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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 없는 진보가 타산지석

 

 

눈동자(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세상을 둘러본다. 미국 대선이 코앞에 다가왔다. 아직까지는 세계를 쥐락펴락 해온 미국의 정치 기상도에서 정세 전망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줄곧 열세란다. 경찰의 멋대로 총질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폭도라 딱지 붙이고 걸핏하면 트윗으로 가짜 뉴스를 날린 초강대국의 염병할 왕초한테 (4년 동안) 학을 뗀 세계 민중은 그가 백악관에서 내쫓기는 것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 하지만 기분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래서 뭐가 달라질지를 묻자.

트럼프는 일찌감치 선거결과 불복을 내비쳤다. ‘표 차이가 크게 벌어지지 않는 한, 내전civil war에 가까운 저항이 따를 게다. 그게 사그라든다 해도 트럼프의 유령(지지 대중)’이 남아서 꿈틀댄다. 백악관을 먹는다 한들 민주당에게 좋은 날은 이미 지나갔다. 정치학자들은 미국이 동유럽과 러시아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를 (심지어 중국의 전제專制마저) 차츰 닮아가지 않을까 염려한다. 1990년 소련이 무너졌을 때는 그쪽 사람들이 다 자유민주깃발 아래 귀순할 거라고 장밋빛 꿈을 꿔댔지만 그거, 말짱 허튼 꿈이었다. 바이든이 솜털만큼도 무슨 비전을 보여준 적 없으니 자유민주주의 실종의 도도한 물결을 변변히 돌려세울 리 없다(민주당의 목표 상향上向을 부르짖은 샌더스라면 그나마 좀 뒤틀었을 게다). 바이든이 세계보건기구, 기후협약에 다시 기웃거리기는 하겠지. 하지만 나토, 한미동맹을 다시 챙기고, 북한에는 깐깐한 눈길을 보낼 터이니 그나마 싹튼 북미 타협의 기운도 사그라들 조짐이 짙다. 이 점에서는 차라리 트럼프가 쬐끔 낫다. 둘을 견줘 봤자 도토리 키재기인데 한 물 간 늙다리의 등장에 뭘 반가워하랴.

 

한국 대선은 어찌 될까. 코로나 방역이 민주당을 살렸다. 환란患亂의 시대에는 장수將帥를 끌어내리기가 조심스러워서 문재인이 레임덕을 겪을 것 같지 않다. 그게 아니었다면 민주당이 변변히 개혁/개선해낸 것이 없으므로 (김종인의 꾀가 통할 경우) ‘국민 거시기당이 다시 맞수로 나설 만도 했다. 그런데 민주당의 재집권이 흐뭇한 일인가? 홍남기가 재정 준칙을 마련했다. ‘자본에게 나랏돈을 몰아주자는 신자유주의 정책기조를 민주당이 군소리 없이 따른다는 얘기다. 행정부가 헌법재판소의 권고를 묵살하고 낙태죄를 그대로 유지할 심산이다. 보수세력, 곧 가톨릭교회와 척 지지 않겠다는 구애求愛 신호다. 민주당 내 여성정치인들이 뻘쭘해졌다. 삼성 간부들을 국정감사에 부르는 것을 한사코 반대한다. 이미 일찍이 노무현이 삼성 공화국을 실토했음을 떠올리자. 제 끗발 지키려고 (친여성 친서민의) 제 깃발은 서슴없이 버리는 정당한테 뭘 바랄 수 있을까.

이낙연이든, 김경수든 문재인보다 반 발짝 더 물러설 거다. 세월이 하 수상하여 촛불 혁명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터이니 말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 여지껏 벌여온 일로 보아 이재명이라면 쬐끔 낫겠지만 문빠들이 똬리 튼 동네에서 과연 대선 후보로 낙점을 받을지가 불투명하다. 때로는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댔던가. (부동산 폭등 따위로) 민주당의 지지율이 폭락하여 무슨 자구책을 수소문할 때가 아니고서야, 콧대 높은 대깨문들이 저희들 리더가 4년 전 이재명에게 겪은 수모受侮를 머리에서 지울 리 없다. 아무튼 그가 청와대에 간다 해도 우리에게 반가운 것은 그가 이뤄낼 결과물이 아니라 사회운동이 활기를 찾을 여지가 좀 더 넓어질 거라는 전망 쯤이다. 여의도나 청와대가 나라 정치에서 해낼 일은 원래 한 옹큼에 지나지 않는다.

태도 보수와 싸가지 없는 진보

 

사회운동이나 (민주당 밖) 진보정치의 전망은 어떤가. 우리는 민주당의 (개혁) 실패로부터 따끔하게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민주당이 재집권을 하더라도 그것은 시운時運의 덕을 보고, 또 맞수가 적폐를 떨쳐내지 못한 결과이지, 민주당이 진취적 개혁을 폼나게 이뤄낸 결과가 아닐 게다. 왜 실패했는가? 18대 대선(2012년말)의 패인으로 당시 문재인/이낙연은 태도문제를 짚었다. 진보세력이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태도가 싸가지 없으면 말짱 도로묵이랬다. 막말을 삼가는 태도 보수를 지향하자고 했다. 우리가 보기에 그때 그들의 패인이 비단 싸가지() 없음만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것이 패인의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싸가지() 없음은 지금 문재인 정권에서도 여전하다. 조국/추미애 사태 처리과정이 민주당의 지지율을 크게 떨어뜨렸다. 사람이 싹 있는, 싹싹한 사람으로 바뀌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정치학자에 따르면 미국의 자유주의 정치세력, 곧 민주당도 워낙 싸가지(!)가 없어서 잇따라 실패를 겪었단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가 트럼프를 우습게 여겼던 사실을 떠올리자. 그러니까 싸가지 없음은 여러 개인들의 태도라는 우연한 요인으로만 설명될 일이 아니고,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세계관(!)이 옹졸한 데서 비롯되는 원천源泉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가령 한국 민주당의 경우, ‘적폐 청산의 슬로건 하나만 주구장창 울궈먹었다. 기후위기, 생태재앙이 살벌하고 나라가 온통 투기판으로 바뀌었는데도 그거 다 못 본 척하고 노동자들은 주워 온 자식취급하면서, 즈그덜이 민주화 시대의 적자嫡子라는 알량한 자랑에 빠져 살았다. 싸가지가 없어질 수밖에!

 

미국에서는 진보주의자(=자유주의자)가 지닌 오만함의 원흉元兇으로 흔히 정체성 정치를 든다. 기성 사회에서 무시당하거나 구석에 처박힌 약자弱者 집단의 존재를 인정/옹호하는 차원에서의 정체성 정치야 무척 요긴한 것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제법 커졌을 때는 정체성 운동을 벌이는 쪽에게도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지혜가 소중하다. ‘세상에는 내 정체성 문제뿐이라는 개인주의(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혀서 다들 패거리 싸움(진영 대립)을 벌이기 일쑤라서다.

이를테면 혐오문화의 으뜸 과녁이 여성이다. 특히 20대 남자들이 여자들을 미워한다. 세상에 저 못난 것을 여자들 탓으로 돌리는 일베 부류의 찌질한 남자들이 우글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베를 흉내낸 워마드(남성 혐오) 부류가 중립 성향의 남자들한테 나쁜 인상을 줬던 측면도 쬐끔은 있다. 정체성 동네 쪽도 문재인/이낙연의 당부대로 태도 보수에 힘썼더라면 혐오문화를 덜 키웠을 것이다. 왜 저쪽이 우리쪽을 그렇게 미워하는지, 그 질문을 차분히 꺼내 들 너그러움이 부디 필요하지 않을까. 여자와 남자가, 흑인과 백인이,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가 때로는 다툴 수밖에 없다 해도 한편으로는 우리로 모여서 생태 재앙과 경제 불평등, 인간 소외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지금은 후자後者우리 문제가 훨씬 절박해진 시절이다.

미국 민주당은 왜 정체성 정치를 한결같이 내세웠을까. 그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정체성 코너가 나온다. 여성에게,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히스패닉계에게.... 심지어 태평양섬의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따로따로 있다. “민주당은 너희들 저마다의 권익을 다 따로따로 돌봐 주겠다!” 이것이 민주당의 착한 얼굴이다. 커튼(바탕 화면)을 제치고 들어가면 노동계급을 내치고 월가 자본가들과 짝짜꿍하는 그들의 검은 본색이 드러난다. 그들 홈페이지에 저마다의 (정체성)’는 있어도 ‘(함께 하는 민중으로서) 우리는 없다. 반면에 공화당 홈페이지에는 우리 함께 미국을 바꾸자!”는 호소가 있다. 그게 허튼 메시지라 해도 가방끈 짧은 사람들한테는 후자後者가 더 묵직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미국을...!!” 울림이 있는 말은 이쪽이다.

페미니즘을 열심히 외친 착한 힐러리(민주당)의 표 일부가 성폭력 전과前科가 있는 못된 트럼프(공화당) 쪽으로 옮겨간 것은 두 당 홈페이지의 상반된 얼굴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주의(진보주의) 이념이 민중에게 별로 감명을 주지 못했다. “저마다 알아서 살아라. 제 능력껏들 사는 거지, ! 옆에서 쬐끔은 거들어 줄게. 쬐끔만!” 저 스스로 잘 살 실력이 되는 고학력의 깨인 엘리트들은 민주당이 체질에 맞지만, 기댈 구석 빈약한 저학력 노동자들은 우리 함께 가자!”는 공화당의 선동에 더 끌린다.

 

PC 따지기가 분열을 낳기도 한다

 

정체성 정치와 닿아 있는 것으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따지기가 있다. 줄여서 PC라 일컫는다. 편견이 섞인 말을 삼가자고 다그치는 운동에서 시작됐다. 여성/장애우/노인/이주민.... 사회적 약자의 자기 존중감을 마구 짓밟는 언어 문화를 맑히는 한에서 그 취지는 당연히 옳다. 다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 문제다. 물론 어디부터가 내쫓겨야 할 언어인지, 경계선을 긋기가 애매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예컨대 PC 켐페인의 결과, ‘식모食母라는 호칭이 가정부家政婦로 바뀌었다. 사실 낱말 자체는 죄가 없을 때가 많다. 그들을 뭐라고 부르든 그 호칭은 그들에게 모멸감을 건넬 게다. 그 직종職種 자체가 없어지거나 사람답게 대접하는 쪽으로 노동조건이 바뀌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그래도 가정부라는 새 호칭이 한동안은 그들의 모멸감을 덜어줄 테니 (그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 수정을 기꺼이 수긍하자.

그런데 PC검열이 낱말 교체수준을 넘어서면 많이 따져야 한다. 40년 전 나온 영화 ‘ET’(그 무렵) 덴마크에서는 상영 불가판정을 받았다. 어른들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느낌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영화에 그런 불손한 언행言行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영화 초반에 어른들은 하체下體만 보여주는 식으로 카메라 워킹을 했더랬는데 이게 검열관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영화감독은 “(ET에게) 아이들은 따뜻한 존재, 어른들은 무서운 존재라는 느낌을 은근히 풍기려 했겠는데 이게 불손하게 읽혔단다. “내가 그렇게(불손하게) 느끼면 그런 거야.”하고 다지른 궁예의 관심법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게 보수 세력의 골 때리는 PC 검열 사례다.

진보세력 쪽에도 PC 검열에 일떠나서는 사람이 많다. 지난 추석의 나훈아 쇼때도 사내여라는 노래가 검열/비난의 대상이 될 뻔했다. 노랫말은 우리에게 닥친 환란을 앞장 서 극복하라는 당부였으니 시비 잡힐 것 없지만 사내여!’라는 제목이 문제다. 관심법에 따르면 남성우월사상의 느낌을 주지 말라는 법 없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제목만 갖고서도 비난을 뒤집어 쓰지 않았는가.

 

낱말에 대한 시비야 웃어넘길 수 있다. 하지만 PC 따지기가 큰 다툼을 낳기도 한다. 이를테면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성관계를 시작하기 전에 적극적인 동의를 얻지 않으면 성폭행으로 처벌하도록 (모든 대학생에게) 허용하는 정책을 위해서 주 정부의 기금 수용을 요구하는 법을 통과시켰단다. 한국은 성관계 거부 의사를 나타냈는데도 들이댈 경우, 성폭행으로 법원이 판단할 텐데 미국은 성관계 찬성 의사를 분명히 나타내야 성폭행이 아니라는 쪽으로 차츰 옮겨가려는(밀어붙이려는) 모양이다. “No is No!"에서 "Yes is Yes!”!! 정의당도 그런 쪽으로 개정법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데 이것, 어느쪽이 옳은지 엄청난 입씨름을 불러 일으킨다. 정의당은 박원순 조문 파동 때에도 조문 거부에 분격한 당원이 상당수 탈당했더랬는데 지금 “Yes is Yes!"의 주장에 당원들 모두가 동의하는지 궁금하다. 부디 두 쪽이 나는 일은 막아 주렴! 부디 황희 정승의 지혜를 떠올려 주렴!

개혁/변혁 세력에게 지금 토론돼야 할 의제는 그것뿐이 아니다. 억수로 많다. ‘성폭행 여부 판단문제가 1순위의 토론거리는 아닐 게다. 그러니까 후순위 주제까지 죄다 제대로(!) 토론하려면 수많은 활동가들이 달포 가량 밤잠을 반납해야 할 성 싶다. 생산적/진취적으로 토론하지 않으면 어디선가 탈이 난다. 아아, 과유불급過猶不及! 태도 보수!! 그래야 다 같이 힘을 얻고, 밤잠도 찾아 먹는다.

 

절망에서 벗어나려면

 

올 겨울은 참 추울 거라고들 한다. 가난한 집은 미리미리 월동 준비를 해야 한다. 산천山川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을(인류 사회)도 부쩍 추워질 성 싶다. 과거를 3백년, 아니 2천년은 거슬러 살펴야 비로소 출구出口를 분별할 눈이 틔워질, 그런 지독한 추위다. 돌아보고 깊게 물어볼 것들이 참 많다. 이를테면 진보세력은 종교의 시대로부터 과학/이성의 시대로세속화世俗化돼 온 흐름을 당연하게만 여겨 왔다. 이렇게 묻자. “그래서 집 구석이 잘됐다고만 볼 수 있니? 어쩌면 탈세속화의 길로 흐름을 돌려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미주알고주알 역사 이야기가 도통 흥미가 없어서 기독교 신자가 될 마음을 먹어본 적 없다. “교회 가서 맨날 그거 읽으라고? 하품 나게?” 감수성이 오히려 절집이나 서원書院으로 쏠린다. 하지만 예수의 삶하나는 마음을 울리고, 해방신학의 메시지는 더 가깝게 다가온다. 복음주의 기독교도는 소 닭 보듯멀리하지만 산업선교회 목사는 반갑다. 저마다 빛깔이 다른 수많은 기독교가 있다. 그러니까 무슨 기독교가 진짜배기이며, 어떤 무신론이라야 무게가 나갈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 도스또옙스키는 신이 없다면 뭐든 허용될 거라고 무신론을 잔뜩 불신했는데 거기 제대로 응답해줘야 하지 않는가.

교회 신자와 얘기 나누다가 내 신관神觀을 잠깐 읊조린 적 있다. “신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볼 수 있지요.” 두 쪽이 칼같이 갈라질 이유는 없으니 세상 이야기를 진취적으로 해보자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이 생각을 더 멀리/분명하게 밀고 간 학자가 있어 그의 말을 소개한다.

 

1. 종교는 신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신이 (비참/고독하게 죽어 간) 망령에게 정의正義와 내세來世를 약속할 수 있다. 하지만 전능하다는 신이 왜 생전의 그들을 돌보지 않았는지가 문제로 남는다. 2. 무신론은 신이 없다고 본다. 비명非命의 죽음을 방치/허용한 신을 도저히 허락할 수 없다. 그거야 정직한 통찰이지만, 망령에게 정의와 내세는 약속될 수 없다. 망령이 언젠가 다시 한 번 살아갈 가능성은 없어진다.

메이야수의 생각에, 망령의 딜레마를 해소해 절망에서 벗어나려면 신이 아직 없지만 언젠가 신이 찾아올 것이라 믿을 길 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뀔 거라면 언젠가 세계의 법칙이 바뀔지도 모르고 신이 찾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마르크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참된 사회주의 혁명이 꽃을 피운다면 신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런 시절이야 까마득 먼 장래가 아닌가. 그 날이 오기 전에는 어찌 살아갈까. 그래서 두 쪽 다 내기를 거는 셈이다. 신 없이 혁명의 길로 가거나, ‘부재不在하는 신을 등불로 삼아 살아가거나. 두 쪽의 사이는 통념보다 훨씬 가깝다.

 

쇠락해 가는 인류 문명을 일으켜 세우려면 이쯤의 정신 무장은 필요하다. 그런데 이 나라(사회)가 과연 비상한 정세 인식에 의거해 사람 키우는 교육에 나서고 있는지 묻게 된다. 코로나로 집콕 생활에 찌든 후세들을 분발케 하려면 왜 코로나 환란이 벌어졌는지제대로 따져 묻는 인문성찰 교육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그런데 교육부 장관은 휴학/개학 일정 조절하는 데만 여념 없다. 총무과 직원이 할 일을 하면서 자못 벅찬 낯빛이다. 내가 발언 기회를 얻는다면 가령 고교 교육과정에 종교과목을 넣으라는 제안이라도 던지고 싶다. 맹랑하게 들리겠지만 폴란드 인문학자들이 그런 제안을 하는 것으로 안다. 물론 기성 교리들을 그냥 그대로 읊어주는 교과가 아니라 빗나가는 종교흐름을 비판적으로 읽어낼 문해文解 교과가 되기를 바라는 제안이다. (거기 실릴 예화例話 하나 : 헌금 수입이 줄어든 몇몇 교회가 박봉으로 헌신해온 전도사들을 하루 아침에 쫓아냈다. 그 충격으로 몇몇이 신경쇠약에 빠졌다. 일산 씨앗교회는 교인들이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자 예배당 전세보증금 3천만원을 빼내 재난지원금으로 나눴다. 모임은 카페를 옮겨다니며 갖기로 했다. 교회와 신앙의 본질을 말해 보자.)

 

TV를 켜면 거의 대부분 하루살이 뉴스만 튀어 나온다. 한 치 앞만 내다보는 여의도/광화문 소식으로 가득하다. 예수의 제자 바울 같았으면 거기, 악령이 우글댄다고 꿰뚫었을 거다. 태극기 부대의 노인들은 즈그덜 나름의 무식한 지혜를 발휘해서 “TV가짜 뉴스를 내보낸다.”고 갈파하고 있는데 촛불 혁명의 기운을 물려받은 진보 시민들은 오히려 TV가 퍼뜨리는 일상적 세뇌공세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거기,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산다. “조국이 옳니, 진중권이 옳니? 똥이냐 된장이냐? 콩켸팥켸....” TV가 전혀 터무니없는 가짜뉴스들을 내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소시민적小市民的 사실성의 세계에 파묻히다 보면 세상이 크게 잘못돼 있다는 통 큰 앎을 놓치게 된다. 하지만 시원히 건너뛸 묘수가 없다. ‘(싸가지) 없는 진보라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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