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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기획] 2. 배움의 공동체에 대한 교육학적 검토

2011.07.18 21:49

진보교육 조회 수:1656

<배움의 공동체에 대한 교육학적 검토>

배희철/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 이론분과장

Ⅰ. 검토 대상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진보교육연구소 5월 월례발표회에서 <‘배움의 공동체’에 대한 교육학적 검토>를 주제로 발표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이를 수락하였기 때문이다. 5월 월례발표회를 처음 기획할 때, 잠정적으로 확정한 주제는 <‘학습자 중심주의, 수업 혁신론’을 넘어 ‘관계의 재구성’으로>였다. ‘교수에서 학습으로’, ‘배움 중심주의’,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는 선동 문구 수준의 주장이 혁신학교를 넘어서 교과부 관료까지 ‘교수에서 학습으로’를 외치는 현실을 만들었다. 이러한 현실은 적어도 내 눈에는 ‘중세 마녀사냥’에 다름 아니다. 그런 주장은 학문적 타당성이 이미 부정된 내용이다. 이러한 선동이 학부모, 학생, 교육 관료에게 호소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심정적으로 이해가 가지만, 문제는 교사도 이러한 선동에 열성적으로 찬동한다는 것이다. 홍세화 선생님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이 글에서 비판하고자 선택한 대상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배움의 공동체에서 펼쳐지고 있는 수업 방식, 다음으로, 학습자 중심 교육, 마지막으로, 구성주의를 비판할 것이다. 이 세 가지 비판 대상은 별개로 다루어져도 될 만큼 복잡한 내용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상이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거친 것이며 거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가지를 <‘배움의 공동체’에 대한 교육학적 검토>라는 짧은 글에 다 담고자 한다. 이러한 구성은 세 가지 내용이 내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주 도식적으로 언급한다면, 배움의 공동체식 수업 방식은 개별적 사례이고, 학습자 중심 교육은 특수한 경우이고, 구성주의는 일반적인 흐름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진술하면, 구성주의라는 일반적인 흐름에서 학습자 중심 교육을 거쳐 ‘배움의 공동체’ 수업 방식으로 연결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추상에서 구체로 글을 쓰는 것이 편하지만, 읽기에는 구체에서 추상으로 쓴 글이 쉽기 때문에 본문의 각장은 배움의 공동체(수업 방식) 비판, 학습자 중심 교육 비판, 구성주의 비판 순으로 배열하였다. 마지막 장에서는 비판한 내용을 종합하였다. 종합한 내용을 토대로“오래된 미래가 들려주는 진보교육”이라는 나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였으나 시간 부족으로 내용을 종합하여 <체계가 없는 ‘배움의 공동체’>로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구호 수준으로 제시하면, 배움의 공동체를 넘어 협력의 공동체로, 학습자 중심 교육을 넘어 협력 중심 교육으로, 구성주의를 넘어 문화-역사적 이론으로 이다. 이 모든 내용은 비고츠키에 근원을 두고 있다.


Ⅱ. ‘배움의 공동체’ 수업 방식에 부재한 것

1.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요즘 수업에 관한 논의 흐름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로 넘어가고 있다. ‘배움의 공동체’ 수업은 그런 면에서 가장 첨단을 달리는 수업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자료를 종합하면 교사가 수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진술만 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가 생략된 까닭을 논리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에 도입된 ‘배움의 공동체’ 수업 방식은 이 문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미국, 일본, 한국은 교육과정이 구성주의에 근거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손우정과 사토마나부가 밝히고 있듯이, ‘배움의 공동체’ 수업은 구성주의 수업 방식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배움으로 전환하는 첫 번째 과제는 ‘매개된 활동’을 조직하는 일이다. 공부가 좌학에 의한 뇌 시냅스의 결합인 것에 비하여 배움은 사물과 도구와 소재와 사람에 의해 매개된 활동이다. 관찰하고 조사하고 실시하고 토의하고 표현하는 구체적인 작업이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매개된 활동을 조직하는 일은 교실에 배움이 성립하는 첫 번째 요건이다.
공부를 배움으로 전환하는 두 번째 과제는 ‘협동(모둠 활동)’을 실현하는 일이다. 공부는 개인적 활동이지만 배움은 협동적 활동으로 성립한다. 지금까지 자립해결이나 자학자습을 내건 공부문화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은 학습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배움의 문화에서는 타자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제공하여 서로 배우는 ‘호혜적인 배움(reciprocal learning)’이 추구되어야 한다. 배움은 하나하나가 서로 부딪치면서 다시 맞추어 가는 것을 수행하는 ‘협동’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공부를 배움으로 전환하는 세 번째 과제는 지식이나 기능을 ‘획득’하여 ‘정착’시키는 학습으로부터 ‘표현’하고 ‘공유’하는 학습으로 이행시키는 일이다. 배운 것을 표현하고 친구와 공유함으로서 아이들은 지식이나 기능을 반성적으로 음미하고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표현과 공유에 의한 반성적인 사고는 배움의 최대 추진력이다. 활동적이고 협동적이고 반성적 배움의 실현이 교육과정개혁의 과제인 것이다(사토 마나부, 2006:165-166쪽).

제가 조사한 바로는, 길게 인용한 부분이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활동적이고 협동적이고 반성적인 배움’에 대해 직접적으로 진술한 내용 전부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교수-학습 방법은 우리의 교과서 체계와 크게 어긋나는 바가 없다. 매개된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교과서 뒤 쪽에 자료까지 제시되어 있고, 서로 의견을 공유하도록 과제가 제시되어 있고, 발표한 후에 반성하도록 되어 있는 우리 교과서와, 본질적으로,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지는 교수-학습 방법인 것이다. 학습자 중심, 유도된 발견학습, 문제해결식 수업, 프로젝트 수업 등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교사용 지도서에 다 들어 있다.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논리적으로는 ‘배움의 공동체’ 수업 방식은 혁신학교의 수업 방식이라기보다는 일반학교의 수업 방식이어야 한다. 국가교육과정에서 규정한 수업 방식을 가장 잘 따라야 하는 학교가 일반 학교여야 하고 혁신학교(거점학교)는 새로운 것을 실험해야하기 때문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 문화가 이런 관계를 왜곡한 것이다.

2. 왜 가르쳐야 하는 가
왜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략된 채,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파악하고,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동전 던지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상과 방법은 목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목적에 의해 대상과 방법 선택의 타당성이 평가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인 이유로 목적을 선정하면, 정치적인 목적에 적합한 가르칠 내용과 가르칠 방법이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사회 변화를 반영하겠다는 목적을 선정하면,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내용과 지도 방법이 선택된다. 하지만 이런 것은 교육적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절대 하지 말라는 교육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사회ㆍ경제ㆍ정치적 월권인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기본법에 명시된 바와 같은 교육의 목적을 전면에, 당면 과제로, 교육현장에 배치해야 한다. 전인교육이라는 교육의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인교육은 포털 백과사전(다음, 네이버)의 정의에 따르면, 어린이의 전면적 발달을 지향하는 교육이다. 공교육의 목적은 어린이의 전면적 발달을 지향해야만 한다. 이에 근거하여 가르쳐야 할 내용과 방법이 도출되어야 한다. 한국의 교육학은 이러한 너무도 상식적인 지점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종합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작업에 집중하기를 촉구하며, 가장 혹독한 비판을 인용하겠다.

“교육학 탐색”이라는 강좌를 신설할 것을 제의했다가 학과교수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두 가지 부정적인 발언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원로교수는 “사실상 교육학이 없는 것 아니냐?” 하는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그에 대해서 나는 “없으니까 시도해보려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런 나의 응답에 대해 “그런 시도는 위험하다.”고 어떤 후배교수가 반론에 가세했습니다. 결국 제자들과 더불어 자율적인 교육학을 모색하려 했던 그 강좌는 다수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것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것도 결국 어린이의 전면적 발달을 지향하는가에 의해 그 적절성이 평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을 학자들은 냉철하게 파고들어야 하는데, 그런 작업이 그 동안 없었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학문이 유통되는 흐름을 돌아보면,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도 미국도 그렇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이런 전개과정을 회상해보면 “배움의 공동체”에서 왜 가르쳐야 하는가에 철저하게 질문하고 답하지 못했는지 나름 납득이 된다.

3. 교사와 학생의 관계
‘배움의 공동체’ 수업 방식에 없는 세세한 것을 다 나열하는 것은 생산적인 비판이 아니다. 여기서는 단 한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교사와 학생의 밀접한 관계가 언급도 되지 않고 있다. ‘배움의 공동체’ 수업 방식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학생 밖에 없다. 교사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교실에 같이 존재하는 교사와 학생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생성되는 그들의 관계를 찾아 볼 수 없다. 가르치는 노동을 하는 자(교사)와 배우는 노동을 하는 자(학생)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배움의 공동체’ 건설을 위해 교실 바깥의 협력을 이야기해도 교실 내의 협력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암묵적으로 전제된 관계를 유추해본다면, 교사에서 학생으로 일방적으로 하달되는 관계, 배움의 목표와 배움의 방식을 강제하는 관계, 교사가 파악한 핵심 내용에 근거하여 선정된 학습지 풀이를 강제하는 협동의 관계가 있다. 또한 실제적 배움이 학생들의 협동에서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교사가 이 결정적인 장면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왜곡된 근접발달영역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학생 간의 관계가 있다. 거기에는 학생의 배움이 이루어지는 장면의 바깥에서 교사가 감독자처럼 모둠 별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협동학습의 심리적 본질이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의 고도화된 노동통제 방식이 놓여 있다.  

간단하게 언급한 빠져 있는 내용들이 결국은 ‘배움의 공동체’에서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을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반영하지 못한 결정적인 까닭이다. 역동적인 근접발달영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고정화된 틀의 수업 방식을 도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의 변화를 관찰하지만 그것이 학생의 전면적 발달과 연계되어야 한다는 언급도 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최근 대한민국 교육과정에서 화두로 떠 오른 핵심역량(고등정신기능)도 부재하다. 거기에는 미래 교육의 핵심인 교사와 학생의 협력 관계가, 협력 교수-학습이 지평선 밖에 놓여 있다.


Ⅲ. 전통적인 학습자 중심 교육관에 부재한 것

1. 발달과 교육의 관계
전면적 발달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학습자 중심 교육관’에 공통되는 현상은 교육 활동이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에 근거한다. 이런 측면에서 ‘배움의 공동체’는 예외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아마도 가장 최근의 흐름이기에 이 부분의 약점이 보완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지적 능력을 습득하는 것으로 배움을, 학습을 위치시키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루소만이 자연주의적 색채에 의해 사회적 상호작용의 역할을 부정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으로, 수업 시간에 이루어지는 지적 능력을 습득하는 배움으로 교육을 축소하였기에 교육에 대한 정교한 진술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그것이 전면적 발달과 어떤 연관 관계를 같게 되는지를 질문하지도 못했다. 이런 연유로 ‘학습자 중심 교육관’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발달과 교육의 관계에서 개념 형성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지 못했다. 특히나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의 구분 정리를 명확히 하지 못함으로서 학교 교육에서 해야 할 적합한 역할을 파악하지 못했다. ‘학습자 중심 교육관’은 개념 형성의 문제를 (피아제처럼) 일상적 개념 형성의 문제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학교 밖 배움,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발생하는 인지 능력 획득을 배움으로 보는데 머물러 있다.

2. 전면적 발달을 위한 경로
어린이 발달을 위한 전체적인 상과 다양한 측면의 발달을 위한 연차적인 순서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시기별 특징을 현상적으로 나열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위에 인용한 루소의 경우도 그렇고 인지적 측면만의 질적 차이를 기술한 피아제의 인지발달단계가 그렇다. 운동적 측면, 인지적 측면, 정의적 측면을 동시에 고려한 발달 경로를 기술한 내용도 찾아보기 어렵다. 콜 버크의 도덕성 발달 단계도 한 측면만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떤 일이 있었기에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인과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피아제의 인지발달단계는 왜 그렇게 질적인 차이를 보이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각 단계의 특징을 정리하여 기술하였을 뿐이다. 한 측면의 발달 경로마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배움의 공동체’는 이 부분을 언급하지도 않고 있다.
전면적 발달 경로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지 못하여, 어린이의 전면적 발달과 학교 교육의 관계를 제대로 규명할 수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전면적 발달에 문화, 특히 언어와 학교가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규명하려는 문제제기도 하지 못했다.

3. 학습자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
‘학습자 중심 교육관’은 왜 학습자 중심 교육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핵심을 집으며 학습자를 어떻게 설명해내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규명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가 어린이를 성인과 질적으로 다른 주체로 설정한 것은 교육사에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에 해당하는 이 분야를 한 걸음 나아가게 한 결정적인 공헌이다. 마찬가지로 피아제가 어린이 인지 발달에서 질적으로 다른 단계들을 발견한 것도 갈릴레이의 공헌에 비유될 사안이다.
이와 비교해볼 때, ‘배움의 공동체’ 수업 방식이 중등과 초등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학습자가 교실에 있다는 것, 거기서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 학생 끼리 잘 배운다는 것을 발견한 공로가 인정된다하더라도, 그 학습자를 질적으로 다른 학습자로 보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학습자관에 대한 이해에서 퇴보한 것으로도 보일 수 있다.
학습자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체계적이지 못하다. 발달의 사회적 상황에 따라 개별화된 발달 경로를 취할 수밖에 없는 학습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근거로 한 개별화 학습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어린이의 일반성, 보편성에 근거한 학습자 발달이라는 피아제 식의 인식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의 흐름인 ‘배움의 공동체’도 모둠별 협동학습 방식이라는 구태의연한 처방전에 안주하고 있다.

‘학습자 중심 교육관’이 발현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학습자가 스스로 사회적 상호작용(피아제), 경험(듀이), 체험, 배움을 통해 발달한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구성주의로 수렴된다. 7차 교육과정의 이론적 배경으로 도입된 구성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작업은 ‘배움의 공동체’나 ‘학습자 중심 교육관’에 대한 비판적, 체계적, 총체적 인식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Ⅳ. 구성주의 교육이론에 없는 것

1. 교사의 모범
누구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듯이 교사의 역할이 학생의 역할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있다. 전통적인 교사의 역할과 비교한다면, 구성주의 교육이론에는 교사가 교실에 없는 듯하다. 교사는 많은 학습 자료를 제공하는 자, 학습지를 제작하는 자, 학생들의 활동을 평가하는 자로 제한된다.
인식주체로서 교사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평생교육 측면에서 보면, 교사도 학습자이다. 교육 노동을 반성적으로 사고하여 계속해서 배워가야 하는 교사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축소된 교사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공개 수업 협의회에 참여해야 하는 교사만이 있다.
전통적인, 상식적인, 실천적인 교사의 모범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삶의 모범을 보이는 학급의 지도자로서의 교사, 문화 전수자로서의 교사, 전면적 발달을 이끌어가는 능동적 교사를 구성주의 교육이론에서 찾을 수 없다. 거기에는 교수 기계로서의 교사만이 있는 듯하다.

2. 역동적인 발달
학습자가 경험을 통해 자연적으로 발달하기에, 역동적인 발달이 전개되는, 인위적인 발달이 펼쳐지는, 질적인 발달이 창출되는 발달의 사회적 상황이 빠져 있다. 유전적으로 결정된 인지구조에 의해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양적인 발달만이 있을 뿐이다. 질적인 인지구조의 변화는 태생적인 것이기에 역동적인 발달이 전개될 여지가 없다.    
학교 교육을 통해, 교과 학습을 통해, 수업을 통해 인위적으로 펼쳐지는 발달에 대한 관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교수-학습을 통해 학생의 발달이 촉진된다는 정도의 언급도 구성주의 교육이론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배움의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발달이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3. 비고츠키의 이론체계

비고츠키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한 세대 이상 교육의 패러다임으로 군림하며, 서태지보다 더 유명세를 탔다.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글은 유행에 뒤진 글로 치부되고 있다. 무관한 내용을 기술하면서도 비고츠키를 인용하는 글을 너무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더 나아가 비고츠키가 사회적 구성주의의 시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유명세를 타면 그 값을 치러야 한다. 비고츠키의 거대 이론은 그저 근접발달영역으로, 언어적 매개로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별적인 것들의 나열로 분해되어 진 것이다. 심지어 학자들도 비고츠키를 언급하지만 그 기조가 상반되는 경우도 많다. 사회적 구성주의가 바로 그런 경우다. 구성주의의 본질적 내용은 비고츠키가 침상에서 검붉은 피를 토하며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색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가며 구술한 마지막 저작(생각과 말)에서 격렬하게 비판한 바로 그 것이다. 그의 유언장은, 그의 최고 저작인 <생각과 말>은 구성주의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독려하는 격문에 다름 아니다.
‘학습자 중심 교육’에 대해 비고츠키가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전통적인 ‘학습자 중심 교육’에서 주인공으로 삼은 학습자의 영원한 어린이성의 허구를 비판하고 역사적인 어린이성, 이행하는 어린이성을 실증적으로 제시했다. 원래 그런, 관념적인, 영원한 어린이의 모습이 실재가 아님을 체계적으로 입증했다. 실재 어린이가 전면적 발달하게 하는 발달의 경로, 특히나 교육을 위해 발달의 중심 노선을 제시하고 있다. 천상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전통적인 어린이상을 지상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실재적인 어린이상으로 대처했다. 발달의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른 발달 경로를 취할 수밖에 없는 어린이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서 진정한 개별화 교육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런 내용을 반영한 ‘학습자 중심 교육’은 아직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다고 봐야한다.

‘배움의 공동체’에 등장하는 비고츠키는 누구나 인용하는 수준에도 미달하고 있다. 거기에는 근접발달영역에 대한 정의와 도식적인 그림뿐이다. 교육활동과 연계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부루너의 ‘비계’처럼 ‘점프’라는 (단편적인 근접발달영역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오해가 가미되었을 뿐이다. 40분 수업마다 이루어져야 하는 ‘점프’는 ‘비계’처럼 근접학습영역을 이야기할 뿐이다. 피아제가 전면에 드러낸 발달 개념마저 거기서는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배움의 공동체’에는 문화역사적 발생 혹은 사회발생이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고등정신기능이라는 것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결정적으로 비고츠키의 거대 이론에 핵심이 되는 발생의 일반법칙에 대한 이해도 인용도 없다. ‘배움의 공동체’ 수업 방식에는 비고츠키 수업 관련 내용의 핵심인 협력을 찾을 수 없고, 협력의 과정을 위한 설계도의 교육과정에 대한 안목은 더 더욱 찾을 수 없다. 당연히 전면적 발달을 위한 학습자관도 거기에는 없다. 수업은 수업일 뿐이지, 그것이 교육과정과 전면적 발달과 어떤 내적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Ⅴ. 체계가 없는 ‘배움의 공동체’

1. 부재한 학문적 체계
지금까지 ‘배움의 공동체’를 분석하고자 ‘학습자 중심 교육’과 구성주의를 간결하게 비판적으로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비판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묶어내는 정리 작업을 하고자 한다.
‘배움의 공동체’ 수업 방식에는 교육학이라고 할 체계가 전무하다. 암묵적으로는 구성주의라는 주된 의미를 담고 있지만 학문이라는 수준에서 논의할, 이론적 차원에서 언급할 가치 있는 내용들의 체계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미 언급했듯이 거기에는 수업, 교육과정, 전인교육이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 부분과 전체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파악할 수 있는 언급이 없다. 이러한 비판은 어떤 의미에서는 비판이랄 수도 없다. 수업 컨설팅이라는 것이, 바로 그 순간의 가장 현실의 역동적인 측면을 반영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적 측면을 부각시킬 필요가 없다. 거기에는 단기적 처방, 현상적 치유, 의뢰인의 고민 해결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업 컨설팅이 번창하는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과 처방은 컨설던트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수업 컨설팅을 요구하게 만드는 근본적 원인이 지속돼야 사업이 번창하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배움의 공동체’ 수업 방식에는 체계가 없어야 하기에, 체계가 있어야 하는 교육학 수준의 내용 구성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 ‘배움의 공동체’ 어디서 어디로 갈까
이렇게 미국,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 ‘배움의 공동체’가 유행하는 데는 필연적인 까닭이 있다. 1980년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 교육 공세가 외적 측면(교사와 학교의 구조조정,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 감축이나 비정규직화와 공장 폐쇄나 이전)을 넘어서서 내적 측면(교육과정, 교수-학습)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가장 열성적으로 뛰어든 국가가 영국, 미국, 일본, 한국이다. 유로의 영향력을 받는 영국은 교육과정 공세에 제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나머지 세 나라에서 구성주의 교육과정에 의한 공세가 전면화 되었다. 한국에도 늦겠나만, 7차 교육과정으로 내적 측면에 대한 공세가 1999년부터 시작되었다. 입시교육과 맞물려 진행된 구성주의에 근거한 7차 교육과정은 10 여 년이 경과하면서 그 전과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창의성이 무너지고, 인성이 무너졌으며, 협력하는 사회성마저 꼴찌를 하고 있다. 서울대생이 논문 구상도 하지 못하다는 비난은 교수 면담하러 부모님의 손을 잡고 왔다는 조롱과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교사들도 협력하는 사회성이 꼴찌라는 사실이 ‘배움의 공동체’ 수업 컨설팅이 확산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다. 거기에 MB 정부 들어 노골화된 공개수업에 근거한 교원평가는 ‘배움의 공동체’ 수업 컨설팅이 번창할 토대가 된 것이다. 교사가 아닌 학생의 학습을 보고 평가하는 수업공개는 교사에게 심정적으로 얼마나 위안이 될 것인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조삼모사(朝三暮四)는 여전히 유효한 한자성인 듯하다.
현재의 흐름이 지속된다면, ‘배움의 공동체’ 사업은 계속 번창할 수 있을 듯하다. ‘배움의 공동체’ 수업 방식이 지닌 심리적 효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보수정권에서 이 사업을 후원할 것 같다. 구성주의 교육 이론을 구성하는데 토대가 된 피아제는 논리적 성숙은 사회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즉 학습에 성공한다는 것은 사회화의 결과인 것이다. 그는 생물학적인 동화와 조절의 적응기제가 평형화를 추구한다는 것으로 유기체적 학습자 상을 상정했다. 이 표현을 사회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자기중심성을 지닌 아이를 강제를 통해 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사회화라는 것이다. 학습에 성공하도록 하는 것은 사회화이고, 사회화가 잘 되려면 협동을 잘해야 하고, 협동을 잘 하려면 강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자기중심성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둠별 협동학습을 내세우는 ‘배움의 공동체’ 수업과 연관되기에 협동의 심리적 기능을 분명히 해야 한다. 협동의 심리적 기능은 강제인 것이다(비고츠키, 2011:127-130).    
‘배움의 공동체’ 모둠별 협동학습이 행동주의적 협동학습의 외형적 틀을 극복하였지만, 심리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강제라는 기제에 근거하여 작동하고 있으며, 선택을 제약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자기주도적, 자율적, 창의적 학습자로의 이행을 방해하고 있다. 시간에 따른 학습자의 변화를 고려하지 못하다면, 천변 만변하는 역동적인 교실의 실재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다양한 학습자의 발달 상황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특정한 교수법이나 학습법을 찾는 교사가 될 수밖에 없다. 수업에서 강제되어야 무엇을 하던 타율적 학습자가 교수-학습의 경험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의식적 파악과 의지적 숙달의 기쁨을 알아가는 자율적 학습자로 이행하는 발달에 대한 올바른 상을 정립할 때만 교사는 자율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바둑의 고수들이 정석을 암기한 후에 다 잊어버리고 실제 상황에 따라 정석에 사로잡히지 않고 창조적으로 대응하듯이, 경지에 오른 교사는 모든 학습법과 교수법에서 해방되어 바로 내 눈에 있는 학습자와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 따라 창조적으로 교수-학습을 전개할 수 있다.  


3.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배움의 공동체’에 학문적 체계가 없다는 것은 없기에 정리해낼 수 없었다. 체계가 없어야 할 까닭을 정리했던 것으로 나의 총체적 검토 결과의 타당성을 뒷받침하였다.

비고츠키(2011:141)는 구성이 (관념론적이고) 주관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구성주의는 인식주체의 주관성에 근거하고 있다. 교사는 학생의 주관을 넘어 객관에 가까이 가도록 인도하는 자이다. 교사의 과제는 인류의 문화 역사적 발전에 의해 응축된 교과의 내용과 누적된 고등정신기능을 후세에 전수하여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야하는 자이다. 이런 측면에서 비고츠키가 강조하는 바는 협력의 교육, 협력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교사는 거기서 체계의 유무가 결정적인 학문적 개념 형성을 학습자가 경험하게 하고, 다양한 고등정신기능이 내재화될 전제들을 학습자와 학습자 앞에 펼쳐야 한다.

교육 선진국은 어설프게 비고츠키 이론을 차용한 핵심역량 중심의 교육과정을 넘어, 협력 중심의 교육과정을 만들고 있다. 유로 교육위원회가 2015년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협력 중심의 교육과정을 미리 대비하도록 하자. 문화 민족의 전통, 공동체 문화, 우리의 교육사는 이런 작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다는 세상을 꿈꾸는 교사가 현재의 시대 상황과 교육학의 흐름을 의식적으로 파악하고 의지적으로 대안을 찾아가는 노력을 경주할 때, 협력의 교육학을 새롭게 이해하는 경지를 개척하게 될 때, 교사 발달이 질적으로 다른 단계에 접어들게 될 때 한국 교육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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