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담론과문화] 눈동자의 사랑과정치

마녀 사냥은 근대 유럽지배층이 저지른 원죄다

눈동자 / 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

  여러분, ‘마녀’를 아는가? 어디서 본 적 없는가? 그녀는 400년 전, 영국 어디서 날품[그날 벌어 그날 사는 노동일]을 팔던 어떤 과부[홀어미]였다. 또다른 그녀는 프랑스 어디서 먹을 것이 없어 이웃에게 구걸을 다니던 어떤 노파였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렇게 가난하고 힘없고 늙은 여성들 수십 만 명이 [4세기 전] 유럽 곳곳에서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거나 산 채로 불태워져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 학교 교과서에는 이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다. 대학의 역사학자들 중에도 관심 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 세기[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동안에 수십만 명이 죽어갔다는데[누구는 50만 명이 넘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들의 죽음은 알아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역사책은 하잘것 없는 사람들 이야기는 별로 다루지 않는가 보다. 그러니 프랑스인들에게 전설처럼 전해 오는 어느 이름난 처녀 얘기를 꺼낸다. 1430년에 몸을 일으켜서 영국과의 백년 전쟁[1337~1453]에 앞장섰던 잔 다르크다.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놀랄만한 용기를 발휘해서 프랑스군을 이끌었다. 그녀는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해낸 국가 영웅’이라고 백과사전에 적혀 있다. 20세기 들어와서는 성인[聖人]으로까지 추앙됐다더라. 그런데 그녀는 유관순보다 불과 한 살 더 먹은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마녀’로 몰려서 불구덩이 속에서 죽어갔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합작해서 그녀를 ‘마녀’로 몰았다. 우리는 이름 없는 과부가 화형[火刑] 당한 것이야 별것 아닌 일이라 쳐도, 대관절 왜 우리를 뭉클하게 만드는 잔 다르크마저도 쳐죽임을 당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서양 동화에서 빗자루를 타고 날아 다니는 늙은 ‘마녀’의 모습을 자주 본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든 아무 현실근거 없이[곧, 단순한 환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동화 속 마녀는 현실의 어떤 사람들을 어떤 생각으로 그려낸 것일까? 위엣 과부나 노파와 동화 속 마녀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더 생각해 보자. 빗자루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마녀 사냥, 구체적으로 어땠는가?

  1585년 영국의 타이번 지방에서 마가렛 하켓이라는 늙은 과부가 ‘마녀’라 고발됐다. 그녀는 목 매달려 죽었는데 왜 그녀를 마녀라고 심판했는지, 옛 기록이 전해온다.
  ⟪그녀는 허락도 없이 이웃의 밭에서 배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돌려달라는 요구에 그녀는 화가 나서 배를 팽개쳤다. 그 뒤로 그 밭에서는 배가 자라지 않게 됐다. 나중에 윌리엄 굿윈의 머슴[하인]이 발효용 이스트를 달라는 그녀의 요구를 퇴짜 놨더니 그의 양조장[술 빚는 곳]이 말라붙었다. 주인의 땅에서 땔감을 훔쳐가는 그녀를 붙잡은 관리인이 그녀를 때리자, 이 관리인은 미쳐 버렸다. 어떤 이웃이 그녀에게 말[馬]을 빌려주지 않자, 말이 죄다 죽어버렸다. 어떤 사람은 그녀에게 신발을 사면서, 그녀가 부르는 값보다 덜 줬다가 나중에 죽었다.⟫
  여기 적힌 내용이 다 사실이라면 하켓을 ‘마녀’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이 덜 발달한 16세기라 해도, 학자들 중에는 하켓의 신통력[神通力]이 사실일 리 없다고 본 사람도 꽤 있었다. ‘레바이아단’을 쓴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 같은 사람은 이런 것을 사실이라 믿지 않았다. 영민한 데카르트는 ‘마녀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다. 그렇지만 하켓 같은 사람들을 ‘마녀’라 단죄하는 데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그 시절 유럽에서 글줄깨나 읽거나 벼슬깨나 하는 사람들에게 최대 관심사는 이것이어서, 서로 만났다 하면 마녀를 헐뜯으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 시절 마녀는 지배층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때려잡았던 것이다.
  인류 역사에는 한 사회집단이 자기가 혐오하는 사회집단에 대해 어떤 ‘편견’을 품게 되는지 말해주는 사례가 헤아릴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귀족이나 근대 스페인, 영국의 지배층은 그리스의 노예와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식민지 백성들을 ‘말할 줄 아는 짐승’쯤으로 여겼다. 민중의 사회적 지위가 꽤 높아진 유럽의 민중을 놓고서 ‘짐승’이라 일컫지는 못했지만, 더럽고 비천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경멸했다. 이렇게 완강한 멸시는 아니라 해도, 최근 반세기 동안 한국에는 전라도 사람에게 혐오의 감정을 품는 경상도 사람이 은근히 많았다[지역감정]. ‘마녀’에 대한 박해도 이렇게 혐오받는 계층에게 일어난 비극이었다. 근대 학문의 역사에서 칭송받는 학자들[데카르트, 토마스 홉스]도 마녀에 대한 고발이 허튼 짓임을 알면서도 유럽지배층과 한 통속으로 놀았으니, 이들의 기회주의적 태도에서 우리는 그들의 학문이 ‘허구’라는 것을 대뜸 헤아린다.

  유럽의 가난한 여자들은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가? 그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이유로, 마술을 갖고서 아이들 수십 명을 죽인 뒤 피를 빨아내고 살덩이로 묘약을 만들어서 이웃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이유로, 가축과 농작물을 못쓰게 만들고, 태풍을 일으키고, 숱하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고발당했다. 이들의 말은 고문을 당할 때 자백한 이야기밖에 전해져 오지 않으니 오늘날 이들의 사정을 당사자의 말로 전해들을 기회가 없다.
  그 여자들이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 서술할 터이니 꼭[!] 기억해 두기 바란다. 심문관들은 고발당한 여자를 발가벗긴 뒤, 몸에 있는 털을 죄다 없앤다[악마가 털 속에 숨어 있다는 이유로!]. 도망노예에게 그러듯이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비롯해 온 몸을 긴 바늘로 마구 쑤신다. 처녀인지 검사한답시고 강간하는 경우도 있다. 이 여자가 바락바락 대들면 더 의심을 품었다. 자백을 하지 않으면 팔다리를 찢고, 쇠의자에 앉혀서 의자 밑에 불을 지피거나 뼈를 으스러뜨린다!! 목 매달고 불태워 죽일 때에는 그 여자의 자식들을 비롯해 동네사람 모두가 반드시 참가해서 이 광경을 눈 뜨고 지켜봐야만 한다. 그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려는 정치행사이기 때문이다.    
  이 두려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다들 겁에 떨었다. 이 여자들을 구하러 나선 남자들이 있었을까? 다들 와르르 몰려가 재판장을 뒤엎은 경우가 어쩌다가 있었으나 대부분 침묵했다. 오히려 일부 남자들은 ‘마녀’를 찾는답시고 설치기까지 했다. 이 참에 평소에 못마땅했던 아내와 헤어지거나, 자기가 나쁜 짓[성폭행]을 저지른 여성들이 저에게 품는 복수심을 짓누르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자기도 ‘마녀’편으로 몰릴까봐 다들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이 마녀사냥은 남자와 여자의 사이를 확실하게 갈라놓았다.  

                    왜 마녀 사냥을 벌였을까?

  당시 지배층은 ‘산파[출산을 돕는 노파]’와 아이 낳기를 거부한 여자, 이웃집에서 땔감을 훔친 거지 여자를 마녀로 몰았다. 창녀나 바람기 있는 여자도 붙들려 갔다. 더러는 살인 따위, 분명한 범죄를 저지른 여자도 있었지만 가난하고 미천한 여자들이 그저 이웃과 다퉈서 평판이 나쁘다는 이유로 붙들려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애꿎은 피해자들은 인간세상의 야만스러움을 탓할 수밖에 없지만, 지배층이 노렸던 것은 한 마디로 말해 ‘여자 길들이기[겁주기]’였다. 그랬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을 마녀의 처형장에 강제로 불러내 겁을 줬던 것이다. 이를 무엇으로 짐작할 수 있을까?
  서유럽 곳곳에서 마녀사냥이 벌어지는 동안, 간통을 저지른 여자를 사형에 처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를 떠올리자. 나중에 신대륙 미국의 청교도 사회에서는 간통한 여자에게 낙인[주홍글씨]을 찍는 것으로 그쳤지만 영국에서는 역적[반국가행위자]과 마찬가지로 화형[火刑]에 처했다. 또 매춘[몸팔이]과 혼외[결혼 않은] 출산이 불법이 됐고, 갓난애 살해는 ‘중죄’로 다스려졌다. 여자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도 비판받았다.
  지배층의 속셈이 무엇이었을까? 한국의 경우도, 가부장 질서를 규정한 종법[宗法]은 조선 후기[16세기]에 들어서야 완강하게 자리잡았다. 종법 이전의 한국이나 마녀사냥 이전의 유럽에서 남녀가 꼭 동등한 사회적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 차별이 심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종법과 마녀사냥을 고빗길로 하여, 여성의 역사가 큰 전환을 맞는다. 유럽 여성사에서 마녀사냥은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원죄[原罪]에 해당한다.
  ‘마녀 사냥의 목적’을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여자가 할 일은 남자를 보필하고, 아기를 낳는 일이라고 못박겠다는 것이다. 여자들에게 버릇을 가르쳐서 [지배층이] 시키는 대로 하게끔 만들려는 것이다. 지배층은 아랫것 여자들이 애 낳기와 무관하게 성[性, 섹슈얼리티]을 즐기는 데 대해 반감을 품었는데, 동화 속 ‘늙은 마녀’가 이를 말해준다. 그 혐오스런 여자가 타고 다니는 빗자루는 남성 성기[性器]를 빗댄 것으로, 절제되지 않는 욕망의 상징이다. 애도 낳지 못하는 늙은 여자가 어디 건방지게 성[性]을 즐기려 하느냐는 거다. 마녀는 짐승들[두꺼비, 고양이, 개]과 더불어 논다. 이것은 “여자는 짐승과 마찬가지야!”하는 뜻을 넌지시 일러준다. 소름끼치는 동화가 아닌가!

  지배층은 ‘마법’이라는 것도 공격하기는 했다. 자본주의 문명의 발달은 ‘마법’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일어났다. 마법은 만물에 힘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건은 그 신비한 힘의 표현으로 읽힌다. 그런데 이 마법에 더 기대려는 사람은 대부분 아등바등 살아가기 때문에 늘 재난을 두려워하는 가난뱅이들이다. 요즘 한국도 처지가 딱하고 불안한 사람들이 점쟁이와 무당을 찾지 않는가. 그 마법을 지녔다 하여 주로 공격받은 대상은 여성이다.
  지배층에게는 ‘산파’도 마법사와 마찬가지였다. 산파는 약초[藥草]와 건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늙은 여성이다. 애 낳기는 산파가 도맡았으므로 남자들이 그 근처에 얼씬도 못했다. 산파는 출산만 도운 게 아니라, 여성들의 피임[임신 회피]도 도왔다. 그런데 나중에 그 이유를 설명하겠지만, 16세기의 유럽 지배층은 ‘인구[人口]’를 늘리고 싶다는 커다란 압박을 받고 있었다. ‘산파’가 출산 문제를 독점해서는 국가지배층의 이런 생각을 내리먹일 수 없었다. ‘산파’가 같은 동네 여성을 편들어 피임약을 주는 것을 막고 싶었다.
  마법이 원래부터 탄압 대상은 아니었다. 과학자들은 비판했지만 말이다. 르네상스때의 [남성] 마법사들은 오히려 인기를 누렸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실존했던 마법사의 전설을 각색한[덧보태 꾸민] 것이다. 중세때 수많은 사람이 몰두했던 연금술[쇠나 구리에서 금을 빼내기]도 일종의 마법이다. 연금술에 대한 실망이 커져 갔어도 고급 마법[마술]에 대한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 마녀사냥이 끝난 뒤에는 마법이 다시 합법화됐다. 상당수 여자들이 점을 쳐 주거나 부적을 팔아서 밥벌이를 계속 했다. 귀족들 사이에서 마법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니까 마법, 곧 전[前]근대적인 믿음 자체가 유럽 지배층이 없애려는 ‘주된 과녁’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설령 데카르트의 제자들인 사회지배층에게 ‘미신’을 혐오하는 신념이 아주 깊었다 해도, 거기서 비롯된 분노가 숱한 애꿎은 여성들까지 쳐죽이는 광란의 춤을 불러냈다고 보는 것은 유치한 생각이다. 우리는 딴 사람이 좀 어리석다[미신을 믿는다] 해서 그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왜 유럽 지배층은 일부 여성들을 본보기로 삼아 쳐죽이고 싶었던 것일까? 나무를 알려면 숲을 봐야 한다. 그러므로 중세 후기의 역사를 알아야 그 답을 찾는다.        

                  농노제도가 무너져 가던 중세 후기

  4세기 무렵, 로마와 신생 게르만 국가의 노예들이 불온해졌다[대담해졌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숲으로 달아나는 것을 막으려면 노예도 한 뼘 땅을 갖고 가정을 꾸리는 것을 허용해야 했다. 한편, 몰락한 자유농민은 밥벌이를 위해 지주[영주]에게 스스로 예속됐다. 노예는 발돋움하고 농민은 추락한 결과로 ‘농노제’가 5~7세기에 탄생했다. 9~11세기에는 남의 땅 빌려 농사짓는 모든 소작[小作] 농민이 농노[servus, serf]가 됐다. 농사 짓는, 농토를 가진 노예!
  농노는 노예보다 훨씬 자유로왔다. 생산수단[한 뼘 땅]을 지녔기에 굶주림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영주에게 맞설 수 있었다. ‘토지는 경작자에게!’라는 근대 혁명의 구호는 이 물질적 토대에서 비롯됐다.
  중세 사회에서 [숲, 냇가, 풀밭과 같은] ‘공유지’는 가난한 농민의 삶을 지탱해준 버팀목이었을뿐더러, 공동체를 묶어준 토대였다. 이것을 토대로 마을 자치[自治]가 발달했다. 물론 중세의 마을[촌락]이 다들 평등한 사람들끼리의 공동체는 아니었지만, 여성들이 남성에게 종속된 삶을 살지는 않았다. 중세 때는 공동체가 가족보다 우선이었고, 여성들끼리의 협동이 여성들의 자주성을 버팅기게 해줬다.

  조잡한 역사책은 중세를 권태롭고 평화로운 시대로 묘사한다. 또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역사의 암흑기로 여긴다. 과학기술의 발달이나 흥미진진한[?] 식민지 탐험이 벌어지지 않은 점에선 정적[靜的, static]일지 모르지만, 잉글랜드 장원재판소 기록을 보면 중세 후기의 장원[莊園, manor]은 계급투쟁이 줄기차게 벌어진 곳이었다. 농노들은 영주에게 갖다바치는 것을 줄이려고 끊임없이 대들었다. 13세기 중엽에는 영국 농노들이 한동안 ‘부역노동’을 거부하기도 했다[농사 파업]. 군대 징집에 대한 거부도 심해서  국왕은 범죄자와 깡패를 군인으로 뽑아야 했다. 도시[town]로 도망치는 것이 농노들의 주요 출구였다. 눈에 보이는 저항 말고도 ‘꾸물거림, 무식한 시늉, 시치미 떼기, 좀도둑질’ 같은 일상의 소극적 태도도 고려해야 그때의 계급갈등을 알 수 있다.  
  중학교 교과서는 ‘[13세기에] 농노들이 지대[地代]를 돈으로 내게 됐다[금납화]’는 것을 상업 발달의 자연스런 결과인 것처럼 서술했으나, 이는 겉핥기의 앎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농노들이 영주의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온, 그래서 그들의 끗발[입김]이 커진 것의 결과다. 화폐발달은 그 매개체였을 뿐이다. 영주는 고정된 분량 이상으로 농노들을 착취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농노제는 사실상 끝났다. 넓은 땅을 지닌 부농은 지대를 내고도 넉넉히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농민들 사이에 차츰 양극분해가 일어났다. 일부는 고용주로, 일부는 땅 없는 무산자[프롤레타리아]로!      
  
                        민중의 저항이 커져 가다

  12~13세기에 천년왕국 운동이 일어났다. 몰락한 농민, 창녀,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 등 온갖 버림받은 사람들이 거기 참여했다. 세계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묵시록적 전망이 퍼졌다. 가난한 직물노동자들이 열렬히 지지했다. 이 운동은 지배층의 탄압으로 단막극에 그쳤지만, 그와 비슷한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와 달리, ‘이단[異端] 운동’은 새 사회를 만들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잘 조직돼 있어서 쉽게 꺾이지 않았다.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벗어난 여러 이단[heresy] 종파가 3백년이 넘도록 프랑스, 독일, 플랑드르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활약했는데, 기성 교회가 집요하게 박해한 탓에 오늘날 전해오는 기록이 거의 없다[지워진 역사]. 그들을 없애려고 교황은 국가억압에서 가장 사악한 기구인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이단운동은 신앙운동이라기보다 급진적 민주화를 갈망하는 저항운동에 가까웠다. 그들은 더 높은 진리에 호소해서 왕국과 교회권력에 도전했다. 그들은 위아래의 수직적 질서, 사적[私的] 소유, 부[富]의 축적을 비판하고, 일상생활의 모든 면[노동, 소유, 출산, 여성의 지위]을 새롭게 규정해서 진정한 ‘해방’의 문제를 꺼내들었다. 이단운동은 국제적인 연락망을 엮어서 서로 교류한 탓에 최초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연대모임]’이라 부를 만했다. 그들은 기성 교회더러 영적[靈的] 권위를 되찾으려면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권력을 내려놓으라고 엄격하게 꾸짖었다. 몇몇 종파는 공산주의[평등과 공동체소유] 실험에 나섰다.
  이단 종파들은 딴 종교에 대해 너그러웠다[관용]. 상업이 발달하자, 유대인 상인들을 혐오하는 반유대주의 기류가 곳곳에 생겼는데 이때 이들을 감싸안았다. 원래 딴 종교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인이다. 일부 이단종파들은 결혼과 애 낳기를 거부했다. 결코 여성을 경멸해서가 아니다[오히려 여성들이 이단운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가난이 심해진 탓에, 시련의 세상에서 자식들이 ‘새로운 노예’로 살아갈 것을 염려해서다. 요즘 한국의 젊은 부부들이 우리 사회의 앞날을 안심할 수 없어 애 낳기를 꺼리는 것과 똑같은 마음이다.  
  이단운동은 농민반란의 정신적 구심[求心]이 됐다. 1381년 영국 농민반란의 지도자 존 볼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우리는 신[神]의 모습을 본따 창조됐는데도 짐승처럼 취급되고 있다. 신사[紳士, 영국의 귀족]와 농노가 따로 있는 한, 영국에서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고려말 반란을 일으킨 노비 만적이 ‘왕후장상[왕과 귀족들]의 씨가 어디 따로 있느냐’고 내지른 때도 이와 얼추 비슷한 때[12세기말]다.  
  
  한편 기독교는 [로마가 교회를 공인해서] 세속 권력과 짝짜꿍이 맞으면서부터 집요하게 ‘성행위 규제’에 나섰다. “성[性]의 욕망을 참는 것이야말로 성[聖]스럽도다!” 여성은 속물스럽거나 저급한 존재로 취급됐다. 교회는 예배와 미사를 치르는 일[성직자 자리]에서 여성들을 내몰았다. ‘성행위는 이러저런 규율에 따라야 한다’고 교리문답서까지 펴냈다. 교회는 에로스를 억누른다는 구실로 여성을 깎아내려서, 가부장[家父長] 제도를 든든하게 지탱해주었던 것이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교회는 성[性]문제에 병적으로[!] 매달렸다. 신자[信者]들의 침실[bedroom]을 몰래 엿보는 것을 넘어, 성[性]을 국가적 문제로 삼았다. 피임하는 사람과 동성애자들에게 비난의 낙인을 찍고, 성행위가 허용되는 날짜까지 지정했다. 이단 종파들은 이런 성적 탄압에 맞서 여성해방을 부르짖기도 했다.
  이단운동은 마녀사냥과 맥락이 닿아 있다. 우선 여성들은 애를 낳고, 안 낳고를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그들의 인권[人權]이 아닌가? “피임은 절대 안돼!”하는 교회의 명령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억압이다. 교회가 이렇게 눈을 부릅뜬 때는 페스트[흑사병]가 나돌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간 뒤부터다. 인구 부족이라는 사태에 맞닥뜨리자, 교회는 피임 규탄에 더 열올렸다. 그 뒤로, 교회가 규탄하는 이단은 ‘여성의 얼굴’을 띠게 됐다. 이단 박해는 자연스레 여성 박해로 옮아갔다.

  이단종파 운동은 1533년 독일 뮌스터에 하느님 마을을 건설하려는 재세례파 운동이 끔찍한 탄압으로 허물어지면서 가라앉았다. 유럽의 지배층은 이런 야만스런 탄압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민중 저항의 불길을 잠재울 수 없었다. 밑바닥 민중이 얼마나 이단운동 지도자들을 믿고 기대했는지 종교재판소의 갖가지 기록에 나와 있다. 1307년 이탈리아 북부 트렌토에서는 대안공동체를 세운 돌치노와 그를 따른 민중이 교회 군대에 3년간 맞싸우다가 패배해 수천 명이 그 자리에서 학살됐는데,  교회의 꼬드김을 뿌리치고 믿음을 지킨 돌치노의 반려자 마르게리타는 [애인 앞에서 천천히] 불태워 죽임을 당했고, 돌치노는 산길로 끌려다니며 몸이 찢겨서 죽어갔다.      
  이렇게 민중 저항이 들불처럼 일어난 까닭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워낙 깊었기 때문이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부자와 빈자를 ‘큰 새’ ‘뚱뚱한 사람’과 ‘작은 새’ ‘깡마른 사람’으로 불렀다. 이 원한과 분노가 가난이 깊어져가는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의 단결을 가져왔다. 이단종파들은 ‘[노예]노동을 거부’하자고 부르짖는 한편, ‘세상 만물은 다 우리의 노동이 빚어낸 것’이라며 노동자가 존귀하다는 것을 일깨웠다. 이들의 지도로, 곳곳에서 민중 봉기가 잇따르자, 재물을 쌓아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페스트의 창궐로 인구[人口]가 부족해지자 없는 사람들의 끗발이 올라갔다. 14세기말에는 “지대를 안 내겠다. 부역을 안 하겠다.”는 퇴짜 놓기가 대세가 됐다. 자기 재산을 지키려는 지배층은 갖은 포악한 수단을 다 써서 사태를 되돌리려고 했다. 피렌체에서는 노예제가 부활됐고, 영국에선 ‘최고임금’을 못박는 법을 만들어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반란 군중은 한때 여러 곳에서 지방정부를 접수하기도 했다. 선술집과 작업장마다 ‘때가 왔다’는 구호가 적혔다. 민중의 저항은 1522~1525년 독일 농민전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예전의 조잡한 역사책들은 15세기를 죽음이 춤추는, 죽음의 상징의 주문에 걸린 세계로 묘사했거니와, 실제로는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황금시대였다. 누구는 이렇게 썼다. “영국에서 그때만큼 임금이 높고, 식료품값이 쌌던 적이 없다. 노동자들은 주5일 노동을 요구했다.” 이 때에 이르러 유럽에서 농노제도는 완전히 소멸하고 자유농민이 탄생했다.    

                    반[反]혁명이 시작되다

  15세기말이 되자, 유럽 지배층의 교활한 반격이 시작됐다. 정부는 젊은 남성노동자들의 무분별한 방종을 부추기는 악랄한 성[性]정책을 썼다. 밑바닥 여성에 대해 아무리 끔찍한 집단강간을 저질러도 그 처벌이 손목 한 대 맞고 끝났다. 권력자들은 민중 봉기를 두려워했고,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자기 부인들을 빼앗아가 노리개로 삼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사태를 막으려고 국가가 나서서 밑바닥 여성에 대한 강간을 부추겼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로 힘을 합쳐야할 가난한 남녀가 서로 웬수 사이로 틀어졌다. 공공[公共]의 웬수에 대한 분노는 까맣게 잊혀졌다. 강간의 합법화는 강렬한 여성혐오 분위기를 북돋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둔감해지게 만들어서 마녀사냥의 토대를 닦았다. 첫 마녀재판은 14세기 초에 열렸다.
  없는 사람들을 서로 이간질시키는 또다른 제도는 ‘매춘의 합법화’다. “젊은이들아, 정치에 관심 갖지 말고 섹스나 즐겨라!”하는 주문이다. 곳곳에서 창녀촌이 성황을 누렸다. 교회도 ‘동성애보다 낫다’며 매춘을 두둔했다.
  부르주아[시민] 혁명을 찬양해온 부르주아 학자들은 중세 후기에 부르주아들은 귀족계급과 격렬한 대립을 벌였다고 썼다. 프랑스혁명[1789년]이 일어나기 직전에 서로 대립한 것은 맞다. 하지만 봉건체제가 완전히 무너진 14-15세기에는 그러지 않았다. 중세도시에서 자치권을 얻으려고 2백년 동안 봉건권력과 싸워온 부르주아지는 정작 봉건체제가 위기에 맞닥뜨리자, 이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경쟁 상대인 영주[지주]들보다는 바락바락 대드는 밑바닥 노동자가 더 싫다!”는 게다. 그들은 절대국가로 가는 첫 걸음인 ‘왕의 지배’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서 귀족권력이 다시 세워지도록 도왔다.    

  봉건제도를 거부하는 민중반란은 1525년 독일 농민전쟁이 패배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10만 명이 넘는 반란군이 패전 뒤 모조리 학살당했으니 그 소식을 들은 민중의 사기[士氣]가 얼마나 떨어졌을지 넉넉히 짐작할 만하다. 이때 농민저항의 정신적 지도자인 신학자 토마스 뮌처도 처형당했는데, 그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찬성하고 나섰다가 루터가 농민전쟁에서 봉건 영주 편을 들어, ‘농민들을 학살하라’고 선동하자 그와 발길을 끊었다. 역사책은 루터의 [서술] 비중을 낮추고, 뮌처를 크게 소개하는 쪽으로 다시 씌여야 한다. 1535년 뮌스터 재세례파의 저항도 지도부가 가부장 옹호[여성억압 태도]로 변절하는 바람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 무너졌다.
  이런 민중반란이 무너지고, 한쪽에서는 ‘마녀 사냥’이 일어나고, 또 식민지가 팽창해 지배층이 두둑한 뒷돈을 챙기게 되자, 민중 저항의 분위기는 차츰 가라앉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리 총칼을 휘두른다 해서 죽은 봉건제도가 다시 살아날 리는 없었다. 노동인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영주[지주]들이 움켜쥔 총칼로는 도무지 농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킬 수 없었다.
   원래 중세말 등장한 유럽 자본가계급은 전혀 근대적 사회세력이 아니었다. 노예노동과 플랜테이션 체제에서 단물을 빨아먹었다. 노예제도는 15세기 유럽에서 부활했다. 16세기 나폴리왕국 인구의 1%가 노예였다. 18세기가 돼서야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불법화된 것으로 봐서, 지배층은 누구나 노예제를 열망했음을 알 수 있다. 노예제도를 유지할 물질적 조건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것이 성행하지 못했을 뿐이다.
  서유럽에서 농노제가 부활하지 못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농민저항 덕분이다. 농민들을 짓밟아 누르기는 했지만 [지배층은] 대들어 싸우는 농민에 대한 두려움이 워낙 깊었다. 또 노동력 부족 현상이 17세기까지 계속돼 노동자 농민을 심하게 착취할 수 없었다. 지배층의 채찍질이 심해서 노동인구가 줄어드는 모순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유럽인들의 정벌 이후, 수십 년의 강제노동과 질병과 징벌의 결과로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3분의 2가 죽어갔다. 유럽은 나치 시절을 빼고는 아메리카만큼 대량학살 수준의 노동착취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토지의 사유화와 다락같이 치솟은 물가 앙등으로 가난과 죽음이 판치고,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유럽에서 토지 사유화[私有化]는 15세기말 식민지 팽창과 더불어 시작됐다. 종교개혁은 상층계급의 토지 약탈을 동반했다. 인클로저[목장 울타리치기]는 16~18세기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로, 상업과 수출을 위한 농업생산은 늘어났어도 민중을 위한 식량 공급은 줄어들었다.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에서 비옥한 땅의 민중들마저 토지사유화와 농업상품화로 2백년 동안이나 굶주림에 시달렸다. 토지 사유화가 진행된 뒤, 유럽 곳곳에서는 ‘부랑자’ 문제가 불거져서 어느 도시든 그 대응책[사회부조]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금[임노동]에 대한 민중의 증오감도 높아졌다. 중세도시의 노동자는 임금을 [영주에게 바치는] ‘부역’과 대조되는 자유의 수단으로 봤다. 하지만 토지를 잃어버린 농민들은 노예화의 도구로 느꼈다. 어느 농민반란 지도자는 “임노동을 할 바에야, 적의 지배를 받으나 동포의 지배를 받으나 마찬가지”라고 울부짖었다. 유럽 곳곳의 ‘부랑자’는 임노동[품팔이]을 하느니 차라리 강제노역을 하거나 처형당할 위험을 견디겠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인클로저 반대운동은 15세기말부터 17세기까지 이어졌다. 이 투쟁에 여성 참여가 차츰 늘어났다. 토지를 잃고 마을공동체가 무너지면 여성들이 더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떠돌이로 살기가 어렵다. 임신과 육아 때문에도 그렇고, 방랑생활때 남자들의 폭력에 노출되기 때문에도 그렇다. 용병이 돼서 입에 풀칠할 기회도 없다.

  교과서는 그 시절에 “아메리카의 금과 은[銀]이 쏟아져 들어와서 유럽의 물가[物價]가 다락같이 치솟았다”고 썼다. 그것은 바깥의 원인일 뿐이다. 이미 사유화와 상품화가 진척돼 있었기에 그런 물가 앙등이 초래된 것이다[내부 원인]. 물가 앙등으로 소농[小農]이 몰락하고, 실질임금이 하락했다. 유럽의 임금이 ‘중세 말’ 수준을 회복하는 데에는 수백 년이 걸렸다. 굶주림에 시달린 민중이 곳곳에서 저항에 나섰다. 1652년 스페인 코르도바의 어느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굶어죽은 아들의 시체를 안고 아침일찍 동네를 울면서 지나갔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삽과 쇠스랑을 들고 곧장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때 민중은 다들 폭발 직전이었다.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는 여성들이 앞장섰다. 역사 기록은 ‘코르도바의 봉기’라 부른다. 이런 봉기뿐 아니라 도둑질, 부잣집 곳간 털기 같은 갖가지 식량투쟁이 유럽 곳곳에서 날마다 일어났다.
  넉넉한 삶을 누리는 지배층에게 이들이 어떻게 비쳤을까? 누가 이렇게 썼다. “길을 가거나 광장에 들르면 여럿이 달려들어 구걸하는데, 굶주림이 역력하고 퀭한 눈에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이들이 병[病]을 옮길까봐, 반란을 일으킬까봐 지배층은 늘 두려움에 떨었다. 지배층은 이들을 어떻게든 악착같이 눌러놔야 했다.
  이 사태를 지주와 부르주아 개인들이 감당할 수 없어 중앙정부가 나섰다. ‘부랑자’에게 곤장을 치고 강제노동을 시키겠다고 엄포를 놨지만 하릴없었다. 굶어죽는 사람을 구할 최소한의 공공 부조[돕기]를 벌이는 한편으로, 민중을 양순하게 길들일 억압책을 꺼내들었다. 무슨 모임이든, 잔치놀이든 다 금지했다. 노동자는 모두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됐다. 여자가 애 낳기를 꺼리는 것도 무거운 범죄가 됐다. 여성을 길들이기 위해 마녀 사냥의 준비에 나섰다. 정부와 교회가 합작해서 마녀 찾기에 들어갔다.  
  16~17세기 유럽에서 처형당한 여자의 죄목은 마녀행위 다음으로 갓난애 살해가 많았다. 마녀행위도 애 낳기와 관련된 게 많았다. 산파를 밀어내고 남자 의사들이 출산을 떠맡았는데, 이는 산파[늙은 아주머니]들이 출산 여성을 감싸고 도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산모[엄마]의 생명보다 태아의 생명을 우선으로 돌보는 의술 관행이 생겨났다. 중세때는 여자가 제 몸을 스스로 통제했는데[피임의 자유], 이제 여자들은 ‘출산노예’ 또는 ‘출산기계’로 추락했다.
  국가는 제 몸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빼앗았을 뿐아니라, 여성의 임무를 엄마 노릇[출산과 육아]에 가두었다. 그동안 여성들은 갖가지 일터에서 일했고, 그래서 나름의 사회적 자주성을 누렸더랬는데 차츰 일터에서 밀려났다. 여자들이 도맡았던 술빚기나 산파 일에서도 밀려났고 오직 남편을 돕는 허드렛일만 허용됐다. 같은 일도 남자가 하면 ‘생산 노동’이요, 여자가 해내면 ‘집안일’로 취급됐다. 여자의 진짜 직업은 ‘결혼’뿐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여자들을 일터와 시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지배층은 여성을 비난[욕]하는 온갖 켐페인[선동]에 일떠 나섰다.
   유럽 지배층이 창조[?]해낸 것은 ‘임금 가부장제도’다. 기존의 역사책은 ‘농노들이 신분[身分] 예속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됐다’며 이를 근거로 근대 사회를 찬양한다. 임금노동 체제 밑에서 남성노동자가 겉보기[형식]로는 해방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는 형식적[겉보기]으로도 해방되지 못했다. 여성들은 고용주뿐 아니라 남편에게까지 예속되는 존재가 됐다. [가내 수공업에서] 부부가 똑같이 일해도 아내의 소득은 법적으로 남편에게 돌아갔다. 여자는 자기 재산을 갖지 못했고, 법률에서 ‘무능력자’로 간주됐다.
  여성들이 겪은 모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일자리에서 쫓겨났을뿐 아니라 길거리도 함부로 다닐 수 없었다. 혼자 다니는 여자는 놀림감이 되거나 성폭행을 당했다. 창가를 내다봐도 ‘버릇 없다’고 꾸지람을 듣고, 딴 여자들과 수다를 떠는 것도 흉이 됐다. ‘여자는 원래 열등하므로 남자가 다스려야 한다’는 통념이 봄비에 땅 젖듯 뿌리내렸다. 그런 현실을 미화[美化]한 속담이 많았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한국]’거나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를 깨뜨린다[유럽]’거나. 역사책에 나오는 똑똑하고 유명한 사람들이 다들 한 패거리가 돼서 여성을 헐뜯었다. 이 지점에서, 세익스피어의 문학이 결코 1류의 문학이 아님을 새겨 두자. 그의 희곡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순종하지 않는 아내를 비웃는 선언서다. 여성 길들이기를 무슨 자랑으로 아는 이야기를 [단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즐긴다 해서] 추어주기는 어렵다.    
  
                여성 길들이기는 자본주의의 원죄[原罪]다

  마녀 사냥은 마녀만 죽인 게 아니었다. 마녀를 꼭 공개처형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여성[과 남성, 곧 민중]에게 겁을 주려는 게 진정한 목적이었다. 여성들은 [고발당하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해야 했을 뿐아니라, 자유발랄한 제 마음속 생각까지 억눌러야 했고, 오직 세상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살아야만 안전할 수 있었다. 2백년 동안[15세기말~17세기말] 국가와 사회지배층이 여성과 밑바닥 민중을 상대로 온갖 테러[!]를 다 저지른 뒤에야 이 마녀 소동은 멈췄다. 왜 그들은 테러를 멈췄을까? 이제 민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지배체제가 안전해졌고, 민중이 양순해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말괄량이[?]’가 길들여지자, 이제 고분고분해진 여성에 대한 찬양이 시작된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영원한 여성이 우리를 저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린다”고 노래했듯이, 숱한 문학가들이 여성과 모성[母性]의 예찬[adoration]에 나섰다. 그런데 그 웃음띤[낯 간지러운] 이야기가 나오기 앞서, 2백년 동안 여성을 ‘2등 시민’으로 눌러앉힐 폭력의 역사가 살벌하게 벌어졌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마녀 사냥’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해서 인류 사회에 자리잡았을까, 그 비밀을 밝혀주는 역사의 하나다. 근대를 찬양하는 수많은 역사책들은 ‘진화론’을 철석같이 믿는다. 하등동물이 자연법칙에 따라 고등동물로 진화하듯이, 저급한 봉건사회가 고급스런 자본주의 사회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유[유추]의 함정을 놓치지 마라. 자연[생명체들]의 세계와 사회[사람들 사이의 네트워크]는 엄연히 다른 실체다. 지금 이 근대체제에 만족해서 사는 사람들은 “봉건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로 넘어오는 것 말고 딴 길은 없었다.”고 단정지어 버리는데, 그 말은 그들의 자기합리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고, 인류 역사의 갖가지 역동성을 짓누르려는 수작이다. “인류는 영혼을 지닌, 생각 깊은 존재들인데 왜 딴 길을 개척 못하겠냐? 너희는 인류를 저급한 존재들로 깔보고 싶으냐?”

  유럽은 14세기에 봉건제도가 무너졌다. 이러저런 이유로 지주[영주]들은 농노를 변변히 착취할 수 없었다. 유럽 곳곳에는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더 나은 세상을 그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실천이 있었다. 공동체적 삶을 추구한 풀뿌리 여성운동이 있었는가 하면, 대안사회를 좀더 치밀하게 그려보려는 ‘이단 운동’도 일어나 새로운 평등사회를 열어갈 전망을 찾았다. 이들의 싸움은 결국 패배했지만 아무튼 봉건제도에 금이 가게 했다. 유럽 지배층은 어떻게든 이 도전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 말고 딴 길은 없었다’고 지레 못박는 것은 이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과 실천을 깡그리 외면하겠다는 뻔뻔스런 수작이다. 봉건제도를 무너뜨린 중세 민중들의 사회적 투쟁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지금의 세계 자본주의체제가 인류에게 결코 ‘운명’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그 투쟁의 역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미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투쟁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니 그 시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우리는 21세기의 청사진을 변변히 마련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어떻게 해서 등장했는가? 1525년의 독일 농민전쟁[이라는 결정적 싸움]이 농민들의 패배로 끝났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농민군 10만 명이 잔인하게 학살돼 유럽 민중이 겁에 질렸기 때문에 자본이 거리를 뽐내며 활보할 수 있었다. 15~17세기[1450년~1650년]는 유럽에서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있었지만,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는 아직 들어서지 못했던 때다. 무주공산[無主空山]! 다만 자본주의 사회의 몇몇 요소[시장, 길드]만이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인류가 반드시 지금과 같이 자본[capital]이 독판으로[!] 활개치는 사회로 바뀌리라는 법은 없었다. 지금과 같은 세상은 그 이행기 때에 유럽의 민중에게 새 세계를 개척할 실력[생각과 전망, 조직적 연대]이 미약했던 탓에 유럽지배층[영주와 부르주아 동맹세력]에게 여지없이 패퇴한 것의 결과로 생겨났다. ‘봉건제 이후’를 떠맡을 심지 굳은 대안세력이 다 무너졌으니, 돈밖에 모르는 자본이 활개를 칠 수밖에.

  자본[資本]은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는가? 그 놈의 괴물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자기 몸뚱아리의 모든 구멍에서 피와 똥오줌을 뿜어대며 이 땅에 출몰했다. 자본은 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들을 아메리카로 붙들어 가서 그 노예노동의 단물을 마구 빨아먹은 덕분에 제 몸집을 불렸다. 신대륙은 거대한 강제노동수용소였다. 아메리카의 숱한 귀금속도 뒷주머니에 챙겼다. 중국에다가 ‘아편’을 강제로 팔아넘겨 한 몫 톡톡히 챙기기도 했다. 서유럽에서는 숱한 농민들을 토지에서 내쫓고[인클로저], 마녀사냥으로 사람들을 겁주고, 부랑자들을 붙들어다가 채찍질해서 돈을 벌었다. 동유럽에서는 ‘재판[再版] 농노제’가 나타나 한번도 노예였던 적 없는 사람들을 농노로 삼으려고 했다. 요컨대 자본은 ‘폭력’을 지렛대 삼아 성장의 길을 달렸다. 이것을 ‘자본의 원시적[primitive] 축적’이라고 일컫는다. 자본주의가 계속 굴러갈 수 있게끔 그 사전[事前] 조건을 마련하는 일!
  자본가들은 사업을 벌일 큰 밑천이 필요하다. 또 무엇보다도 그들이 부려 먹을 무산자[프롤레타리아]가 생겨나 있어야 한다. 제가 붙여먹을 땅뙈기가 없어질 때라야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러 간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산업 임금노동자 형성의 면에서만 살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형성은 유럽 농민에게서 땅을 빼앗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선주민[先住民]을 노예로 부려먹은 데에 그치지 않는다. 여자들을 ‘애 낳는 도구’로만 삼아서 그들의 노동을 거저 빼앗았다. ‘마녀’를 쫓는답시고 여성의 사회적 힘을 파괴하고 그들을 ‘2등급 노동자’로 깎아내렸다. 없는 사람들 내부에서 ‘남녀’를 수직 분할한 덕택에 없는 사람들을 더 철저히 착취할 수 있었다[임금 가부장제도].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 축적은 어찌 되었든 노동자들이 신분에서 해방됐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것이라고 긍정해줄 수 없다. 여성 빈민의 자리에서 세상을 봐라! 자본주의의 출현은 ‘절반 진보, 절반 예속’이 아니라 그야말로 반동의 승리다.          

                   ‘기억을 둘러싼 싸움’이 가장 엄중하다!

  한동안 학자들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근대 초기에 끝난 일로 치부했다. 자본주의가 자리잡았으니 자본가들은 이제 공장 안에서 이윤을 챙기는 데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처음 들여올 때는 포악스런 폭력이 불가결했지만, 자본주의 경제법칙이 작동하고 노동자 길들이기가 완성되면 더 이상 [경제외적] 폭력을 쓸 필요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한때 유럽에서는 이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런데 유럽이 그나마 한동안 문명사회 같은 모습을 띠게 된 비결은 유럽 자본이 제국주의 침략을 통해 딴 대륙에서 크게 벌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나라 민중에게는 얼마쯤 자비로운 지배자의 얼굴을 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세계자본주의의 위기가 깊어지자, 자본은 다시 포악스런 얼굴을 드러냈다. 20세기 후반기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곳곳의 농민들이 땅에서 쫓겨나 도시 변두리에 거대한 슬럼[빈민촌]이 생겼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다시 맹렬하게 벌어진 것이다. 2005년에는 세계의 슬럼 인구가 10억 명을 훌쩍 넘어섰다. 16~17세기, 유럽에 여성 깎아내리기가 한창일 때, 여성의 3분의 1이 부잣집 하녀살이를 했는데, 21세기 들어 필리핀과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은 다시 부잣집 하녀로 고용살이하거나 창녀촌으로 몸팔러 간다. 16세기의 유럽 민중만 굶주림에 시달렸는가? 19세기 유럽 민중도 굶주렸다.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을 떠올리라. 21세기에는 전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굶주리고 있다. 2020년이 되면 도시 빈민이 세계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거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왔다. 빌어먹을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옛 시절의 ‘마녀 사냥’이 과연 무슨 곡절을 안고 있었는지, 새삼 묻는다. 여성의 역사는 계급의 역사다. 무슨 소수자[少數者]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현실을 옹졸하게 바라보는 관점이다. 빈민 여성들이야말로 기성 체제로부터 가장 악랄하게 뺏기고 뜯기고 놀림감 되고 죽임을 당하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다. 하느님마을[신국(神國)]이든, 유토피아든, 이들 때문에 생겨난 간절한 꿈이다. 이들의 자리에 서서 세상을 내다볼 때라야, 우리는 세상의 진면목을 꿰뚫는다. 우리는 “인류가 ‘봉건제 이후’를 놓고 맞겨룬, 15~17세기의 거대한 계급투쟁에서 유럽 민중이 여지없이 패배한 뒤로, 줄곧 반혁명의 시대를 살아 왔구나!”하는 깨달음을 뒤늦게, 지금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두렵게 받아 안는다.
  
  빼놓은 얘기가 있다. 마녀 사냥은 유럽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숱하게 벌어졌는데, ‘선주민 박해’의 한 부분을 이뤘던 것이라 바깥 사람들이 따로 구별해서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다.
  기막힌 것은 요즘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에서는 ‘마녀 사냥’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보자면 곳곳의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벌이는 짓이지만 그 뒷면에 깔려 있는 사회적 압력을 주목해야 한다. 가장 밑바닥 사람들을 내쫓고 살해하는 기제[메카니즘], 그것은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이들 제3세계 민중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 사례가 한둘이 아닌데, 서방[미국과 유럽]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현상이야말로 세계자본주의가 한결 야만스러워졌다는 가장 또렷한 증거가 아닌가.
  마녀 사냥, 이는 인류사회의 가장 부끄러운 치부[恥部]요, 그뿐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역사다. 그런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회지배층은 한사코 이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있다. 진보적인 시민들 대부분도 그 두려운 정체[正體]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인류 공통의 절절한 역사적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인류 문명을 살려낼 마지막 정신적 무기[武器]가 아닐까? ‘교학사’ 파동과 교과서 ‘국정화[國定化]’ 책동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야말로 지금 전열[戰列]이 흐트러져 있는 세계 민중에게 최전선의 싸움이라는 것을 다시 실감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1 진보교육 52호 차례 진보교육 2014.04.16 546
30 [권두언] 뚜벅뚜벅 걸어가야 할 때 file 진보교육 2014.04.16 431
29 [Edu Focus] 교육민영화_교육민영화 개념 정리 file 진보교육 2014.04.16 701
28 [Edu Focus] 교육민영화_자사고 확대정책과 교육서비스 대책의 성격과 문제점 file 진보교육 2014.04.16 904
27 [기획] 청소년기 생각 발달과 개념 형성 file 진보교육 2014.04.16 1587
26 [초점] 유아교육정상화투쟁_3살 유아에게 8교시가 웬말이냐 file 진보교육 2014.04.16 1015
25 [초점] 2014, 초등돌봄교실은 안녕한가 file 진보교육 2014.04.16 871
24 [초점] 기존 전일제 교사의 시간제 전환이 노리는 것 file 진보교육 2014.04.16 1042
23 [초점] 전교조 법외노조 공방 file 진보교육 2014.04.16 629
22 [논단] 그람시와 교육 file 진보교육 2014.04.16 1000
21 [담론과문화] 코난의 별별이야기_『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전』을 보고 file 진보교육 2014.04.16 729
20 [담론과문화] 은하수의 음악이야기_생명력을 일깨우는 것들 file 진보교육 2014.04.16 755
19 [담론과문화] 윤주의 육아일기_새로운 종이 나타났다! file 진보교육 2014.04.16 747
18 [담론과문화] 강가딘의 세상읽기_非正常의 頂上化 file 진보교육 2014.04.16 567
» [담론과문화] 눈동자의 사랑과정치_마녀 사냥은 근대 유럽지배층이 저지른 원죄다 file 진보교육 2014.04.16 569
16 [전망] 근쥐의 근심 file 진보교육 2014.04.16 402
15 [전망] ‘진지전’으로서의 학부모운동 : 학부모 운동론의 정립을 위한 이론적 모색 file 진보교육 2014.04.16 705
14 [현장에서] 교사로서 몸부림치기_교단일기 두 번째 이야기 file 진보교육 2014.04.16 610
13 [현장에서] 동성애를 선동하라 file 진보교육 2014.04.16 699
12 [현장에서] 2014년 학교비정규직 상황과 주요 활동 계획 file 진보교육 2014.04.16 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