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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 [논단] 국가란 무엇인가

2014.07.15 17:45

진보교육 조회 수:704

[논단]
                            국가란 무엇인가

                                                                                               이경호 / 진보교육연구소 운영위원

제발 우리 아이들을 구해주세요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꽃다운 청춘들이 꿈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눈앞의 구조대를 보고 곧 구조되리라 믿으며 희망을 품었던 이들에게 그 희망은 헛되고 허망한 것이 되었다. 침몰한 배에서 단 한 사람도 구하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함과 총체적인 부정과 부패를 온 국민이 분노하고 규탄했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강남의 아이들이라도 이렇게 할 것이냐.” 하는 가난한 부모의 외침은 메아리 없는 하소연에 불과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국가란 과연 무엇이냐는 물음을 던져 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제발 살아있기를 빌면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부모들은 진도의 팽목항을 찾았다. 부모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해경을 비롯한 구조대를 붙들고 우리 아이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 온 것은 사랑하는 아이들의 죽음뿐이었다. 팽목항은 부모들의 절규와 눈물과 분노로 가득했지만, 고위관료들은 인증 샷이나 찍으려 하거나 한가로이 라면이나 먹는 등 몰지각한 행동을 하여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단원고 지역 도지사라는 사람은 “자기 지역이 아니라 힘이 없다”는 등 무책임한 말로 부모들을 더욱 절망케 했다.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 주면서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 부패의 총체적 완결판을 이뤄냈다. 국가는 최소한의 제 구실도 하지 못하는 무능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조직화된 무책임(!)’을 호기롭게 떨쳐 자랑했다. ‘책임지겠다’고 사표를 던진 총리가 [마땅한 후임 총리가 없다며] 다시 권좌(權座)에 롤백하는 희대의 소극(笑劇)마저 벌어졌으니 이 언어도단(言語道斷) 앞에서는 누구라도 말을 잃을 지경이다. 현 집권정당의 소행 머리를 맞닥뜨리고서 우리는 대관절 ‘국가가 왜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국민이다

우리도 국민이다.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국가를 향해 울부짖었다. “우리도 국민이다!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 돌아온 대답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말 뿐. 국가가 최선을 다한다고 여긴 부모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국가로부터 보호 받을 자격이 없는 국민이란 말인가?” 이와 같은 외침은 비단 팽목항에서만 외쳐진 것이 아니다. 밀양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용산의 희생자들이 외친 절규였다. 그리고 지금도 곳곳의 노동현장에서 외치고 있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침묵과 국가폭력이다.
  한 국가의 인적(人的) 존립기반은 국민이다.  우리도 헌법 제2조 1항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국적 법정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적법은 혈통주의(속인주의)를 기본원리로 하고 있다. 즉 부모의 국적에 따라 국적이 정해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혈통(혹은 가문)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 많이 듣던 말이 한민족, 단일 민족 등 혈통주의 말들이다.
  상류층은 대부분 갖고 있는 것이 미국 시민권인데 미국은 이민의 나라이기에 혈통주의가 아니라 속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즉, 자기나라에서 태어나면 누구나 미국 시민이 된다. 부모 자식의 국적이 다른 이유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상류층이 배를 움켜쥐며 미국에 가서 애를 낳으려고 한다.
  이번 서울 교육감 선거에서 고승덕 후보의 딸이 한국인이 아니면서도 자기 아버지와 관련해 교육감의 자질을 논하는 글을 올렸는데 그녀가 미국인이 된 것은 바로 미국의 속지주의 덕분이다.  미국에서 애를 낳으면 그 아이는 이중 국적자가 된다. 곧, 부모의 국적을 따지면 한국인인데도 미국에서 출생했기에 미국 국민도 된다. 이중 국적자는 만 22세가 되기 전까지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  한국에서 먹고 살려면 한국을 선택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대체로 미국국적을 선택할 것이다. 고위 공직자 후보를 검증할 때 아들의 국적이 문제가 많이 되는데 이들은 대체로 한국에 살면서 미국국적을 선택한 경우가 많다. 병역을 면제하기 위한 방편이자, 유사시 미국으로 떠나기 위한 방편이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은 이중 국적자가 되지 못한다. 죽으나 사나 이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야 한다. 겉으로는 똑같은 국민이나 실제로는 똑같은 국민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바쳐서

  우리 국민은 정말 순박한 사람들이 많다. 국가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곧이곧대로 행동한다. “국가가 설마 나쁘게 하겠어? 우리를 위해서 그러는 걸 거야.” 수긍하고 참 말을 잘 듣는다. 국가 말을 잘 안 듣는 사람들에게는 사회 부적응아나 심지어 빨갱이 딱지가 붙는다.  언제부터 이렇게들 착한 사람이 되었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  
   우리는 초등학교 아니 초등학교 2~3학년때부터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왜 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꼬박 외웠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외웠던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기억이 무의식의 바다에까지 단단히 똬리를 틀었나 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으려면 말 잘 듣는 학생이 돼야 했다.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결국에는 국가 말을 잘 듣는 학생이 돼야 했다. 국가는 통치자가 대표했다. 충효와 삼강 오륜은 아뭇 소리 말고 따라야 할 덕목이다. 그게 학생의 본분이고 국민이 된 도리다.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 학생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정말 착하게도 잘 따른 결과는 참혹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의심하고 확인 해 봤더라면 희생자가 많이 줄었을 것이다.
  독재시대가 지나가고 이른바 민주시대가 왔는데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는 여전히 복종과 순응을 가르친다. 국가는 말 잘 듣는 국민에게는 순한 양의 모습을 띠지만 그렇지 않은 국민에게는 괴물로 변한다. 그것도 무자비한 괴물로.    
  이러한 복종적 순응적 사상은 서구 정치이론에서 비롯된 바이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충효를 강요하는 유교적 전통의 가부장적 사고와 보수 기독교 교리가 맞물리면서 더욱 강력한 국가 절대 사상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가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효는 국가 통치자에 대한 충성으로 대응된다. 그렇기에 국가 통치자에 대한 비판이 국가에 대한 비판이고 아버지에 대한 비판이 된다. 불효요 불충이다.  

     국가는 괴물인가?

  우리는 참 착하게도 국가를 선(善)한 존재로, 우리를 위해 봉사하는 아름다운 존재로 알고 살아왔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언제든지 달려와 도와주는 슈퍼맨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국가는 누구에게는 슈퍼맨이지만 누구에게는 무자비한 괴물이다. 국가폭력의 야만의 역사는 동서양을 가르지 않는다. 국가가 괴물이 될 수 있는 것은 국가에게 독점적인 폭력행사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의 폭력 독점권은 주권으로부터 나오고, 주권의 행사와 정당성은 헌법이 보장해준다.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해 국민주권주의를 표방한다. 국민주권이란 고전적인 입장에 따르면 ‘주권’의 주체는 국민이며, 주권이란 국가의사를 결정하는 최고의 독립적이고 불가분적이고, 불가양적인[=양도할 수 없는] 권력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국민 주권론은  홉스의 군주 주권론을 거쳐 로크, 루소의 국민 주권론으로 발전했고, 서구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오늘날 국가가 선한 양이냐 괴물이냐의 여부는 바로 이 주권의 행사가 정당하냐 정당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국가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한다면 그것은 필요악이 되겠지만 정당하지 못하다면 국가폭력에 불과하다.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국가는 누구를 위해서 있는가. 이에 대한 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가는 착한 양(羊)이며 국민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자유라는 핵심 교리를 기반으로 삼는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국가를 토론의 중립지역으로 간주한다. 선출된 국회의원과 임명된 공무원이 일을 주도해 나가지만 동시에 공중의 요구를 반영하며 현안에 관심을 갖는 공중을 위해 기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실제로는 항상 그렇지는 않다 할지라도 대중의 이익에 봉사하려 하며, 정부는 국민의 종복이며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국민에 의하여 임명됐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국가관은 17세기 유럽의 정치적·경제적 환경 속에서 출현하여 내려오고 있다.
  알다시피 유럽은 신(神)의 나라였다. 교황은 절대적 권력자이며, 선의 상징이며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의 죄를 사해 주려고 면죄부까지 팔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종교 개혁 등을 거치면서 17·8세기에 새로운 정치철학이 출현했다. 새로운 정치철학은 신권(神權)보다는 인간의 권리를 강조하고, 인간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와 인간정신 자체를 정당화했다. 이에 인간의 권리는 천부의 권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사상가들은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공동선(Common Good)’ 이라는 ‘신적(神的)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에 공동선은 인간의 신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다.  이와 같은 신적 합리성 기반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본으로 간주되는 미국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 국기에 대한 맹세나 미국 대통령 취임 시 성경위에 손을 얹고 하는 것 등을 볼 수 있다.  
  미국적 시각의 기초는 주로 존 로크와 아담 스미스의 사상 속에 있어 항시 근본적인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옹호하면서, 이러한 생산관계에 내재하는 적대적 사회계급들의 존재를 부정해오고 있다. 미국을 추종하는 우리나라도 지식인의 주류가 미국 유학파이니 미국의 주류사상을 받아들여 신(神)을 받들 듯이 국가를 떠받든다.  


           국가가 선하다는 거짓말

  국가가 선하며 중립적이라는 가정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철학이다. 이런 가정이 없다면 대의민주주의는 존립하기 힘들다.  그러나 국가가 과연 선한 의지로 모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주는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진보주의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근거 없는 가정이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는 로크와 스미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국가는 선하며 중립적이라면서 국민들을 호도한다.  이와 같은 국가론에  마르크스가 반론을 폈다. 국가는 단지 지배계급을 대변하고 지배계급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물질적 조건을 그 사회구조와 인간의식의 토대로 간주하기 때문에 국가형태는 생산관계로부터 나타난다고 본다.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정치적·지적 생활과정을 조건 지으며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사회이고, 사회는 지배적인 생산양식과 그 양식의 고유한 생산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생산관계로부터 출현하는 국가는 공동선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 고유한 계급구조의 정치적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국가가 전체로서 사회의 수탁자라는 견해를 거부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부르주아지에 의해 지배되는 계급사회로 공식화 하면서 국가는 부르주아지 지배의 정치적 표현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노동에 대한 특별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지배계급은 국가와 그 밖의 제도들에 자신의 힘을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그에게 부르주아사회에서의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억압적 무기이다. 즉 계급 적대감을 억제하기 위한 억압력으로서 국가 출현은 국가의 계급적 본질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에 봉사하는 억압적 기능을 표현한 것이다. 억압은 국가의 본질적 요소이며 근대국가의 집행부는 단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통사항을 다루는 위원회일 뿐이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집행부의 권력을 억누를 민주주의의 확대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람시는 국가를 지배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유지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피지배계층으로부터 능동적인 동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론적·실체적 행위의 총체적 복합체로 보았다. 국가는 부르주아들의 강압기구 이상의 것으로 국가는 상부구조에서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국가를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며 그 지배방식은 헤게모니에 의거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국가는 지배계급의 권력 확대를 위한 일차적 도구인 동시에 또한 피지배 집단을 연약한 미(未)조직적 상태로 묶어 두는 강압적 힘(정치사회)이기도 하다. 그는 국가에 시민사회가 포함된다고 보면서 국가가 시민사회를 둘러싸고 있다고 보았다.(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
  이렇게 본다면 헤게모니는 단순히 동의가 아니라 동의와 강압의 합이 된다.  헤게모니는 시민사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헤게모니’와 함께 ‘정치적 헤게모니’로서 국가 안에 자리 잡으며 헤게모니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 형태만 다를 뿐이다. 그람시는 국가를 헤게모니기구가 확장된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에 의하면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속에 국가가 통합되는 것은 ‘부르주아지 계급 자체의 성격’으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또한 부르주아지는 모든 요소와 그 환상적 확대를 사용하여 노동계급을 계급적 위치에 대한 자각이 없는 ‘하나의 노동계급으로서’ 전체 부르주아 발전에 통합시키려 하며 부르주아적 발전은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의식의 영역에서의 헤게모니를 통해서 수행된다고 보고 있다. 그렇기에 의식의 영역에서 힘(지배)을 갖지 못한다면 부르주아지는 지배의 일차적 도구로서 국가의 강압적 권력에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정치적 투쟁의 영역에서 의식을 지배하는 것을 생산력을 지배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위협하여 헤게모니가 위협을 받게 된다면 지배계급은 수동혁명을 한다고 한다. 즉 지배계급은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대중들이 정치·경제제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국가권력을 재조직화하는’ 한편  혁명적 대항세력들의 혁명적 잠재력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괴물과 왜 못 싸울까?

  이른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계급투쟁(경제영역)이 생기지 않는가? 계급이 사라졌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이 잘 보장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국가를 지배하게 된 자본가들은 그들의 지배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계급투쟁의 영역을 경제영역에서 정치영역으로 대치시켰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잘 맞는 정치제도가 되었으며 대의민주주의는 가장 적합한 제도가 된 것이다. 자본가들은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합법적이고 정당하게(그들 입장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하며 동의와 강압을 통해 국가를 지배한다.  
  
1.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분리하라
  자본주의적 생산은 노동과정 자체로부터 기술을 분리시킴으로써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분리시킨다. 국가는 이 같이 분리된 것을 모든 국가기구에 병합시킨다. 지적(知的) 노동과 정치적 지배, 지식과 권력사이의 유기적 관계가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실현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이루어진다. 이 같은 국가는 지식과 권력이 분리된 것의 필연적 결과이며 그 산물인 동시에 그러한 분리의 구성 및 재생산에 있어서 그 자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국가는 과학을 국가의 권력 메카니즘에 병합시키며 지적(知的) ‘전문인들’은 그들의 재정적 종속을 통해 통제된다. 국가는 사회에서 새로운 지식의 생성뿐만 아니라 그 지식이 사용되는 방식에도 중요한 영향을 행사하며, 이러한 지식은 지배이데올로기의 틀 내에서의 정치적 행위를 위한 전략의 일부다. 풀란차스는 권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서는 기술이나 지식에 대해 언급할 수 없으며 대항헤게모니를 발전시키는 과정은 국가기구들 내에서의 투쟁을 포함한 계급투쟁의 일부라고 말한다.

2. 노동자를 철저히 개체화(individualization)시켜라
  자본주의 국가는 사법체계와 정치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생산에 있어서의 적대적인 계급갈등 위치로부터 노동자와 자본주의적 경영인들을 모두 고립시킨다. 즉 국가는 노동자든 자본가든 사회성원을 하나의 개체화된 인간으로 간주하고 취급함으로써 노동자와 자본가를 각각의 생산에 기초한 사회 제 계급들로부터 격리한다.  각 개인들은 그들이 속한 계급의 다른 성원들과 생산에서 경쟁하며 국가는 이러한 (경제적 영역에서) 고립화된 개인들을 국민국가의 보호 하에서 정치적 영역내로 재통합시킴으로써 국가가 노동자와 자본가들의 집합적 의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주장해 국가가 마치 중립적인 것처럼 표방한다.
  그러나 국가는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 국가는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을 막는(그들을 계급적 이해관계로부터 고립시키는) 동시에, 자본가와 그들의 경영자들이 국가를 통해 그들의 지배적 위치를 재천명하도록 고립된 지위(국가가 창출 하는데 일조 했던 고립)로부터 다시 불러들이는 데 기여한다.
  노동자들의 개체화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거] 생산수단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분리하는 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같은 분리는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적 유물론의 기초이다. 곧, 이러한 개체화의 이데올로기는 계급관계를 은폐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자본주의 국가는 결코 자체를 계급국가로 드러내지 않는다), 서민 대중의 분리와 고립화(개체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는 ‘개인을 권력의 근원으로 삼음으로써 대의 민주주의가 투쟁영역이 되도록 허용해준다.’

3.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NO, 너희를 위한 법은 없다.

  근래 자주 듣는 말의 하나가 ‘법대로’다. 법에 따라서 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번에 서울행정법원이 고용노동부의 전교조 법외 노조 통보가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린 것은 이러한 기본 사상의 단편을 보여준다. 얼핏 보면 일리가 있고 맞는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법을 누가 만들며 누가 해석, 집행하느냐이다.  또한 공정하더라도 한국의 경우에는 법의 제정 목적에 따른 해석이 아니라 자구(字句) 해석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법률 수혜자에게 불리하게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판결도 한국 판사들의 경직된 사고와 노동에 대한 경시에서 오는 어쩌면 당연한 판결이다. 한때 도덕책이 소크라테스의 예를 들면서 ‘악법도 법’ 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무슨 큰 교훈으로 당연시하여 서술해서 악법에 정당성을 부여한 행위는 우리나라의 법적 사고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우리는 이번 전교조 판결뿐만 아니라 용산 판결을 비롯해 노동관련 판결에서 거의 정답에 가까운(?) 판결들이 내려지는 것을 보고 있다. 과거 독재시절이야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부끄러운 판결들이 양산되었다고 하나 민주화가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법의 본질적 성격을 파악하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 볼 수 있다.
  풀란차스는 자본주의 국가에 있어서의 법의 역할과 법의 재생산적 기능에 관련된 두 가지 명제를 정식화했다. 첫째로 그는 자본주의 국가에 있어서 법과 억압 사이에는 이분법적 구분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둘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억압적 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기구를 분석적으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폭력으로부터 법을 분리시키지도 않으며 억압 대신에 조작-설득(이데올로기)의 메카니즘을 대치시키지도 않으며 오히려 합법적인 물리적 폭력에 대한 독점을 증진시킨다고 본다. 곧, 자본주의 국가의 육체적 통제 수단 축적은 법과 질서를 나타내는 국가의 특성과 보조를 같이 한다. 따라서 그는 의회와 학교 같은 교육제도와 이데올로기적 제도의 출현은 국가에 의한 폭력 독점을 ‘상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폭력은 다시 ‘합법성’과 법을 통해 정당성을 내세움으로써 모호하게 가려진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그는 법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개인들을 위한 형식적인 응집 틀(cohesive framework)을 구성해준다고 주장한다. 곧 법은 개인들이 재통합되어 들어가는 정치적 공간과, 그들이 재통합되는 ‘방식’을 규정해 준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법은 국민들 사이의 진정한 차별을 모호하게 만들기는커녕, 이러한 차별(개인적이건 계급적이건)을 규정해주고 정당화한다.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을 부르짖음으로써 개인들은 ‘동질성’의 틀 내에서만 분리되고 차이가 나타나며, 단일법과 국민-민족 단위 하에서 동등한 취급을 받는 것으로 주장된다. 자본주의하에서 법은 자본주의적 권력과 지식관계를 구체화 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에서 법은 소유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탈피해서 국가기구에 대한 투쟁으로 갈등의 규칙을 제한시킴으로써, 경제적 영역에서 정치적 영역으로 계급투쟁을 대치시킨다.
  이러한 법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국가 관료와 자본가들은 입만 열면 법을 이야기하며 법을 통해 해결하자고 떠든다. 그것이 공정한 게임의 룰이라는 것이다. 기업은 노동조합들에게 걸핏하면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들은 법질서를 확립한다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일반 국민들은 이러한 법 집행 행위는 정당하며 적법한 것이라 착각한다. 과거 유전무죄 무전유죄 였다면 이제는 여기에 덧붙여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 無權有罪)인 것이다. 돈도 권력도 없는 민초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법이다.  
  우리가 그렇게 공정할 것이라 믿고 있는 법의 최종 해석자들도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게 된다.  법률가들은 그들 자체가 지식자본가일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에 의해 임명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충성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고 법이 공정하리라 생각할 수 있는가.

4. 선거는 도깨비 방망이-제로섬 게임

  국가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통틀어 일컫는다. 국가기구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는 선거를 통한 대표의 선출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선거는 계급투쟁에서 평화롭게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선거제도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계급적 관계와 모순을 해결해주는 도깨비 방망이다. 부르주아지들에게 이보다 좋은 도깨비 방망이는 없다.  
  풀란차스는 부르주아 국가는 권력 블럭에 참여하고 있는 ‘지배’ 집단들 사이에서만 갈등을 허용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으며 국가정치는 국가 내부의 모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곧 국가는 권력 블록에 참여하고 있는 파당들이 그들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제도다. 또한 국가는 권력 블록에 참여하고 있는 각 파당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시킬 뿐만 아니라 권력 블록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갈등도 무마시키므로 국가 구조는 피지배계급과 그들의 투쟁이라는 특수한 존재를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선거는 투쟁의 장을 제공하며 누구든 국민적 지지를 받는다면 권력을 장악하리라 착각하게 만든다. 선거는 권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국가폭력을 정당화 시킨다. 그런데 이 선거 게임의 룰은 제로섬게임이다. 단 1표라고 많이 얻은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간다.  100명중 51표만 얻으면 49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다음 선거를 기다리라고 한다. 그게 민주주의라고. 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를 뽑으면 사실상 모든 국기기구는 선출된 세력의 지배 밑에 들어간다.  
  결국 선거는 계급투쟁의 대표적 형태이며 이 계급투쟁에서 승리한 계급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며 이에 따라 국가의 성격이 결정된다.  따라서 국가기구들은 계급관계들의 구체적 표현이며 응집형태이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표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문제는 현재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이미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백지의 상태에서가 아니면 황야에서 결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모든 국가기구가 장악된 상태에서 싸워야 하므로 선거라는 계급투쟁에서 피지배계급이 이길 확률은 제로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서 싸움에 나서야 한다.

5. 빅 브라더는 현실에 - 모든 것을 감시하라

조지 오웰은 「1984년」에서 빅 브라더의 출현을 경고했다. 곧, 감시사회의 도래다. 모든 것을 감시하는 국가. 그것은 정말 끔직한 존재다. 부모 자식 간, 부부간에도 서로 감시한다. 국가를 비난하는 자는 처벌을 받으며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다. 끔직한 고문을 받아 새롭게 태어나거나 처형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 된다. 「1984년」의 주인공 윈스턴이 빅 브라더의 온화한 미소의 의미를 아는 데에 40년이 걸린다.  윈스턴은 고문과 세뇌를 받은 끝에 연인을 배반하고 당(국가)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되고 총살형을 기다린다.
  많은 이들은 스스로 의심 없이 빅 브라더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심한 고문을 받게 된다. 한마디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이것이 빅 브라더 세상이다. 우리는 빅 브리더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제는 IT 산업의 발달로 정보 감시가 더 수월해진 까닭에 더더욱 빅 브라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과거의 물리적 폭력, 고문이 사라졌다고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집을 나오는 순간부터 들어오는 순간까지 거의 모든 일상을 국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다. 자랑스런 민주주의 국가 미국은 전 세계를 감시한다.
  지배계급은 검찰, 경찰, 정보기관들을 이용하여 국민들을 감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감시한 내용을 바탕으로 통제하려한다. 빅 브라더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 존재한다. 국가라는 괴물의 또 다른 이름이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국가 즉, 정부가 자본주의에 이롭도록 행위하는 것은 자본가들이 국가제도를 통제할 뿐만 아니라 국가제도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인 특징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수집단이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그로부터 다양한 특권을 이끌어내며 이 사람들- 부유하고, 동일한 엘리트 학교에 다니고,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이 관료, 판사, 정치인으로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다. 국가체계의 모든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재계 출신이거나 전문직 중간계급 출신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지배계급이 국가를 장악했기 때문에 항상 패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왜 지배계급의 지배에 동의하느냐는 것이다. 분명히 대의민주주의는 피지배계급에게도 국가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형식적으로나마 주고 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생산수단의 소유권은 지적 생산수단으로까지 확장되고 지적(知的) 생산수단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대되는 신념을 갖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적 자산의 사적 소유가 아주 구속력이 큰 제약들을 부과하기 때문에 어떠한 정부도 그 목표가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자본가들의 이익을 거스르는 정책을 추진할 수 없다. 모든 사회집단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 자신들의 행위가 자본 소유자들의 투자의사에 미치는 영향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자본소유자들의 투자 의사는 다시 투자의 수익성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가 계급사회라는 것은 두 개의 조직화된 계급이 항상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처럼 자본주의에 특징적인 소유구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물질적 조건이 부를 소유한 사람들의 사적(私的) 의사 결정에 따라 좌지우지 되도록 되어 있다는 의미에서다.
  특정 정부가 자신만의 독자적 이익과 목표를 갖고 있든지 아니면 여러 집단이나 계급을 대신해 행위하든지 간에 물질적 자원을 필요로 하는 목적을 추구하는 한, 정부는 구조적 종속성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국가가 구조적으로 종속적인 이유는 어떠한 정부도 이윤을 감소시키면서 동시에 투자를 증대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분배와 성장, 평등과 효율성 사이의 대상 관계에 직면한다. 정부는 더 평등한 소득분배를 투자의 감소와 맞바꿀 수는 있지만  이러한 대상관계의 조건 그 자체를 변경 시킬 수는 없다. 정부는 성장이냐 소득 분배냐를 선택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지만, 모든 정부는 제한된 재분배 효과를 갖는 정책들을 추구하는데 그치고 만다. 왜냐하면 유권자의 물질적 복지는 그들의 소득의 몫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에 의해서도 좌우되기 때문이며, 분배는 성장을 희생시켜야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괴물과 안 싸울까?

  흔히 약한 자가 강한 자와 싸우는 모양을 빗댈 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가와의 싸움은 골리앗에 견줄 바가 아니다. 이것은 유치원 아이가 디셉티콘 군단과 싸우는 것과 진배없다. 따라서 애초에  싸움이 되지 못하고 이길 공산이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싸우지 않고 포기하거나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국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 거대한 괴물이 있어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괴물이 싸움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자본주의 국가는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로 작용한다. 물론 제도적으로는 공정한 게임의 룰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나 국가는 갖가지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 기구를 활용해 피지배계급의 도전을 봉쇄한다. 그럼 도대체 왜 노동자들은 혁명의 주체로 등장하지 못하는 것인가?  
  국가는 노동계급이 혁명적 세력으로서 집합적으로 조직화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는다. 자본주의 밑에서 법률과 이데올로기는 모든 계약당사자들을 ‘개인’으로서 동일하게 취급함으로써 자신들의 노동능력을 판매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고용계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 있는 현실을 은폐한다. 자본주의적 정치제도는 모든 사람을 계급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자본가와 노동자로 파악하는 대신 추상적 ‘시민’으로 간주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노동자라는 계급을 해체한다. 노동자들의 공통적 계급이익은 그들을 노동자로서 자본주의에 대항하게 만들지만, 자본주의적 법률과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장 안에서 그들은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개인-시민’으로서 등장한다.  
  따라서 노동자라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자 계급이 전체로서 보이지 않는 괴물과 싸울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스스로 노동자임을 인식한 일부 노동자만이 눈에 보이는 거대한 괴물과 싸워 목숨을 잃고 상처를 입는다.

         괴물과 어떻게 싸울까?

  지금까지 국가의 본질[곧, 지배계급에 의해 지배되며 지배계급의 이해(利害)에 복무한다]을 밝혔다. 국가는 지배계급에게는 순한 양이요 슈퍼맨이다. 그러나 피지배계급에게는 괴물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대의 민주주의 밑에서는 피지배계급에게도 문은 열려있다. 그러나 길은 닫혀있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고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괴물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체 피지배계급의 조직적 저항이다. 그러나 웬만해서는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 4·19나 6·10 항쟁은 민중이 들고 일어선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 결과는 사실 달라진 것이 없고 그 과실은 엉뚱한 놈들이 따먹는 일들이 생겼다. 그 이유는 민중들의 이해와 욕구를 대변해 줄 정치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항은 있었으나 조직된 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칭해지는 지배블록 안의 두 파당이 번갈아 권력을 움켜쥐고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그람시의 견해에 의하면 국가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합이며 지배계급은 헤게모니로써 지배한다. 그런데 이 헤게모니는 시민적 헤게모니(즉 동의)뿐만 아니라 정치적 헤게모니(즉 강압=폭력)에 의해 관철된다. 따라서 피지배계급은 그들의 헤게모니를 극복해야 한다. 어떻게?
  그람시는 그 방법으로 노동계급의 대중 조직과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대항헤게모니로 국가기구를 포위하라고 한다. 즉 새로운 문화의 토대로서 노동계급의 조직화를 확립하라는 것이다. 또한 종속적 위치로부터 해방시켜줄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수립하고 행동으로 옮기라고 하고 있다. 그는 그 전략으로 혁명정당을 전위정당이 아닌 노동계급 전체와 연결시키라 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가 현실이 되어야 한다. 의식의 확산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수립할 수가 없다. 또한 노동계급의 대중정당을 건설 할 수 없다. 물론 노동정당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다면 지배계급은 이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이석기 사건’에서 보듯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 국가보안법을 이용하여 탄압을 할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시민적·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일이며 계급의식의 자각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의 하나는“의식화”이며 대항헤게모니의  수립이다. 이를 위해서 ‘유기적 지식인’을 양성해야 한다. 지배계급은 종속적 계급에까지 손을 뻗쳐 지배집단에 동질성과 자기의식을 부여할 지식인들을 포섭한다. 따라서 자본에 포섭되지 않을 유기적 지식인의 양성이 중요한 실천이 된다.  결국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결여가 부르주아지의 그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는 주요한 원인인 것처럼 ‘의식 그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와 생산수단을 장악하기 위한 권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맺으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가는 어쩌면 무색무취로 보인다. 그러니 의식이 뚜렷이 없는 사람에게는 국가가 중립적이며 선한 존재로 보인다. 국가가 우리를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의식이 깨어나면 진정한 국가의 모습이 보인다. 따라서 국가를 제대로 볼 수 있으려면 의식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 흔히 불렀던 “의식화”가 바로 이 작업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확립이 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 ‘의식화’를 위한 노력이 없으며, 학습하는 분위기도 사라졌다. 혁명적 대중정당의 건설은 머나먼 이야기이다.  이제 국가는 투명 망토를 두를 필요 없이 괴물의 모습 그대로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눈앞의 괴물을 보지 못하며 자신만을 탓한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진도 앞바다에서 아이들을 하늘로 보낸 우리의 부모들도 이제는 지쳐서 자신의 무능함을 탓한다. “부모 잘 못 만나 너희들을 보냈다”고. “다음 세상에는 좀 더 좋은 부모 만나 행복하게 살라”고.  누가 이들에게 이토록 절망을 가져다 주었는가. 어찌 이것이 부모들의 탓이란 말인가. 이 땅의 가난한 부모와 아이들이 눈물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들은 국가를 운영할 자격과 능력이 없다. 우리는 분명히 외쳐야 한다. “이제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더 이상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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