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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도론의 비판

2001.10.15 13:34

장하준 조회 수:1836 추천:1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도론의 비판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도론의 비판

※이 글은 장하준의 논문을 간추려 옮긴 것임.

 1. 신자유주의의 해부

(1) 신고전파와 오스트리아 학파의 불순한 동맹

  신자유주의가 갖는 가장 큰 자기모순의 근원은 신고전파와 오스트리아 학파(그리고 그 아류 시카고-버지니아 학파)간의 불순한 동맹에 의해 탄생했다는 점이다. 이 동맹 관계에서 신고전파는 그 논리적인 정교함, 학계에서 누리는 지배적인 위치를 이용하여 '지적(知的)인 정당성'을 베푸는 구실을 하며, '자유', '기업가 정신' 따위 정치적인 호소력은 크지만 정교하지 못한 개념을 부려 쓰는 오스트리아 학파는 정치적인 수사(修辭=꾸밈말)을 덧씌운다. 두쪽의 사상적인 틈새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우두머리 하이에크가 신고전파를 매섭게 비판한 여러 글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서로 아귀맞지 않는데도 두 학파의 '불순한 동맹'은 변함없이 이어지는데, 이는 두 쪽이 호혜적(互惠的)인 분업 관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손꼽을 예는 91년 동구권 몰락 이후 벌어진 '이행 논쟁'이겠다. 계획경제가 몰락한 뒤, '자본주의를 즉각 채택할 것'을 부르짖었던 사람들이 국민들 지지를 얻으려고 처음 내세웠던 수사(修辭)는 <자유, 기업가 정신> 같은 화려하고 충동적인 오스트리아 학파의 것이었지, <일반 균형, 파레토 최적> 따위 메마르고 기술적인 신고전파의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동원(動員)을 통해 권력을 쥔 정부들이 '자문역'을 구할 때는 자신들의 정책의 정당성을 높이려고 오스트리아 학파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유럽의 '유명한' 대학에 몸 담은 신고전파 학자들을 택했던 것이다.

  신고전파는 오스트리아 학파와의 동맹을 통해 그 정치적 설득력을 높였지만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대가란, 오스트리아 학파의 강력한 불(不)개입주의 성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신고전파 이론에 들어있는 '개입주의적 성향'(→이는 후생경제학의 '시장 실패론'에 잘 드러나 있다.)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적 신고전파가 자기의 개입주의적 성향을 억누르는 데는 크게 보아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첫째는, '시장 실패론'의 논리를 받아들이되 그것을 '(국가)개입 반대론자'들이 정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영역에는 들이밀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외부성(外部性)'의 논리를 '환경 문제' 같이 별로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은 분야에는 힘껏 적용하면서, 똑같은 논리로 정당화될 수 있는데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산업 정책' 같은 데는 적용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신고전파 이론만 갖고는 어디까지가 '옳은' 국가 개입이고, 어디부터가 '옳지 않은' 개입인지 판별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들은 '시장 실패'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생겨나는 경우가 드물다>는 식으로 어정쩡하게 '불개입주의적' 결론을 맺는 것이다.

 또다른 방법: '진지한' 학술 논의와 '대중적인' 정책 논의를 갈라 내서, 앞엣것에는 신고전파 이론을, 뒤엣것에는 오스트리아 학파 이론을 들이댄다. 학술 논문을 쓸 때는 신고전파 완전경쟁 이론에 터하여 엄격한 '반독점 정책'을 옹호하다가, 정책 토론 마당에 나가서는 '기업가 정신을 해치지 않기 위해' "반독점법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면 곤란하다."며 오스트리아 학파의 관점에 서서 두둔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옛 동구권의 경제개혁 과정에서 흔히 나타난 두 이론 진영의 분업 관계도 같은 맥락이다.

  세 번째 방법: '시장 실패'의 논리에 터하여 개입주의 정책을 옹호하는 이론 모형을 세우되, 그 '정책적 함의'를 따지는 부분에 가서는, "현실 세계의 정부들은 부패하고 무능하니까 추상적 모형에서 이끌어낸 개입주의 정책을 쓰지 않는 것이 낫다."고 발뺌한다. 이른바 '전략적 무역 이론'을 세운 크루그만이 손꼽히는 예다. 그는 개입주의적 무역 정책이 사회적 후생(厚生)을 높인다고 결론 맺어지는 정교한 이론 모형을 만들어 놓고도, 결론 대목에서 "실존하는 정부들을 믿을 수 없다."는 핑계를 대서 자신의 모형의 현실 적용성을 부정했는데, 그 때문에 오스트리아파로부터 "그런 결론이라면 무엇 때문에 정부 개입을 옹호하는 모형을 만드느라 헛고생 하느냐?"는 빈정거림을 당했던 것이다.

  (2) '국가 개입' 문제에 대한 신고전파 이론의 불확정성

  앞엣 두 진영 간의 갈등 말고도 신자유주의는 또다른 내부 분열 요소를 간직하고 있는데, 이는 신고전파 안에서도 '국가의 바람직한 구실'에 대해 합의(合意)가 없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신고전파는 강력한 개입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외부성'의 논리를 충실히 따르다 보면,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의문이 들 정도로, 국가의 '정당한' 개입 영역은 거의 무한대(無限大)로 넓어질 수 있다. 대부분의 재화(財貨)는 그 생산 과정에서 '오염'이라는 형태로 부(負)의 외부성을 빚어 낸다.

 '연계 효과'나 '금전적 외부성'을 고려하면 정(正)의 외부성을 가진 재화는 수두룩하다. 신고전파 몇몇은 생필품(生必品)의 경우, 그 소비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범죄를 일으키므로 외부성을 가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따라서 생필품 구입에 '정부 보조'가 필요하다고까지 부르짖는다. 또, 개인의 선호 체계 사이에도 상호의존성이 있다. 이를테면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든가 우리가 사치품을 사들일 때 그 재화의 내재적 성질뿐 아니라 남들이 소비하지 못하는 것을 소비한다는 만족감에서도 '효용'을 얻는 것들이 그 본보기다.

  예는 숱하게 더 들 수 있다. 요컨대 신고전파 이론은 국가의 '바람직한 역할'에 관해 뚜렷한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1920-30년대 '계산 논쟁'에서 오스카 랑게가 신고전파 일반균형이론 시각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옹호했던 것은 신고전파 이론을 통한 '국가 개입 옹호'가 거의 무한히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어떤 신고전파 학자가 <개입주의냐 아니냐>는, 그가 간직한 경제학 '이론'보다는 그의 정치적 '편향'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몇몇 신고전파가 부르짖듯이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바람직한' 정부 개입과 그렇지 못한 개입을 가를 수 없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2.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도론의 비판

(1) '자유 시장'이란 무엇인가 - 국가 개입의 정의와 측정

 요즘 대다수 신고전파가 내세우는 입장은 "자유 시장이 최적(最適)의 결과를 낳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고, 그런 경우에도 이른바 '정부 실패' 때문에 국가 개입이 꼭 사회 복지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담론 구조 자체에 따져야 할 구석들이 많다. 왜 그런지 풀이하려면 먼저 "<자유 시장>이란 과연 무엇이냐?"는 물음부터 던져야 한다. "웬 한가로운 질문이람? 무엇이 좋은/나쁜 국가 개입인지는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무엇이 국가 개입인지/아닌지는 분명한 것 아닌가벼?"하고 혀를 찰 분도 있겠지만 결코 한가로운 질문이 아니다.

  사례 1 =아동 노동 : 지금 선진국 백성 대다수는 '국가가 아동 노동을 금지하는 것'을 "국가가 노동 시장에의 진입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개입 행위"라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19세기 유럽 자본가들이나 20세기 후진국 자본가들 여럿은 그것이 '인위적인 제한'이라는 구실을 붙여 '아동 노동 금지'를 반대해 왔다. 왜 그런가?

  이것은 지금 선진국들에서는 "어린이들이 일하지 않고 교육 받을 권리(=고용주들이 어린이는 고용해서 안 되는 의무)가 노동 시장 밑에 깔려 있는 '권리 / 의무 구조'에 완벽하게 통합돼 있으며, 따라서 아이들을 고용한다면 틀림없이 이득을 챙길 기업가들조차도 대부분은 '아동노동 금지'에 찬성하고, 한발 더 나아가 그것을 '국가의 개입 행위'로 생각하지조차 않기 때문이다. '아동 노동의 금지'가 '노동시장에의 자유로운 진입'을 가로막아 '효율성'을 떨어뜨리는지/아닌지 따지는 것은 이들 나라에서 더 이상 정책 토론의 옳은/온당한 주제가 못 되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유럽이나 지금의 후진국에서처럼, 어린이들이 일하지 않고 교육받을 권리가 사회 전반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경우에는 국가에 의한 아동 노동 금지는 (찬성쪽이건, 반대쪽이건) '개입 행위'로 비춰지며, 그 '효율성'을 따지는 것이 정당한 일이 된다.(--경제학적으로 볼 때 아동 노동이나 노예제의 효율성을 못 따질 이유는 없다.--)

  사례 2 = 환경 기준 : 갖가지 환경 기준이 처음 OECD 나라들에 들어왔을 때, 이 규제를 정부가 기업활동의 자유(--공장 매연/폐수에 관한 기준)나 개인의 자유(--자동차 배기가스 기준)를 부당하게 짓밟는 '개입' 행위라며 삿대질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환경문제의 중요성이 널리 인식된 요즘은 사람들 대부분이 '환경권'에 동의하므로, 환경 관련 규제를 '개입'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가령 미국 국민들 중에서 '배기가스 기준'이 있다 하여 자기 나라 자동차 시장이 '자유 시장이 아니'라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 그런데 환경권이 미국만큼 튼튼하지 못하여 미국만큼 엄격한 배기가스 기준을 들이대지 않는 나라의 자동차 수출업자 눈으로 보면, 미국의 이러한 환경 기준은 저희 나라 자동차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무역 장벽'이며, 따라서 미국의 자동차 시장은 '자유시장이 아닌 것'이다.

  사례 3 = 이민 규제 : 신고전파 중에는 '최저 임금제'와 '지나치게 높은 근로 기준'이 저임금과 형편없는 근로조건이라도 견디며 일하겠다는 노동자들의 노동시장 진입을 인위적으로 가로막는 부당한 국가 개입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들 중에 같은 논리에 터하여 이 나라들이 지금 펼치고 있는 '엄격한 이민(移民) 규제'를 '노동시장의 진입을 인위적으로 가로막는 짓'이라고 열 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자유로운 노동 시장 진입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이민 규제'는 최저임금제와 다를 바 없다. 이들 신고전파가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들이래서 그런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한 나라 국민에게는 외국인의 진입을 규제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꼭 그렇게 볼 것은 없다. 우리가 여기서 보여주려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모순점이 아니다. 어떤 시장이 '자유 시장'인지/아닌지 따지는 데는 그 시장에의 참여자와 그 참여를 원하는 사람들의 '권리 / 의무'에 대한 사전(事前) 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리/의무 구조를 규정하는 갖가지 제도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제도들은 ⓐ이익 집단들의 조직/활동을 규제하는 공식/비공식 규칙들(...정치단체 결사, 기업 설립, 노조 결성, 로비 활동에 관한 법규정, 사회 통념)

ⓑ'공평성' '천부적 권리' 따위 권리/의무 규정에 관련된 기본 개념에 관한 공식/비공식 이데올로기들(...사유재산권, 노예제 부당성에 관한 믿음, 아동 교육권에 관한 사회 여론...)

ⓒ권리/의무 구조를 바꾸는 절차에 관한 공식/비공식 제도들(...법령 개정 규칙, 정당한 권리로 수용되는 때/관습...)

  애초에는 아주 간단해 보였지만, '자유 시장'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은 전혀 간단치 않다. 그리고 이 문제는 우리가 '시장 실패'를 살피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하는 물음이다. 더 나아가 제도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유 시장'을 규정하려는 노력 자체가 헛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든 시장에는 누가 어떤 조건으로 참여하느냐는 데 대한 '정부의 개입'이 웬만큼이라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국가 개입은 어떻게 측정하며 왜 문제가 되는가

  국가 개입의 측정 방법의 바탕에는 나름의 국가 이론이 깔려 있고, 따라서 이 문제는 그저 기술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흔히 많이 쓰여온 두 가지 국가개입 척도/잣대는 ㉠국민 소득에서 '국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 ㉡국민 소득(또는 투자)에서 공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인데, 문제는 이 잣대들이 <국가의 크기>만 잴 따름이지 그 <개입 정도>를 살피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커다란 국가'가 반드시 더 '개입'을 많이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긴데, 이는 동아시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80말-90초 동아시아 경제발전 논쟁에 끼여든 여러 신고전파들은 이 나라들이 모두 '작은 정부'를 갖고 있음을 짚어 내고는(...'대만'의 공기업 부문이 비사회주의권에서는 가장 컸다는 사실은 슬그머니 덮어두었다...), 이것은 <정부가 개입을 덜할수록 경제가 성공한다>는 자신들의 이론을 뒷받침해주는 썩 어울리는 증거라고 내세웠다.(가령 '세계은행'의 보고서) 그러나 이런 주장이 안고 있는 문제는, 이렇게 내세우는 사람들이 동아시아에서 국가 개입 정도를 측정하려고 쓴 잣대가 '정부 지출'이나 '공기업의 크기' 같은 전통 잣대였던 데 견주어, 동아시아 나라들의 국가 개입 방식은 전통 잣대의 바닥에 깔린 국가개입 이론에서 생각한 것과는 달랐고, 따라서 이 전통 잣대로는 그 국가 개입을 제대로 잴 수 없었다는 점이다.

전통 잣대의 바닥에 깔린 세계관 속에서 국가가 개입하는 방식은 '생산 수단의 소유'와 '조세/보조금을 통한 자원 재분배'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이것들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개입이 이뤄져 왔다. 주로 쓴 것은 ㉠진입, 설비 투자, 가격 매기기, 기술 도입 따위에 관한 갖가지 규제  ㉡은행 대출에 대한 국가 개입  ㉢갖가지 공식/비공식 대화 채널을 통한 기업에의 영향력 행사 따위다. 이런 차이를 보면 전통 잣대로 볼 때 동아시아 나라들이 '불(不)개입주의'로 비쳤던 것은 이해가 간다.

  전통 잣대의 한계는 동아시아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몇몇 논자들은, 우리가 흔히 '자유방임주의 정부의 표상'으로 여기는 미국 연방정부가 국방 관련 연구개발비 지출이나 국방 물자 구매 정책을 통해 항공, 정보통신 같은 주요 산업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짚어낸다. 그렇다면 왜 미국 연방정부가 '산업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환상을 품은 사람이 많은가? 아마도 그 환상은, '국방'이라는 것이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자들마저도 '국가가 맡아야 할 최소한의 정당한 기능'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거의 모든 사람이 '국방 정책'을 통한 국가 개입은 무조건 옳고, '효율성'의 차원을 넘어선 문제라고 여기는 탓일 터!

  우리가 말하려는 점은, 국가 개입의 정도를 재는 여러 잣대들은 특정 제도 맥락에서 이론화되었고, 따라서 어떤 제도 맥락에서 개념화된 특정 잣대를 딴 제도 맥락을 가진 사회에 무턱대고 들이미는 것은 인식의 오류를 낳는다는 것이다.

2) 시장 실패란 무엇이며 얼마나 중요한가

 시장은 언제 실패하는가

 '시장 실패'란 실존하는 시장이 '이상적인' 시장이 해야 하는 구실에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적인' 시장이란 과연 무엇인가? '완전경쟁 시장이야말로 이상적인 시장'이라 여기는 학자들이 꽤 되지만, 신고전파의 완전경쟁시장 이론은 여러 시장 이론의 하나일 뿐이다. 특정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실패하고 있는' 시장이 딴 관점에서는 '정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사례 1 : 신고전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장기구의 가장 큰 실패를 '지나치게 불공평한 소득 분배'라고 짚어낸다. 그러나 신고전파에게는 이것이 시장의 실패가 아니다. 그네들은 '이상적인 시장'이 '공평한 소득 분배'를 베풀어야 한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브라질 같은 나라의 소득분배가 불공평하고, 상대가격의 왜곡을 가져오지 않는 한번의 소득 이전을 통해 재분배된다면 그렇게 개선되는 것이야 바람직하다고 얘기할 사람도 있겠지. 그러나 이렇게 '개혁적인? 자비로운?' 신고전파마저도 불공평한 소득분배가 시장의 실패라고 여기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다.

  사례 2 : 신고전파에게는 '불완전 경쟁'이 가장 큰 시장 실패의 하나다. 그러나 슘페터와 맑스에게는 '불완전 경쟁'이 기술혁신에 터한 역동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이다. 거꾸로 말하면, 신고전파에게 완벽한 시장(=완전경쟁 시장)이라도 그것이 기술혁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슘페터에게는 실패한 시장으로 비친다는 얘기다.

시장 실패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시장 실패'는 신고전파에게는 심각한 문제이지만, 딴 관점 특히 제도론에서는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

  신고전파 경제학은 '시장에 관한 이론'이다.(....그것 빼고는 시체다. 그나마 제대로 된 시장 이론도 아니고, "숲 속에 외롭게 살면서 도토리와 나무 열매나 교환하는 인간들만 존재하는 물물교환 경제의 이론일 뿐"이다.) 그 이론의 세계에서는 '기업'도 한갓 생산함수일 뿐이지 진정한 뜻의 '생산 제도'가 아니며, 현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여러 제도들(기업연합, 노조, 갖가지 생산자 네트워크)은 아예 不在하거나 존재한다 받아줘도 '시장의 정상적인 기능'을 저해하는 경직성 쯤으로 비치는 것이다.(....이들 학자 나리들에게 합법화되기 전의 민주노총이나 전교조가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까? 실체가 없다고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 속에서나 가끔 나타나는 유령?...)

  따라서 '시장 = 경제'로 보는 신고전파에게 시장의 실패는 경제체제 전체의 실패를 뜻하는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들 눈에는 시장 바깥에 존재하는 유일한 제도는 ('시장'의 반대 명제로서의) 국가이기 때문에 시장 실패의 유일한 해결책은 '국가 개입'이다.

  하지만 '시장'을 자본주의 체제를 이루는 여러 제도의 하나일 뿐이라 여기는 제도론에서는 '국가'말고도 여러 가지 非시장 제도가 있어서 시장이 실패하더라도 경제활동을 엮어낼 수 있다고 본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경제활동 대부분은 기업 같은 조직 안에서 위계질서적 명령체계를 통해 이뤄지며, 시장을 통해 이뤄지는 비중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를테면 '독과점'의 특징을 갖는 근대 산업 여럿은 신고전파에게는 '시장 실패'로 가득차 있지만 이 산업들이야말로 기술혁신과 성장의 근원이었음을 떠올리면, 이 산업들에 있는 독과점체제는 시장제도의 '성공'의 근거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시장 실패가 없다'거나, '별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게 아니라(...대부분의 경우,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시장'이라는 것이 이른바 '시장 경제'(→'자본주의 경제'라 부르는 것이 더 온당하다.)를 이루는 여러 제도의 하나일 뿐이라는 얘기다. 자본주의는 교환 제도로서의 시장, 생산 제도로서의 기업, 이들간을 엮는 제도의 창조자/규제자로서의 국가, 그리고 여러 딴 제도들의 복합체인 것이다. 그런데 신고전파는 그중 한 귀퉁이만 쳐다보고 있다.

(3) 태초에 시장이 있었다? - 시장 우선성의 가정

  가장 깨인 신고전파와 가장 뒤처진 제도주의 경제학자 간의 차이를 결정짓는 주된 잣대는 그가 '시장 우선성의 가정'을 받아들이고 있느냐 여부다. 신고전파는 '태초에 시장이 있었나니라.'고 믿으며, 국가 따위는 저절로 생겨난 시장에 대한 '인위적인 대용품(代用品)'일 뿐이라 본다.

  '시장 우선성 가정'의 대표적인 예는 신자유주의 국가론에서 많이 쓰이는 '사회계약론적 국가 기원론'이다.(→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 이들에 따르면 '국가'는 법질서(특히 재산권 보호)라는 공공재 공급에 관련된 집단행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겨난 제도이다. 이들에 따르면 '법질서'는 일단 공급되면 그 공급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 혜택을 누리는 '공공재'이므로, '시장 기구'에 의해 '최적 수준'으로 공급될 수 없고, 따라서 이런 시장 실패에 대응하여 국가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자신도 털어놓듯이, 현실의 역사에서 '국가'는 시장이 생기기 이전에 탄생했다!

  짚어둘 점은, 누가 '시장의 우선성'을 가정했다 하여 꼭 그가 '국가 개입'을 반대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장의 제도적 우선성을 (적어도 암묵적으로) 믿으면서 아울러 폭넓은 국가 개입을 옹호하는 신고전파도 많다. 앞서 보았듯이, 신고전파 이론으로 정당화하지 못할 국가 개입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국가 개입을 널리 인정한다 할지라도 신고전파에게는 이런 것들이 '자연적인 (시장)제도'에 대한 '인공적인' 대체물일 뿐이다.

  태초에 시장은 있지 않았다! 자본주의 발흥 이전에 '시장'이라는 것은 국지적(局地的, local)인 생활필수품 교환이나 귀금속, 향료 같은 사치재의 국제 교역을 빼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가장 생각이 트인 신고전파 스티글리츠마저 '시장은 자연적으로 발달한다.'고 믿지만,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자본주의 발달 초기에는 '시장의 형성 과정' 자체가 <국가의 의도적인 개입 행위의 산물>이었다.

  폴라니에 따르면, 흔히들 시장경제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여기는 '영국'에서마저도 시장 경제의 탄생에 '국가 개입의 역할'은 지대했다. 자유 시장으로 가는 길은 지속적이고 중앙집권적이며 통제된 개입의 엄청난 증가에 힘입어 열리고 유지되었다. 아담 스미스의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자유'를 인간 사회의 필요와 양립(兩立)시키는 것은 지극히 복잡한 일이었다. '인클로저'와 관련된 숱한 법안들의 복잡성,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이후 처음으로 중앙정부에 의해 감독되었던 신구빈법(新救貧法)의 운영에 필요했던 관료적 통제, 도시 개혁의 집행을 위해 늘어난 정부 행정업무 따위를 생각해 보라.

  흔히 자유시장 경제의 '귀감'으로 알려진 미국의 경우에도, 재산권 확립, 주요 하부구조의 제공(철도, 전신 체계), 농업 연구의 지원에서 국가가 펼친 여러 개입이 그 자본주의 초기 발전에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나팔꾼 세계은행마저도 수긍하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야말로 '유치(幼稚) 산업 보호론'의 본고장이며, 2차대전 전까지 백여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관세율(...40% 웃돌 때가 대부분)을 통해 이를 밀어붙였음을 떠올리면, 미국의 '시장 경제'의 발달에 국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영국과 미국 아닌 딴 나라들을 보아도 (홍콩을 빼고는) 인류 역사상 일정 기간 '국가 개입' 없이 산업화에 성공하여 선진국이 된 예는 없다. 만일 지금 선진국이 된 나라들 대부분이 정부 개입을 통해 '부자연스레' 발달했다면, 과연 '시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런' 존재인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

  '시장'이라는 제도에 우선성을 매기느냐, 아니냐에 따라 경제 개발의 청사진은 달라진다. 신자유주의자들이 권고하여 자본주의로 이른바 '빅뱅' 방식에 의해 급격히 '이행'하려 했던 <여러 구동구권 국가들이 지난 십여년 간 겪어 왔던 경제 붕괴와 사회 해체>는, 잘 굴러가는 국가 없이 잘 운영되는 시장 경제를 세우기가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신자유론자들이 믿듯이 시장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진화(進化)하는 것이라면, 빅 뱅 방식을 채택한 구동구권 국가들은 공산주의 붕괴 이후,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미 제대로 구실하는 시장경제를 세웠어야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지난 20여년 간 개발도상국들이 채택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무수히 실패를 거듭한 사례를 생각해 보아도 '시장의 우선성'의 가정에 기초하여 "국가 개입만 멈추면 억눌려 있던 시장들이 되살아나고, 없던 시장들도 스스로 생겨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 알 수 있다.

 (4) 시장의 탈정치화는 가능한가 - 구자유주의 정치의 부활

  신자유론의 주된 명제의 하나는, "정치가 시장의 합리성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갖가지 이익 단체들은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여 자기 이익을 보호하는 '진입 규제', '보조금', '관세' 따위를 쟁취하고 그 과정에서 '가격의 왜곡'을 가져와 시장 기능을 저해한단다. 따라서 신자유론자들은 이같이 '정치가 경제를 부패'시키는 것을 막으려면 시장이 탈정치화돼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첫째로,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둘째로, 그나마 최소한의 국가 개입이 존재하는 영역에서도 행정 집행 규칙을 강화하고, 셋째로, 통화 관리나 독점 규제 등 정치적 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많은 정책 집행과 관련해서는, '단순 명료한 행동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독립적인' 기구(...독립된 중앙은행)를 세워 정책 집행자의 자율성을 최소화해야 한단다.(...80년대 중반 '자유주의 혁명' 이후, 뉴질랜드는 중앙은행 총재의 봉급, 임면 여부를 물가상승률에 곧장 연계했다.)

 모든 가격은 정치적으로 결정된다 : 시장의 정치성

  '자유 시장'에 의해 결정된 가격들은 정치적 과정과 무관하게 과학적/객관적으로 결정된 것일까? 신고전파는 재산권이나 여러 경제권리(와 의무)의 분배 상태를 '객관적'으로 주어진 '초기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가격 기구의 기능을 분석한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경제적 권리의 분배/재분배는 매우 정치성 짙은 과정이었다. 영국 자본주의 초기에 벌어진 카톨릭 교회 재산의 수탈이나 인클로저를 통한 봉건 공유지(共有地)의 사유화(私有化) 따위를 통한 '자본의 본원적 축적'은 재산권을 비롯하여 경제 권리의 배분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정치적인 것인지 보여준다. 요즘으로 보면, 구동구권이나 몇몇 후진국들의 '공기업 민영화' 과정에 득시글거린 정치적 거래, 정실주의(情實主義), 횡령 따위가 그 본보기라 하겠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접어두더라도, 지난 20-30년간 '환경권'이나 '소비자 권리'를 세우려고 얼마나 많은 정치적인 노력들이 들어갔는지 떠올리면 신자유론자들이 '객관적으로 주어진 초기 조건'이라 여기는 권리/의무 체계부터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결정'되는지 너끈히 짐작한다.

  또,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가격들 중에 '정치성' 없는 것이 있는가? 첫째, <임금과 이자율>의 결정은 엄청나게 정치적인 과정이다. 임금 수준은 최저임금제, 근로기준법, 세금제도 따위 잘 알려진 정치적 변수뿐 아니라 우리가 흔히 잊기 쉬운 '이민 통제'라는 엄청나게 정치적인 행위에 의해서도 결정되는 것이다.

  '이자율'의 결정도 매우 정치적 행위임이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최근 유럽 단일통화 출범과 관련된 논쟁에서 여러 사람이 짚었듯이, '통화 정책 자주권'이 '정치적 주권'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 떠올리라. 신자유주의의 유토피아 미국에서 채택하는 '식품 안전성'에 관한 갖가지 규제, 공해 규제, 수입 규제 따위를 생각하면 "탈정치화된 시장 가격이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 점을 밝혔다 하여, 그 반대쪽 맨 끝에 서서 "자원 배분과정을 완전히 정치화(政治化)시키라."고 내세우려는 뜻은 아니다. 첫째, 어떤 자원 배분 기구가 어느 만큼의 '객관성'도 없이 완전히 '정치적 협상'에 의해 운영되는 것으로 비친다면 백성들에게서 그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일어나 그 기구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둘째, 자원 배분의 결정이 모두 '협상 가능한 것'으로 비친다면 많은 사람들이 협상 기회를 찾고 그 협상 진행에 엄청난 '거래 비용'을 퍼붓게 된다. 이 두 가지가 구동구권 국가 체제의 쇠퇴/붕괴에 큰 원인이 되었다.

  탈정치화 : 구자유주의 정치의 은밀한 부활

  그들이 정치적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이익집단들이나 정치가들의 탐욕에 희생당하는 '조용한 다수'의 이익을 대변"한단다. 그러나 현실은 시장제도 안에서 대부분 불리한 처지에 놓인 조용한 다수가 '시장이 낳은 결과'를 민주적 정치과정을 통해 수정할 수 있는 제도적인 범위를 좁히는 것일 뿐이다.

  신자유론자들이 '시장의 탈정치화'를 바라는 근거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반대한 근거와 같다. 요즘은 '자유주의!' 하면 민주주의와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무산계급(無産階級)과 같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불리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게 되면 이들은 정치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없애든지 적어도 시장기구의 작동을 훼방 놓으리라 걱정하여 민주주의를 완강히 반대했는데,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입장도 근본적으로는 이와 같다. 물론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지금 이들이 민주주의를 반대하지는 못하겠지만, 정치를 '비합리적'이고 '부패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그 영역을 최대한 좁히기 위해 국가 개입을 줄이고, 아울러 '정치적 영향에서 단절된' 기구들(--중앙은행, 규제위원회)에게 최대한 정책 권한을 넘겨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민주적 통제를 최소화/무력화하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옳든 그르든, '탈정치화'가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무슨 동기에서건, 어느 나라나 정치력을 가진 이익집단들이 있고, 어떤 식으로든 정치 과정을 통해 '시장 기구가 낳은 결과들을 수정'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정치 집단이나 시장의 결과를 수정하는 갖가지 제도 중에는 아주 뿌리가 깊어 그것을 없애려면 막대한 정치적/경제적 비용이 드는 것들도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대규모의 <'경제 자유화'가 성공하려면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처럼 혹독한 권위주의 정부가 필요하다.>는 '신자유주의의 역설'이 생긴다. 문제는 아무리 피노체트 정권처럼 철권 통치를 휘두른다 해도 시장의 탈정치화가 완벽히 이뤄질 수 없으며, 설령 이뤄진다 해도 거기까지 다다르는 과정에 치러야 할 희생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