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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현장에서_칸쿤투쟁 참가기

2003.11.07 15:11

jinboedu 조회 수:2001 추천:58

칸쿤 투쟁 참가기

칸쿤 투쟁 참가기

 

최문경 | 연구소 사무국장

 

 

9월 7일 한국 민중투쟁단의 출국 기자회견에서 정광훈 투쟁단장은 WTO가 전 세계 민중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인류에게 최대의 재앙을 가져올 WTO 5차 각료회의를 무산시키려 칸쿤으로 향한다. 칸쿤으로 가기도 전에 많은 에피소드를 겪어야 했다.  심지어 여행사의 미숙함으로 각 단위 대표급만 참여할 뻔했던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우여곡절을 기어코 '이겨낸' 180여명의 한국 민중투쟁단은 '각료회의 무산'을 위해 칸쿤으로 갔다.

나를 포함한 상황실 일꾼들과 몇몇 투쟁단원은 인천-대만-벤쿠버-멕시코시티-칸쿤... 이토록 복잡한 노선을 취하여 칸쿤에 가야만 했다. 인천에서 비행기가 출발할 때야 비로소 이제 정말 칸쿤으로 가는구나하는 실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처음 타는 비행기라 긴장도 되었지만 우리를 실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한국 땅은 아름답기만 하였다. 비행기 속 푸른 하늘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의 삶 자체였으면 하는 조금은 감상적인 생각도 들었다. 약 3시간 후 대만에서 벤쿠버 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16시간 가량 비행기 속에서 자다, 먹다, 다시 잠들기를 반복한 끝에 벤쿠버에 도착하였다.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팀들이 캐나다를 통하여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사람들로 오인받아 벤쿠버에 도착하자마자 이민국으로 보내졌다는 정보를 알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건만 우리 또한 그 신세. 말도 설고 사람도 설은 내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것저것 알아보고 눈치를 보다가, 투쟁단 부단장인 '노동자의 힘' 이종회 대표가 "우리는 WTO를 반대하기 위하여 칸쿤으로 간다", "우리는 WTO 5차 각료회의에 반대하기 위하여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제서야 우리는 억류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40분 정도의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지만 오로지 얼굴색이 틀리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밀입국자라고 오인 받았던 것은 억울하고 열받는 일이었다. 다른 한편 칸쿤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고도 험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 가자! 가서 칸쿤에서 반 WTO투쟁을 한국민중투쟁단이 주도적으로 벌여 보자는 각오를 다지며 멕시코 시티로 향하였다. 정작 멕시코 시티를 거쳐 칸쿤으로 도착하였을 때는 관광을 온 사람마냥 그 어떤 제지도 당하지 않았다. 다만 눈이 아플 정도로 찌르는 듯 강렬한 햇빛과 몇 걸음만 떼도 땀이 흐르는 무더위가 힘든 투쟁의 여정을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칸쿤.. 그러나 전혀 아름답지 않은 WTO 세계화

 

땀을 연신 닦아내며 차에 오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바깥 날씨와는 상반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칸쿤 시내를 둘러보았다. 칸쿤 시내를 에워싼야자수 나무, 청명한 하늘과 어우러진 에머랄드빛 바다로 둘러싸인 칸쿤의 경치엔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칸쿤이라는 이름도 WTO 5차 각료회의 때문에 알 정도로 나의 삶과는 무관했던 도시. 이 도시에 와서 처음 느낀 것은 '아름답다'라는 것이었다. 거의 미국사람들이 여기 와서 휴양을 한다고 했던가, 하긴 나도 WTO 5차 각료회의만 아니었으면 칸쿤과 전혀 연이 없는 사람 아니었던가... '투쟁'도 잠시 잊을 정도로 마음을 들뜨게 하는 에머랄드 바다의 출렁거림. WTO 세계 질서 밑에서 죽어가고 있는 민중의 거친 삶을 기억하면서 애써 밀어냈다.

이런 생각도 잠시... 상황실 사람들은 여독을 풀 약간의 여유도 없이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투쟁단 대표자 회의, 상황실 회의 등 일정에 곧장 합류했다. 상황실 회의를 열어 조직위원회 전술회의 참여와 투쟁단 상황실 운영 등의 역할분담을 하였다. 투쟁단 숙소 담당과 포럼 담당자, 투쟁단 내외 소통담당, 전반적 핸들링 담당 등으로 일을 나누었으며, 바로 다음날 상황판과 칸쿤 시내 지도 등을 상황실에 붙이기 시작하였다.

우리 숙소는 각료회의가 열리는 컨벤션센터와 다운타운의 딱 중간에 위치해 있었고, 대부분의 포럼과 집회가 다운타운에 배치되었기에 칸쿤 시내 지도는 필수품이었다. 대부분의 투쟁단원들은 바디랭귀지로 멕시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해야하는 처지여서 포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적잖이 길을 헤매곤 했다. 몇 발자국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 속에서 길을 헤맨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 중 하나였다.

 

투쟁의 전개

 

8일 투쟁단 대표자 회의를 통하여 투쟁단 발대식을 다음날인 9일 호텔 앞에서 하기로 결정하였다. 9일 오전 투쟁단이 모여 발대식을 시작한지 채 5분도 안되어서 멕시코 경찰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멕시코 경찰이 투쟁단 발대식에 참여하기 위해 호텔 앞으로 집결하는 것은 아닐 테고. 긴장된 표정이 역력한 멕시코 경찰의 얼굴이 보였고 경찰 지도부도 보였다. 우리는 집회를 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고, 서로 통성명하기 위해 모였다, 많은 인원이 모여 인사를 나눌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어 호텔 앞마당에 모인 것이다 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신고되지 않은 집회이므로 바로 연행해간다는 경찰의 말을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아주 간단히 발대식은 정리되었다. 발대식은 정리되었지만, 그 순간 투쟁단 모두에게 이곳에 그냥 모인 것이 아니라 투쟁하기 위해서 어렵게 모였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결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날 오후 5시에는 Plaza de la Reforma (개혁광장)에서 투쟁단 및 농민참가단 투쟁 선포식이 있었다. 멕시코 현지인들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결합된 한국민중투쟁단 선포식은 비록 수는 많지는 않았으나 개혁광장을 투쟁의 열기로 달구기에는 충분하였다. 같은 곳에서는 선포식 이후 국제민중포럼 개회식이 진행되었다. 투쟁단은 선포식 이후 전원이 포럼 개회식에 결합하였는데, 포럼 개회식은 문화행사 중심으로 짜여졌다. 개회식 이후 실천투쟁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우리는 문화행사로 끝을 맺은 개회식에 당황했다. 칸쿤에 오기 전의 우려가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한국민중투쟁단은 조직 명칭 그대로 WTO 반대하는 전세계 민중들이 모여 투쟁하여 WTO 각료회의를 저지해야 된다는 결의를 다졌었으며, 그에 맞는 투쟁 전술을 국제 조직위원회에서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국제 조직위원회에서 잡은 일정은 10일 국제농민공동행동의 날과 13일 국제 공동의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일정이 포럼 중심이어서 가기 전부터 우려를 했었던 것이다. 이런 우려가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국제포럼 개회식이 철저히 문화판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후 일정이 조금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이경해 동지의 자결... 그리고 우리의 투쟁

 

9월 10일 국제농민공동행동의날, 투쟁단은 오전 10시에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WTO에 희생된 농민을 비롯 민중들을 애도함과 동시에 WTO의 사망을 선포하는 상징 의식을 위해 상여를 매고 대오 앞에서 행진하였다. 국제농민공동행동의날에 모인 인원은 약 5,000 주로 농민과 학생들이었다.

이후 12시 즈음 킬로미터쎄로에 설치된 바리케이트 앞에서 투쟁단과 경찰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선두에 선 한국농민투쟁단은 바리케이트에 오르거나, 돌을 던져 경찰과 적극 대치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부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이경해 동지가 바리케이트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WTO Kills Farmers!'의 구호를 크게 외친 이경해 동지는 바로 준비한 칼로 자결을 하였다. 순식간에 바리케이트로 떨어진 이경해 동지는 바로 병원으로 후송이 되었고, 대오는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무리는 경찰에 의해 바리케이트로 떨어진 것으로 알기도 했고, 병원으로 실려가기 전 이미 사망했다고 아는 이들도 있었다. 삽시간에 외국기자들에게 이경해 씨가 이미 사망하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흥분과 분노가 투쟁대오로 번졌다.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이러다간 몇몇 사람들이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판단에 한국민중투쟁단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상황을 수습하였다. "이경해 씨는 지금 수술중이며, 아직은 사망하지 않았다" 구름 떼처럼 몰려온 외국기자들은 이경해 씨의 현재 상황들을 적어 내려갔으며,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주로 어떤 경유로 이곳에 결합하게 되었는지, 이경해 씨의 자결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는지,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등. 기자회견 장소 옆에서는 한국민중투쟁단의 집회가 계속 이어졌다. 그로부터 약 2시간 30분 후인 오후 4시 이경해 동지의 사망소식이 전해졌고, 투쟁 대오는 병원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한국민중투쟁단이 앞장섰고 그 뒤로 많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줄을 이어 대오를 형성하였다. 병원 앞 WTO규탄과 한국정부 협상단 철수 요구 공식 기자회견을 가진 한국농민참가단과 한국민중투쟁단은 그 곳에서 촛불집회를 가진 후 한국 농민참가단과 한국민중투쟁단의 회의를 가졌다. 회의를 통하여 우리는 이경해 동지 자결 현장에 동지의 뜻을 이어 WTO 5차 각료회의 저지를 위해 캠프를 치고 철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같은 날 밤 11시 경 이경해 동지의 자결 장소인 킬로미터쎄로에 천막을 치고 14일까지 천막 노숙투쟁을 전개해 들어갔다.

천막 노숙투쟁은 점점 WTO 5차 각료회의 투쟁 전체 상황실과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세계 민중조직들이 한국민중투쟁단 천막 옆에 자신들의 근거지를 만들었는가 하면, 천막 주변에는 많은 이들이 수시로 오가며 투쟁도 조직하고, 직접 플랭카드를 만들어 걸기도 하는 선전전도 진행하였다. 천막 노숙투쟁 기간 매 저녁 6시에는 이경해 동지의 추모 촛불 집회가 있었으며 그 집회에는 브라질노총, 비아깜페시나, 남반구포커스 등 세계 운동조직들의 연대가 형성되었다.

한편 한국민중투쟁단의 노숙투쟁 장소에 이경해 동지의 빈소가 차려졌다. 하지만 단일하게 빈소를 차리지는 못하였고, 투쟁단 숙소와 노숙투쟁 장소 두 곳으로 갈려 빈소를 꾸리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민중투쟁단과 한국농민참가단은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WTO 반대 투쟁에 대한 견해도 약간은 다른 면이 있었다. 또한 이경해 동지의 자결을 놓고 이것을 보다 어떤 수위와 방향으로 투쟁을 확산시킬 수 있느냐에 대한 의견도 갈라진 면이 없지 않아, 빈소를 두 곳으로 나누게 되었다. 실내의 빈소에는 정부 협상단이 오가기도 했으며, 다른 운동 단체에서 한국농민참가단의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실외에 차려진 이경해 동지의 빈소에는 끊이지 않고 촛불이 밝혀졌으며, 수많은 헌화가 놓였다. 처음에는 슬픔에서 시작하여, 후에는 분노와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행진들이 빈소와 한국민중투쟁단 캠프에 채워지기 시작하였다.

 

9월 13일 국제행동의날... 여전히 희망은 투쟁 속에 있다.

 

9월 13일 한국민중투쟁단이 제안하여 사회운동국제네트워크 전략,전술회의에서 전체적으로 공유한 투쟁 전술은 장·내외 투쟁을 동시에 전개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각료회의장인 컨벤션센터 근처에서 결사대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외 투쟁으로 바리케이트 앞에서 바리케이트를 철거하고 그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한국민중투쟁단에서는 15명의 결사대와 해외 활동가 5명이 회의장 기습 시위를 전개하는 시점에서 장외 투쟁이 시작되었다. 바리케이트를 무너뜨리기 위해 준비된 절단기가 여성활동가들에게 주어진다. 여성활동가들과 해외 활동가, 한국민중투쟁단원 약 10명이 바리케이트 위로 올라가 바리케이트를 끊어낸다. 그 위로 준비된 굵은 밧줄 4개가 묶여진다.

사람들은 긴장되고 흥분된 마음으로 바리케이트가 밧줄에 묶이는 것을 지켜본다. 드디어 바리케이트를 묶은 밧줄은 밑으로 전달된다. 사람들은 일렬로 서서 밧줄을 잡고 서로 다른 언어로 '당겨'라는 신호를 기다린다. '당겨'라는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밧줄을 당긴다. 여러 차례 시도 후에 드디어 바리케이트가 '우직' 밑으로 떨어진다. 일제히 여기저기에서 환호와 함성과 힘찬 음악이 넘친다. 땀에 절은 이들이 포옹을 하고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면서 승리의 기쁨을 표현한다.  

약 3,000여명의 투쟁단이 한 호흡으로 뭉쳐 바리케이트를 제거했다는 것은 단순한 눈앞의 방어벽을 무너뜨렸다는 기쁨 이상이었다. 3미터 넘는 바리케이트는 WTO를 옹호하는 가진 자들의 의지의 표현물이었으며 상징이었다. 즉, 각료회의 장으로의 진입을 막고 있는 바리케이트를 철거했다는 것은 WTO를 저지하는 첫 신호탄으로 3,000명의 시위대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철거된 바리케이트는 옆으로 치워졌고, 바로 한국민중투쟁단이 앞으로 나와 집회를 진행하였다. 먼저 한국민중투쟁단의 발언과 해외활동가들의 각각의 힘찬 발언이 이어졌다. 특히 마음에 남는 발언은 '아프리카는 상품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아프리카를 상품으로 간주하여 아프리카 민중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는 WTO에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아프리카의 한 여성동지의 발언이었다. 마찬가지로 교육이, 의료가, 문화가 식량이, 상품이라고 하면 인간 자체가 상품이 되어 노예처럼 이리저리 팔려야 될 것이다. 인간이 상품이 아니라면, 인간이 결코 노예가 되어선 안 된다면, 인간사회를 통째로 교역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WTO는 반드시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발언 이후 전체 대오는 WTO를 상징하는 구조물을 불태웠다. 지금은 우리가 비록 상징물을 태우는 데에 그쳤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WTO를 전 세계 민중의 이름으로 심판하리라.

그때, 스페인 통역이 목소리를 높여 한 소식을 전달하자, 시위대가 갑자기 환호하고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등 환호하였다. 그것은 WTO 각료회의가 몇몇 개도국의 협상테이블의 이탈로 무산될 위기에 놓여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정확하게 알아 봐야했지만 당시 우리들은 WTO 각료회의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 그 자체만으로 승리감을 만끽하기에 충분하였다.

순식간에 대오는 축제 분위기로 전환. 우리의 장구와 꽹과리, 현지 민속 음악이 묘하게 궁합을 맞추어 음악을 만들어내었고, 거기에 맞춰 시위대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내가 유일하게 외우는 현지 구호인 '싸파타 비베 라 루차 씨게' (싸파티스타는 우리 마음에 영원히 살아있고, 투쟁은 영원하다!)가 흘러나온다. 투쟁 속에 희망이 있고, 희망 속에 투쟁이 있다.

 

칸쿤 투쟁 그 후...

 

결국 WTO 각료회의는 결렬된 채 막을 내렸다. 칸쿤에서 WTO가 전 세계 농민을 다 죽이고 있다는 구호를 남기고 자결하신 이경해 동지의 뜻이 작게나마 실현되었다. WTO의 악랄한 행진의 일부를 막아내었다는 승리감이 한국민중투쟁단 캠프 전역에 넘실거렸으며 해외 활동가 투쟁단이 데낄라를 먹으며 북을 치며, 꽹과리를 치며 환호했다. 승리의 환호가 캠프장을 가득 채우는 동안 붉은 노을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다. 14일부터 17일로 나누어 한국민중투쟁단은 한국으로 출발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보수 언론들은 각료회의 무산을 애석해했다. 다자주의와 지역주의·양자간 협상을 비교하면서 지역주의·양자협상은 바로 강대국의 논리가 통용되기에 한국과 같은 힘없는 개도국은 불리한 협상을 할 수밖에 없기에 개도국간의 연대가 형성될 수 있는 다자주의 질서인 WTO 5차 각료회의가 무산됨을 개탄해 마지않았다. 그들은 WTO가 마치 전 세계 민중의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한국민중투쟁단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온 후 투쟁단 평가회의가 한 차례 진행되었다. 한국민중투쟁단의 현지 활동은 체계를 갖고 시작되었다. 칸쿤으로 떠나기 전 국내 상황실과 칸쿤 현지 활동 상황실 팀으로 나누어, 현지와 국내 상황실간의 소통 체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칸쿤으로 상황실 전체가 도착한 후 대표자 회의와 조직 책임자 회의를 진행, 한국민중투쟁단의 소통 라인을 구성하였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 소통과 공유 라인이 제 구실을 못한 것은 정확히 9월 10일 이경해 동지의 자결 시점 이후이다. 이경해 동지의 자결이라는 상황이 벌어질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이미 상황은 전개되었고 이에 가장 체계적이고 적합한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했다.

하지만 물 설고 말 설고 모든 것이 설기만한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작고 큰 돌발상황은 너무나 많았다. 그 많은 돌발 상황을 예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또한 수많은 돌발상황들을 처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실무력이 뒷받침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을 처리할 상황실에 배치된 일꾼은 고작 6명...

가장 먼저 틈이 벌어진 것은 소통 체계였다. 모든 일정을 정리하고 1차로 상황실 회의가 있고 다음으로 조직 집행책임자 회의가 이어지면서 그 날 그 날의 투쟁과 사업들을 총화하여 공유하고 투쟁단 전체에게 전달되어야 했고, 다음날의 투쟁 전술을 짜고 이 또한 조직 전체로 소통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늦은 밤까지 천막노숙투쟁단을 챙기랴, 촛불집회 준비하랴 등등의 실무로 밥 먹을 시간까지 잊을 정도로 실무를 처리해야 했던 상황실에서 회의를 하기란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물론 조직 집행 책임자 회의는 말할 것도 없음이다. 다음 날의 투쟁판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면서 그저 투쟁에 결합하는 상황들이 이어졌다. 한편 이경해 동지 자결이후 모든 투쟁이 농민중심의 투쟁으로 돌아가고 있음에 교육·의료·문화 등 서비스 협상에 대한 문제점이 묻히지 않을 수 있는 방법들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실천해 들어가지 못했다.

애초에 예상했던 5만에서 10만명의 세계민중들의 투쟁이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 1만 5천 여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이경해 동지 자결이후 한국민중투쟁단이 실천과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점을 모두가 인식하여 실천 지침들을 구성해야 했음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아쉬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천막 노숙투쟁 중간에 보여줬던 많은 해외 활동가들의 연대와 깊은 애정들은 국경을 넘은 동지애를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한국민중투쟁단에서 실천했던 상여투쟁, 밧줄 투쟁 등은 국제 사회운동 전술의 본보기가 되고도 남았다. 200여명의 최초의 대규모 원정투쟁의 경험은 이렇듯 많은 아쉬움과 기쁨을 남기면서 값진 투쟁의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민중조직 전체에도 마찬가지라 판단하는 바이다.

 

이후 결의를 밝히며...

 

10월 2일 교육부에서 발표된 국제자유도시 및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교육기관 설립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이 발표되었다. 이에 WTO 교육개방 저지와 교육공공성 실현을 위한 범국민교육연대는 10월 11일 출범식을 깃점으로 WTO 교육개방 전면화 특별법을 저지해 나가야 한다는 투쟁의 각을 세웠다. 비록 현재는 강위력한 투쟁을 전개해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나, WTO 교육개방 저지와 교육공공성실현을 위한 범국민연대의 선도적 투쟁으로 인하여 반드시 WTO 세계체제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굳은 투쟁의 의지를 다시금 확인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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