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48호 [열공] 어른들은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숨겨진 삶

2013.04.15 16:51

진보교육 조회 수:746

『어른들은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숨겨진 삶』
  - 마이클 톰슨 외 지음/ 김경숙 역/ 2012/ 양철북

김태정/ 평등교육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또래집단의 힘
십대청소년을 자녀로 둔 학부모들이라면 아이들이 부모나 선생님보다는 또래집단에 매우 강한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특정 메이커의 옷을 입는 것으로 동질성을 확인하려 한다든지, 특정 연예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는 공통점을 중심으로 뭉쳐다니는 등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또래집단의 영향이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집단 따돌림이다. 집단 따돌림은 학교폭력의 하나의 유형으로 분류되며, 육체적인 가해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왜 아이들은 이런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걸까? 물론 집단 따돌림을 포한한 학교폭력의 근본 원인은 입시경쟁교육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설명만으로는 무언가 2% 부족하다. 그런데 그 부족함을 채우는데 있어 일정하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있어 소개한다.

집단생활의 보이지 않는 법칙
저자들은 교사이자 심리학자로 오랫동안 아이들을 상대로 상담치료를 해온 경험을 토대로 아이들 집단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매우 설득력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물론 교사들조차도 이른바 ‘선량한 아이들’도 때때로 ‘불량한 아이들’과 완전히 똑같은 기본 원칙을 따른다는 사실이나 혹은 학교에는 ‘불량한 패거리’뿐만 아니라 ‘선량한 패거리’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집단생활의 보이지 않는 규칙은 무엇일까?
첫 번째 법칙은 “네 또래와 똑같아져라”이다. 물론 동조화의 압력은 십대의 학생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나 중학생의 경우 그들의 신체와 생활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로 불안상태이기 때문에 집단에 강하게 종속된다고 한다. 또 통계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들이 단지 4%정도만 집단의 행위라는 외면적인 요소 대신에 자기 내면의 양심과 가치관을 들여다보고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능력을 가진다고 한다.  
두 번째 법칙은 “반드시 집단에 속해야 한다”이다. 사람은 누구나 동질성이 뚜렷한 어떤 집단에 자신이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하며, 일단 그 집단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비우호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즉, 집단 응집력에는 어두운 면이 존재하며 이것이 편견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 번째 법칙은 “들어와라. 그렇지 않으면 나가라”이다. 포함과 배제는 집단 결속의 강력한 도구이다. 쉽게 말해 같은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서로 친밀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누구나 배타적인 것, 아무나 속할 수 없는 어떤 것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며, 자신은 거기에 속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법칙은 “사회적 서열 속에서 너의 자리를 찾아라”이다. 인간은 다른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사다리에 자신을 배치하는 경향이 있으며, 때로는 이 서열 문제가 아이들에게는 매일매일 부딪쳐야 하는 투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 사이에 서열이 존재하여 어떤 아이가 다른 아이를 지배한다는 것이 불쾌하겠지만, 이것은 집단의 필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법칙은 “반드시 역할이 있어야 한다”이다. 저자들은 집단의 보편적인 힘이 각 구성원에게 서열과 역할을 할당해주며, 어떤 특정한 역할이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그 역할에 빠져든다는 점을 들면서, 도덕성은 단순히 개인적인 특징이 아니며 우리가 속한 집단의 한 양상이라고 지적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의 경우 독재적인 집단 안에서 희생양을 만들고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아이들이 서열을 염두에 두고 낮은 지위의 존재를 멸시하도록 고무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따돌림 등이 집단이 가지는 고유한 법칙의 산물이라면, 게다가 영장류가 가지는 필연적인 현상이라면 해결방법은 없단 말인가? 저자들은 친구들을 따돌리고, 희생양을 만들고, 약한 아이를 괴롭히고, 해로운 집단을 결성하고, 그 밖의 다른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대안은 바로 학교를 바꾸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도덕적인 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학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교사와 학생이 서로 대화하라고 충고한다. 예를 들어 벌줄 사람과 칭찬받을 사람을 결정하고, 혹은 학생수첩에 적힌 교칙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는 것으로는 학교를 도덕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대화를 통해서 해도 좋은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토론하면서 답을 얻을 수 있으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을 확실히 대화에 참여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개별적인 상황에 대해 일일이 체벌하느라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학교의 바탕을 이루는 사회적 역학관계를 이해하는데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말한다.
한편, 집단의 사회적 잔인성이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막기 위해서 나서서 무언가를 할 생각은 하지 않는 ‘방관자’들을 대상으로 시민의식을 키우는 것에 있다고 충고한다. 서로 존중하고 예의바른 학교를 만드는 데 능동적인 역할을 하도록 그들을 고무시킬 수 있으며, 그들이 힘을 합쳐 행동에 나서면서 손을 내밀어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 새로운 집단 기풍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별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사안별로 접근하기 보다는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특히 학부모 그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듣는 것보다 학부모가 다 같이 모여서 단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 학교의 비주류 학부모들(소수 민족, 저소득층 등)이 학교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학교의 규모도 작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아이들이 매일 자신의 눈을 바라봐주고 등을 두드려주는 어른이 한명은 있는 학교. 바로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감시 카메라보다 더욱 효과적인 보안장치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저자들은 아이들이 더욱 안전하게 지내고 보다 인정받고 소속감을 느끼고 좋은 우정을 쌓아갈 수 있도록 돕는데 사용되는 모든 시간은 결국 학급 내의 모든 아이들이 보다 더 주의를 집중할 수 있고, 학교생활을 즐기며, 소모적인 인기전쟁 대신에 공부에 더 신경을 쓸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즉, 뛰어난 상위권 학생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아이들이 진정으로 꽃을 피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며
대체로 경청할 만한 많은 조언들로 구성된 글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집단 안에서 위계질서 즉 서열이 필연적인 현상이라는 저자들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영장류만의 특징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 그리고 역사적 규정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별자들간의 차이가 차별과 배제로 이어지는 사회적 관계를 협력적이며 평등한 관계로 바꾸는 것 그것이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유적 본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