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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담론과문화] 우리에게 양심이 있다면

2010.04.20 18:41

진보교육 조회 수:1376

[담론과문화] 우리에게 양심이 있다면

이성우/진보교육연구소회원


어떤 고교생이 조영래변호사가 쓴 [전태일평전]을 읽고 적잖은 심적 혼란에 빠집니다. 학생은 아마도 사회적 불평등이나 자본주의사회의 모순 따위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품었던가봅니다. 며칠 뒤 학생은 사회교과를 가르치는 한 교사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이면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사가 대답하기를, "네가 가진 사상은 빨갱이의 것이고 너는 위험한 인물이 되겠다"라 했답니다.

참으로 씁쓸합니다. 가르치는 위치에 서있음이 뭘 뜻하는지......
하긴 어떻게 보면 그 선생님이 특별히 이상한 분이라 할 수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 학생이 예외적인 경우라 해야겠죠. 사회주의나 꼬뮤니즘 따위의 언어는 이 사회에서 오래도록 금기의 영역에 묶여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같은 사고 유형이 지성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보편적인 인간의 양심에도 맞지 않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힘주어 말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조건반사'라는 개념으로 풀어갈 것입니다. 특정 사상체계에 대해 대중들이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빨갱이'니 하는 반지성적인 표현 양식이 사라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한 얼마 전에는 우리 사회에서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 그것도 최고의 명문 대학임을 자랑하는 S대 학생이 TV의 퀴즈 프로그램에 나와 '빨치산'이라 답할 것을 ‘빨갱이’라고 내뱉았다고 합니다. TV에 퀴즈 선수로 나올 때는 그 중에서도 나름 똑똑하다는 인물일텐데 그 진풍경이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방불케 합니다. 참으로 웃기는 사회입니다. 학교에서나 지성의 전당에서조차 ‘빨갱이’라는 반지성적인 수사법이 우리 관념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참으로 씁쓸한 기분 떨쳐내기가 힘듭니다.

몇 년 전에 지부사무실을 가끔씩 찾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교육문제로 사무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내버리는 폐휴지를 가지러 오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한동안 할머니 얼굴이 잘 안보여 궁금해 하던 차에 사무처장 J선생님에게 그 분의 근황에 대해 물었더니...... 돌아가셨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연세가 많아 사실만큼 사셔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폐휴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로 도로를 횡단하다가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J선생님과 함께 그 할머니에 관한 얘기 주고받으며 참으로 우울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주로 자본주의에 관한 단상으로 모아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진 속에 있는 이런 분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또 우리가 가르치는 어떤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십니다. 나는 이런 분들 볼 때마다 이 놈의 세상이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우리아이들이 미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과격한 사람이어서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소득2만불’이라는 같은 울타리 내에서 살아가는데 이 분들의 운명이 다른 어떤 사람들의 그것과 왜 그리도 심한 차이가 있음을 생각한다면 내 말이 그리 심하게 들리진 않을 겁니다. “선의 본질은 공동선이며, 정의는 곧 분배의 정의”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선하지도 않고 정의와도 거리가 먼 불량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불경스럽지만, 노파의 그 모습이 흡사 밤거리를 활보하며 먹이를 찾는 도시고양이(보통 '도둑고양이'라 일컫지만)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삭막한 도시의 하루가 내놓은 배설물을 열심히 주워 담는 노파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우리와 같은 종에 속하는 생명체가 맞는가’ 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들도 분명 우리처럼 생물학적 분류체계상 최정점에 위치한 종에 속할 것이지만, 사회적 활동반경이나 행동방식에 있어서는 우리들과는 너무나 낯선(alien) 사회적 종(class)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런 착각이 일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튼, 노파의 모습은 추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합니다. 아니, 정작 추한 것은 도둑고양이를 방불케 하는 노파의 모습이 아니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상을 영위하는 이 무심한 도시의 풍속도일 것입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국민소득 2만불의 사회에서, 휠대로 휜 허리가 웅변하듯 늙기도 서러운 그 노파에게 드리워진 삶의 무게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삶의 속성에 비추어 우리의 존재론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도시의 배설물을 허리 굽혀 주워 담는 노파의 모습은 외계인의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모습임을 잊지 맙시다. 굽히기보다 펴기가 더 힘들 노파의 허리를 통해 우리는 질곡의 우리 현대사를 읽어내야만 합니다. 돼지가 아닌 지성인임을 자임한다면 그럴 의무가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빨갱이다?
특히 박정희시절에 이런 말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대다수가 침묵을 지킬 때 용감하게 말문을 여는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돌아옵니다.
“당신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당신 빨갱이야?”
사실 이 말은 그 논리적 정합성은 둘째 치고 “무엇에 대해” 말이 많은가 하는 측면을 언급하지 않은 점에서 이미 절반의 실패를 담고 있는 유아적 수준의 수사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 많음’과 관련하여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고 봅니다. 교사의 경우를 예로 들면, “친목회 때 말 많은 선생”과 “직원협의회때 말 많은 선생”의 두 부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군데에서 모두 말 많은 사람은 잘 없다는 겁니다. 이와 관한 자세한 저의 논리는 제 글 [침묵과 요설의 변증법, 본부게시판]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그냥 말 많음이 아니라 “특정 맥락에서의 말 많음”인 것입니다. 그 특정맥락이란 주로 "이웃의 불행에 대해 민감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의 불행에 그저 마음 아파하면 '착한 아이'가 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왜 불행한가에 대해 알려고 하면 '문제아'로 치부되는 것입니다.


네가 가진 사상은 빨갱이들이나 가지는 거고 너는 위험한 인물이 되겠다???

이 말을 들었을 때 학생이 받았을 상처도 상처지만 학생의 가치체계 속에서 어떤 심각한 혼란을 겪었을 것 같습니다. 그 혼란은 개념의 혼란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봅니다. 무엇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 혼란이 생깁니다. 그건 그 이상한 선생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선생은 제 무식한 줄 모른 채 자기확신을 갖고 떠드는데 반해, 학생은 선생이 권위를 동반하여 억누르니까, 선생 말이 뭔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자기 생각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기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이 사회에서는 극소수라는 현실 감각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학생이 내 앞에 있다면 “진리는 다수결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을 짚어주고 싶습니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일러주겠습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쓴 글귀를 인용해봅니다.

1980년대까지 [자본, Das Kapital]이 번역되지 않은 나라는 전세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이곳’ 밖에 없었음을 일러두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매우 특별한 사회이다. 히틀러의 만행을 능가하는 일제 식민지를 겪고도 식민지 시절 적극적 친일 행각을 벌였던 자들이 독립된 이후에도 지도층이 되어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지금까지도 자자손손 부를 축적해 오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인으로 말하자면 히틀러에 해당하는 일본천황에게 피로써(혈서와 선서) 충성을 맹세하며 일본군장교가 되어 민족 독립을 저지한 자가 해방된 조국에서 국가원수로 둔갑해 민주주의와 피억압 민중을 위해 저항하는 양심세력을 얼마나 많이 짓밟고 고문하고 죽였던가? 그럼에도 그는 이 나라를 흥하게 한 불세출의 영웅이란다. ‘이곳’에서는 민족을 배반하든, 부정부패를 저지르든 마르크스주의자만 아니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아니더라도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덮어씌우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였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지 못한 결과, 왜곡된 역사인식은 지금 이곳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암울한 시대는 갔으되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다. 지금도 이곳은 ‘맑스주의’에 관한 한 ‘인식론적 식민지’ 상태에 있다. 매우 특별한 이곳에서는 지금도 교사의 입장에서 맑스주의를 피력하자면 어떤 ‘커밍아웃’을 시도하는 것과 같은 망설임과 용기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 세계에서 ‘반공’이 국시였던 나라는 이곳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 멀지 않은 시절의 현실이었다. 독재를 청산하는 것은 단번에 이룰 수 있지만, ‘맹목적 반공주의’라는 우리 내면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요컨대, 맑스주의에 관한 한 우리 사회는 아직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을 때 그들은 나를 성자로 불렀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은 왜 굶주리는가 물었을 때, 그들은 나를 ‘빨갱이’라 일컬었다.
When I gave food to the poor, they called me a saint. When I asked why the poor were hungry, they called me a communist.  


브라질의 대주교 둠 헬더 까마라의 말입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개인적 실천에 머물면 노벨평화상을 받거나 최소한 범사회적 존경을 받게 되지만, 사회적 실천으로 옮기고자 하면 과격분자로 요주의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가난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여길 터이지 부당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려 하면 매우 불편한 평가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종교 관계자분들에게 대단히 미안하지만, 그런 이유에서 나는 우리시대의 성자라는 분들을 우러러 보지 않습니다. “선의 본질은 공동선이며, 정의(justice)는 곧 분배의 정의”이기에, 사람으로서 바르게(just) 살자면 분배를 바르게 하는 문제에 민감해야만 합니다. 분배에 있어 극심한 불평등을 간과한 채 막연히 바르게살기를 강요하는 모든 도덕률은 필연적으로 위선을 구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면, 앞서 제가 언급한 노파의 삶을 목격할 때나, (학생의 경우처럼)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의 전기를 읽었을 때, 우리 사회의 모순구조에 대해 심각한 회의와 함께 고민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환갑이 지난 나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청춘’은 그러해야 합니다.
회의!
‘회의’라는 것은 “가난한 것이 죄가 아닐진대 가난한 사람은 죽도록 일해도 비참한 삶의 처지를 못 벗어나는 반면, 부자들은 빈둥빈둥 놀고먹으면서 호화로운 삶을 사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요컨대, 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반면 부자는 또 너무 많이 가져서 비인간적인(타락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회의감은 필연적으로 불안감과 함께 분노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 불합리한 질곡으로부터 나 자신이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할 때 원인 모를 불안감과 함께 때로는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파도같은 분노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무식한 그 선생에게 일러두고 싶은 바이지만, 이건 결코 사춘기에 일시적으로 겪는 질풍노도가 아닙니다. 돼지 IQ가 아닌 인간의 이성과 함께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돼야 정상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 쪽은 너무 못 가져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다른 한 쪽은 너무 가져서 인간성이 상실된다면 그게 어떻게 정상적인 사회입니까? 많이 가진 자체가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는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한 끼의 점심식사비로 얼마를 지불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책에서 미국 부자들이 하룻밤 즐기기 위해 파티비용으로 쓰는 돈이 가난한 사람들 몇 만 명이 1년동안 쓰는 생활비보다 더 많다고 하더군요. 그 돈으로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수십만 명을 살릴 수 있겠죠. 그래서 아무리 돈이 남아돌아도 그렇게 소비하는 것은 죄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부가 열심히 일한 땀의 결실이 아니며 대부분 도둑질(프루동의 어법)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지나친 부는 그 자체로 죄악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더 힘들다" 하신 것은 이런 뜻일 겁니다.
비단 부자가 아닌 보통 사람의 경우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허리가 굽어질대로 굽어진 연약한 노파가 문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몸무게의 몇 배나 되는 폐휴지를 싣고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내리는데, 또 그러다가 차에 치여 돌아가시고 하는데, 어떻게 한쪽에서는 소주방에서 나이트클럽으로 또 노래방으로 이어가면서 밤새도록 흔들고 퍼마시며 미친 일상을 영위한단 말입니까? 이게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모습들입니까? 이런 사회에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입니까? 이런 우리의 삶이 배부른 돼지의 삶과 뭐가 다릅니까?                            
위험한 생각이라뇨?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는 이웃의 불행에 대해 마음 졸이고 또 그것을 생겨나게 한 사회적 모순에 민감해 하는 태도가 어떻게 위험한 생각입니까? 오히려, 그런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막창에 소주 땡기고 노래방 가서 “어머나 ~ 이러지 마세용~” 하는 것이 위험한 태도 아닙니까?
위험한 생각이라니?
어떻게 선생이라는 사람이 학생에게 그런 말을 던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선생이지만 만약 나의 제자가 내게 그런 ‘고해성사’를 해오면 손을 꼭 잡아주며 같이 울겠습니다. "너는 너무도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면 누구나 너와 같은 사고를 하게 되어 있는데, 대부분 그러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러주겠습니다.

“만약 상어가 사람이라면 작은 물고기들에게 잘 대해 줄까요?” K씨에게 주인집 여자의 꼬마가 물었다.
“물론이지” ......
... “그리고 만약 상어가 사람이라면 작은 물고기들에게 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를 멀리 하라고 가르칠 거야. 작은 물고기들은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그런 경향을 드러내면 즉시 상어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배울 거야.” - 브레히트, [상어가 사람이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안내해주겠습니다.

“네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 하든!”
Follow your own course and let people talk!
(원래는 단테의 말인데 마르크스가 [자본] 서문에서 인용해 씀으로써 유명해진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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