가 무너지고 상인들이 커가던 시절.
작가는 주인공이 미륵부처가 가져올,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갈 대동[大同] 세상을 꿈꾸는 의적이라고 분명하게 그려냈다. 1970년대 민중이 품은 새 세상에 대한 꿈을 옛 의적에게 의탁하여 그려낸 것이다. 현재를 구원해줄 정신적 유산으로서 과거를 캐냈다.  
  우리는 ‘고전’ 작품이면 꼭 읽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우리가 딴 공부로 바빠서 읽지 못하기는 해도 아무튼 그 독서는 유익하다는 단순한 생각! 하지만 이 선입견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잠깐 칼질해볼 필요가 있다. 충효의 도덕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옛 사람들에게야 유교적 영웅 유비의 삼국지가 두고두고 읽어볼 고전[클래식]이 분명하다. 그러나 충효의 윤리를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현대의 우리에게 삼국지는 꼭 고전이라 못박기 어렵다. 옛 민중의 모습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에게 수호지는 괜찮은 소설이기는 하다. 하지만 시대를 넘어설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수호지가 지금도 고전으로 대접받을 까닭은 없다. 홍길동전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세심한 눈길이 담겨 있기로는 ‘임꺽정’과 ‘장길산’이 한 수 윗길이다.
    
  서유기 : 명나라때[16세기] 오승은이 민간 설화와 구전[口傳] 자료를 모아서 썼다. 7세기에 당나라 승려 현장이 인도의 불교 경전을 얻으려고 17년간 50 개가 넘는 서아시아 나라들을 다니며 겪은 일을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에 남겼는데 ‘서유기’가 이 실화에 토대를 두긴 했어도 그 대부분은 ‘반지의 제왕’ 같은 순전한 판타지의 세계다. 어미 아비도 없이 산봉우리의 돌 알에서 태어난 돌원숭이가 주인공인데 인도 서사시 ‘라마야나’에 나오는 원숭이 얘기를 계승했다. 남송[1127~1279] 때 이야기가 생겨나 원나라[1260~1368] 때는 희곡이 나오고 명나라[1368~1644] 때 소설이 생겨났다. 요즘 소설처럼 작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이 아니라서 얘기가 복잡하고 뒤죽박죽이다.
  손오공은 야성[野性]의 본능이 다스려지지 않은 미개한 존재다. 그러나 결국에는 삼장 법사의 일깨움을 받아 머리를 조이던 쇠테가 사라진다. 파란만장한 서유기는 결국 ‘참 나[=자기]’로 나아가는 자기 수양의 여행길이다. 사오정과 저팔계도 ‘나[자아]’ 속에 있는 또다른 본성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한 사회로서는 야만의 시대로부터 문화의 시대로 옮아가는 여행인 셈이다.

  금병매 : 명나라때 나온 4대 기서奇書의 하나인데 작가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수호지에 나오는 무송과 무대, 반금련이 그대로 나온다. 바람둥이 서문경이 반금련을 만나 첫 눈에 반한다. 둘이 짜고서 무대를 독살한다. 서문경은 돈 많은 과부 맹옥루를 부인으로 맞아 큰 부자가 된다. 친구 부인 이병아와 밀통해서 친구가 울화가 치밀어 죽고, 그 재산까지 다 차지한다. 반금련이 이를 질투해서 그 새로운 첩과 결국에는 서문경까지 죽게 만든다. 그뒤 서문경 집안은 몰락한다.
  반금련의 ‘금련’은 전족[발의 성장을 억지로 막는 짓]을 해서 작아진 여자의 발을 가리킨다. 이런 표현을 비롯해서 이 소설에는 대담한 성적 표현이 무척 많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음서[음탕한 이야기]’로만 여겼다. 그러나 그 선입관을 벗어나 보면 명나라때의 생활상[갖가지 풍속]이 무척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홍루몽 : 삼국지보다 한참 뒤늦게, 18세기 후반에 조설근이 썼다. 주인공 가보옥은 황실 측근으로 부귀영화를 누린 가씨 집안에 태어나 어른들의 총애를 받으며 자란다. 글공부를 싫어한 그는 주변 여성들에게 연민의 정을 쏟았다. 그는 임대옥을 사랑했지만 어른들이 계략을 꾸며 설보차와 혼인을 맺게 된다. 이를 안 대옥이 절망하여 죽고 가보옥도 결국 세상을 훌훌 털고 중이 된다. 한편 악녀 왕희봉이 어른들의 총애를 받아 가씨 집안의 실제 권세를 휘두른다. 돈과 권세를 얻기 위해 그녀는 갖은 수단을 다 부렸으나 흥망은 무상無常하여 결국 고리대금 죄목으로 처벌받고 그와 더불어 집안도 몰락한다.  
  중국에서 붉은 색은 기쁨과 정열과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복을 받아들이는 대문의 색깔도 붉게 칠한다. 홍루는 화려한 귀족집안, 고귀한 규중[집안] 여성이 머무는 집을 가리킨다. 중국과 대만 국기는 둘다 바탕이 ‘붉은 땅’을 가리키는 붉은 색이다. 홍루는 홍진[紅塵: 어지러운 속세]을 뜻하기도 한다. 하늘의 선사仙師는 가보옥의 마음에 욕망의 불길이 솟아난 것을 보고 그를 홍진 세계에 들여보냈다. 즐거움이 끝에 이르러 슬픔이 생기는 한계에 이르면 미련없이 속세를 떠날 것을 다짐 받고서.
  ‘홍루몽’은 여느 소설들과 달리 작가의 개인 삶이 짙게 투영돼 있다. 그의 집안은 청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부친이 일찍 죽고부터 집안이 기울었다. 작가는 꿈처럼 사라진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썼으니 자신의 인생을 그대로 담아낸 셈이다.
  이 소설은 중국 문화의 백과사전이다. 온갖 계층의 인물이 다 나오고, 유불선 儒佛仙 사상이 다 서술돼 있다. 독특한 것은 ‘정情의 세계’를 으뜸으로 돋을새김한 것이다. 1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유럽 열강이 중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자 이에 맞서는 민중 저항이 5.4운동으로 터져 나왔다. 후스[胡適]를 비롯해 중국 지식인들이 이를 이어받아 민중을 일깨우는 백화白話 문화운동을 벌였다. ‘백화’는 민중이 쓰는 입말투 말을 글말로 옮기자는 것. 그들은 ‘홍루몽’처럼 글을 쓰면 언문일치[말하는 대로 글쓰기]가 절로 이뤄진다고 이 소설을 높이 내세웠다.
  근대초기 중국에서는 갖가지 정치적 렌즈를 끼고서 이 소설을 읽는 경향이 심했다. 홍루몽에 ‘청나라를 물리치고 명나라를 되찾자’는 숨은 뜻이 들어 있다고 본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은 홍루몽이 담고 있는 철저한 반봉건 사상과 남녀 평등에 대한 자각을 추켜 세웠다. 임대옥의 반항적 성품과 가보옥의 동정심 등등이 그런 면을 띠고는 있으나 크게 보면 봉건왕조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집안의 이야기다. 마오쩌둥이야 그네들 민중이 애호해온 이야기라 애써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싶었겠지만 우리로서는 그렇게 대단히 추켜줄 작품이 못 된다. 옛 부귀영화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무슨 진취적인 정서는 아니잖은가.
  견줄 소설은 17세기말 김만중이 지은 ‘구운몽九雲夢’이다. 결국 불교 세계에 몸을 의탁한다는 결말은 두 소설이 같지만, 구운몽은 주인공 양소유와 여덟 선녀가 한결같이 행복한 결합을 이뤄낸다는 점에서 사랑의 아픔과 비극을 절절하게 그려낸 홍루몽보다 무게가 덜 나간다. ‘구운몽’의 결말만 건성으로 기억할 경우, ‘주제는 세상 만사의 헛됨을 깨달은 것’이라고 읽기 쉬운데, 그것쯤으로 읽을 바에야 아니 읽는 것만 못하다. 김만중이 그런 교훈을 베풀기 위해 이야기를 지었다고 보기에는, 양소유가 세상에서 입신양명의 욕망을 누리는 이야기가 무척 곡진하다[정성이 지극하다]. 양소유가 늘그막에 가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줄거리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한껏 만끽한 상류 지배층의 위장된 포즈[몸짓]일 가능성이 짙다. 이 소설을 제대로 읽으려면 그런 비판의식을 품고 읽어야 한다.    
  조선 후기[1800년 무렵]에 ‘김려’라는 불우한 문인[文人]이 살았다. 지배층의 비위를 거슬려 북녘땅 함경도 부령에 귀양 갔다가 다시 경상도 진해로 유배지[流配地]를 옮겼다. 부령땅에서 사랑을 나눈 기생 연희를 머나먼 남녘에서 절절히 그리워했다. “그대 무엇을 생각하는가 저 북쪽 바닷가라네 괴상해라 오늘 밤 꿈도 괴이해 연희가 내 손 잡고 눈물 흘리며 한 차례 목이 메다 겨우 하는 말 서방님 묶인 채로 성문 나선 뒤 우물가 앵두나무 살구나무는 벌레가 뿌리 먹어 함께 죽었죠 올 가을 접어들자 홀연 잎이 나더니 손바닥만한 잎이 가지마다 가득해요 서방님도 나무처럼 어서어서 돌아와 이승에서 다시 만나 함께 지내요”
  그의 연작시[連作詩] ‘사유악부’는 민중의 고단한 삶에 대한 연민과 탐관오리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있다. 홍루몽의 세계가 화려한 상류층이 몰락하는 쓸쓸함을 토로한 귀족문학이라면 ‘사유악부’는 사대부 출신의 작가가 민중과 눈높이를 맞추어 그들을 대변하려는 진취적인 정치적 결단이 뒷받침된 문학, 다시 말해 근대 사회혁명의 공감대를 쌓아가는 문학이다. 또 가보옥과 임대옥의 사랑 이야기[홍루몽]보다 늙은 유배객과 밑바닥 관기[官妓]의 사랑 이야기가 훨씬 뭉클하다. 같은 무렵, 같은 유배지 부령에는 [떠나간] 유배객과의 사랑의 추억을 온전히 간직하고 싶었던 어느 기생이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죽도록 곤장을 맞은 실화가 전해 온다. 그 기생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 투쟁했던 것이다. 같은 무렵, 그의 동무 ‘이옥’도 연작시 ‘이언[俚諺]’에서 우리말 속어와 구어[口語]를 능란하게 부려 써서 민중의 삶과 밑바닥 여성들의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웬수의 저 서방 달이 질 때야 돌아오니, [내가] 졸고 있으면 성을 벌컥...”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 이것은 11세기초 일본의 궁녀였던 무라사키시키부가 지은 장편 소설이다. 화려한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남자주인공 히카루겐지[光源氏]의 사랑과 영화[운명], 슬픔과 구원을 그려냈다. 도읍인 쿄토[京都]를 주무대로 70여 년의 세월에 걸쳐 방대한 규모로 펼쳐지는 서사시다. 천 년이 넘게 인기를 끌어 노[能]나 가부키[歌舞伎] 같은 일본의 전통 예능부터 미술과 공예, 음악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을 소재로 삼은 것이 수두룩하다. ‘노’는 14세기에 형성된 일본의 전통연극. 이야기를 암시하는 시각적 외양과 동작으로 주제를 나타낼뿐 이야기연극이 아니다. 16세기말에 생겨난 가부키는 노래와 춤과 무언극, 호화로운 옷이 어우러진 종합연극이다. 배우와 관객이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왕자[王子] 겐지는 계모[부왕의 첩]인 후지츠보와 해서는 안될 사랑을 나눈 탓에 고뇌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거기서 낳은 아들이 천황이 돼서 사실상 천황의 아버지로서 화려한 영화[榮華]도 누린다. 겐지의 또다른 연인 로쿠죠미야슨도코로는 겐지에 대한 집착과 고뇌로 원령[원망을 품고 죽은 영혼]이 됐다. 후지츠보의 조카 무라사키노우에도 겐지의 평생 반려였지만 젊은 온나산노미야가 정실正室이 되자 고독에 빠져든다. 겐지는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근친상간의 죄를 지어서 운명의 복수를 받는다. 정실부인이 딴 남자[가와사기]와 밀통하여 임신한 것이다. 정실부인은 애를 낳은 뒤 출가하고, 가와사기도 죄의식을 못 견뎌 죽는다.
  작가는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만큼은 아니라도] 인간의 애정과 집착이 빚어내는 죄와 운명의 끔찍한 힘을 보여준다. 영혼이 구원받는 문제가 잇따라 나오는데, 겐지는 출가[승려가 되는 길]를 결심하면서도 줄곧 방황한다. 이 소설은 ‘출가해서 구원 받으라’는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다. 구원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속에 사람살이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뜻뿐이다. 당시 귀족들은 일부 다처제 사회라서 여성의 삶은 남자의 사랑에 좌우되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사랑의 고뇌 속에 자기 삶의 주체성을 모색하는 모습들도 이 소설에서 읽어낼 거리다. ‘홍루몽’도 사랑의 아픔과 비극을 그리긴 했으나 ‘겐지 이야기’만큼 사람의 애정과 집착이 빚어낸 어두운 죄와 운명의 그늘을 무게 있게 그려내지는 못했다.  
  
  열녀전[列女傳] : 한[漢]나라의 유향이 지었다. 예수가 탄생할 무렵이었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무척 오래된 전기[傳記] 문학이다.
  이 책은 여러 유형[type]의 여성들의 삶을 소개한 것으로 여성교육의 성스러운[?] 교재로 구실했다. “이러저런 여자들이 살았느니라. 본받을 것 본받고, 교훈 삼을 것은 교훈 삼아라!” 맹자 어머니를 비롯해 모범 어머니와 현명한 아내, 지혜로운 여자, 예[禮]와 정절을 지킨 여자 등등. 한 마디로 ‘현모양처’의 개념은 이 책에서 나왔다. 나라나 집안을 망친 여성도 소개했다. 주로 왕과 제후의 부인들인데 한결같이 강한 성욕의 소유자로 서술돼 있다.  
  유향이 책을 쓴 정치적 의도가 너무 뚜렷했다. 황후와 외척 세력이 활개치는 것을 견제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들 성욕이 강했다’는 서술은 이 여성들이 권력투쟁에 패배한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내건 구실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도 원래는 중립적인 표현[여러 여자들의 전기]인데 사람들이 정치적 표현으로 바꿔서 읽었다. 열녀[烈女], 곧 봉건 윤리에 순종한 여인들의 이야기로!
  똑똑한[대찬] 여자들 얘기도 쬐끔 들어 있다. 조나라 뱃사공의 딸 여연은 ‘여자는 재수 없다’는 속설에 기대어 자신이 노를 젓는 것을 반대한 임금 조간자[趙簡子]에게 반박했다. “옛날 은나라 탕임금이 하나라를 정벌할 때 양 끝의 두 말은 암말이었소.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 좌우 끝의 두 말도 암말이었소. 두 왕은 모두 혁명에 성공했소. 지금 왕께서 여자의 배를 탈 수 없다고 하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조나라의 벼슬아치 필힐이 반란을 일으켜 그 가족도 죽임을 당하게 생겼다. 그의 어미가 왕에게 따져 물었다. “[그를] 잘못 가르친 죄를 묻는 것이라면 그 책임은 주군[主君]에게 있소. 어미는 어릴 때만 책임을 지는 것이오.”
  이 책은 고전으로서 읽을 책이 아니다. ‘고전’이라 일컬어진 것들 중에 얼마나 허튼 것들이 많은지 되새길 때 들춰볼 책이다. 가령 ‘맹모 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작가가 지어낸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오랫동안 억눌린 사람들의 간절한 이야기는 책으로 전해오는 것이 드물다. 그러므로 옛 역사를 ‘책’으로써 알아보려 할 때에는 늘 ‘의심의 해석학’을 동반해야 한다.
    

                              시와 시인

  시경詩經 : 옛 중국의 시 모음집이다. 주나라 초기인 기원전 1100년 무렵부터 춘추시대 중기인 기원전 600년 무렵까지, 500년 동안 창작된 민간 가요와 사대부들의 시, 왕실의 잔치나 종묘 제사를 지낼 때 부른 노래의 가사들이다. 작가는 알 수 없고 계층도 갖가지다. 공자가 백성을 가르칠 목적으로 전래돼온 3천 여 수首 가운데 305편을 추렸다. 백성의 노래인 국풍 國風과 사대부들이 지은 아雅, 송頌으로 되어 있다. ‘풍’은 ‘풍자하다’ ‘풍유[풍자하는 비유]’의 뜻이다. ‘송’은 제사지낼 때 신을 찬양하거나 조상의 은덕을 칭송하는 노래다.
  겉으로는 사랑 노래이지만 속으로 정치적 뜻이 담겨 있는 시도 있다. 이를테면 주나라 문공이 배필을 얻었을 때 그 배필의 후덕함을 노래한 시.
  남녀가 예절을 어기고 몰래 만나 즐기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도 많다. “둘째 도련님, 우리 집 뜰을 넘나들어 우리집 박달나무를 꺾지 마세요. 그것이 아까워서겠어요? 딴 사람들의 말 많음이 두려워요. 도련님도 그립지만 사람들의 말 많음이 또 두려운 걸요.”
  통치자의 포악함을 바람에 빗대 꼬집은 노래도 있다. “북풍은 뼈에 사무치고, 하늘 가득 큰 눈이 내리네. 누가 나와 한 마음이 되랴? 손 잡고 함께 가리라.” 백성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도 풍자했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기장[잡곡의 하나]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견뎌왔건만 너는 나를 돌봐줄 기색이 없구나.” 훗날 조선의 김시습이 그 속편을 썼다. “...어떻게 하면 잔인한 고양이로 한번에 너를 없앨까.”
  돌아가신 부모나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고 애도하는 시도 많다. “무성하게 자랐구나, 지칭개여! 지칭개[좋은 풀]가 아니라 들쑥[잡초]이네. 슬프구나, 우리 부모님! 나를 낳고 고생하셨구나.... 병이 비어있는 것은 오직 항아리의 부끄러움일 뿐이네. 부모 잃은 고독한 백성의 삶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세상 살이의 덧없음을 노래한 시도 있다. “큰 수레를 끌지 마라. 스스로 먼지만 뒤집어 쓰니. 괜한 걱정일랑 하지 마라. 스스로 병만 들게 되니.”
  풀을 노래해서 짤막하나마 울림을 주는 시도 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구나.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공자는 이 시를 군자[바람]가 소인들[풀]을 교화[敎化]하는 이야기로 읽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있겠지만 그 풀이가 너무 협소하다. 20세기 후반에 김수영 시인이 ‘풀’의 심상을 더 적극적으로 읽어서 절창絶唱을 읊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공자는 이 시를 해설하기를, 군자의 덕(통치 행위)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삶)은 풀이라 했다. 공자는 통치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봤고 김수영은 민중의 자리에서 풀과 공감했다.

  시경에 실린 노래들은 그 정서가 단순하고 소박해서 현대인도 쉽게 알아듣는다. 사대부끼리 풍월을 읊느라 민중의 정서에서 멀어져간 훗날의 한문학보다 공감되는 바가 더 크다.
  ‘시경’은 그 뒤로 동아시아 문학의 주된 전거[모범]가 돼 왔다. 한시 漢詩는 그 형식[4언시]을 계승했고 숱한 문인文人이 시경에서 힌트를 얻었다. 가령 ‘경복궁’ 이름이나 유성룡의 ‘징비록’도 시경의 구절을 따왔다. ‘전전긍긍’‘타산지석’‘절차탁마’‘일각여삼추’ 같은 고사성어도 거기서 나왔다.

  
  초사楚辭 : 한나라[기원전 206 ~ 220] 유향이 엮어서 펴낸 초나라의 민요풍 노래인데 그 가운데 굴원[기원전 3세기]이 쓴 시를 으뜸으로 친다. 굴원은 초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재주가 뛰어나 왕의 총애까지 받았으나 시샘하는 견제세력 때문에 밀려났다. 전국戰國 시대에 초나라는 이웃나라에 시달려 사면초가의 처지였는데 왕이 굴원의 충성어린 진언進言을 듣지 않았고 그는 쫓겨나서 멱라강에 빠져 죽었다. 중국의 단오절은 굴원이 멱라강에 빠져죽은 것을 애도하는 데서 유래했다.
훗날의 중국인들은 그를 비운의 애국자로 기렸다. “...굴원의 말 : 머리를 감은 이는 갓 먼지를 털어서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이는 옷을 털어 입는다지. 어찌 결백한 몸에 더러운 것을 입힐 수 있으리오... 어부가 빙그레 웃음 짓더니 삿대를 두드려 뱃머리를 돌리며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을 때라면 갓끈을 씻을 수 있겠네만 창랑의 물이 흐릴 때라면 발이나 씻고 돌아갈 수밖에! 그대로 가서는 다시 말이 없네.”
  ‘초사’는 신화와 주술적인 상상력의 경지를 마음껏 달리는 시들이 많다. ‘원유 遠遊’라는 시에서 주인공은 탕곡 湯谷의 연못에서 머리를 감고 열 개의 태양빛으로 여유롭게 몸을 말린다. 훌쩍 하늘위로 날아올라 온갖 신들과 만나 즐겁게 논다.
  그때 초나라는 신에 대한 제사와 점 치는 행위가 일상문화였다. ‘초사’에도 점을 쳐서 하늘의 뜻을 묻거나 신이 내리는 무속 의례가 잘 나타나 있다. “난초 물에 몸을 씻고 향초 물에 머리 감으니 아름다운 옷차림 꽃송이 같네. 무녀가 운신을 부르니 제단에 머무시며 환한 빛 환하게 비추시네”
  
  도연명의 ‘귀거래사’ : “자, 돌아가자. 고향의 논밭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여지껏 고귀한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하릴없음을 깨달았다...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 그 얼마이리. 어찌 마음을 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럽게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이 시는 13년간에 걸친 관리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드디어 향리[시골]로 돌아가서 이제부터 은자[숨어 사는 자]의 생활로 들어가련다고 다짐하는 이야기다. 여지껏 벼슬아치로 살면서 마음이 형(形=육체)의 역(役=노예)으로 있었던 것을 반성하고, 논밭으로 마음을 돌려 자연과 하나가 되는 생활 속에서만이 진정한 인생의 기쁨을 준다고 단언한다. 영탄적 어조가 강하나, 그려진 자연은 선명하고 청아한 풍이 넘쳐 있다. 짧으면서도 구성과 표현이 가지런하다.
  도연명은 5세기초 송나라 사람으로 동진 東晉이 무너지고 혼란스러운 시절에 유교와 장자 사상을 새기고 닦아서 깨끗한 선비로 살았다. 벼슬 자리를 그만두고서 농사를 짓고 그 감회를 시로 읊어 후세 선비들의 정신적인 귀감[본보기]이 됐다. 장자가 말로 전하려 한 도道를 몸으로 실천한 셈이다. “사람들 사는 곳에 오두막집 엮었으나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이 없다... 동쪽 울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멀리 남산을 본다. 저녁 산그늘이 아름답게 드리울 때 새들과 더불어 돌아간다. 이 가운데 참뜻이 있으니 따져 말하려다가 말을 잊었다.”
  마음이 담담하면 바깥 세계는 자연스레 초월[달관]된다. 내가 바깥 세계와 한 덩어리로 있는 물아일체 物我一體의 경지다. 그는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홀로 선 소나무를 만나게 돼 날개 거두고 멀리서 돌아왔다. 거센 바람에 무성한 나무 없는데 이 그늘만이 남달리 쇠하지 않았다.” 세상 정치에 관심을 끊지 않되 그 관심을 출세의 욕망으로 연결짓지 않았고, 시골에 은둔해 살지만 고상한 신선처럼 행세하지 않았다. 스스로 노동하며 이상향을 꿈꾸었다. 깊은 산속을 찾아갔더니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마을이 나타났는데 세상의 난리를 피해 숨어 사는 사람들이라 했다. 그가 꿈꾼 무릉도원武陵桃源은 그 뒤로 동아시아 사람들이 그린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됐다.
  고려말의 문인文人 이색은 “흰머리 되어 길게 읊조리니 나도 이젠 끝이련가. 문 닫고 그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나 읽으리라.”고 했다. 20 세기의 박두진도 산[도봉]에 파묻혀 살아가는 정취를 노래했다. “산새도 날러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긴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그러나 논밭에서 땀을 흘리며 신명을 느끼는 도연명의 기개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 백 : 8세기 당나라때 사람으로 우리 선조들에게 무척 친숙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그가 술 한 잔 걸치고서 뱃놀이 하던 중에 달을 따보려고 호기를 부리다가 물에 풍덩 빠졌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노래다. 그도 벼슬아치의 삶과 인연이 없었고, 자연 속에서 호방하게 노니는 기쁨을 즐겨 노래했다.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냐 묻길래 웃고 대답 아니해도 마음 절로 한가롭네 복숭아꽃 흐르는 물 아득히 떠가거니 또다른 세상일래, 인간이 아니로세”
  옛 사람들은 꽃 한 송이 피어난 모습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얻었다. ‘풍류風流’의 세계를 이백만큼 멋들어지게 노래한 시인도 많지 않다. “둘이서 술잔을 주고받는데 산꽃이 피네....” “그대여 보게나 황하의 저 물은 천상에서 내려와 세차게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그대여 보게나. 귀한 집 맑은 거울 속을 대하며 백발을 슬퍼하니 아침녘 푸른 실같은 머릿발이 저녁 무렵 흰 눈이 되었네 인생이 뜻대로 될 때 무릇 즐기기를 다할 것이니 황금 술통을 달빛 아래 그대로 두지 말게”
  벼슬에 연연하고 살지 않으니 민중의 삶이 눈에 들어 온다. “약야 냇가의 연蓮밥 따는 아가씨, 노래 부르며 돌아오는 뱃사공을 보고서 웃으며 연꽃 뒤로 숨고는 수줍은 듯 나오지 않네.” “왕소군 옥[玉]안장에 치맛자락 스치며 말에 오르자 붉은 뺨엔 눈물지네 오늘 한나라 궁녀의 몸이 내일 아침 오랑캐 땅 첩의 신세라.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20 세기의 정지용도 모더니즘의 실험을 그만 두고는 도시에서 물러나 고고하게 살아가는 심경을 노래했다.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로 인동 삼긴[인동초를 우려낸]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여 붉고 ... 산중山中에 책력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하지만 이백처럼 소박하고 밝은 얼굴로 주변 세계와 어울리지 못했다. ‘빼앗긴 땅[곧 식민지]’에서는 물러나 유유자적[悠悠自適]할 곳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두 보 : 8세기 당나라때 사람으로 입신양명의 꿈을 포기한 뒤로 민중이 겪는 참혹한 현실을 시로 읊어 후세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지붕 새어서 침상 머리 마른 곳 없고, 빗발은 삼 줄기 같이 그칠 줄 모른다. 난리 겪으며 잠은 적어졌지만 젖은 채로 긴 밤 어찌 새우리오? 어찌하면 천만 칸 큰 집 지어 천하의 가난뱅이 크게 감싸 함께 환한 얼굴 되어서 비바람에도 산처럼 태연할 수 있을까?” 태풍이 불어 지붕이 다 날아간 민중의 동네를 바라다 보며 마음 아파하고 있다.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남았네 성엔 봄이 와서 잡초만이 우거졌네 시절을 느끼매 꽃을 봐도 눈물 나고 이별을 한탄하니 새소리에 마음 놀라네 전쟁과 난리가 석 달이나 계속되니 집안 소식 만금에 값하는 것을. 흰머리 긁을수록 더욱 짧아져 이제는 비녀도 꽂지 못하겠네.”
  “수레는 삐걱삐걱 말은 힝힝 우는데 출정하는 군인들 허리에 활을 찼네 부모 처자 달려나와 전송하느라 자욱한 먼지 일어 함양교도 뵈지 않네 옷 붙들고 넘어지다 길을 막고 통곡하니 통곡소리 곧장 올라 하늘에 사무친다...”
  “저물어 석호촌에 묵어 자는데 한밤에도 관리는 사람을 붙잡누나 늙은이 담 넘어 도망가고 늙은 아낙 문에 나와 내어다보네 관리의 호령은 어찌 저리 우악하며 아낙의 울부짖음 어찌 저리 괴로운가 (...) 이튿날 앞길을 오르려는데 할아범 혼자서 작별을 하네” 노파는 아들 둘이 전쟁터에 끌려가 죽었다. 며느리와 손주를 지키려고 자기라도 병사들 밥 지어주러 나가겠다고 했더니 관리는 늙은 할멈마저 전쟁터로 끌고 갔다.
  두보의 시는 민중의 고단한 삶을 안쓰러워 하는 숱한 선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을 비롯해 애민시[愛民詩]의 오래 된 전통은 두보로부터 시작됐다. 조선시대에 그의 시를 우리말로 옮긴 ‘두시 언해’가 나온 것으로 봐서 널리 일반 민중에게 사랑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만엽집萬葉集 : 8세기인 나라[奈良]시대 후기에 펴낸,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이다. 전쟁터에 끌려나간 민중의 애환[哀歡: 슬픔과 기쁨]을 노래한 시가 많다. “내 여행은 여행이라고 단념하지만 집에서 아이를 껴안고 [내 걱정으로] 바짝바짝 마르고 있을 아내가 가엾다.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들을 넘고 산을 넘어 왔지만 내 부모는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병졸이 된 아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노래도 있다. “집에 남아서 그리워하고 있는 것보다는 니 허리에 차는 칼이라도 되어 너를 지켜주고 싶다.”
  전쟁 이야기의 배경은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 패한 왜국이 그들이 일본 열도에까지 침략해올 것을 대비해 농민들을 불러내 기타큐슈[北九州] 방위를 맡게 했을 때다. 일본인들은 그 옛날에 시가집이 만들어진 것은 일본뿐[!]이고, 작자도 다양한 계층에서 나왔다고 자랑하지만 그 당시 한자를 읽고 쓸 줄 아는 것은 귀족뿐이었다. 귀족들이 [두보처럼] 민중의 처지를 딱히 여겨서 시를 읊었지 민중이 문학의 주체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 때는 ‘만엽집’이 서가[서고] 한 구석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먼지만 덮어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세상이 되고부터 ‘만엽집’이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근대 일본’이 발명해낸 셈이다.    
  시들 중에는 ‘가을 바람’을 노래한 대목이 많다. 그런데 이 상징은 신라 향가[월명사의 ‘제망매가’]에도, 중국 한시에도 자주 나온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일본과 베트남까지]의 문학적 상상력이 서로 비슷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