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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적교육구조의해체와근대교육의성립

봉건적 교육구조의 해체와 근대교육의 성립

김 학 한 / 책임연구원

 


한국 근대교육의 성립과정을 검토하는 것은 교육의 사적 전개에 대한 관심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공교육의 역사적 특수성을 해명하는 단초이며, 한국 교육구조의 변동을 계통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물적 토대의 변화에 기본적으로 규정되지만1), 새로운 교육구조는 선행 교육구조를 물적 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교육구조의 이행과정을 검토하는 것은 당면한 실천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2)
근대교육을 봉건적 교육을 넘어서는 교육구조라고 규정할 때, 근대 교육구조의 성립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선후기에서 일제를 거치면서 봉건적 교육구조가 해체되는 과정을 동시적·통일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국 근대교육의 성립과 기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봉건적 교육의 본질과 봉건적 교육구조의 성격에 대한 파악이 전제가 된다.


1. 조선후기 교육구조의 기본 성격과 변동

 가. 봉건사회의 교육의 본질과 봉건적 교육구조의 성격

 봉건사회의 교육의 본질적 특징은 봉건 지배계급에 의한 교육기관의 전유, 교육기관의 전유에 의한 교육의 독점, 피지배계급의 교육기관으로부터의 배제이다. 중세사회의 교육에 대한 다음의 서술은 봉건적 교육구조의 본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고대사회 다음인 중세사회의 학교도 오랜 기간 민중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토지에 속박되어 선조 대대로 같은 토지에서 같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반복되는 생활만 하였기에 민중은 문자를 배울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조건이 완전히 변한 것은 한참 뒤인 시민사회에 들어서이다."3)

 봉건적 교육기관은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지배계급의 구성원에게 사상과 능력을 육성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하였다. 피지배계급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의 대상이었으며, 교육 자체가 특권적 영역으로 유지됨으로써 국가적 교육으로부터 방기되었다. 따라서 피지배계급의 교육은 생활로부터 미분화된 채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지배계급의 사상을 수용하는 것이었다.4) 민중은 예외적으로 반란과 혁명의 시기에 자신을 지배계급의 사상으로부터 분리하였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교육기관을 창출하였다.

이러한 봉건적 교육구조는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시민혁명에 의해 봉건사회의 붕괴와 함께 해체된다. 시민혁명은 시민계급의 사상을 전면화 하는 한편, 봉건 지배계급의 교육 독점을 철폐하고 공교육제도를 성립시킴으로써 새로운 교육구조를 출발시켰다. 거꾸로 말하면 봉건사회의 전면적 폐지 이전까지 봉건적 교육구조는 자신을 계속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 사회의 성립이 곧바로 대중에 대한 교육 확대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신분적 차별에 따른 교육 독점이 폐지되고 경제적 차별에 의한 교육 독점이 새로운 차별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결국 공교육의 확대 정도는 자본주의 발달과 계급투쟁의 진전에 따라 그 범위가 일차적으로 규정된다.

나. 조선후기의 봉건적 교육구조

 조선의 봉건 지배계급은 초등·중등·고등교육 기관을 세우고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양반과 관료의 자식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봉건 지배계급은 교육기관을 독점함으로써 관리 등용의 관문인 과거를 사실상 독점하였으며, 대다수 민중은 교육기관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양반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서리·향리는 국가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며 8할의 농민과 양반가·각 관아·절·궁정의 노예는 다 문맹이 되고 말았다'5)

조선의 봉건적 교육구조에서 지배적 교육사상은 성리학과 숭명주의 사상이었다. 성리학은 이(理)와 기(氣)로 우주철학을 계통적으로 구성하여 삼라만상의 변화를 설명하였으며, 이 우주철학으로부터 윤리철학과 교육철학을 도출하였다. 성리학의 교육사상은 교육의 목적을 선인의 양성에 두었으며 최종 목적은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또한 숭명주의 교육사상은 모화사상에서 연원하여 정치·경제적으로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전개되었다. 교육과정은 소학·사서·삼경으로 편성되었고, 중국의 역사·지리·인물들로 구성된 천자문·동몽선습·통감·사략 등을 가르쳤으며, 문장·시구도 중국인의 것을 주로 읽었다. 성리학의 교육방법은 명심(明心)과 견셩(見性)을 위한 공경이 주된 것이었고, 암송과 질의문답이 주된 교육방법이었다.6) 고등교육 기관으로는 성균관이, 중등교육 기관으로는 4학과 향교·서원이, 초등교육 기관으로는 서당이 있었다.

그러나 봉건적 교육구조의 한계가 본격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한 18세기 들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교육구조 개편이 제기되었다. 그들은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서민교육·실업교육·과학기술 도입 등과 관련된 개혁적인 교육사상을 주장하였다. 학제에 관한 그들의 주장은 서울에는 최고학교인 대학·중학·4학을 두고, 각 도에는 영학을, 각 현에는 읍학을 두고, 최하급 학교로 서울에는 방상, 시골에는 향상을 두어, 전국에 학교를 설치하려는 것이었다. 교육내용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실용성을 강조하면서 특히 기술교육과 과학교육을 제기하였으며, 조선의 역사·지리·언어에 대한 교육과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교육방법에서도 실제 행동과 실제 사업을 통한 교육, 즉 실용적 교육방법을 제기하였다.7)

그러나 봉건사회에 기반한 실학자들의 교육사상은 봉건적 교육제도의 근본적 변혁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으며, 또한 그나마 지배계급으로부터 거부당하여 현실화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봉건적 교육구조의 해체와 근대적 교육구조의 수립이라는 과제는 개화사상가들의 과제로 넘겨지게 되었다.

다. 봉건적 교육구조의 쇠퇴와 자생적 부르주아 교육구조 수립의 좌절

 봉건제의 쇠퇴와 함께 봉건적 교육구조의 개편은 불가피해지게 되었다. 봉건적 교육구조의 폐지는 개화파 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갑신정변에 의한 교육구조 개편 시도는 그 구체적인 실례이다.

개화파 부르주아 세력의 교육적 관심은 일차적으로 근대적 개혁을 수행할 인재 양성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양반의 자제뿐 아니라 광범위한 계층의 청년들에게 개화사상을 전파하고 근대 문물을 전수하려 하였으며, 해외 유학은 그 주된 수단이었다. 유학은 아직 근대적 학교를 설립할 만한 물적 조건이 미비했던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들은 서양식 교육제도 도입과 의무교육, 소학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1883년 원산에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원산학사가 설립된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따라서 원산학사의 설립은 한국 근대교육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편 이와는 달리 한국 근대교육의 출발을 18세기 후반 서당계와 서당교육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한 견해의 근거는 첫째, 도시 상공인과 광작을 통해 부를 축적한 계층이 자신의 자제를 전문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개량서당을 세움으로써 지배계급의 교육독점이 점차 퇴조하기 시작하였다는 점. 둘째, 평민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서당의 교육내용이 성리학적 예악 질서로부터 벗어나 근대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8) 그러한 견해는 봉건 지배계급의 교육독점 약화와 봉건적 교육구조의 해체, 그리고 교육내용에서의 근대적 변화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근대교육으로 확정짓는 데에는 몇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다. 근대교육의 시작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서당이든 학교이든 상관없이 그것이 봉건적 교육구조에 대한 전면적 재편의 성격을 갖는가 하는 것이다. 개량서당의 경우 그것이 봉건체제에 대한 극복의 한 형태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며, 교육내용 또한 실학사상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보기 어렵다. 개량서당의 경우, 근대교육의 출발이라기보다는 봉건교육으로부터 배제된 계층이 자신의 계층적 지위를 재생산하기 위한 독자적인 교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따라서 그것은 봉건적 교육구조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의 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봉건적 교육구조에 대한 전면적 폐지는 갑신정변으로 집권한 개화파의 신정강을 통하여 최초로 시도되었다.9) 신정강의 주요 내용은 청에 대한 사대외교의 폐지, 봉건적 신분제도의 폐지, 국민 평등권의 확립, 봉건적 착취의 제한, 국민 생활의 구제, 식산흥업, 군사·경찰제도의 개혁, 국왕 전정의 폐지, 내각회의의 권한 확대 등이었다. 그중 봉건적 교육구조의 폐지와 관련된 것은 다음과 같다.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고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규장각을 폐지할 것

 그들은 국민의 평등권을 제기함으로써 봉건적 신분질서의 타파와 이를 바탕으로 한 교육기회의 균등, 교육의 확대를 제시하였으며, 봉건 지배계급의 문화적 상징인 규장각의 폐지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교육개혁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10)

그들은 구교육을 부정하고 개혁의 근간을 이룰 신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박영효의 '건백서'에는 교육개혁에 대한 개화사상가들의 견해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학교·중학교를 설치하여 6세 이상의 모든 남녀를 취학시킬 것

둘째, 장년학교를 설치하여 한문 또는 언문으로 정치·재정·법률·역사·지리·산술 등의 외국서적을 번역하고 소장관료 및 장년의 선비를 교육하여 과거시험을 통해 문관에 채용할 것

셋째, 인민에게 국사·국어·국문을 가르칠 것

넷째, 외국인 교사를 고용하여 인민에게 법률·재정·정치·의술 등의 재예를 가르칠 것

다섯째, 서적을 널리 인쇄·출판할 것

 박영효의 이 개혁안은 남녀평등과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를 전제로 근대적 학교제도의 창설, 의무교육의 실시, 근대학문의 도입, 국사·국문의 사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조선교육사에 획기적인 일대 획을 긋는 내용이었다.11) 그러나 갑신정변이 청과 민씨 정권의 반동으로 실패함으로써 그들이 추구한 부르주아 근대 교육구조의 수립은 시행 단계에서 중단되는 중대한 좌절을 경험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 후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의 침탈은 가속화하여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둘러싸고 열강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1894년 일본의 군사적 우위를 업고 출범한 갑오 정권은 부르주아 개혁의 일환으로 근대적 교육구조의 수립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봉건사회의 잔재인 문벌·신분제·공사노비제·연좌제 등을 폐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 등 사회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와 함께 교육구조의 개편도 추진되었다. 갑오 정권은 학무아문을 설치하여 교육개혁 전반을 관장하도록 하였으며, 근대적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교육입국조서가 발표되면서 소학교 설립, 의무교육 등 근대적 공교육제도를 실시하였다. 또한 봉건사회의 전통적 관리채용 방법인 과거를 폐지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인물본위의 채용방식을 도입하였다. 시험 과목도 사서오경과 같은 유교경전에서 근대적인 정치 실무와 교양과목으로 대체하였다. 과거의 폐지는 단순히 관리임용 방식의 변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유교를 조선사회의 지배원리에서 배제한 것이었다.12)

그러나 일제의 정치·군사적 후원을 등에 업고 진행된 갑오개혁은 일제 침략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서의 숙명을 안고 있었으며, 의병전쟁을 통해 궐기한 봉건세력의 총반격을13) 받아 아관파천 이후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14)그 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근대적 교육제도·여성교육·실업교육·한글 사용·근대 학문의 수용 등을 시도했으나, 제국주의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과 주체적 역량의 미숙,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 등으로 역시 실패하였다. 결국 근대적 교육구조 수립을 위한 자생적 부르주아 개혁은 좌절하고 말았다.

조선사회는 부르주아의 미성숙으로 인하여 혁명적으로 해체되지 못하였고, 봉건적 교육구조의 철폐와 근대적 교육구조의 수립은 외세의 지배하에서 타율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의 근대교육은 식민지 지배정책과 결합되어 지극히 왜곡된 형태로밖에 실현될 수 없었다.15)

 1905년 사실상의 식민지화 이후 근대적 교육구조 창출을 위한 노력은 반제·반봉건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을사보호조약과 군대 해산 이후 반일 의병투쟁과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는데, 민족적 지식인과 학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 단체들은 사립학교를 설립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이루고자 하였다. 서북학회·기호흥학회·호남학회·보인학회·관동흥학회·대동학회 등 여러 학회와 신민회·대한협회·여자교육회·애국부인회 등이 사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월보를 발행하고 순회강연을 실시하는 등 민중계몽과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사립학교들은 반일사상과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근대적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일제는 1908년 학회령·사립학교령을 발표하여 전면 탄압에 나섰다. 학회령에 의해 모든 학회 설립은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했으며, 매년 활동상황을 학부에 보고하도록 하여 학회의 조직과 활동을 원천적으로 규제하였다. 사립학교령에 의해 사립학교 설립은 반드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했고, 교과서도 학부에서 편찬한 책이나 학부의 검정을 받은 책만을 쓰도록 하였다. 또 사립학교 교사에 대한 자격을 명시하였으며 학부대신의 명령에 의하여 학교 폐쇄도 가능하게 하였다. 아울러 일제는 사립학교의 재정기반이 취약한 점을 이용하여 학교운영 재원을 차단하였으며, '지방비법'을 공포하여 지방 재산과 시장세·잡세를 기반으로 삼고 있던 지방 사립학교의 폐교를 유도하였다.16) 이 시기 학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구국 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고 민족적이며 근대적인 학교를 수립하려는 운동으로 반제·반봉건 교육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즉 위로부터의 근대적 교육구조 창출 시도가 실패함에 따라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그러한 움직임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반제·반봉건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 형성된 반제·반봉건 교육운동은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본격화되었다.

 

2. 일제 식민지 교육구조의 성립과 교육운동의 전개

 가. 일본 제국주의 교육의

본질적 성격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세계 자본주의는 새로운 단계인 제국주의로 진입하였다.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유지하고 수탈을 영속화하기 위해 식민지 민중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고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는 파시즘적 지배를 수행하는 한편, 그를 위해 식민지 민중을 노예화·우매화하는 교육·문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식민지 교육의 본질은 식민지 민중의 노예화·우매화였으며, 그 방법은 민족 언어와 문화를 박탈하고 제국주의 국가의 언어와 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선전함으로써 민족의 주체성을 상실케 하는 것이었다.17)

이에 따라 식민지에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유포하고,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매판세력을 형성시키며, 식민지 유지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근대적 교육제도가 부분적으로 도입되게 된다. 그 결과 식민지에는 식민지 반봉건적(半封建的) 교육구조가 성립하게 된다.

식민지 교육의 반봉건성의 핵심은 교육으로부터의 민중의 실질적 배제이다. 봉건교육의 핵심이 인신적 예속에 따른 신분적 차별, 그것에 의한 교육의 배제였다면, 반봉건 교육의 핵심은 경제외적 강제를 포함한 지주-소작관계의 유지와 민중의 경제기반 침탈, 그것에 의한 민중의 실질적 배제이다.18) 즉 식민지 교육구조는 근대적 학교제도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특정계급의 교육독점, 식민지 민중의 배제, 민족적 차별을 지속시키게 된다. 다시 말해 식민지하에서 민중들에게는 제도적으로 교육에의 참여가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민중들이 배제될 수밖에 없음으로 해서 근대적 교육구조로서 중대한 한계를 가지게 된다.19)

식민지 학교교육은 제국주의의 모순구조를 다음과 같이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식민지 교육은 식민지 수탈을 위한 노동정책의 일환이다. 제국주의는 식민지로부터 최대의 초과이윤을 달성하기 위해 저급한 실업교육과 식민지 중간지배인을 양성하는 인문교육을 병행하여 실시한다.

둘째, 식민지 교육은 식민 체제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한 이데올로기 교육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개화라는 미명하에 제국주의적 문화·가치를 이식시키는 일에 전념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물질적 기초가 필요한데, 그것이 미비한 상태에서는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폭력적 통제를 수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식민지 교육은 파시즘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20)

결국 식민지 교육은 식민지 민중의 대다수를 공교육으로부터 사실상 배제시키는 반봉건적 성격을 가지게 되며, 식민지 제도교육은 식민지 지배를 보장하기 위한 노예화·우매화 교육이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파시즘적 교육통치를 자신의 속성으로 삼는다.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투쟁이 민족해방 운동으로 전개된 것처럼, 식민지 교육에 대한 민중의 투쟁은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 교육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학교 안에서는 교원과 학생들이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투쟁을 전개하였고, 학교 바깥에서는 야학에서 민족학교에 이르는 다양한 방식으로 민족교육 운동이 전개되었다.

나. 일제하 식민지 교육구조의

 성립과 전개

 일제 식민지 교육의 기본 정책은 동화(同化)=황민화(皇民化)=일본인화 정책이었다. 그것은 타이완 탈취 이후 '대동아 공영권'의 와해에 이르기까지 일제가 일관되게 견지한 기본 정책이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일본어 교육 강요, 일본의 역사·문화·생활양식 주입, 근대적 생산기술 특히 초보적 농업기술의 전수 등이었고, 일제는 근대적 학교제도의 이식을 통해 그것을 실현시키려 했다. 민족혼의 말살은 일제의 노골적인 지배수단으로서 정치적 예속, 경제적 착취를 보강하는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문화적·정신적 전통과 생활양식의 파괴는 그들의 주된 교육목표였던 것이다.21)

 일제 식민지 교육정책은 1차에서 4차에 걸친 교육령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10년 항일 의병투쟁을 진압한 일제는 한일합방을 단행하면서 식민지 질서 유지를 위한 교육구조 정비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1911년 제1차 조선학교령을 발표하여 식민지 조선에서의 교육의 목표는 천황과 일본제국에 충성하고 복종하는 충량한 국민의 육성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학교제도를 보통학교(4년), 고등 보통학교(4년, 여자는 3년), 실업학교(2-3년), 전문학교(3-4년)로 개편하였다.22) 교육과정에서는 수신 과목과 일본어를 통해 동화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사립학교 규칙을 개정하여23) 민족적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1919년 3. 1운동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를 한층 더 고도화하고 동화정책을 더욱 철저하게 시행하였다. 그 일환으로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교육제도를 부분적으로 변경하였다.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일본과 동일한 교육제도를 채택하고24) '내선공학(內鮮共學)'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일시동인(一視同仁)의 교육이 천명되었다. 그리고 동화교육을 강화하여 교육과정에서 조선어를 줄이고 일본어·일본 역사·일본 지리가 늘어났고, 저급한 실업교과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정규 보통학교에 취학하지 못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간이학교(2년)를 신설하여 일본어 교육과 초보적 직업교육을 통하여 동화교육의 효과를 최대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규·비정규 학교의 확대는 조선인을 말살하고 식민지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일제 교육정책의 집요함을 말해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전시체제에 돌입한 일본은 이른 바 대동아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조선을 침략전쟁을 위한 인적·물적 기지로 만들기 위해 황민화 교육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일제는 1938년, 식민지 교육의 기본 방침으로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內鮮一體)·인고단련(忍苦鍛鍊) 등 3대 교육강령을 내세우고, 조선인을 황민화 하여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참기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일제는 제3차 조선교육령을 선포하여 각급 학교의 교육내용을 개편하고 학교 내·외의 모든 행사를 일본색 일색으로 만드는 등 교육기관을 개편하였다.25) 이 시기의 학제는 초등교육 기관으로 소학교(6년), 중등교육 기관으로 중학교(5년), 고등여학교(5년-4년), 실업학교(5-3년), 전문학교, 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일제는 전체주의 이념과 군국주의 기치를 내걸고 교육을 총력 전시체제로 개편하였으며, 그것을 위해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을 선포하였다. 1941년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명하고26) 전문학교의 수학 연한을 단축하였으며, 1943년 전시 비상체제에 적합하도록 중등학교의 수학 연한을 5년에서 4년으로 단축하였다. 그 결과 1938년 100만 명이었던 관·공립 국민학교의 학생 수는 1943년 193만 명으로 급증하였다.27) 이것은 조선인 아동에게 황국신민화 교육을 최대한 확대하여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것으로, 일제 식민지 교육의 최후적 형태였다. 또 황민화 교육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여 민족적 색채가 강한 사립학교를 공립학교로 개편하였고, 사립학교의 조선인 교장을 일본인 교장으로 대체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이를 거부하는 학교는 가차없이 폐쇄하였다.

결국 일제의 식민지 교육은 조선인의 민족적·민주적 권리를 억압하고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내몰기 위한 파시즘적 전시 동원체제를 수립하는 것으로 그 결말을 맞이하였다.

다.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 교육운동의 전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반제·반봉건 교육운동은 교육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으나 일제의 무단통치로 잠복하다가 3.1 운동을 경과한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반제·반봉건 교육운동은 주로 제도교육의 밖에서는 민중교육의 형태로 전개되었고, 제도교육 안에서는 항일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 그와는 별도로 국외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사학 설립운동으로도 나타났다.

1) 일제하의 민중교육

일제하 대부분의 민중은 교육기회가 제한됨으로 해서 제도교육으로부터 방기되어 있었고 그나마 제도교육은 일제에 의해 확고히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족교육은 주로 사회단체의 민중교육운동과 노농야학(勞農夜學)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전의 무단통치로부터 이른 바 문화정치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지배정책의 전환은 사회 전반에 걸쳐 일정한 유화국면을 조성하였는데, 이 기회를 틈타 일부 민족 부르주아지는 자치론을 내세우며 타협과 개량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민족주의 좌파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이러한 움직임을 강력히 비판하며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내걸고 좌우합작운동을 벌여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신간회는 식민지 교육의 철폐,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요구하며, 연구의 자유·학생자치권 확립·사립학교에 대한 통제의 중단·조선인 아동의 의무교육제 확립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1920년대 들어 노동자·농민의 정치적 각성이 고조되면서 노동야학과 농민야학이 급격히 증가하였다.28) 특히 노동·농민단체들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을 촉진시키는 유력한 방안으로 야학을 의욕적으로 설립 운영하였다. 야학의 교육내용은 반일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일반적 문화·지식수준을 높이기 위한 과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애국적 교과로는 조선어·조선지리·조선역사·창가 등이 있었고, 교양교과로는 일본어·산술·서간·위생 등이 있었으며, 실용교과로는 노동독본·노동산술·농민독본·양잠·부기 등이 있었다. 야학은 제도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근로대중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반제·반봉건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주된 과제로 삼았다.29)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일제가 야학에 대한 검열과 탄압을 강화함에 따라 비합법 형태로 전환하거나 타협적인 식민성 노동야학으로 변질하였다. 특히 일제가 1면 1개교 정책을 추진하고 1930년대 말 군대와 근로대에 청소년을 강제동원하기 위해 청소년 훈련소와 특별 훈련소를 설치함으로써 야학은 점차 인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하 노동야학·농민야학은 노동쟁의·소작쟁의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반제·반봉건 교육운동의 주요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2) 교원운동과 학생운동

1920년대 이후 문화정치의 등장, 동화정책의 강화, 식민지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식민지 제도교육은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양적인 확대 팽창을 거듭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 교원과 학생들의 수는 급격히 늘었으며, 식민지 제도교육 내에서 교원운동과 학생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물적 조건을 형성하게 되었다.

 ※ 교원과 학생수의 변화

일제의 교원 양성과정은 식민지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데 앞장설 식민지 교육의 대행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일제하 교원은 군국주의적 교육방침에 따라 학생을 가르쳐야 했으며, 정치활동 금지법·사학제도 등을 통하여 교육활동에 제한을 받는 등 교원으로서의 자율성이 거의 인정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일제의 파시즘적 교육통치 하에서 대중적 교원운동으로의 발전은 사실상 불가능하였으므로, 교원운동은 주로 사회주의적 관점의30) 비밀결사 형태로 전개되었다. 1935년 총독부 학무국의 집계에 따르면 1930년부터 1934년까지 교원·교수의 사상사건 발각 건수는 85건, 관련자 수는 120명에 달하였다.31) 이 시기 교원운동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아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해방 후 조선교육자협회 창설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즉 교원의 비밀결사 운동은 그 후 전개될 대중적 교원운동의 조직적·사상적 기초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 교육의 모순은 그 직접적 대상이었던 조선 학생들에게서 가장 첨예하게 나타났으며, 그에 반대하는 항일 학생운동의 전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특히 1926년 6.10 학생운동을 분기점으로 학생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민족해방운동적 성격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1929년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을 내걸고 동맹휴학을 벌이는 등 대중적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 학생 맹휴의 대중적 양상

 그러나 1929년 광주 학생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신간회 등 민족운동 단체가 와해되면서 학생운동 또한 비밀결사의 형태로 전환하였다. 즉 일제의 파시즘적 통치 강화에 따라 합법적 활동공간이 거의 사라지게 되면서 국내의 민족해방 운동은 전반적으로 퇴조하였고, 그와 함께 식민지 교육구조를 철폐하려는 학생들의 대중운동도 지하로 잠복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제하 한국의 교육구조는 민족적 억압을 본질로 했다는 점에서 식민지적 교육구조였고, 동시에 다수 대중을 교육으로부터 배제시켰다는 점에서 반봉건적 교육구조였다. 따라서 그에 대한 투쟁은 반제·반봉건 민족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으며,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아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수면 밑으로 잠복하게 되었다. 한편, 일제는 한국 민중의 점증하는 교육적 요구를 식민지 교육의 양적 확대를 통해 포섭해 나아갔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교육구조의 수립은 해방 이후 반제·반봉건 과제의 해결과정으로 함께 넘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
1
) 일반적으로 교육구조의 성격은 국가권력의 본질적 성격에 기본적으로 규정된다. 국가권력은 경제적 토대와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도적으로 교육이념과 교육과정, 교육제도를 개편하며 새로운 교육구조를 창출한다.
2) 사실 근대적 교육구조의 성립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은 당면한 시기 개편되고 있는 교육구조를 신자유주의적 교육구조로 파악하고 해방이후 90년대 중반이전가지 교육구조를 파시즘교육구조의 성립과 퇴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서 해방이전 한국교육구조의 성립과 전개를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가의 관심에서 제기되었다.
3)梅根悟. 세계교육사. p. 115.
4)조선의 지배계급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통해 피지배계급에 대한 교육적 우월성을 확보하고 성리학의 교육적, 도덕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위계적 봉건질서를 생활에서 일상화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 즉 조선전기 과거에 합격이라는 방식을 통해 양반들은 민중에 대한 교화권을 국가로부터 공인 받았으며 이러한 교화권을 전제로 비생산적 일탈집단을 교정, 배제하고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극단적으로 체현한 바람직한 인간상을 선별, 장려 포상하는 것에 의해, 그러한 활동의 교육적 효과를 통해 봉건적 질서를 내면화하고자 하였다.
정재걸.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교육구조' 한국교육 15권. 1988. pp. 8-9  

5)이만규, 조선교육사I. 거름. 1988. p. 282
6)이에 대해 이만규는 교수법에 대하여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거경(居敬])과 주정(注靜)의 수학방법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비판한다. 정(靜)이란 수양에 편중하여 지식계급이 성리공론에 환멸되고 노동을 멸시하면서 도리어 고고하고, 과학과 생산과 경제와 정치에는 무식하고 구국하는 지식과 방책에는 어두웠던 것이다.  이만규. Ibid. pp. 276-281
7)박득준. 조선근대교육사. 한마당. 1989. pp. 15-17
8) 정순우.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성격과 교육의 특질. 한국교육개발원. 한국교육의 중층성 세미나. 1988
9)한국 근대 교육의 기점과 관련하여 김대용은 1860년대 전개된 반봉건, 반제투쟁에서 근대교육의 출발점을 획정하고 있다.
 "한국의 근대사를 일본의 침략사로서가 아니라 한국의 민족해방 투쟁사로 고찰한다고 할 때, 한국의 근대교육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는 한국인들의 주체적 노력, 특히 식민지적 질곡상황에서 반제, 반봉건 투쟁에 앞장섰던 농민노동자들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민중적인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반봉건투쟁에 앞장섰던 1860년대의 농민들의 투쟁에서 근대교육의 기점을 찾아야 한다. "김대용. '한국 근대교육의 기점과 성격'한국교육사. 풀빛. 1993. p56
그러나 근대교육의 기점을 1860년대 봉건제에 대한 반봉건투쟁에서 획정하는 것은 일정한 난점을 내포한다. 첫째, 반봉건투쟁의 광범한 전개를 근대의 기점으로 설정하고 있으나 반봉건투쟁은 봉건제의 모순이 심각화되는 상황에서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사건이다. 반봉건투쟁이 새로운 시대와 직결되기 위해서는 봉건제를 무너뜨릴 지도적 계급과 .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바탕으로 한 반봉건 투쟁일 때 이것을 새로운 시대의 서막으로 위치지울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860년대의 집중적인 반봉건적 농민운동을 근거로 근대교육의 시기를 획정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둘째, 근대적 교육제도를 민족적인 관점에서 또는 민중적인 입장에서 수립되는 교육구조로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근대적 교육구조의 성격과 수립형태는 각 국가의 조건에 따라 특수성을 가지게 된다. 즉 조선에서 자본주의의 발달이 일제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자본수출을 통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자본주의성립의 특수성을 가지는 것과 유사하게 조선에서 근대적 교육구조의 수립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수성을 가진다.

10
)강순원은 근대교육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는 데 이는 봉건적 교육과 대비되는 것으로  부르주아 교육을 의미한다. "근대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전의 봉건적 신분체계의 반영이자 재생산 기구인 폐쇄적인 교육제도의 틀을 벗어나 교육의 주체와 객체가 신분적인 제한을 초월하고 교육과정이 근대적 지식의 전달을 위한 것으로 구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 강순원. 한국교육의 정치경제학. 한길사. 1990. 71쪽.  
11)윤건차. 한국 근대교육의 사상과 운동. 청사. 1987. p. 52.
12)박종근. '갑오개혁과 김홍집 정권 연구', 한국근대정치사연구. 사계절. 1985. p. 262.
13)갑오정권이 시행한 부르주아적 개혁, 그 중에서도 과거제의 폐지와 근대학교의 설치는 위정척사를 앞세우며 봉건제의 강화를 주장해 온 양반 유생에게 일대 정치적 위기를 맞게 하였다. 즉 과거제의 폐지는 양반 유생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봉쇄하는 조치였으며 과거제의 폐지에 따른 관리 임용시험과목의 변경과 근대학교의 설치는 봉건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지방에서'교도'의 위치로서 영향력을 행사하여왔던 이들의 전통적 지위마저 위협하였다.
이와 같이 지방 유생들이 중심이 된 을미의병은 비록 반일의 기치를 들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개화파의 부르주아적 정치개혁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에서 표출된 반개화 정치운동이었다.
윤대원. 한국근대사. 풀빛1993. p. 273
14)군국기무처를 통해 수행된 갑오정권의 근대적인 개혁안은 갑신정변 당시의 '신정강'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사상한다면 획기적인 것으로서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몇 가지 결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김옥균 등이 중핵으로 되어 주체적으로 민씨 정권 타도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것에 근거하여 결행했었다. 일본은 조력자 였다. 그러나 갑오정권은 일본의 침략행위의 결과 타율적으로 성립함으로써 비자주성이 정책의 수행과정에서도 시정될 수 없었고 일본에 종속되고 있었다.
박종근. '조선에 있어서 근대적 개혁의 추이'. 갑신 갑오기의 근대변혁과 민족운동. 청아출판사 1983. pp. 167-168
15)윤건차. Ibid. p. 418
16)이러한 탄압으로 1910년 5월까지 400개의 사립학교가 폐교되었다. 또한 1910년 5월에 종교학교를 제외한 사립학교는 1400여 개에 달하였으나 1912년 5월에는 817개교로 조사되어 500개 이상이 폐교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근현대사 연구회. 한국근대사 강의. 한울. 1987. 258쪽.
그리고 일제는 사립학교령을 근거로 1, 217건의 사립학교 인가 신청 중 42건만 인가하고 1, 175교를 인가하지 않았다. 한국교육사연구회. 한국교육사. 교육출판사. 1991. 238쪽.
17)小澤有作. 민족문제와 교육. 교육출판기획실 편역. 푸른나무. 1990. 39-40쪽
18)교육의 반봉건성의 핵심을 봉건적 이데올로기와 유교사상의 존재에서 찾는 것이 지배적인 경향이지만 이것은 오류이다. 이러한 봉건적 이데올로기는 식민지 뿐만 아니라 종속적 자본주의에서도 발견되며 나아가 제국주의 일본교육에서도 광범하게 존재하였다.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존재는 자본주의 지배적 생산양식이 되고 있음에도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온존되고 있으며 동시에 선진자본주의국가에 있어서도 다양한 형태로 봉건적 잔재는 존속한다. 오히려 일제의 천황에 대한 충효사상은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로서 성격이 본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것을 반봉건성의 결정적이며 본질적인 특징으로 파악하는 것은 과학적 인식과 거리가 멀다. 반봉건성의 핵심은  대중의 교육으로부터의 현실적 배제의 지속이며 공교육의 미성립 또는 형식적으로도 불완전한 성립과 관련된다. (교육에서 봉건성의 핵심은 지배계급에 의한 교육의 독점, 피지배계급의 교육으로부터의 배제이다. )
이러한 관점은 동시에 다음의 점을 시사하는 데,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 교육운동의 주요한 영역은 제국주의의 교육제도의 외부에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중이 교육기관으로부터 배제된 상황에서 민중의 교육은 식민지 교육구조의 외부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제도교육 내에서 제국주의의 파시즘적 지배는 민족운동 차원의 교육을 어렵게 하였다. 실제로 식민지에서 교육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일부분으로 수행되었으며 교육을 통한 민중의 민족적, 계급적 모순의 인식을 기본방향으로 하는 것이었다.
19) 그러나 이러한 반봉건적 성격은 일제의 보통교육의 필요성과 민중의 교육적 요구가 결합되면서 1930년대 후반부터는 해소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해방이후 반봉건적 토지 소유관계의 재편, 새로운 계급계층의 형성과정에서 각계각층이 교육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참여함으로써 한국에서 본격적인 근대적 교육구조가 형성된다.
20)정진상. 한국교육의 식민지적 성격. 제국주의와 한국사회. 한울. 1991. 271쪽.
21)정재철. '일본제국주의 침략기의 교육'한국교육사. 한국교육사연구회. 한국교육사. 교육출판사. 1991. 315쪽.
22)이는 조선교육령 3조의 '시세와 민도에 적합하게 함을 기한다'는 방침아래 교육연한을 전체적으로 단축시키고 저급한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의 실시에 중점을 두는 것에 근거하여 진행되었다. 23)1915년의 개정사립학교 규칙이 목적하는 바는 종래 한국어와 영어를 사용했던 사립학교의 교수용어를 일본어로 바꾸고 반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교원을 교단에서 추방하려는 것이었다.
24)제2차 조선교육령은 보통학교의 교육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고등 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으로, 여자고등 보통학교는 3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였다. 그리고 실업교육, 전문교육, 대학교육은 일본의 제도에 따랐다.
25)김영우. 피정만. 최신 한국교육사 연구. 교육과학사. 1995. 430쪽
26)1941년 제정된 국민학교령의 국민학교의 교육방침은 담음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첫째,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따라 교육의 전반에 걸쳐 황국의 도를 수련시켜, 특히 국체에 대한 신념을 공고히 하여 황국신민으로의 자각에 철하도록 하는 데 힘쓴다. 둘째, 일시동인의 성지를 봉체하여 충량한 황국신민다운 자질을 체득시켜 내선일체, 신애협력의 미풍을 양성하는데 힘써야 한다. 셋째, 아국 문화의 특징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동아시아 및 세계의 대세에 관해서 가르쳐 황국의 지위와 사명을 자각하는 동시에 대국민다운 자질을 계발하는 데 힘써야 한다
27)이는 일반적인 식민지 교육구조의 상황과 구별되는 한국교육의 특수성이다.
28)일제 강점직후부터 세워진 야학은 1906-1919년간 50여개소가 세워졌으며 192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설립되어 2, 345개의 야학이 세워졌다. '일제하 민중야학. 교육현장. 사계절 1985. 247-249쪽
29)박선미. '일제하 신간회의 교육저항과 노농야학' 한국교육사. 풀빛. 1993. 231쪽.
30)1933년 일제에 검거된 교육노동조합사건의 경우 교육노동조합은 다음의 사항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①생활권 보호 ②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획득 ③제국주의 교육타도, 프롤레타리아 교육 건설,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 실시 ④무산계급의 완전한 해방
31)한국교육연구소. 한국교육사. 풀빛. 1995. 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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