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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읽을거리4_내 친구 니코스(Nichos)

2006.03.07 17:13

진보교육 조회 수:2463

내 친구 니코스(Nichos)

김유현ㅣ교육정책이론분과 연구원


서울에서 출발하여 27시간 동안 꼬박 비행기를 탔다. 완행 비행기가 따로 없었다. 서울서 타이빼이로, 타이빼이에서 방콕으로,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그리스의 아테네로… 싼 게 비지떡이라고 했던가…
새벽 5시에 아테네 공항에 내려 24시간 문을 여는 공항 보세구역내 환전소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폐 중 하나이면서 아직까지도 통용되는 그리스 화폐 ‘드라크마’를 환전하고 아테네 중앙 ‘신타그마(헌법)’광장까지 가는 직통버스를 탄다. 이른 새벽 버스는 거침없이 달려 30여분 만에 신타그마 광장에 다다른다. 국회의사당과 ‘대영제국' 호텔의 위용을 뒤로하고 고달픈 몸을 쉴까하여 호텔을 찾아 나선다. 여행 안내책자에 소개된 호텔을 찾는데, 미처 해는 뜨지 않았고 온통 그리스어로 쓰인 거리이름에 혼란을 느낀다.
그리스의 겨울은 모든 것이 더디 가는 시절이다. 열사의 해변을 그리워하며 구름같이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유럽의 여름과는 달리 지금은 동면의 계절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찾아간 호텔의 방값은 예상외로 비싸다. 몸은 힘들어도 배낭을 짊어지고 힘차게 거리로 다시 나선다. 겨울 날씨에도 배낭을 메고 걷는 동안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오토바이를 탄 경찰이 보기가 안쓰러운지 나를 태워주고 저렴한 숙소를 찾아준다.
오전 11시, 공사장의 소음과 창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으로 잠이 깬 나는, 피곤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서울의 명동 격인 ‘Ermou'거리가 있는 크레타 섬에 가기 위해 나선다. 눈부신 햇빛을 손으로 가리고 거리를 나서는 순간 저 멀리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로 순백의 아테네 여신을 위한 파르테논 신전이 위압적으로 서있다.
싹싹한 여행사 직원의 여행상품 호객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달랑 배표만 구입한다. 선실표가 아닌 갑판표! 밤 8시에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6시에 도착하는 유람선이다.
짐을 챙겨 항구로 가서 배에 올라탄다. 그리스 정교의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그런지 배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멀어지는 피레우스 항구의 불빛을 바라본다. 두어 시간 있으려니 지중해라도 겨울은 겨울인지라 슬슬 몸이 떨려온다.
선내의 레스토랑에 들어오니 여기저기 소파에 사람들이 쓰러져 자고 있다. 비어있는 소파는 없고 결국 바닥에 몸을 뉘고 배낭을 배게 삼아 잠을 청한다. 사람들의 소음과 담배연기에도 몸이 피곤하니 금새 골아 떨어졌다. 어수선한 소리에 일어나니 지중해 최대의 섬, 서양 최초의 문명인 미노스 문명의 발상지 크레타의 이라클리온에 도착한다.
좁고 오래된 골목을 돌고 돌아 이라클리온에서 유일한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그리스 출신의 가수 나나무스꾸리를 닮은 뿔테 안경의 여주인이 무심하게 손님을 맞는다.
여섯 명이 잘 수 있는 방에 하루 묵는데 한국 돈으로 오천 원이란다. 여름이라면 침대하나 차지하기 어려웠겠지만 때는 겨울이라 한가하기만 하다.
넓직한 방에 덩그마니 이층침대가 3개 있고 게다가 이층은 모두 비어있다. 결국 세 명이 묵는 방에 나를 포함해서 두 사람 이렇게 셋이 묵게 된다.
비몽사몽간에 짐을 풀고 아침을 먹기 위해 카페로 간다. 달짝지근한 그리스 탠케익과 원두커피를 그대로 넣고 끓이는 Greek Coffee 를 마시니 카페인 진액을 마신 것처럼 잠이 확 달아난다. 미노스 문명의 발상지인 크노소스 궁전을 보고 저녁을 먹고 숙소로 오니 같은 방을 쓰게 된 두 명의 룸메이트가 먼저 와 있다. 한 명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세르비아인 니콜라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영국에서 온 죤이다.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다 보니 죤은 나보다 세 살 위이고 니콜라스는 동갑이다. 니콜라스는 나에게 친근하게 니코스라고 부르라 한다.
다음날 아침 7시, 니코스가 잠을 자는 나를 깨운다.
“일 나가자.”
"무슨 일?”
“지금이 한창 오렌지를 따는 계절이라 일자리가 많으니 나랑 같이 농장에 가자.”
“나는 박물관에 가야하니까, 일 안 나갈란다.”

아마도 죤과 니코스는 나를 여행객이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 온 이주 노동자로 생각했나보다.
박물관을 다녀온 후 숙소에 오니 그들이 와 있다.
“왜 일찍 왔어?” 내가 물으니,
“내일이 그리스 정교 크리스마스라 일자리가 없고 다 쉬네.”

‘쉬는 날은 모든 가게가 문을 닫을텐데…’
불길한 생각이 들어 헐레벌떡 거리를 나서니 정말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심지어 카페도 문을 닫아 빵은커녕 커피도 못 마시게 생겼다. 하릴없이 빈손으로 돌아와 미리 준비해온 과자와 빵을 먹고 있자니, 니코스가 잠깐 나가서 맥주며 먹을 것을 한 아름 사온다.
순간 뜨거운 것이 가슴에서 솟구쳤다. 호의를 선한 마음으로 받아 정성껏 맛있게 먹는다.
어느 정도 술이 돌아가자 죤과 니코스는 자신의 과거를 얘기한다. 니코스는 세르비아인으로 세르비아 민병대의 군인이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민족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을 학살하는데 가담했다고 한다.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유현! 나 다섯 살 난 아들이 있다.” 며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아들의 사진을 보여준다.
공책을 갑자기 달라고 하면서 자기 고향집 주소를 적는다.
“내년에 고향마을로 간다. 조그마한 시골마을인데 돈을 벌면 조그만 잡화점을 열어서 아들과 함께 살거야.”
“나중에 유고슬라비아로 와라, 유고슬라비아는 그리스보다 더 아름답고 아가씨도 예쁘다.” 라면서 동네 아가씨를 소개해 준다고 한다.
음식도 맥주도 다 마신 다음, 니코스는 죤에게 초보적인 영어를 배운다.
죤은 귀찮아하지 않고 성심껏 영어를 가르쳐준다.
아무런 대가 없는, 아무런 이득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코스모폴리탄적인 우정을 볼 수 있었다.

다음날은 공휴일이라 일을 나가지 못하는 룸메이트들과 먹기 위해 어렵게 식당을 찾아서는 커다란 통닭과 커다란 빵 그리고 그리스 포도주 두 병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 내일 아테네로 돌아간다. 오늘 밤이 마지막이야.”
“사진 한 번 찍자!” 니코스가 얘기한다.
셋이 뻘줌하게 사진을 찍고 오랜만에 고기와 포도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다.
다음날 아침 룸메이트들은 일찍 일어나 자고 있는 나를 깨우고는 굳게 두 손을 잡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테네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멀리 이라클리온의 항구가 보이고 길게 뻗은 방파제 그리고 방파제 끝으로 베네치아 사람이 세운 요새가 보인다.
  
몇 년 후 다시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에 갔다. 속절없는 줄 알면서도 나나무스끄리 닮은 주인여자가 운영하는 유스호스텔을 다시 찾았다.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주인여자를 빼다 박은 검은 머리의 딸이다.
“몇 년 전 제가 이 호텔에 묵었는데요. 그때 장기투숙하던 유고슬라비아 니코스와 영국인 죤이 혹시 지금도 묵고 있습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어머니한테 물어보면 될텐데…”
“엄마는 돌아가셨는데요.”
“죄송합니다.”

다시 배낭을 메고 항구로 향했다. 애초 며칠 묵기로 했었지만 반가운 친구들도 없고, 딱딱했지만 그리스 여자의 정기와 크레타인의 강건함을 지녔던 주인여자가 없는 이라클리온에 묵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았다.
몇 년 전 친구들을 두고 떠나면서 보았던 항구의 모습과는 달리 이번엔 무언가가 빠진 듯 허전했다.
그리고 배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바다를 가르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뒤로 뒤로 내달리는 포도주색 에게 해(Aegean Sea)의 빛깔은 내 가슴속의 빛깔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