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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노동운동의 흐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김창우 | 전국일반노조협의회(준) 수석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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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노동운동에서 최대의 화두는 노동운동 위기론이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하루빨리 산별노조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심지어는 2007년 복수노조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통합하지 않으면 노동조합운동은 살아남기 힘들다고 강변하는 자들조차 있다.(한국노총을 부정하고 복수노조를 요구하면서 민주노총을 만들었는데, 다시 복수노조 때문에 한국노총과 통합해야 한다면, 결국 민주노총은 애초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잘못 만든 사생아란 말인가?) 이들이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1997년 IMF 경제공황이 터졌을 때 우왕좌왕하던 모습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로라하는 노동운동가는 물론이고 진보적이라고 하는 학자들 어느 누구도, 당시의 공황이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라는 초국적 자본에 의한 새로운 자본주의적 지배 형태와 관련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단순히 독점재벌의 천민적 자본 축적 방식의 결과 초래된 것 정도로 인식하거나, 아니면 도식적으로 미국에 예속된 식민지적 경제체제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정도의 천박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소위 NL/PD라는 낡아빠진 정파적인 교조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러한 현실 인식에 대한 무지와 무능 때문에 당시 IMF 총재였던 깡드쉬와 총자본의 협박 공갈에 넘어가,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의 핵심 내용인 정리해고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무지와 무능, 실패에 대하여 어느 누구하나 진지한 반성과 성찰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공허한 구호만을 이제는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외치고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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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또한 이들은 현재 ‘산별 재편(산별 건설도 아닌)’이라는 공허한 구호만 열심히  외치고 있다. 민주노총 건설이후 10년 동안 어떠한 의문도, 내용에 대한 검토도, 반성도 없이 한결같이 똑같은 구호만 외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산별노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적으로 고수해야할 유일한 물신(物神)인가?
노동조합 조직형태는 역사적 산물이다.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변화해온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은 19c에는 지역의 경쟁적인 중소자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숙련노동자 중심의 직업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운동은 19c 말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대규모 독점자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전국적 규모의 산별노조나 일반노조 형태로 변화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직업별 노조에서 산별노조로 되기까지는 수십 년에 걸친 수많은 투쟁과 희생이 요구되었다. 그것도 단순한 투쟁이 아니라 혁명적 투쟁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혁명적 투쟁의 결과 산별노조는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의해서 촉발된 유럽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비로소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지배세력이 혁명을 막기 위해서 노동세력을 체제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정하게 양보하고 타협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독일의 경우 1918년 11월 혁명의 결과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 정권에 의해 비로소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이 인정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유럽식의 사회적 합의주의 또는 사회적 코포라티즘 체제의 출발 과정이다.(그런데 현재 한국의 일부 논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이해도 없이, 마치 노사정간의 타협을 통해서 산별노조와 산별교섭이 보장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지금이 20c 초와 같은 혁명적 투쟁과 혁명적 위기의 시대인가? 지금과 같은 자본 우위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과 권력이 무엇이 두렵고 아쉬워서 양보와 타협을 한단 말인가! 87년 노동자 대투쟁처럼 체제에 위협을 느낄 정도의 전면적인 계급전쟁이 터져 나오지 않는 한 결코 사회적 합의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우리는 이러한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가 장기불황 국면에 들어가면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유럽식 복지모델은, 자본과 정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폐기되면서 신자유주의가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소위 케인즈주의에 기초한 일국적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가 파탄나고,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그 형태가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부문별 산업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산별노조라는 조직형태가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 유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국적 자본을 중심으로 한 총자본의 공세에 대해서는 총노동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 총체적 계급투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산별노조 노선을 폐기하고 산별노조들을 통합하여 대산별노조 또는 전국단일노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 독일에서는 1990년 대 초반, 당시 독일노총 위원장이던 한스-베르너 마이어가 산별노조를 넘어선 전국단일노조를 공식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세계노동운동은 유럽을 중심으로 이미 15년 이상 전부터 산별노조를 넘어 전국단일노조로 가는 발걸음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노동운동은 21c에 들어선 지금에도 유독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산별노조를 금과옥조처럼 주장하고 있다. IMF 시대의 무지와 무능과 실패의 경험이 또 다시 반복되는 것 같아 참으로 가슴이 답답하다. 한국노동운동 전체가 집단적으로 종교적 최면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외국에서는 수백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산별노조도 힘이 약하다고 다른 산별노조와 통합까지 하면서 그 힘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노총 조합원 모두 합쳐야 70만 명도 안 되면서, 그것도 수만 명씩 수십 개로 쪼개는 산업 업종별 조직방식으로 대응하려 하고 있다. 과연 제정신들인가! 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온 사람도 많고 외국에 사례연구 한다고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어찌하여 10 수년 전부터 변화하고 있는 세계 노동운동의 흐름을 제대로 전달하는 사람조차 없는가! 제 눈에 안경이라고 했던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오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어떻게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총자본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세계의 이러한 조직 통합 경향은 시대적 조류에 부응한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재 세계노동조합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는, 산별노조라는 조직형식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에 구시대적인 케인즈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적 합의주의에 기초한 노동운동이 가지는 이념적, 내용적 한계 때문에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이 형식적으로 조직 통합을 하여 산별노조로 재편된다고 해도 내용적으로 노사협조주의 이념을 버리지 못하는 한 어용노조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요한 것은 조직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어떤 지향과 목표를 가진 조직인가라는 내용적 측면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산별노조를 뛰어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조합 조직형태는,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운동의 이념과 노선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한국의 노동조합운동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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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이 ‘복지모델’이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 정치,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며 위기감을 고조시켰기 때문이다. 부르주아가 그냥 양보하지는 않는다. 체제전복의 위험이 있을 때만이 양보한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노동계급이 전투성을 잃어버리면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어떠한 양보도 얻어낼 수 없다. 세계적 규모의 변혁만이 자본주의 모순을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말은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박노자 교수가 “북유럽 사민주의의 성과와 한계‘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 중의 일부이다. 현재 한국노동운동의 위기를 논함에 있어 위기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라 생각된다. 현재 한국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업별노조체계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면서 빨리 산별노조로 전환하지 않으면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현재 한국노동운동의 위기는 ’기업별노조냐 아니면 산별노조냐‘라는 단순한 조직 형식의 문제 때문에 생긴 것인가? 그렇다면 20세기 이후 산별노조로 대표되는 서유럽과 미국, 영국 등의 노동조합운동이 최근에 그 영향력을 급격하게 잃어가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문제의 본질은 ‘기업별노조냐 아니면 산별노조냐’라는 조직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박노자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현재의 노동운동이 한국자본주의체제에 얼마나 위협적인가 하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지 않고, 노예생활에 안주하면서 보다 편안하게 살아가려는 운동을 노예해방운동이라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저항하고 근본적으로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운동 역시 노동운동이라고 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해방이 아니라 오직 자기 사업장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실리주의적 노동조합운동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노동운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의사들의 파업과 같은 이익집단 활동들을 운동이라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를 포기한 운동은 사회운동이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럽의 신사회운동은 이미 사회의 변화와 변혁을 포기하고 기득권에 안주해 버린 유럽의 노동조합과 정당들의 운동을 사회운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사회의 근본적 변화나 변혁을 꾀하지 않는다면 지배세력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안전에 대하여 위협이나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다. 이처럼 자본가와 정권이 노동운동을 전혀 두렵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면, 무엇이 답답해서 그들 스스로가 먼저 타협하고 양보하겠는가? 애완동물처럼 갖고 놀다가 앙탈을 부리거나 말썽을 피우면 적당하게 임금이나 올려주면서 어르면 그만이다.
노무현이 입만 열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때문에 한국노동운동이 망해가고 있다’고 조롱하는 것은 그만큼 노동운동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없는 호랑이를 맹수가 아니라 가지고 노는 애완동물로 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만약 한국노동운동이 전투성과 변혁성이라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는 맹수라면 이런 식으로 무시하고 조롱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1990년! 비록 기업별노조들의 협의체에 불과했지만 전평(1945년 11월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말함)의 전투적이고 변혁적인 노동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전노협이 건설되자, 지배세력들은 엄청난 위협을 느껴 3당 통합까지 하면서 체제수호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대응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노동운동의 위기는 전혀 체제에 위협적이 아닌, 근본적으로 전투성과 변혁성이라는 이빨과 발톱을 잃어버린 운동성의 위기에 있는 것이지, 단순한 조직형태의 문제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조직의 양적 축소나 도덕적 타락으로 대표되는 진정성의 위기라는 것도 노동운동의 근본인 전투성과 변혁성을 포기한 데서 오는 하나의 부분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이미 자신들의 요구를 대변하고 보호해줄 능력이 없는 노동조합에 신입 조합원들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또한 언제든지 적과의 투쟁에 대비하여 끊임없는 훈련과 기량을 연마하지 않는 조직이 사기가 떨어지고 군기가 빠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현재 한국노동운동은 엄밀하게 말하면 노동조합은 있으나 진정한 노동운동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자기 집단의 이익이나 실리를 챙기는 이익집단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노동운동의 위기는 노동조합의 위기가 아니라 운동성의 위기인 것이다. 운동성이 없더라도 노동조합은 존재할 수 있다.(한국노총처럼!) 노동운동은 망하더라도 의사협회나 협동조합과 같이 하나의 이익단체 형식으로서의 노동조합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현재 일본의 노동조합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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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지 않는 한 그 체제 내에서 어떻게 하면 실리나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변혁성을 포기한 일본의 노동운동이, 수십 년에 걸쳐 어떻게 전투적 경제주의 또는 실리주의 운동에서 결국에는 렝고라는 노사협조적인 노동조합으로 망해갔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대사업장 정규직 중심의 한국의 노동조합운동도 일본과 별 차이 없다.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어떻게 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연대하여, 체제를 위협할 만큼의 가열찬 투쟁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 갈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정규직 아버지의 일자리를 비정규직 아들에게 세습시켜줄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내용이 조합원들의 요구사항이라는 이유로 단체협약안에 까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반영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산별노조가 아니라 산별노조 할애비가 만들어져도 노동운동의 위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배세력과의 결전을 위해 노동자 대중의 주체 역량을 키워나가기 위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동자 대중운동은 씨가 마르게 된다. 마치 보수 정치판의 공약 경쟁처럼 조합원들의 실리적 요구를 해결해 주기 위한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며, 자신이나 자신의 패거리(정파)를 지지해주기를 구걸하는 권력지향적인 풍토가 판을 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조합원들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하는 선진적인 투쟁부대, 정치부대로서의 운동조직은 없어지게 되고, 오직 조합 권력 장악을 위한 선거조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 버린 정파조직들만이 활개를 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운동의 원칙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를 오가며 이합집산 한다.
전형적인 예로 지난 금속연맹 지도부 선거에서 보여준 소위 좌파, 우파, 중앙파라는 망국적인 종파구도에 의한 합종연횡의 권력투쟁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전국 단위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 같은 대공장에서도 조합원 대중들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만큼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심지어는 금년 초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와 같이 정파간의 사생 결단식 권력투쟁에 조합원 대중들을 동원하여 조합원들 간의 분열조차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하고, 앞으로 지방자치단체와 각종 국가기관 등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노총의 몫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권력 지향의 정파운동의 폐해와 준동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한국의 노동운동도 만델라 집권이후 5만 명에 달하는 노조 간부와 활동가들이 국가권력기관으로 빠져나가면서, 노동조합운동이 완전히 황폐화되어 버린 남아프리카 노동운동의 전철을 밟을까 두렵다. 이후 남아프리카 노동운동은 빠져나간 전직 노조 간부와 활동가들의 교란 작용에 의해 엄청난 혼란과 갈등, 그리고 분열과 조직력 약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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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정파적 활동이나 조합원들의 실리를 위한 활동 이외에는, 노동자 대중을 인간다운 삶과 투쟁과 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한 일상활동이나 조직활동 등을 거의 포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조합원 대중의 자발성이나 능동성은 거의 상실되어 버리고  연맹 등 상급기관의 지침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지침조직’ 내지는 ‘통제조직’으로 전락하고 있다(심지어 어떤 업종노조에서는 민주집중제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언술로 조합원들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대부분의 노동조합이 연맹의 지침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이러한 지침에 대한 토론조차 조합원들은 말할 것 없고 단위 사업장 집행부내에서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합원들의 활발한 토론과 제안을 기초로 지도부가 의견을 수렴하여 지침을 작성했던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조차 이제는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87년 이후 그 엄청났던 조합원들의 자발성과 능동성, 그리고 창의성, 진취성 등과 같은 해방의 열정과 에너지들이, 민주노총 시대로 오면서 10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오로지 실리에 대한 기대와 집행부에 대한 의존성만이 남아 있는 조직으로 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조합원 대중을 삶과 투쟁과 운동의 주체로 세워 내기 위한 진정한 노동운동을 실종시켜 버린, 조합권력 지향의 정파운동들이 저지른 최대의 역사적 죄악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운동의 잘못된 풍토가 어렵게 조직하고 있는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운동에도 그대로 인입됨으로써, 정파 간 권력투쟁에 실망하고 좌절한 수많은 열성 조합원들과 선진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떠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번에 비리가 문제된 어떤 대공장 노동조합에서는 각 정파별로 활동가들을 취직시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조합 내에서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면서, 대자본 대정권 투쟁에 혼선을 초래하고, 투쟁의 고비마다 수많은 역량의 파괴와 소모를 가져왔다고 한다. 심지어는 정파 활동가들이 조합원 대중들이 주체가 되어 자발적으로 벌인 일상투쟁조차 전략, 전술, 조직적 통제 운운하면서 사기를 꺾어버리는 행태까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일부 지역노조들의 경우, 조합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상대편 동지들을 음해하고 중상모략하며 조합원들 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상식 이하의 작태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결국 기존 노동조합운동이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현재와 같은 운동성이 상실된, 권력 지향의 실리주의적인(다른 말로 하면 의사나 약사 집단 같은 이익단체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정파적 노동운동을 철저하게 부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노동운동은 새로운 이념과 내용을 가진 건강한 기풍의 참노동운동을 새롭게 세워내기 위해 전력투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현재 그래도 일정하게 건강성이 살아남아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에 지워진 역사적 책무이다. 이러한 역사적 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한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는 결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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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에는 왕도가 없다. 운동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질 때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잘 나갈 때 보다 자세와 폼과 정신이 흐트러져 있다. 고치는 방법은 간단하다. 기본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보다 어려운 기술이나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않는다. 잔대가리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이렇다면 우리 노동운동도 기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노동운동의 기본기를 새롭게 쌓아나가야 한다. 기본기를 기르는 작업은 소홀히 하기 쉽다.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훌륭한 기본기를 갖추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훌륭한 기본기를 갖추지 못하는 한 결코 슬럼프나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창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면 반드시 훌륭한 기본기를 갖춰 나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전노협이 기업별노조체제하에서도 그렇게 노동운동의 원칙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은 전태일 정신이라는 기본기로 무장한 수많은 변혁적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마다 얼마나 많은 학습 소모임과 교육이 있었던가! 그런데 그 많던 소모임과 교육, 문화패, 선봉대 등등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 현장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기본기로 무장된 활동가들과 선진노동자들이 사라져 버린 노동조합은 더 이상 살아 있는 노조가 아니다. 죽은 노조다. 이러한 기본 조직과 활동가들을 복구하고 재생산해내야만 노동운동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이와 같은 살아있는 세포들을  되살려내지 못하는 한 어떠한 처방도 결코 한국노동운동을 살려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