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16호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며

2003.07.14 10:47

이영주 조회 수:1303 추천:4

전남 교육 노동운동의 과제와 전망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며

이영주 전교조 공주지회 사무국장



지난 2000년 충남지부 선거

 

2000년 겨울 충남지부장 선거는 정책적 입장을 달리하는 두 후보가 격돌하였다. 과거 몇 번의 경선이 있기는 하였지만 이번처럼 세 대결이 치열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합법화 이후 충남 지부 활동가들의 정책 지형이 그만큼 바뀐 것이다. 비합 시절 대통령 선거라는 그 물줄기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두 진영이 각자의 후보를 내고 선거를 치룬 적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압도적 다수와 극소수 비주류가 있었을 뿐이다. 더구나 비합이라는 객관적 조건으로 인하여 선거인단 역시 소수 활동가가 전부였던 시절이다. 그래서 선거결과는 너무 뻔하였다. 선거에 뛰어든 비주류는 선거결과에 연연하기 보다 "문제제기" 자체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극악한 탄압이 이어지던 시절, 경선은 큰 후유증을 동반하지 않았다. 선거가 끝나면 내부의 분열과 갈등은 권위주의 정권이라는 더 큰 적과 대치하면서 거대한 용광로에 녹아들었다.

그런데 2000년 경선은 양상이 바뀌었다. 이제까지의 극소수 비주류가 아니라 상당한 세를 확보한 비주류가 나타났다. 경선다운 경선이 가능한 정도까지 세력 비율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합법화 이후 조합원의 증대는 학교현장의 활동가들을 교체하는 계기가 되었고 폭발적으로 늘어난 선거인단은 선거결과에 대한 예측이 어려운 상황을 조성하였다. 물론 분회장들 혹은 지역의 활동가들의 입장에 따라 선거 판도가 결정나는 봉건적 현실은 여전하였으나 조합원의 증가는 분명 선거판세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전교조 창립 이후 충남지부를 세우고 이끌었던 주류 세력들은 언제나 비슷한 인물들이었다. 이는 전국 어디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집행부를 꾸리면서 비주류 세력들이 함께 하기도 하였다. 아니 세력이 함께 하기 보다 "특정 인물이 같이 참여"했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해직이라는 지독한 탄압을 견뎌야 했던 시절, 합법화라는 절박한 목표가 존재하던 시절, 내부의 입장 차이는 쉽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합법화 이후 주류 세력 내에서도 미세한 입장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격동이 휘몰아치던 시절에는 쉽게 포착되지 않았던 미세한 입장 차이가 합법화라는 열린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사업작풍과 투쟁노선"에 따라 그 차이가 분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2002년 선거에서는 정치노선까지 달리하게 된다.)

차이를 분명하게 했던 사건이 "정의여중고" 싸움이다. 1999년 서천의 정의여중고 4명의 교사가 재단으로부터 강제 전보되면서 시작된 이 싸움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1년여를 끌었다. 1999년 1년 동안 충남지부는 정의여중고 싸움에 매달려야 했으며 끝내 현직 교육감을 낙선시키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하지만 길고 힘든 싸움을 거치면서 많은 활동가들 사이에서 투쟁의 피로를 호소하는 투쟁혐오증이 증후군처럼 번져갔다. 이는 합법화 이후 전교조가 좀더 다른 모습으로 국민들 앞에 나서야 하며, 보다 대중적으로 학교현장에 착근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에게 선거시 호재로 작용하였다. 정의여중고 싸움의 "무리수(좌편향)"를 강조하는 이들은 2000년 선거를 통하여 집행부를 단일칼라로 구성하며 투쟁 위주의 사업방식을 지양하고 소위 '참실' 위주의 사업방식을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선거 홍보의 전면에 내세웠다.

그래서 충남지부는 정의여중고 싸움을 둘러싼 평가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두 진영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주류 세력 일부와 비주류 세력이 정의여중고 싸움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옹호하며 충남지부의 새로운 진영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충남지부는 기존의 주류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참실진영"(이 당시만 하더라도 자신들을 명명하는 호칭을 별도로 갖지는 않았다. 주류세력으로서 섹터방식의 별도 조직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랫동안 충남지부를 이끌어왔던 주류 입장에서 보면 충남 활동가들이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담이었다. 그래서 참실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편하게 부르는 단지 이름일 뿐이다)과 진보적 교육대안을 이야기하는 "진보진영" 이렇게 두 축으로 나뉘게 되었다.

2000년 겨울 선거 당시에는 두 진영 모두 정책 차이를 전제로 하여 조직적 편제를 갖추는 정파로 독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단지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만드는 수준이었다. 물론 정의여중고 싸움에 대한 평가에 따라 갈라지기는 하였지만 지도자의 개인적인 매력에 따라 무리지어 있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선거시기에 정책과 정견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지도자의 인물됨을 기준으로 자신의 정치노선을 결정하기도 하는 지라, 선거 시기의 정파(여기서는 정파라는 명칭을 쓰기도 사실 어려울 것이다. 단지 적확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사용할 뿐이다)라는 것이 특정한 정치노선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조직이 아닐 수도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2000년 선거는 시작되었다. 당선 이후 집행부는 "one color" 구성을 전제로 선거는 시작되었다. 선거결과는 4 : 6 패배였다. 두 진영의 세력판도를 그대로 드러낸 결과였다. 아니 활동가들의 세력판도를 드러낸 결과였다. 선거과정은 치열하였다. 어떤 이는 예측불허의 접전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의여중고 싸움 이후 지쳐있는 활동가들에게 "투쟁이냐 참실이냐" 하는 저들의 선거전략은 기가 막히게 적중하였다.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류되면서 강경파 투쟁주의자로 몰린 진보진영은 선거운동 기간 중 큰 벽을 절감해야 했다. 그리고 결과는 참담하였다. 선전했다고 자위하면서도 상처는 크고 넓었다.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딛고 일어선 2002년

 

선거가 끝나고 진보진영은 선거패배의 후유증을 딛고 활로를 모색한다. 그리고 정기적인 모임을 구성한다. 일명 충남진보교사모임. 운영위원회라는 일정한 조직 골간도 세우고, 선거를 같이 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회원구조도 정립하고, 온라인 소통체계를 담당하는 홈페이지도 꾸미고, 다양한 교육사업을 준비하기도 한다. 진보교육연구소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적인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한다.

그렇게 암중모색 절치부심 2년을 보내며 착실히 내공을 다진다. 기실 2년 동안 활동한 내용 중에 내세울 만한 것이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색할 정도로 빈약하기는 하지만 2002년 선거를 맞이할 동안 서로 연결의 끈을 놓지 않고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외연을 확대해 왔다고 성과있게 자평할 수는 있다. 또한 진보교사모임의 활동가들은 소속 지회 간부로 진출하여 대중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충남지부의 침로를 올바르게 견인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런 노력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진보교사모임을 통하여 의사소통과 정책논의를 긴밀하게 하였던 것이다. 가령 전국적 사업으로 등장한 7차 체제 폐지 투쟁 혹은 성과급 반납 투쟁은 진보진영 회원들이 소속한 지회를 중심으로 가열차게 전개되었으며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충남 지부를 견인하는 큰 힘이었다.

2002년 선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았던 초등의 일부 활동가들이 진보진영과 함께 선거를 치루기로 하였다. 2000년 선거 이후 꾸려진 충남지부 집행부의 투항적인 모습과 사업작풍에 실망한 초등의 일부 활동가들이 진보진영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는 두 번째 선거를 치루는 진보 진영에게 큰 힘이 되었다. 또한 선거패배의 아픔이 있는 진보진영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었다. 사실 2002년 선거를 준비하는 진보진영은 별 희망이 없었다. 조합원 확대라는 일관된 원칙으로 상당한 성과를 이룬 2000년 이후 집행부의 자신감을 꺾기에는 우리의 힘이 너무 미약하였다. 문화·체육대회 등 대중친화적 사업을 위주로 2년을 끌고 온 참실진영 집행부는 학교방문 등 지회 및 분회 활동가들과 접촉의 면적을 끊임없이 넓혀왔으며 인간적 유대를 튼튼하게 맺어오고 있었다. 전임이라는 집행간부의 객관적 잇점을 살려 일찍부터 선거를 준비하며 선거운동이 시작하기도 전에 대세론을 만들어놓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선거를 준비하는 진보진영은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2002년 선거가 시작되면서 전국은 참솔진영과 혁신진영으로 정립되었다. 이에 따라 충남도 참솔진영과 진보진영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지난 시기 선거패배의 주요 요인 중에 하나가 정책선거가 되지 못하고 학연과 지연에 따른 봉건적인 선거판 때문이었다고 평가한 진보진영은 정책선거를 위하여 "공정선거를 위한 선거규정 합의안"을 전격 제안한다. 학연 지연에 기초한 개인적인 선거운동을 비롯한 전화선거 등을 서로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가급적 충남의 모든 분회가 정책설명회를 하도록 독려하자는 내용이었다. 물론 참솔진영은 우리의 제안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공정한 선거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중립적인 활동가들에게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분회정책설명회를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실제 전체 분회의 40% 정도가 분회 설명회를 개최하였다. 이들 분회는 각 지회에서 덩치가 큰 분회들이었다. 즉 일정한 규모를 갖춘 대부분의 분회에서 정책설명회를 하였던 것이다.

분회 정책설명회를 통해 현장의 조합원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투쟁이냐 참실이냐" 하는 참주선동을 무력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선 국면에 따른 정치적 결정이 우리 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적극 방어할 수도 있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일이, 민주노총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일이, 노동자성을 강조하는 일이 교육운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노동운동의 통일성을 높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일임을 적극 선전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분명한 선거 쟁점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즉 참교육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도개선투쟁을 우선할 것이냐, 아니면 일상적인 참교육 사업을 우선할 것이냐" 하는 정확한 쟁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는 전화선거에서도 위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짤막한 전화통화를 통하여 선거쟁점을 분명히 설명하고 정책에 따른 투표를 호소하였다. 학연 지연 등의 조직선거가 되지 않도록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현장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현저하게 열세인 조직세를 만회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일방적인 게임으로 끝날 줄 알고 방심하고 있던 참솔진영이 선거 후반에 들어서면서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자신들의 활동가가 있는 분회에서는 정책설명회를 해태하는 경우도 있었다.

뚜껑이 열렸다. 설마 하던 결과가 나왔다. 다들 너무 몰랐다.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한 한쪽은 아연실색하였고 고군분투하기는 하였지만 뒤집기에는 힘에 부칠거라고 예상한 또 다른 한쪽은 감격하였다. 그러나 선거는 끝나지 않았다. 4표 차이라는 너무도 아슬아슬한 결과는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후 모두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재검표와 4개 지회 재투표로 이어지며 지루하게 끌던 선거는 2003년 3월이 되어서야 막이 내렸다. 모두가 돌아가기 어려운 강을 건너며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안팎의 고난속에서도 굳건히 제 갈길 가야

 

충남은 13년 만에 전혀 다른 색깔의 집행부가 들어섰다. 그동안 주류세력이 지부 집행부를 맡으면서 비주류 세력이 일부 집행간부로 일하기는 하였지만 충남지부의 색깔이 이번처럼 확연하게 구분되기는 분명 처음이다. 그래서 우려와 기대 섞인 시선이 교차하였다. 혹자는 경험이 부족해서 잘 할 수 있을까 염려하며, 혹자는 이제 정말 제대로 바뀌겠구나 기대하며....

충남은 지금 보성초 사태로 인하여 교육청 앞에서 60일 가까이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 네이스 싸움으로 인하여 선거후유증은 증세를 더해 가고, 중립적인 위치에 있던 다수의 활동가들은 지루한 싸움으로 짜증을 내고 있다. 선거가 끝나고 학교 현장을 두루 방문하며 선거후유증을 위무하고 치유해야 할 지부 간부 및 활동가들이 정신없이 쏟아지는 투쟁현안에 혼비백산이다. 일상사업은 실종되거나 앙상해지고 있으며 학교 현장의 활동가들은 긴급하게 떨어지는 투쟁현안에 손발이 다 짤린 지부 집행부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진보진영 내부에서조차 투쟁 현안에 대한 다른 견해가 표출되면서 일사불란한 사업집행이 차질을 빚고 있다. 인재풀의 한계는 적재적소에 능력있는 인재를 발탁하기가 쉽지 않고 이는 사업추진의 미숙으로 나타난다. 충남 교육계를 장악하고 있는 특정학맥에 연이 별로 없는 집행부는 교섭과 투쟁의 양동작전을 구사함에 있어 교육청과 물밑교섭을 중재할 사람을 찾기 어렵고 일상사업에 대한 교육청의 물적 지원을 쉽게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13년 만에 충남지부를 책임진 진보진영은 안팎의 어려움에 처해있다. 당선 이후 진보진영만의 별도 모임을 하기가 낯간지러운 측면이 있어서, 아니 너무 바쁘고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한번도 별도 모임을 하지 못했다. 상호 정책을 공유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며, 지부 사업을 현장에서 모범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응집력을 준비하는 모임조차도 마련하지 못했다. 서로간에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모임을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마무리 수순에 접어든 여러 투쟁이 정리되면 늦게라도 소통구조를 활성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집단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지난 몇 개월을 평가하고 인식의 차이를 확인해야 된다. 2003년 상반기, 충남의 진보진영에게는 시련과 도전의 시간이었다. 다시 신발 끈을 매고 허리춤을 추슬러야 한다. 시작은 지금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