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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한국민중교육의 역사적 전개와 프레이리 교육사상

2003.07.14 10:44

홍은광 조회 수:2504 추천:5

프레이리 교육사상에 대한 평가와 분석

한국 민중교육의 역사적 전개와 프레이리 교육사상

홍은광 프레이리 연구팀


1. 한국 민중교육운동의 역사적 전개와 그 특징

한국 민중교육운동은 그 역사적 전개에 있어서 연관과 단절을 함께 가지고 있다. 한국 민중교육운동의 역사적 뿌리는 구한말의 노동 야학에서부터 시작한다. 일제시기 노동야학과 농민야학, 강습소 등에서의 교육활동은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중요한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은 이후 저항운동의 주체 역량 소실로 인하여 민중운동의 흐름은 일정한 단절의 시간을 갖게 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 민중교육운동은 해방이전의 흐름이 한국전쟁 이후 일정한 단절을 겪고, 1960-70년대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다가, 1970년대 후반 프레이리 교육사상의 도입과 1980년대 중반 맑스-레닌주의의 광범위한 유입,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입과 신사회운동의 성장이라는 역사적 전환 과정을 겪었다.

한숭희(2001: 113-118)는 한국 민중교육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그 특징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었다. 그 첫 번째 시기는 1960년대 중·후반 이후 1970년대 말까지의 시기로, 이 시기의 민중교육은 기독교와 카톨릭 단체의 해방 신학 지향의 선교교육이 중심이었으며, 사회 변혁을 위한 정치운동보다는 휴머니즘에 기반한 인권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 졌다. 두 번째 시기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맑스-레닌주의를 중심으로 한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는 시기로, 기존의 해방 신학적 인식론과 유물론적 인식론이 민중교육 내에서 갈등을 일으키며, 과학적 사회주의에 기반하여 정치 변혁을 위한 '선전·선동'의 성격이 강한 의식화 교육의 성격을 가지는 시기다.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1990년대 초반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이며, 기존 민중운동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비판이 신사회운동과 포스트 모더니즘적 시각에서 제기되며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원리에 기반한 민중교육의 가능성이 잠재하면서 표출화되고 있다. 이러한 한숭희의 민중교육에 대한 시기 구분을 기반으로 하여 민중교육의 흐름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그 교육 목적, 주요 실천 단위, 주요 단체 유형, 주요 교육 내용, 주요 사상적 기반을 개괄해 보았다.

1) 1960-70년대: 교육운동의 한계와 반성, 민중교육운동의 태동

먼저 1960년대의 교육 실천은 기존사회에 비판성을 가지지 못하고 기존 체제에 대한 편입을 주요한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민중교육운동에는 속한다고 보기 힘들지만, 1970년대의 흐름이 1960년대의 흐름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민중교육운동의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함께 분석되어져야 한다. 1960년대의 교육 실천은 그 교육목적이 기존 사회에 대한 편입을 위하여 자유주의적 관념을 가진 지식인들의 시혜적 의미에서의 교육형태가 주를 이루었으며, 조직 유형에 있어서도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검시야학이 다수였고, 기초문해와 기능문해, 그리고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교육이 주를 이루며(이미숙, 1985), 인본주의 신학을 그 사상적 기반으로 하였다.

1950년대 말부터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산업전도가 시작되고 산업지역의 전도활동을 통해서 보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메델린 주교회의가 있었던 1968년을 기점으로 기독교 교육운동은 '산업 선교'로 그 활동 방향을 전환하고 노동자의 인권 향상과 민주노조건설 운동을 조력하게 되면서 노동교육을 진행해 나간다.

1970년대의 민중교육운동은 1960년대의 교육활동에 대한 비판과 반성, 해방신학의 도입이라는 상황에서 사회 변화를 주요한 목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활동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단체 내의 지식인과 목회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는 1970년 노동인권을 주장하며 분신했던 '전태일 열사'의 영향이 컸다.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외면에 대한 자기반성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중교육 활동가들은 사회체제에 대한 급진적 저항에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인 개선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정환규, 1985: 153).

1970년대 민중교육의 실천 현장으로서는 기독교 선교운동, 야학과 노동운동, 농민선교운동, 도시빈민선교운동 등이 있었다(이미숙, 1985: 27-44). 이 시기 대표적 민중교육의 실천사례인 '크리스챤 아카데미 산업사회 중간집단 교육'의 경우에도 사회의 통합과 화해를 통한 점진적인 민주주의 사회로의 개혁을 중심 목적으로 하였다(정연순, 1997). 1960년대에는 검시, 생활야학을 주요 활동목표로 하였던 야학운동도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 특히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현장에 대한 문제의식이 깊어지면서 많은 야학들이 노동야학으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학생운동의 경우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으나 1970년대 말까지는 노동문제에 대한 조직적인 결합은 이루어내지 못하고, 개별적인 형태로 기독교 노동교육운동, 야학운동에 결합하였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이 기독교 교육운동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져, 알린스키의 조직화론과 함께 기독교 교육운동의 활동의 중요한 원리로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기독교 야학을 통해서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2) 1980년대: 민중교육운동의 질적 전환과 내적 갈등

1980년의 '5·18 광주 민주항쟁'은 한국 민중운동의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광주항쟁은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민중운동 이념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1980년대 민중운동의 감성적 출발점으로서 작용하였다. 1970년대 말 프레이리 사상이 대중적으로 소개되고, 1980년대 맑시즘이 유입되면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성이 성장하면서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맑스주의적 변혁운동이 성장하여 민중교육의 흐름은 해방신학적 기반에서 맑스주의적 기반으로 이동하게 된다. 1980년대의 민중교육운동은 사회의 구조적 변혁이라는 목적 하에, 그 조직 유형에 있어서 이전의 종교단체의 외피를 벗고 자주적 대중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기 시작하며, 그 내용도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사회과학적 안목의 성장을 위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 정권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이전보다 이념적 지향을 분명히 하면서 기독교 교육운동은 개별 노동조합 건설보다는 선진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화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빈민선교교육운동은 지역사회교육활동을 그 중심으로 삼게 된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여러 대중운동 단체들의 성장과 함께 기독교 교육운동이 담당하였던 민중교육활동의 기능이 여러 대중운동단체들로 이전된다.

교사 교육운동은 1970년대 말 종교단체 안에서 주로 야학운동과 기독교 운동과 관련을 맺은 개별적이고 소규모적인 활동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는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교사 교육운동을 거쳐 1986년 '교육 민주화 선언' 운동을 통해 1987년 전교협의 조직, 1989년 전교조의 결성에 이르게 된다. 학생운동의 경우에는 1970년대 말 기독교운동과 야학운동의 역사적 유산을 기반으로 노동운동과 정치투쟁에 집중하면서 기독교 교육운동, 야학운동, 교사 교육운동의 연계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학생운동은 1980년대 이후 노동운동에 집중하면서 노동야학, 기독교 교육운동에 참여하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교사 교육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노동운동에서의 교육활동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종교단체에서의 교육운동을 중심으로 소그룹 학습조직 형태로 이루어지다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는 전노협, 민주노총, 노동교육운동 단체 등에서의 노동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며, 노동자의 정치적 의식의 함양과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노동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노동해방 사상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하여 노동운동 지도자 즉, 노동계급의 유기적 지식인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교육기관설립운동이 1980년대 말부터 시도되기도 하였다(김민호, 1996; 조정아, 1996).

이 시기에는 프레이리의 의식화론이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교사운동 등의 여러 영역에서 중요한 지침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맑스주의와 결합되어 하나의 비판적 운동주체 형성을 위한 교육 이론으로 채택되었다. 상대적으로 교육기능이 강하였던 야학의 경우 교육 원리와 방법에 대한 교사 세미나 자료에 프레이리의 저작과 관련 저작들이 사용되기도 하였다(기독교 야학 연합회, 1985: 143).

1980년대 민중운동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기존의 해방신학적 민중교육론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민중교육론이 이론적, 실천적 갈등을 가지게 되며(한숭희, 2001: 114), 점차로 '과학적 사회주의'에 그 중심이 옮겨진다는 것이다. 민중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서 이은숙의 다음과 같은 글은 당시의 민중교육의 지향이 1970년대에 비하여 더욱 사회 변혁적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교 외 교육 즉 비제도권 교육운동도 사회변혁을 위한 교육운동으로 확산·발전되어야 한다. 노동자를 위한 각종 교육구조도, 농민운동을 위한 농민 교육도, 도시빈민을 위한 각종 교육구조도, 그 밖의 모든 대중교육구조도 모두 사회변혁을 위한 교육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 사회 변혁을 위한 교육적인 요구를 체계화·이론화시킨 것이 민중교육론이다. 다시 말해서 민중이 처하고 있는 역사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교육적인 노력이 바로 민중교육운동이다(이은숙, 1988: 178).

당시 이러한 민중교육의 정치성 강화의 흐름에는 일정한 내적 갈등이 있었으며, 이에는 정치와 교육의 관계, 지도와 대중의 관계 설정에 대한 문제들이 중심이 되었다. 예를 들어, 정환규(1985: 148-151)는 1980년대의 민중교육론의 갈등 양상을 지적하며, 이를 '해방교육론'과 의식화 교육론'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해방교육론은 사회주의적 일반명제에서의 교육의 기능에 기반하여 혁명의 과정으로서의 교육을 지향하며, 노동계급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노동계급운동의 일환으로서의 교육을 강조하고, 노동자 스스로의 의식화를 꾀한다. 그러나 의식화 교육론은 비판적 사회이론과 변증법적 인식론, 카톨릭적 세계관으로 융합되어 구성되며, 남미의 사회적·교육적 현실에서 구성된 프레이리의 교육이론을 중심적 기반으로 삼는다. 그에 의하면 온건한 입장을 가진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론은 전사회의 소외·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양심적 지식인에 의해서 경험되고 이론화되어 지도되는 교육이론이다. 이러한 정환규의 민중교육론에 대한 구분과 설명을 통해서 1980년대의 민중교육 진영 내에서의 프레이리 사상과 맑스주의와의 대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정환규는 의식화 교육론이 매우 소박한 민중주의와 인간주의, 온건한 입장에 기반하고 있음을 아울러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맑스주의 입장에서의 프레이리 이론에 대한 비판과 동일하다. 정환규의 '의식화 교육론'과 '해방교육론'의 대비 설명에서 의식화 교육론은 프레이리의 교육사상을 의미하며, 해방교육은 사회주의 교육을 의미한다는 주장에서, 이 시기까지의 의식화 교육은 곧 프레이리의 교육론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화 교육론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순수하게 프레이리적인 것이기보다는, 그 당시의 사상적 지향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한국적 맥락에서의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의식화 교육'이라는 개념으로 대표되는 프레이리 교육사상은 조금씩 그 강조점을 달리하면서 한국적 맥락 안에서 변형된 것이다.

이 시기의 민중교육론은 지나친 경직성과 기계적인 유물론의 영향으로 그 근본적인 교육이념이 왜곡되어 '선전'과 '선동'의 개념으로 전화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한숭희, 2001: 113).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성낙돈(1991: 45)은 노동교육의 과제를 설정함에 있어서 '교육 만능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을 주장하였다. 즉,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노동교육을 보아야만 구체적인 실천요구를 지니고 투쟁과 결합할 수 있는 노동 교육의 운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천노동자 대학 운동의 내부에서도 교육과 정치에 무엇을 우위에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과 긴장 또한 있었다(김민호, 1996).

결국, 1980년대 민중교육운동 내부에는 그 목적과 실행의 중심에 대한 내적 갈등과 긴장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의 프레이리 교육사상에 대한 입장들의 갈등에 대한 분석은 한국 민중교육운동의 형성과 전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연구지점이라 할 수 있다.

3) 1990년대: 민중교육운동의 침체와 전환 시도

1990년대에 이르러 후기 맑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유입되고, 신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이 성장하면서 한국 민중교육운동은 또 한번의 전환을 겪게 된다. 변혁운동의 지향으로서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계층 분화, 제한적 민주주의의 실현 등의 조건에서 변혁적 노동계급 운동이 상대적으로 퇴조하면서 새로운 행동 양식을 가지고 새로운 영역에 대한 '신사회 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시민운동과 다양한 문화운동이 성장하였다. 이러한 신사회운동에는 그람시의 시민사회론과 '진지전(war of position)'론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람시의 시민사회론과 진지전론은 전체 변혁운동의 전략적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지만, 한국의 시민운동은 시민사회 내에서의 시민 주체의 체제내 개혁으로 그 지향이 개량화되면서 민중운동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상호 보완적 관계가 아니라 경쟁적 관계를 갖게 되었고, 스스로의 지향을 제한적으로 설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시민운동은 기존의 계급-민족 담론보다는 다른 부문영역의 주제에 천착하면서, 시민주체의 자발적 참여와 의식의 함양을 중요한 교육적 지향으로 갖고, '민주시민의 의식 함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시민 교육사업을 진행하였다(양희준, 2001). 그 주요한 교육 내용으로는 부문운동 영역에 대한 내용 즉, 환경, 여성, 지역 등이 있으며, 1980년대 정치적 활동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대중조직 내에 있었던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단체들이 독자적으로 교육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한국 민중교육운동의 중요한 흐름이었던 야학운동은 저학력 노동자의 감소와 노동운동으로의 노동야학 기능의 흡수, 제도권 내에서의 성인교육제도의 발달로 인하여, 1990년대 이후 다시 생활야학, 검시야학의 형태로 회귀하는 현상을 보이며, 이와 함께 한편으로는 환경, 여성, 지역 등의 신사회운동의 영역에 포괄되는 이슈를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노동교육의 경우도 기존의 철학, 경제학 중심의 유물론 학습에서 보다 넓은 영역에 대한 비판적 의식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교육 영역의 외연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민중'이라는 호명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계급적 정체성을 강하게 부여받은 말이었으나, 시민운동은 지나친 노동자 계급 중심성을 부정하고 의식적으로 '시민'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에, '민중교육'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990년대 이르러, 물론 여전히 1980년대 활동의 유산을 이어받은 민중교육 실천은 계속되었지만, 민중교육에 대한 학문적 관심도 낮아졌으며, 이와 함께 프레이리라는 교육사상가·실천가 또한 함께 회상의 대상이 되어갔다.

 

2. 한국 민중교육운동의 전개와 프레이리 교육사상

 

1) 한국 민중교육운동에서의 프레이리 교육사상 수용과정과 그     특징(-1979년 이전까지)

프레이리 교육사상은 한국의 민중신학자였던 문동환에 의해서 1970년대 초반 소개된 이후, 기독교 교육운동을 중심으로 민중교육의 이념적 방향으로 받아들여졌다. 프레이리에 대한 한국 내에서의 최초의 학위 논문인 김성재의 논문 이후, 신학대학을 중심으로 기독교 교육운동의 이념적 지향, 방법론적 원리로써 연구되어왔고, 기독교 민중교육의 현장에서 그 교육방법의 원리로서 적용되어졌으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초기의 프레이리의 교육사상의 수용은 신학자, 신학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민중운동, 민중교육운동에서 기독교 운동은 하나의 시발점, 모태로서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에서 프레이리 교육사상이 이후 여러 민중운동에 전파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이와 함께 초기에는 프레이리 교육사상이 기독교적인 것으로만 이해되는 경향이 한편에서 있기도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프레이리 교육사상이 기독교 민중교육운동의 이념적 지향의 전환에 도움을 주었지만, 프레이리의 교육방법론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나 실천의 형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물론, 야학운동을 중심으로 1970년대 중후반에 프레이리식 방법론을 적용하고자 한 시도가 있었지만, 프레이리 사상의 구체적인 적용의 사례는 많지 않았으며, 교육활동의 이념형 수준에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로써 이후 프레이리 교육사상에 대한 한국사회의 구체적인 적용과 민중교육의 방법론의 새로운 구성에 대한 필요성이 실천적으로 제기되었으며, 이러한 시도가 일각에서 진행되기도 하였다.

셋째, 1970년대 민중교육운동에 있어서 교육자-학습자의 관계는 이후에 살펴볼 1980년대 민중교육운동보다 상대적으로 학습자 주도성을 더욱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알린스키의 조직이론과 더불어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론은 학습자의 경험세계에 기반한 의제의 선정, 지역주민중심의 실천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지향에 이론적 바탕이 될 수 있었다. 즉, 지역 주민이 중심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외부에서 지원하고 촉발하는 성격을 강하게 가졌다. 민중이 주체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의식할 수 있는 계기를 함께 만들며, 문제점에 대한 해결을 위한 집단적 조직화의 과정을 외부자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 그 내부에서의 조직화의 과정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넷째, 프레이리 사상과 민중신학의 관계에 있어서 프레이리의 인식론과 방법론이 한국 민중신학의 방법론에서 민중 담론에 기반한 교육 방법론을 구하고자 하는 시도의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서남동의 '한(恨)과 단(斷)의 신학'과 김용복의 '민중의 사회전기(社會傳記)', 문동환의 '이야기 신학', 그리고 허병섭의 '민중사실 연구'등은 이러한 지향을 반영한 민중신학, 민중교육 방법론에 해당한다.

2) 1980년대 민중교육운동에서의 프레이리 교육사상의 수용과 영향

1980년대 민중운동의 전개에서 프레이리 교육사상의 영향을 알기 위해서 한국 민중교육운동이 처한 사회적, 주체적 사상적 상황과 그 안에서의 프레이리 교육사상에 대한 이해와 실천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한국 민중교육운동이 처한 사회적 조건은 프레이리 사상이 수용되고 실천되는데 있어서의 기본적 조건으로서 작용하였다.

첫째, 한국과 브라질의 사회적 상황의 공통점과 유사점에 있어서 비문해율의 정도와 종교적 기반의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프레이리 교육사상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적었으며, 분단체제라는 이념적 상황은 프레이리 사상의 실천에 있어서 제한점으로 작용하였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의 민중운동과 정권의 극렬한 대립이라는 상황은 프레이리 교육사상의 구체적인 적용보다는 지배권력과 이념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서 받아들이는 경향을 강하게 만들었으며, 한국의 교육체제의 폭력성은 지배교육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프레이리 사상의 수용이라는 경향을 강화시켰다.

둘째, 프레이리 사상은 분단체제라는 상황 하에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프레이리 사상의 의미 변용, 왜곡에 많은 부분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79년 한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에서「페다고지」를 번역 출간했을 때의 상황은 1978년부터 제기되어온 기독교 운동 특히 산업 선교 운동에 대한 '좌경, 용공 논쟁'이 기독교 내외에서 진행되었던 시기이다.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구조는 프레이리 교육사상에 대한 정권의 왜곡 시도가 계속해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사회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프레이리 교육사상은 1980년대 초의 '야학 연합회 사건', 1980년대 중반의 '「민중교육」지 사건', 1980년대 중·후반의 '의식화 교사'사건 등의 정권의 좌경, 용공시비에 의해서 계속해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공세는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을 사회주의 '좌경 의식화교육', '세뇌교육'으로 몰아붙여 프레이리 교육사상을 왜곡되게 이해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셋째, 프레이리의 교육사상의 수용 당시의 한국 사회의 맥락으로 '민중운동집단과 정권간의 극렬한 대립'이라는 정치적 조건이 있었다. 가시적인 투쟁을 통해서 사회의 민주화를 이루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안정적인 교육활동은 미비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민중교육운동 진영은 이러한 정치적 대립상황으로 인하여 안정적인 교육활동이 어려운 조건에 처해있었고, 프레이리 사상에 대한 장기적인 연구와 실천의 기회가 제약당하는 상황이 있었다.

넷째, 프레이리의 사상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의 사회적 조건으로서 한국 교육체제의 비민주적, 권위적 특질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형성할 수 있게 한 것이 프레이리 교육 사상이었다. 프레이리 교육사상은 비판적 교육사회학이 소개되기 이전에 1970년대 말부터 지배를 위한 교육에 대한 이론적인 비판을 제기하였고, 이는 제도권의 교육체제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서 받아들여져 왔다. 1980년대 중반 이후「페다고지」가 학생운동의 입문교재로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제도교육에 교육받은 내용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정립을 위한 '개안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프레이리 사상의 영향과 관련한 한국 민중교육운동집단의 주체적 상황에 있어, 먼저 야학운동의 경우, 야학교사의 대부분을 이루던 대학생 교사들의 장기적인 활동의 부재, 경험 축적 체계의 부재라는 상황에서 프레이리 사상에 대한 장기적인 연구와 실천 프로그램의 실시, 성과의 축적 등이 원활히 진행되지 못하였다. '대화식 방법론'을 추구하였지만, 실제의 대화식은 말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정도에서 머무르고, 많은 부분에서 주입교육이나 교육내용에 대한 일방적 정당화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하여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은 그 본래의 원리가 충분히 발현되지 못하는 방식으로 야학교육에 적용되어졌다.

다음으로 제도권 학교가 주 활동 영역이었던 교사 교육운동의 경우 신분의 위협과 기존 체제의 경직성, 학력주의 체제로 인하여 여타의 민중교육운동 보다는 새로운 방식의 교육을 펼치기에는 더욱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사 교육운동에서는 프레이리 교육사상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탄압과 함께 '제도권 신분'이라는 주체적 상황은 '의식화 교육'을 가장 기초적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정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1980년대 후반의 '참교육 운동'을 거쳐 1990년대의 교사 교육운동이 정치적인 성격을 점점 잃어가게 되는 한계로서 작용한다.

한국 민중운동의 사상적 조건과 프레이리 사상의 수용·영향과의 관계를 알아보고자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집단의 이념적 지향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이러한 이념적 지향이 프레이리 교육사상의 한국적 수용과 실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 사이의 시기는 학생운동의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의 낭만적 자유민주주의의 흐름에서 1980년대 초반에는 맑스주의적 성향으로 보다 이념적 성격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학생운동은  맑스, 레닌 등의 정통 맑스주의의 원전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의 과정에서 '인식의 철저성' 혹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 하에 이전의 민중문화, 민중 중심의 의식화 과정은 정치투쟁의 하위에 복속되는 경향이 강해졌으며,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론 또한 인식의 철저성과 과학성이라는 잣대로 평가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1980년대에 이르러 민중운동이 맑스주의 원전을 광범위하게 접하게 되면서, 결정론적 유물론에의 지향이 강해지고,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레닌주의 사회주의 운동의 방식으로서, 정치적 의식을 외부에서 주입하려 하는 지향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1980년대 민중운동의 이념, 정치실천 내에서 프레이리의「페다고지」는 '민중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보다는 제도교육에 대한 비판 논거의 확립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게 되었다. 프레이리의 교육 사상의 한국적 적용은 구체적이면서도 장기적인 활동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계급 투쟁'이라는 관념적 지향을 중요시하는 풍토에서 교육활동은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프레이리 교육 사상의 한국 사회에서의 구체적 적용을 어렵게 하는 사상적, 주체적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함께 '의식화 교육'은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민중들에게 부과하고, 민중들을 선전·선동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특히, 1980년대 이전과는 달리, 원전과 함께 일본과 소련에서 정리된 맑스주의 해설서를 보면서, 그리고 동시에 스탈린주의의 입장서 해석된 맑스주의를 접하면서 학생운동은 맑시즘에 대하여 보다 교조적인 해석에 의존하게 되었다. 특히 레닌주의는 사회주의 운동의 '전위조직이론'과 '조직화론', '선전·선동론'과 '의식화론'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해서는 외부의 전위적 지식인들에 의한 의식의 주입이 필요하다는 레닌주의적 운동방법론은 교육보다는 정치적 폭로를 중심으로 하는 선전·선동에 우위를 두는 활동을 하게 하였다. 결국 1980년대 민중운동은 의식의 외부에서의 주입 필요성과 교육 혹은 학습보다는 선전 선동, 정치투쟁을 위한 조직화를 핵심적 목적으로 하는 의식화를 위한 정치교육의 필요성이라는 한국에서의 맑스레닌주의의 영향 속에서 프레이리 사상이 이해되었던 것이다. 결국 '의식화'라는 말은 외부에서의 '주입'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해석되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이러한 사상사적 조건은 프레이리 사상을 정치투쟁을 위한 선진 활동가를 통한 민중들에 대한 의식의 주입이라는 제한된, 왜곡된 내용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러한 1980년대 민중운동의 진행 속에서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론'은 프레이리 자신의 의미와는 달리, 한국의 주체적, 사회적, 사상적 맥락에서는 '주입 교육'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1990년대까지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제 '의식화 교육'이라는 말 자체도 그 쓰임이 줄어들게 되었으며, 전체 민중운동의 쇠퇴 속에서 프레이리에 대한 관심도 멀어지게 되었다.

3) 1990년대 이후의 교육담론의 전개와 프레이리 교육사상

1995 정부의 '5.31 교육개혁안'이 제출되면서 교육정책의 방향이 자율성과 다양성이라는 이름 하에 수월성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안이 제출되었고, 교육을 인적 자원의 개념에서 보는 시각이 강해졌다. 이후 초 중등교육에서는 수준별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하는 7차 교육과정이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자립형 사립고교의 도입 추진, 영재 교육법 제정 추진, 교원 자격의 개방, 평준화 해제, 입시제도 변화 등의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소수의 두뇌인력 생산체제 구축을 위한 불평등 경쟁 체제 구축과 공적 교육 영역의 축소와 사적 영역의 확대를 통해서 교육에 있어서의 불평등 문제를 확대·심화 재생산하며, 교육의 비판적 기능을 더욱 축소시키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평생교육영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평생교육담론과 정책은 OECD중심의 노동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인적자원 개발 중심의 논의에 집중되고 있으며, 기존의 사회교육에서의 민중적 정체성은 사라지고 있다. 프레이리가 가장 강조한 교육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인식이 제거되면서, 민중은 사회적 모순에 대한 주체적 인식자와 실천가가 아닌 '개별화된 학습자'로 현신하는 경향이 강화된다. 그리고 '민중적인 것'은 그저 '학습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강해진다. 민중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자던 초기의 생각은 민중이 가지고 있는 것에 머무르는 것으로 변질되는 경향이 1990년대 이후로 강화되어 왔다. 이른바 '수요자 중심 교육'은 고립된 학습자의 상황과 욕구에서 머물고, 그 상황과 욕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제기하지 않는다. 이는 또 하나의 교묘한 형태의 은행예금식 교육의 발현태라 할 수 있다. 학습자로부터의 출발을 학습자에서의 머무름으로 속 쉽게 해석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민중교육의 정신은 개별화된 욕구 충족으로 해체되고 있다.

 

3. 민중교육의 복원을 위하여...

 

최근 비판적 성인교육론, 사회교육학, 평생교육(학습)론 등에서는 학습자와 교육자, 민중과 지식인의 관계와 학습 내용 조직과 방법의 원리에 대한 논의가 여러 입장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에는 프레이리 교육사상, 후기 맑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그 사상적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논의에는 과거의 지식인 중심의 교육에 대한 반성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적 흐름과의 연계에 대한 경계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신자유주의적 논리의 기반으로 민중에 대한 억압을 더할 수 있다는 프레이리의 비판과 민중을 대상화하고 교육을 도구화하였던 과학적 결정론적 맑스주의의 역사적인 오류를 모두 고려해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보적 가능성과 억압적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민중교육의 근본적 의미를 복원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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