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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산은(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

 

선거철이 돌아왔다. 현직 대통령의 정치는 실종되고 다른 인물들의 말과 떠들썩한 행보가 뉴스의 메인을 도배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대통령 직선이라는 단어에 대한 감흥도 사라진 지 오래다. 대통령의 순서도 헛갈리는데 그에 맞선 후보자들과의 논쟁이나 맹세 같은 것은 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지 모른다. 지금 언론에 노출되고 있는 후보들과 별 다를 바 없었을 테니.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과 시장의 확대와 국민의 복지 사이에서 정책은 분명한 방향이나 일관성이 없다. 오직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는 말들의 잔치, 이른바 부정적인 의미의 포퓰리즘이 난무하고 있다. (포퓰리즘은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아니므로, 워커스 53호에 실린 정치학자 채효정의 포퓰리즘을 읽으시길 권해 드린다.)

더 날 선 언어라거나 좀 유화적인 몸짓에서 조금씩 다를 뿐, 정치에 나선 포퓰리스트들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국민을 대표한다고 소리친다.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의 우리가 국민이다. 너희는 누구냐?”라는 일갈이나, 영국 브렉시트 찬성파 나이절 패라지의 브렉시트 결정은 진정한 국민의 승리라는 말처럼. 또 트럼프가 말하는 위대한 미국 만들기와 같이 공허한 정치적 언어를 구사하며, 자신들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이 국민 전체를 대변하고 있으며, 그런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포퓰리즘 문제가 남미를 넘어 전 세계적인 문제로 떠오른 것은 비교적 선진적이라고 여겨졌던 나라들에서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간 억제됐던 인종주의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사회의 표면 위로 등장하고 폭력과 혐오 범죄가 유럽 안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유럽의 극우 정당들은 유럽의 전후 30년간의 경제 호황기가 막을 내리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확산되었고 자본주의적 경제 위기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대응은 노동과 자본 간의, 시민과 국가 간의 사회적 합의를 하나씩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이나 자유주의자들이 이에 합의했다. 보잘것없는 군소정당으로 존재했던 극우 정당들이 세력을 확산한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다. 우파의 약진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며 우향우한 좌파 정당으로부터 이탈한 노동자 계급과 하층계급을 흡수하여 기반을 확장한 결과였다.

 

낸시 프레이저 Nancy Fraser의 책을 두 권 골랐다. 프레이저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비판이론가, 페미니즘 사상가이다. 뉴스쿨의 정치학과와 철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페미니스트 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인정을 넘어 사회 정의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실천적인 지식인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지만, 여러 지적 전통에 속한 학자들과 논쟁하며 자신의 사회이론을 발전시켜나갔다.

선정한 두 권의 책은 주류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진보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은 책이다. 저자의 인식이나 실천적인 지향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으나,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책 자체는 100여 쪽 정도의 분량이지만 중심이 되는 글은 50여 쪽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군더더기 없이 치열하다.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The Old is Dying and the New Cannot Be Born -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 낸시 프레이저 (지은이), 김성준 (옮긴이), 책세상(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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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쓴 옥중수고의 구절을 빌린 것이라 한다.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사실에 위기가 존재한다. 이러한 공백 상태에서는 아주 다양한 병적인 증상이 출현한다.” 낡은 것은 갔는데, 새것이 오지 않았으니 비어 있는 공백이다. 공백은 위기이기도 하고, 새로운 대안이 등장할 기회이기도 하다. 프레이저는 현재가 지구적인 공백 상태이며 기존의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패퇴하는 시기라고 분석한다.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니 가히 충격적인 규정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을 모두 시장주의자나 보수주의자로 매도해 왔는데, 진보와 신자유주의가 결탁한 시대였다니.

금융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던 신자유주의 세력과 인정 정치가 필요했던 진보주의 세력과의 결탁은 1990년대 클린턴을 통해서 재편되었는데, 프레이저는 이를 진보적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한다. 이후는 정확하게 말하면 1980년 이래 진행되어 온 정치적 진보세력이 사실상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이에 투항하는 과정이다. 이후 20여년간 유지되었던 이 헤게모니 블럭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해체되었고, 그것의 결과로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공백의 시대라는 분석이다.

 

프레이저는 그의 다른 책의 제목인 분배냐 인정이냐에서 나타나듯이 사회의 정의(justice)를 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눈다. 분배는 사회의 자원과 재화를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문제로, 정의의 사회경제적 측면을 나타낸다. 인정의 차원은 어떤 집단의 정체성과 소속이 사회에서 어떻게 인정되는가의 문제로, 정의의 문화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을 분리함으로써 어떤 차원에서는 진보적인 세력이 다른 차원에서는 진보적이지 않을 수 있음이 드러난다. 예컨대 모든 차별을 철폐하자는 진보적 인정 정치를 추구하는 세력이 극도로 불평등한 신자유주의적 분배 정치와 모순 없이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는 두 세력의 위험한 동맹으로 드러났다. 동맹의 한 축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주류인 자유주의적 분파(페미니즘, 반인종주의, 다문화주의, 생태주의, 성소수자 인권 등)가 담당했고, 다른 한 축은 미국 경제의 주류인 부유한 부문(월 스트리트, 실리콘밸리, 할리우드)이 담당했다. 이것이 프레이저가 말하는 진보적 신자유주의로 이 헤게모니 블록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세력의 실재하는 강력한 동맹이었다.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잔혹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다양성에 대한 찬양과 차별 철폐, 코스모폴리타니즘 등의 매력적인 가치로 가려주었기 때문에 우파가 내세우던 근본주의적 신자유주의보다 훨씬 더 성공할 수 있었다. 한국의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여기에 통일을 하나 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아래서 미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은 점점 더 커지고, 노동계급과 중산층의 수준은 계속 하락했다. 서민들을 노리는 약탈적인 대출이 증가하고 좋은 일자리는 점점 사라져갔으며 제조업의 주요 중심지들이 붕괴해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상위 1%에만 모든 부를 집중시키는 지금의 불평등한 경제 질서가 정의롭지 않음을 깨달았지만, 당장 신자유주의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트럼프가 등장한 배경이라는 게 프레이저의 진단이다. 붕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대체할 새로운 헤게모니가 필요해졌다.

이 책에서는 헤게모니와 헤게모니 블록을 구분하고 있다. 헤게모니란 지배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상정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과정을 가리키는 그람시의 개념이다. 그리고 헤게모니 블록이란 지배계급이 모은 이질적인 사회 세력들의 연합이며, 지배계급은 이 연합을 통해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한다. 트럼프가 등장하기 전 미국 정치를 지배하던 헤게모니 블록은 진보적 신자유주의였다. 그들은 평등을 능력주의로 환원해버렸다. 정의로운 지위 질서를 위한 진보적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사회의 위계를 철폐하려고 하기보다 능력 있는 여성과 유색인, 소수자들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그들의 역량을 강화해서 사회의 위계를 다양화했다.

프레이저가 짚고 있는 불평등과 파편화의 원인, 즉 전지구적이고 금융화된 현행의 자본주의가 원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프레이저가 대안 헤게모니 블록으로 내세운 진보적 포퓰리즘 블록은 개인의 능력과 태도를 강조하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와 달리 현대 사회의 구조적·제도적 기반의 개혁과 경제적 분배정의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99% 페미니즘 선언 Feminism for the 99%: A Manifesto

낸시 프레이저, 친지아 아루짜, 티티 바타차리야 (지은이), 박지니 (옮긴이), 움직씨(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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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끝난 올림픽에서 짧은 머리를 한 양궁선수에 대한 소란에서 드러나듯 페미니즘은 논쟁적이며, 심지어 적대적이다. 긴 머리를 묶고 화장기를 보인 다른 종목의 선수들에 대한 광기 어린 응원과 달리 자신의 경기에서 탁월함을 보였음에도 저주에 가까운 비난이 지속되었다.

선뜻 입장이나 의견을 내세워 말하기 어려운 화제가 페미니즘이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쉽지 않으며, 페미니즘적이라는 규정 자체가 워낙 범주가 다양해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99%를 위한 페미니즘을 지금 선언한다면, 그 이면에는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은 1%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 온 자유주의 페미니즘’, 소수의 1%를 위한 그 페미니즘에 반기를 든다.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는 모든 국가와 기업의 절반을 여성이 운영하고 가정의 절반을 남성이 꾸린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나아질 것이라며 여성 경영인들에게 (자본주의 시장에) “lean in 망설임 없이 뛰어들라로 충고하면서 여성들이 재계에서 이를 악물고 거둔 성공이야말로 성평등을 이룰 왕도라고 말했다. 소수의 특권 계층 여성이 기업에서 경력의 사다리를 오르고 특정 직업에서 더 높은 지위로 진급하게 하는 데 헌신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대다수 여성이 자유와 자율권을 누릴 수 없게 만드는 사회 경제적 제약에는 무관심하다. 그들의 목적은 평등이 아니라 능력주의다. 사회 위계를 없애기보다는 위계를 다양화해 재능 있는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정상에 오르도록 권한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억압을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그들은 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하고, 성공하는 여성들의 뒤편에서 가사노동이나 돌봄 노동 같은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노동을 터무니없이 낮은 급여를 받는 다른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이 짧지만 강렬한 책은 불평등, 불공정, 부정의에 대항하는 99% 여성의 목소리다. 기후 위기, 생태 재앙, 감당할 수 없는 주택, 충분하지 않은 의료 서비스,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저임금, 국경 감시, 국가 폭력, 그리고 성폭력. 이들은 착취당하면서도 스스로 중산층으로 여기도록 강요당한 전 세계 99% 여성과 생물학적 성에 불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닥쳐올 재난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자체로 젠더 억압의 원천이다. 성차별주의는 자본주의 구조 안에 내장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여성의 억압을 재발명하고 전체 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지위가 불안해지고 경력이 불안전하고, 정치 불확실성이 심한 사회일수록 젠더 질서도 흔들린다. 실업과 해고의 위험이 높아질수록 가부장의 폭력도 심해진다. 그렇기에 99% 페미니즘은 소수의 자유를 보호하려고 다수의 안녕을 제물로 내놓기를 거부한다. 가난한 여성과 노동계급 여성, 인종 차별을 당하는 이주 여성, 퀴어, 트랜스, 장애 여성, 자본에 착취당하는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 이 페미니즘은 전통적으로 규정된 여성의 쟁점에 그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다. 평생을 일해도 가난한 99% 사람들, 집 안팎에서 자본에 이중 착취당하는 여성들과 생물학적 성에 불응하는 퀴어 LGBTQ+들의 당연한 권리를 위해 싸운다. 그런 까닭에 99%의 페미니즘은 깊이 있고 광범위한 사회 변혁을 추구한다. 환경정의, 수준 높은 무상 교육, 아낌없는 공공서비스, 저렴한 서민 주택, 노동권, 보편적인 무상 의료, 인종주의와 전쟁 없는 세계를 위한 분투로써 99%의 공동 행동에 동참할 것을 제안한다. 99% 페미니즘은 반신자유주의일 뿐만 아니라 반자본주의이기도 한 것이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 의하면 영국,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브라질, 아르헨티나, 루마니아, 터키, 독일, 또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출간되는 99% 페미니즘 선언38일 세계 여성의 날 공동 행동 #8M, 페미니스트 여성 파업 #WeStrike 우리는 싸운다, 미투 #MeToo 운동, 라틴 아메리카의 페미사이드 #NiUnaMenos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 등 세계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폭발한 페미니스트 행동주의의 물결에 영감을 더한 책이라 한다.

이 책은 선언문이다. 저자들이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글은 <공산당 선언>이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짧은 선언문에는 이론에 대한 세부적인 논증이나 대상에 관한 긴 역사적 서술은 등장하지 않는다. 시대의 핵심을 포착하는 이론적 단면들과 운동의 조류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을 볼 수 있다. 이 선언은 페미니즘이 모두의 해방을 위한 이념임을 선언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선전포고이다. 이 선언은 그러한 측면에서 완성된 이념의 표출이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운동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설픈 설명보다는 테제 자체를 읽는 것이 우선이다.

 

Thesis 1: A new feminist wave is reinventing the strike.

밀려오는 새 페미니즘의 물결은 파업을 재발명한다.

Thesis 2: Liberal feminism is bankrupt. It's time to get over it.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파산한다. 이제는 그것을 넘어설 때다.

Thesis 3: We need an anticapitalist feminism - a feminism for the 99 percent.

우리에게는 반자본주의 페미니즘, 99퍼센트의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Thesis 4: What we are living through is a crisis of society as a wholeand its root cause is capitalism.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전체 사회의 위기이며, 위기의 근원은 자본주의다.

Thesis 5: Gender oppression in capitalist societies is rooted in the subordination of social reproduction to production for profit. We want to turn things right side up.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젠더 억압은 사회적 재생산이 이윤을 위한 생산에 종속된 데 기인한다. 우리는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리기를 원한다.

Thesis 6: Gender violence takes many forms, all of them entangled with capitalist social relations. We vow to fight them all.

젠더 폭력은 여러 형태를 띠며, 그 모두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뒤엉켜 있다. 우리는 맹세코 그 전부와 맞선다.

Thesis 7: Capitalism tries to regulate sexuality. We want to liberate it.

자본주의는 섹슈얼리티를 단속하려 든다. 우리는 그것을 해방시킬 것이다.

Thesis 8: Capitalism was born from racist and colonial violence. Feminism for the 99 percent is anti-racist and anti-imperialist.

자본주의의 태생은 인종 차별과 식민주의적 폭력이다. 99%의 페미니즘은 반인종주의이며 반제국주의다.

Thesis 9: Fighting to reverse capital's destruction of the earth, feminism for the 99 percent is eco-socialist.

99%의 페미니즘은 자본의 지구 파괴를 되돌리기 위해 싸우는 생태-사회주의다.

Thesis 10: Capitalism is incompatible with real democracy and peace. Our answer is feminist internationalism.

자본주의는 현실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와 함께 갈 수 없다. 우리의 답은 국제주의 페미니즘이다.

Thesis 11: Feminism for the 99 percent calls on all radical movements to join together in a common anticapitalist insurgency.

99%의 페미니즘은 모든 급진적 움직임이 공동의 반자본주의적 혁명에 함께 하기를 촉구한다.

 

글쓴이에 대한 소개와 두 권의 책을 소개하면서는 분배와 인정의 두 차원에서 정의를 논하고 있지만, 또 다른 저서인 전진하는 페미니즘에서 낸시 프레이저는 3번째 차원을 더하여 사회 정의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어 간략하게 요약해 드린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으며, 환원론적 문화주의에 대한 불신이 널리 퍼져있고, 정치경제를 둘러싼 페미니즘적 관심이 빠르게 부활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위기의 근본적 특징을 포착하고 해결에 대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젠더 감수성 프레임이다. 그런 면에서 요청되는 것은 위기의 성격에 대한 다층위적 개념화다. 현재의 위기는 재정, 생태, 사회적 재생산을 포함한 전체 영역을 동시다발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또 다른 요청은 이런 위기에 대처하고 페미니즘이 작동하는 정치적 영역을 재설정할 수 있는 사회적 투쟁 문법을 지형화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정의 이론은 삼차원적이어야 하며 분배라는 경제적 차원 및 인정이라는 문화적 차원과 더불어 대표라는 정치적 차원이 상호결합해야 한다. 분배 redistribution는 정치경제에 기반한 장애물을 전면에 내세우는 반면, 인정 recognition은 지위 질서에 근거한 장애물을 폭로하며, 대표 representation는 사회의 정치적 구성을 침해함으로써 동등한 참여를 가로막는 장벽을 개념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