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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학교를 파는 시장터 - 남부 고교선택제 학부모 설명회를 다녀와서

송지선 / 구로고

몇 년 전 처음으로 고3 담임을 하면서 1년 동안 각종 대학 마크가 찍힌 물건들이 집에 하나씩 늘어갔다. 포스트 잇, 가방, 시계, USB, 보온병, 머그컵, 우산, 찻잔 세트 등등…. 처음엔 그런 걸 마구 주는 것이 좀 신기하기도 했지만 별 생각 없이 집으로 받아왔다. ‘에이∼학교 마크 좀 안 보이는데다 찍어주지….’하면서 말이다. 어느 대학에서 주었는지 모를 메모지 박스가 선생님들에게 별 인기가 없어 학년부실 한구석에 막 쌓여 있다가 처분되는 것을 무심코 지나치기도 했고, 필요한 것을 받았을 때는 솔직히 좀 반갑기도 했다. ‘어차피 배치표로 대학 순위는 거의 정해져 있고 애들은 배치표랑 평판에 따라 대학 가는데 고 3 담임들한테 이런 선물을 주면 뭐가 달라지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뭐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것은 나와 별 상관없는 대학의 문제, 그것도 요즘 살아남기 힘든 지방 사립대만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월 24일. 남부교육청에서 주관하는 고교선택제 학부모 설명회가 있었다. 그날 학부모가 많이 모이니 우리 지회는 고교선택제 반대 선전전을 하자고 해서 행사장인 윤중중학교에서 모이기로 했다. 윤중중학교에 가는 길, 약속 시간 보다 일찍 도착하기도 했고, 학교 앞에 무슨 큰 마트가 보여 음료수나 하나 사먹어야겠다 생각하며 들어갔다. 그런데 일요일인데도 교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여학생들과 교사로 보이는 젊은 여자 분들이 큰 쇼핑카트를 두 개나 끌고 다니면서 음료수며 과자 등을 잔뜩 사고 있었다. ‘설마.. 설명회에서 과자로 애들이랑 학부모 유혹하는거..?’ 근데 정말로 그 일행은 나와 함께 윤중중학교로 향한다.
행사장 안에 각 학교 별로 교실을 하나씩 차지하고 부스를 차렸다고 하는데.. 그 걸로는 부족한지 교문 앞에서부터 벌써 가판을 차려 놓은 학교가 보였다. 우리도 선전전을 하려고 선전지를 챙겨 교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행사장 건물로 들어가는 길목 여기 저기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 보인다. 그리고는 저마다 자리를 잡고 그 낭랑한 목소리로 “안녕하십니까! 꿈을 이루어주는 ○○고등학교입니다.”라고 외치며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고등학교 이름이 커다랗게 인쇄된 쇼핑백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다른 학교 학생들이 꼭 비행기 승무원 같이 예쁜 미소를 띠며 열심히 홍보물을 나누어 주고 있다. 한마디로 행사장은 호객행위 하느라 시끌벅적한 시장판이다.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에는 칸칸마다 ‘△△고등학교’ 스티커가 잔뜩 붙어있다. 학교를 둘러보니 곳곳에 이 스티커가 안 붙어 있는 곳이 없다. 그 학교 선생님들과 애들이 새벽부터 와서 붙였을까? 학교 이름 하나 학부모 뇌리에 남기겠다는 절실함으로 이 스티커를 이렇게 열심히 붙였을까? 꼭 그 짧은 시간에 이름 하나 소비자에게 남기겠다고 상품명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TV광고처럼….

선전지를 나누어주는데 우리학교 교무기획 샘이 지나간다. 학교 부스에 앉아 있다가 너무 민망해서 도저히 있을 수 없어 나왔다고 한다. 처음엔 하나도 준비 안했다가 판넬이라도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판넬 4개 만들어 왔더니 너무 초라해서 우리 학교 부스는 아무도 들어오질 않는단다. 그 판넬 만드는데 100만원 들였는데, 다른 학교는 영상이다 장식이다 뭐다 해서 잔뜩 화려하게 준비하고 애들까지 동원했으니 돈을 얼마 들였을지 상상도 안 된다고…. 이렇게까지 치열한 판촉전이 벌어질 줄은 교장, 교감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 하면서 교문 밖으로 나가신다.

행사장 안에는 어느 학교에나 다 있는 원어민 교사가 홍보 도우미로 동원되어 부스 한쪽에 서 있는 학교도 있고, 예쁘게 차려 입은 여선생님들이 학교 부스 앞에서 친절한 미소로 학부모를 불러 모으는 학교도 있었다. 그리고 사탕과 온갖 음료수, 과자를 뿌리며 홍보하는 학교도 있었다. 복도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우리 학교는 꿈을 이뤄줘요”라고...교사와 학생이 학교 홍보에 동원되는 것이 우리의 꿈이었나?
부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결국 우리나라 고등학교는 두 종류다. 입시 성적이 좋은 학교와 그렇지 못한 학교. 성적이 좋은 학교는 입시 결과를 내세우고, 그렇지 못한 학교는 ‘인성교육(?)’을 특색사업으로 내건다. 그렇게 드러난 우리 교육의 앙상함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런 걸 크게 써 붙이고는 나머지는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정말 아이들을 위해 쓰여야 할 엄청난 교육 예산을 동원해 어울리지 않는 포장을 해 놓은 채 학교를 학부모들 앞에 내놓고 있었다. 예쁘고 보기 좋은 거 선택하라고….

  
  

2009년 학교 홍보비로 쓰인 돈이 평균 880만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강동의 어느 고등학교는 홍보비로만 3,500만원을 지출했다고 한다. 한 해 홍보비를 1,700만원 이상을 쓴 학교가 10개나 된다. 표에 나온 것은 아마 대부분 고교선택제로 당장 위태로워질 수 있는 사립 고등학교들이겠지만 올해 윤중중학교에서 망신당한 우리 학교 교장이 내년에 학교 홍보비로 얼마를 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중학교에 있는 한 선생님이 그 지역 고등학교에서 보내온 USB를 받았다고 한다. 이제 중학교 교무실에 고등학교 이름이 찍힌 각종 물건들이 쌓일 날이 오는 걸까? 이 치열한 학교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학교들은 어떤 홍보물까지 만들어낼까? 그 동안 우리가 봐왔던 대학들의 생존 경쟁이 그대로 우리의 모습이 될 것이다. 광고는 점점 화려하고 다양해지는 반면 학교는 점점 가난해지고 교육은 더 망가져갈 것이 분명한데도 왜 이런 짓을 계속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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