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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초점] 통제가 멈춘 곳에서 비로소 교육은 시작된다

2010.04.21 12:11

진보교육 조회 수:1158

[초점] 통제가 멈춘 곳에서 비로소 교육은 시작된다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제정 시도가 갖는 의미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2009년이 저물어갈 무렵,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 초안이 발표됐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당선 공약 가운데 하나였고, 임기가 지난해 7월부터 5개월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지난해 12월 17일 구체적 윤곽이 제시됐다. 조례안이 발표되자마자, 보수 언론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학생인권조례는 반(反)교육이다’, ‘좌빨 교육감이 학교를 운동권 합숙소로 만들려 한다’, ‘교육 황폐화 우려된다’, ‘좌빨 교육감의 재선용 작품이다’ 등 과장된 우려와 이념 공세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자유교원조합과 같은 보수적인 교사단체와 실체도 확인하기 힘든 학부모단체들도 학생인권조례를 당장 철회하라며 독기 품은 언사들을 뱉어댔다. 이는 ‘진보 교육감’으로 불리는 김상곤 교육감이 하는 일이면 물어뜯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의 단순한 반사작용이 아니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을 때 닥쳐올 변화가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 두려움의 실체, 그것이 바로 학생인권조례가 정녕 제정되어야 할 이유이고 필자가 서울과 수원을 수차례 오가며 조례 제정 위원으로 참여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학생인권조례, 무엇을 담았나?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은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조례안은 학생인권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학생인권의 현실이라는 숨결을 불어넣어 학생인권의 구체적 기준을 제시했다. 그간 학교 현장에서는 기존의 학생 지도 방식이 학생인권을 침해하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숱한 갈등과 논란이 있어왔다. 인권단체들의 새로운 기준 제시와 국가인권위원회의 몇몇 결정문이 존재해 왔지만 공식적이고 통합된 학생인권 기준이 없다 보니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불가피했다. 일기장, 문자메시지 등 학생의 사적 표현물에 대한 교사의 개입은 어디까지 허용되나, 강제이발이 문제인가 아니면 두발규제 자체가 인권침해인가, 서약서와 반성문을 받아내는 일은 정당한 교육행위인가 양심의 자유 침해인가, 학교 안에서도 학생은 집회를 열 수 있나, 학생은 언제 어디에서 휴대폰을 소지․사용할 수 있나, 학생회의에 교사가 함께하는 것은 검열인가 지원인가, 학생 징계는 어떤 목적과 절차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등 숱한 쟁점들에 구체적으로 답하지 않는 조례라면, 힘있는 자들의 해석에 휘둘려온 학생인권 현실을 움직일 힘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의 기준을 구체적, 공식적으로 밝히는 규범 구실을 맡게 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교육적 효과를 담보하게 될 것이다.
둘째, 조례안은 학생인권 수준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실천 방안으로서 정기적 실태조사 실시와 실천계획 수립, 인권교육과 홍보, 학생인권심의위원회와 학생참여위원회 설치 등을 실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담고 있다. 조례가 제정된다고 해서 학생인권 문제가 단번에 학교현장에서 사라질 리는 없다. 오랜 기간 무풍지대로 버텨온 학교 안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정책과 의식 변화가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조례안은 학생인권 구제 기구로서 학생인권옹호관을 설치하고 그 옹호관의 권한과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권리를 회복할 수단과 절차가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그 권리는 헛된 선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학생인권과 관련해서는 구조적 약자인 학생들이 믿고 기댈 만한 마땅한 기구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학교 안에서 공정하고 신속한 문제해결을 기대하기도 힘들고 교육청에 민원을 넣어도 ‘학교 재량’이라는 답변만 되풀이해서 돌아오는 게 현실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그나마 기대할 만한 기구였지만,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문턱이 그리 낮지 않다. 조례에 따라 설치되는 학생인권옹호관은 학생들에게 좀더 가까운 구제기구로 자리잡아 조례가 제시한 학생인권 기준이 유명무실화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학생인권조례, 학교를 변화시킬 수 있나

학생인권조례 초안이 발표되자, ‘학생인권 vs. 교육’이라는 황당한 대립구도로 조례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줄을 이었다. ‘좌빨 교육감의 학교 장악 시도’라는 모함에서부터 해묵은 시기상조론, 학교 자율화라는 시대적 흐름과 역행한다는 논리, 미성숙한 학생들에 대한 포풀리즘적 선동질이라는 맹비난도 쏟아졌다. 말도 안 되는 공세들에 일일이 반응해야 하나, 학생인권을 둘러싼 쟁점이 여전히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고 답답해지기도 하지만, 사실 이 맹비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학생인권조례가 맡게 될 역할을 내다볼 수 있기도 하다. 겉으로는 교육 붕괴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지만, 결국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현존 질서의 붕괴이지 교육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수 언론과 단체들이 지켜내고 싶은 것은 시민을 길러내는 공(公)교육의 전당이 아니라, 사적(私的) 왕국에 순종할 신민 양성소로서의 학교다. 모든 학생을 고루 지원하는 교육이 아니라 가혹한 경쟁시스템 안에 학생들을 집어넣고 될성부른 떡잎만 솎아낼 교육체계가 체신머리도, 효용성도 잃지 않고 돌아가길 원한다. 학교의 진실이 파헤쳐지는 모습, ‘싹수 노란 떡잎들’이 일찌감치 잘려나가지 않고 자유네 참여네 하면서 왈왈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유의 공기를 흡입한 학생들이 정말로 성숙해질까봐, 더 이상 인내하지 않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통제와 폭력에 교육이라는 권위를 부여해줄 독점적인 권력이 무너질까 두려운 것이다.
학생을 권리의 주인으로 대접하는 학교, 학생이 육체적․정서적․문화적으로 감당할 만한 교육이 제공되는 학교, 다양성을 교육의 초석으로 받아들이고 차별에 맞서는 학교, 자유를 행사하는 과정을 통해 책임감을 배울 수 있는 학교, 학생의 삶을 총체적으로 돌볼 줄 아는 학교. 학생인권조례를 만들면서 밑바탕 철학으로 삼았던 학교의 모델이다. 동료이자 벗인 한 교사는 학생인권조례가 바탕을 둔 철학을 접하면서 눈물이 날 뻔했다고 고백한다. 그런 교육이 아니라면 어찌 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그렇다. 학생인권조례는 교육이라면 응당 품어야 할 기준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인권 없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일 뿐임을, 인권은 교육의 시작이자 끝임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려면 교권보호조례도 함께 제정하라고 요구하는 교사단체가 있다. 학생인권조례에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불편해하는 교사들, 학생인권이 학생들을 망칠까 조심스러워하는 성인들도 많다. 그러나 교사의 정당한 권리가 보장받고 교육적 권위가 바로 서기 위해서도 학생인권조례는 필수적이다. ‘몽둥이’를 내려놓는 순간, 교사는 더 이상 간수가 아니라 교사일 수 있다. 통제를 목적으로 한 검문과 단속이 사라지는 곳에서, 교육적 만남이 시작된다. 평화를 위장한 ‘침묵의 교육’이 아니라 시끌벅적한 ‘소통의 교육’이 시작된다. 그럴 때 학생들 앞에 군림하며 으름장 놓는 교권이 아니라, 진정한 교육을 되살리는 데 필요한 교사의 정당한 권리가 국가에 의해 제한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자유를 행사하고 권한있는 자리로 초대받은 학생들은 타인의 인권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어린이․청소년이 학습과정에 있는 ‘예비 시민’으로서만 멈추지 않고 바로 지금 ‘시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 변화의 계기가 열린다.


조례 제정이 좌초되더라도 의미있는 이유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과연 제정될 수 있을까? 조례제정 자문위원회는 1월 중 세 차례 공청회를 거쳐 최종안을 확정, 교육감에게 조례안을 건넬 예정이다. 자문위원회 안을 넘겨받은 김상곤 교육감이 조례안을 최종 확정해 입법 발의하면, 도 교육위원회와 도 의회 통과 절차가 남아있다.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교육위와 의회 상황을 감안하면, 김교육감의 무상급식정책에 발목을 잡고 나선 그들의 전력을 보면, 조례안 발표 이후 간간이 터져 나오는 반응을 보더라도 조례가 두 개의 큰 문턱을 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학생인권 얘기만 나오면 미성숙과 보호부터 들먹이는 사회 분위기도 여전하다. 어쩌면 올 6월 선거에서 김상곤 교육감이 재선되거나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공약으로 내세운 다른 교육감 후보가 당선된다면, 의회 구성원이 어느 정도 물갈이된다면, 조례 제정을 어느 정도 기대해봄직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조례 제정이 설령 좌초되더라도 이번 제정 시도가 남긴 결실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조례 제정 소식과 더불어 경기도 지역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 전체가 학생인권에 대해 깊이있게 고민할 수 있는 학습의 기회를 제공받았다. 구석진 자리에서만 울려 퍼졌던 학생인권 보장 목소리가 더 큰 비중으로 환기되었고, 학생인권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보이거나 침묵해왔던 교육․시민단체들도 어떤 방식이로든 입장을 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조례제정위원회에 학생 대표가 참여하지는 못했지만(학생에 대한 이 사회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학생참여기획단이라는 이름으로 수백 명의 경기도 학생들이 조례 제정에 참여하고, 인권에 대한 학습을 거쳐 조례에 담겨야 할 내용을 제안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를 계기로 학생들이 인권을 가깝게 만나고 자기 삶과 연결시켜 고민하는 계기가 된 만큼, 이미 학교는 변화의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섰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학생인권조례는 그간 있어왔던 학생인권운동의 역량이 결집될 수 있는 계기였고 앞으로 더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는 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의식 있는 한 교육감의 개인 작품이 아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애초 김상곤 교육감의 선거 공약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도, 비교적 괜찮은 내용으로 조례안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비교적 오랜 기간 ‘학생인권’이라는 불모지를 일구어왔던 인권운동의 결실이다. 학생도 인간이라는 당연한 진실이 외면받는 사회에서, 불이익과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감추어진 사례들을 발굴해내고 학생인권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온 학생들과 인권활동가, 교사들이 있었기에 그 축적된 역량이 이번 조례 제정 과정에 집약적으로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경기도에서 제시한 조례안과 그 과정에서 생산된 논거들은 향후 다른 지역의 조례 제정 시도들을 지필 밑불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어쩌면 다가올 교육감 선거에서부터 학생인권에 대한 입장과 정책 제시가 여느 교육감 후보도 비껴갈 수 없는 필수 조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나아가 향후 치러질 총선, 대선에서도 중요한 쟁점이 되면 좋겠다. 그만큼 학생인권이 중요한 사회 의제로 자리 잡았다는 증거일 테니까.

*필자 주- 이 글은 ‘오마이뉴스’, ‘교회와인권’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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