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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비전’을 품지 않고는 FTA를 버텨내지 못한다

정은교 │ 서울 양강중

‘FTA의 본질이 무엇일까’를 묻는 질문이 일년 전만 해도 여유로운 질문일 수 있었다. 아직 싸움이 본격화되기 전이었으니까. 미처 덜 파악했다 하더라도 나중에 보충할 수 있었다.    일년 전만 해도 ‘FTA 그깟 거, 얼마든지 비판해줄 수 있어’하고 호기롭게 바라보는 경향도 짙었다. 연구공간 ‘수유, 너머’의 고병권과 이진경이 합작하여 쓴 글이 작년 초에 인터넷에 올랐는데 요지인즉슨 이렇다. “경제적으로만 따져도 정말 어리석은 협상인데 노무현이 왜 나섰을까? 이는 그가 아메리카니즘에 쩔어 있어서 그렇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어리석은 경제협상인데 왜 한국의 지배세력 대다수가 열렬하게 지지했을까? 다들 ‘숭미 사상’에 젖어 있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하면 너무나 속 편한 설명이 된다.  

지난 4월 2일, 부시 정권과 노정권은 ‘협상 타결’을 선언했다. 민중운동은 이 ‘타결’을 막아내지 못했는데 그 까닭을 ‘저들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서’라고 설명하는 것은 ‘얄팍한 변명’이다. 민중운동이 실력이 모자라서 허용한 것이요, 그 실력 부족을 뜯어 보자면 첫째, 11월 민중총궐기때 밑으로부터의 투쟁 열기를 잠재우기 바빴던 지도부의 ‘결사항전 의지 부족’이요, 둘째 ‘반드시 막아내야 하는 것’으로 치열하게 선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실력 부족을 확실히 개선하지 못한다면 FTA는 그대로 통과된다. 이미 4월초의 타결로 하여, 반대하는 민중이 패배주의에 빠져 들었다는 엄중한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권투로 비유하자면 민중운동은 무쇠 주먹을 얻어맞고 한 차례 링 위에 엎으러졌다. 아직 ‘KO패’ 당한 것은 아니겠으나 저들은 기고만장하여 날뛰고 있고, 몽롱해진 정신을 빨리 가다듬어 사생결단하지 않고는 패배를 면하기 어렵다. 링에 3번이나 엎으러졌다가 기어이 상대를 눕힌 복서 홍수환이 정말 그리워지는데 그의 승리 비결은 ‘헝그리 정신’이었다. 과연 한국의 민중운동이 그런 헝그리 정신을 발휘할 수 있을까?

범국본은 이미 작년 하반기부터 골골거리기 시작해서 4월 ‘타결’ 뒤에는 투쟁을 거의 손 놓았다. 지난 5월 17일 범국본 토론회는 아주 위험한 이야기들을 버젓이 꺼내놓았다고 하는데, ‘전면 무효화’ 투쟁을 벌일 경우 ‘꼴통 집단’이라는 ‘국민적’ 비난이 부담스럽다는 말이다. 그래서 계속 ‘전면 반대’를 외치는 시늉을 하되 이를 빽으로 하여 국회에서 ‘재협상’ 논의에 끼어들자는 이야기가 다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면 반대’가 아니라 ‘부분 반대’요, 이를 뒤집어 말하면 ‘조건부 찬성’이 된다. 협상문안이 공개될 경우 국민의 분노를 기반으로 다시 투쟁의 불길을 지피겠다던 의지는 어디론가 실종돼 버렸다.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구실로, 기회주의 시나리오를 꺼내들 위험이 높아졌다.  
이렇게 범국본이 무너질 거라는 사실은 사실 일년 전부터 예견할 수 있었던 일이다. 범국본은 분야별 협상 중에 ‘국익에 유리한 것이 없다’는 논지로 선전을 해왔는데 그렇게 뜨뜻미지근한 반론으로 사람들의 투쟁을 불러 일으킬 수는  없었다. 선전하기 쉬운 내용이라고 ‘광우병’을 거론하여 시민의 관심은 끌었지만 그 시민들이 가세하지는 않았고, ‘농민의 피해’를 주로 언급한 탓에 민주노총의 노동자들이 ‘농민을 도와줘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은 느꼈어도 사람이 ‘연민의 정서’만으로 투쟁에 나서지는 않는다. ‘노동자에게 재앙이 닥친다’는 사실을 치열하게 알려내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노총은 얼마든지 ‘먼산바라기’를 할 수 있었다.
FTA의 본질이 무엇일까? 세 가지로 간추리자. ① 미국의 경제식민지로 편입  ② 신자유주의의 완결판  ③ 소(小)제국주의로의 발돋움. 이 중에 ①은 얼마쯤 선전이 되었고, 오히려 과잉되게 선전함으로써 다른 측면들을 가려버린 효과를 낳기도 했다. 범국본은 분야별 협상 논의에 말려드는 바람에 ②의 측면을 가열차게 선전해내지 못했는데 그랬으니 민노총이 별로 참여하지 않고도 마음의 부담을 느끼지 않았지. ③은 아예 주목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왜 ③이 중요하냐면 남한 자본이 미국에는 손해를 보더라도 자기들의 ‘해외 진출’에서 이를 벌충할 심산이었음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손해 보는 협상이니까 반대하는 국민이 늘 거’라는 기대는 너무나 소박한 기대였다.
노동자계급에게 닥칠 재앙은 그런 속셈을 한미 지배세력이 시원하게 털어놓지 않으니까 ‘실증 자료’로 밝히기는 어렵고, 그러니 계급적 관점을 확실히 움켜쥐고서 선전에 나서야하는 문제이기는 했다. 그러나 ‘논리’로써는 얼마든지 설파할 수 있거니와, 타결 무렵에 나온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가 그런 구조조정과 계급투쟁의 속셈을 넌지시 비춰 주었다. 여전히 공개를 거부하는 ‘양해 각서’와 ‘이면 합의들’ 속에 신자유주의 방향으로 제도와 법을 완전히 뜯어고치라는 미국의 요구가 들어 있으리라고 넉넉히 예견할 수 있는데 이미 한나라당과 노무현이 신자유주의 개헌을 합의해 놓은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범국본은 이미 사상적으로 무너졌고, 민노당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노회찬과 심상정이 TV 토론회에서 ‘국익 공방’으로 임하다가 정부 관리들에게 밀린 것으로 이미 실증된다. 3월 중순에 미디어 참세상은 ‘이미 싸움은 졌다.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옮아가자’고 안타까운 논평을 실었는데, 싸움을 더 이어갈 기백이 없음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경솔한 체념론’으로 비판받을 일이지만 투쟁 주체의 상황이 아주 심각함을 알린 점에서는 정확했다. 그래, 민중운동은 이미 작년말 민중총궐기에서 꼬리를 내린 순간부터 ‘패배’에 맞닥뜨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해야 이 흐름을 뒤집을 수 있을까? 위로부터 싸움이 근사하게 벌어질 기대일랑 접는 게 좋다. 밑으로부터 투쟁 흐름이 솟구쳐서 상부의 기회주의 그룹들을 닦아세우며 싸움을 이어가야 비로소 희망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둡다.
그런데 하부 투쟁대중들이 ‘결의’를 북돋우려면 어떤 관점과 사상으로 무장해야 할까?
    
조중동 언론을 유심히 뜯어 읽은 사람들은 지배세력이 어떤 셈속으로 한미FTA에 나섰는지를 어렵지 않게 읽어낸다. “20년이 다 된 87체제가 지배세력에게도 불편하다. 어떻게든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게다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한국 자본들이 활로를 찾아야 한다. 미국과 파트너 관계를 더 밀착함으로써 자본주의 선진국으로 가자!” 이것이 그들의 전략이요, ‘미국을 본받아 선진국으로 가자’는 것이 그들의 비전이었다. 지배세력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 누구나 ‘비전이 필요하다’는 정세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그 ‘비전’은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선진국 도약’이 가능하다는 보장도 없고, 선진국이라도 10 대 90의 절름발이 선진국이 될 뿐이겠지만 어쨌든 ‘비전’이기는 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희는 만날 반대만 했잖니? 그럼 FTA를 하는 대신에 무엇을 하겠다는 거야?” 그에 대해 답하지 못하고서는 ‘기 싸움’에서 결국 패배한다. 전 청와대 비서관 정태인처럼 “한미FTA 대신에 한중 FTA를 했어야 한다.”는 논리는 머릿 속에서는 지어낼 수 있어도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으므로 결국 한미FTA를 불만스럽게 수용하는 결과로 갈 것이다.
다음과 같은 믿음을 높이 품고 결사 항전할 때라야 우리는 가까스로 FTA에 파열구를 낸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밖에 낳지 못하는 자본주의 자체를 거부한다. 백년에 걸쳐 투쟁한다면 얼마든지 사회주의로 갈 수 있으며 당장은 ‘연대 사회’를 지향하겠다. 그 길이야말로 인류가 윤리와 사회성을 회복하고 지속적인 생존을 보장받는 길이다.”
아마 어쩌면 우리는 결국 FTA에 무릎 꿇을지도 모른다. 이미 한참을 죽 쑤었으므로. 그러나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싸우는 만큼 우리는 일어날 수 있다. 밑으로부터 투쟁이 일어나는 만큼, 지금의 썩어 문드러진 운동판을 바꿔낼 수 있고 그래야 재기한다. 녹록치 않은 현실 앞에서 우리는 숙연하다. 아아, 기개 높은 사람들이여, ‘비전’을 품고 일어나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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