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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진보교육연구소 번역팀)

 

<번역팀 주석>

 

이 논문의 핵심 주제는 인간 발달은 새로운 연결 체계의 발달이라는 것이다. 비고츠키는 인간의 고등정신기능을 범주적 지각, 자발적 주의, 논리적 기억, 개념적 사고 등으로 나누면서도, 이 기능들이 시각적 지각, 반응적 주의, 자연적 기억, 실행적 사고 등과 같은 기초정신기능에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기초정신기능이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생물 진화의 과정에서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고등정신기능은 인간의 문화, 역사적 발생의 과정에서 기존의 기초정신기능들 간에 새로운 연결과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생겨난 새로운 심리적 체계라는 것이다. 이 새로운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호, 특히 인간의 말이다. 처음에는 사회적 접촉 수단으로 출현한 말은, 개인 내적으로 변화하면서 자신의 기능들을 연결하는 수단이 된다.

이제 지각, 주의, 기억, 생각은 더 이상 서로 별개의 기능이 아니다. 인간은 생각으로 기억하고, 기억을 통해 생각하고, 기억과 생각을 통해 상상하며, 생각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고, 지각은 기억이나 생각과 떨어질 수 없게 된다.

 

<본문 주요 내용 요약 및 발췌>

 

글을 시작하며 비고츠키는 이 글이 완료되지 않은 시도이며, 이 시도가 인격 개념과 관련있다고 말한다. 또한 모든 자료를 포괄하는 이론이 아직 없기 때문에, 사실적 자료를 제시할 것이며, 주로 제시할 자료는 병리학에서의 실어증과 정신 분열, 그리고 발생 심리학에서 청소년 문제라고 말한다.

 

1절은 유인원과 어린 아이의 감각운동 통합체로 시작한다. 발달하면서 이 통합체의 연결은 끊어지며 새로운 관계가 출현한다. 두 번째로 지각을 다룬다. 인간의 지각은 말과의 복잡한 종합에 참여하며 지식과 결합된 범주적 지각이 되며,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다시 즉각적 지각으로 돌아가기 힘들다. 현대인의 지각은 본질적으로 시각적 생각의 일부가 된다. 세 번째는 기억이다. 논리적 기억은 생각과 기억의 복잡한 합금이다.

이 새로운 관계는 사람들 간의 상호심리적 기능이 심리내적 기능이 되면서 출현한다. 말은 타인을 이해하는 수단이자 자신을 이해하는 수단이다. 생각은 타인과의 논쟁이 내부로 전이되어, 자신과의 토론으로 출현한다. 주의 발달도 그렇다. 자기 행동 숙달(의지)은 스스로 명령하고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분리되어 있던 기능들의 복잡한 체계가 내부에 출현한다.

 

이 새로운 관계는 기호()를 통해 출현한다. 모든 기호는 타인과의 접촉 수단이다. 자신에게 전이되었을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의 기능을 결합하는 수단이 된다. 사회적 접촉 수단은 복잡한 심리적 연결을 형성하는 기본 수단이 된다.

 

그 다음 비고츠키는 계통발생적 사례로 카피르의 꿈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 한다. 덧붙여 로마인의 꿈의 기능과 프로이트 신경증에서 꿈과 성적 욕망 간의 관계도 언급하며, 이는 꿈이 여러 기능들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는 꿈뿐 아니라 복잡한 심리 체계 전체의 형성에 적용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또한 카피르의 꿈에 대한 이러한 표상은 부족의 이데올로기의 일부라고 말하며, 특정 이데올로기 체계와 심리적 기제를 관계를 논한다.

 

2절은 청소년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청소년기 심리적 발달의 본질은 연결의 증가가 아니라 연결의 변화에 있다. 어린이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기억에 의존하며, 청소년에게 기억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능들의 재배열, 관계의 변화, 생각의 선도적 역할을 이행적 연령기에 관찰할 수 있다.

 

3절은 개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개념 형성은 이행적 연령기에 처음으로 성숙하고 모양을 갖추는 기능으로, 모든 발달 과정과 붕괴 과정의 핵심이 되는 체계이다. 개념은 심리적 체계로 나타난다. 여기서 비고츠키는 형식 논리학에서의 개념의 빈곤성과 변증법적 논리에서 개념의 풍부함에 대해 대조하며 설명한다. 새로운 개념 형성에서 일어나는 것은 연결의 확립이다. 개념은 생각을 펼칠 가능성, 궁극적으로 세계관에까지 상응한다. 개념은 일정한 법칙적 연결로 인도된 판단 체계이며, 그 본질은 전체 체계를 다룬다는 데 있다. 개념 속에서 형식과 내용의 통합을 발견한다. 개념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특정한 체계, 특정한 생각 형태를 소유하는 것이다.

 

그 다음 비고츠키는 이행적 연령기의 열쇠라며 정신분열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신분열에서 우리는 이행적 연령기에 형성된 기능들의 붕괴를 관찰한다. 사태의 본질은 지적, 정서적 기능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하는 연결의 파괴에 있다.

정신분열에서는 개념 형성 기능이 붕괴되며, 정서적 둔감으로 특징지어 진다. 또한 정서적 둔감성과 정서적 삶의 빈곤함과 함께 정신분열 환자의 모든 생각은 그의 정서로만 결정되기 시작한다. 이는 지적이고 정서적인 삶의 관계의 변화이다. 관념과 느낌은 변하지 않고 남지만, 복잡한 체계에서 수행했던 기능을 상실한다. 가장 먼저 붕괴되는 것은 가장 늦게 형성된 체계, 즉 사회적 기원을 가진 체계이다.

이는 정신분열에서 특히 분명하며, 정신분열은 형식적 측면에서 심리 기능이 보존된다는 의미에서 불가사의하다. 형식적 기능 자체의 보존과 체계의 붕괴가 정신분열의 특징이다.

 

그리고 느낌과 정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사람은 그냥 느끼는 것이 아니다. 느낌은 질투, 분노, 공격, 모욕으로 의식된다. 느낌의 명명이 느낌을 변화시킨다. 느낌은 생각과 연결된다. 기억이 내적 생각의 일부가 되어 논리적 기억이 될 때 일어나는 일이 느낌에서도 일어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개체발생 과정에서 인간의 감정은 개인의 자기의식과 현실에 대한 의식에 대한 일반적 태도와 연결된다. 타인에 대한 경멸은 그 사람에 대한 평가, 이해와 연결된다. 정서나 감정의 역사적 발달은 원래 연결이 변하고 새로운 질서와 연결이 출현하는 것이다. 정서에 대한 인식이 정서를 변화시키고 수동적 상태에서 능동적 상태로 변화시킨다. 정서는 개념과 복잡한 체계를 이루어 작동한다. 복잡한 감정은 역사적으로만 출현하며, 그 자체로 역사적 삶의 조건에서 생겨난 관계들의 결합을 나타낸다. 정신분열 환자의 정서적 둔감은 이 체계의 붕괴에서 일어난다. 정신분열 환자의 생각은 감정적 흥미와 욕구에 봉사하는 생각이 된다. 복잡한 체계는 붕괴되고, 정서는 원시적 상태로 돌아가 생각과의 연결을 상실하고, 개념을 통해 정서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체계와 그 운명에 대한 연구는 발달과 형성뿐 아니라, 붕괴 과정에서도 유익하다. 주변과의 사회적 관계를 상실한 정신분열 환자는 자신과의 사회적 관계를 상실한다. 인격 체계의 붕괴는 상호심리적 관계인 외적 관계 붕괴의 다른 측면이다.

 

4절의 첫 번째 주제는 심리적 체계와 뇌의 관계이다. 생리학적으로 볼 때 뇌에서 개념적 생각에 상응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은 사전에 구조적으로 새겨져 있을 필요가 없는 기능의 결합, 새로운 종합, 새로운 체계들을 위한 조건과 가능성을 뇌가 포함한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뇌에는 새로운 체계의 출현을 위한 잠재력이 있다. 이는 우리가 도입한 심리적 체계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고등 심리 체계의 국지화 문제는 사전에 주어지지 않은 복잡한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원래 두 사람 사이에 나누어져 있던 행동 형태(명령과 실행)가 하나의 인격에서 결합된다. 파킨슨병 환자는 이러한 체계가 손상된 것이다. 걷지 못하는 파킨슨병 환자는 걸음을 내딛으세요.”라고 말하거나 마루 위에 종이를 두고 인도해야 걸음을 뗀다. 그 환자는 외적 기호를 통해서만 뇌의 두 지점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심리적 체계는 세 단계를 통과한다. 상호심리적 단계(나는 명령하고 너는 실행한다). 외적 심리 단계(나는 자신에게 말한다). 내적 심리 단계(외적으로 자극된 두 점이 하나의 체계로 작동하며 피질내 지점으로 바뀐다).

 

비고츠키는 사람의 차이가 개별 기능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 관계, 연결에 있다고 말한다. 카피르의 꿈은 중심적 역할을 하지만, 우리의 꿈은 본질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생각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물학적 선택이 근본적으로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보다 인색한 노동자도 많다. 사회적 역할은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성격학적 연결이 사회적 역할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는 인격으로 이행된,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의 체계이다.

심리 체계의 형성은 인격 발달과 일치한다. 윤리적으로 완전한 인격을 갖추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과 연결된, 하나로 연결된 체계를 갖는다. 스피노자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

 

모든 문제는 기능 내적 변화가 아니라, 기능 간의 연결의 변화와 이로부터 생겨난 무한히 다양한 행동 형태에 있다. 새로운 종합, 새로운 연결 형태는 특정한 발달 단계에 출현한다. 우리는 체계와 그 운명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내가 여기서 보고할 계획은 우리의 공동 실험 연구에서 비롯되었으며 상당히 많은 조사에서 결정된 것을 이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아직 완료되지 않은, 어떤 시도를 나타낸다. 이 조사의 주요 목적은 두 조사 노선(발생적 노선과 병리적 노선)을 한데 모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도(형식적이 아니라, 그 본질에 따른)는 여기서 나타나는 새로운 문제들을 지적하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기능 발달의 측면에서 조사되었던 많은 심리적 문제들을 이제 이 기능의 상실의 측면에서 진술된 동일한 문제와 비교하고, 우리의 실험 조사에 실제적 가치를 가질만한 것을 선택하기 때문에 출현한다.

 

내가 보고할 계획은 그 복잡성에서 지금까지 다루었던 개념 체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나는 먼저 우리 대다수가 알고 있는 설명을 반복하고 싶다. 우리가 매우 단순한 어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비난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오히려 거꾸로 비판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즉 우리는 엄청나게 복잡한 문제를 극도로 단순한 방법으로 설명해왔다. 이제 다소 이해가능하거나 원시적이라고 해석했던 많은 현상을 다룰 것이며, 그 복잡성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크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노력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연구하는 문제에 대한 점점 더 복잡한 개념화를 향한 이러한 움직임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 연구의 고유한 관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아시다시피 고등 기능에 대한 우리의 기본 관점은 이러한 기능들이 인격과의 관계에 있어 원시적 심리 기능들과는 다른 위치에 놓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은 자기 행동을 숙달하고 지시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한 것(자발적 주의나 논리적 기억)을 설명하기 위해 인격과 같은 더 복잡한 현상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심리 기능들의 모든 설명 속에 존재하는 인격 개념에 대한 설명을 놓쳤다고 우리는 비난받았다. 이는 실제로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절대적으로 모든 과학적 조사가 수행되는 방식이다. 괴테의 아름다운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문제를 전제로 바꾼다. 즉 우리는 가설을 먼저 공식화하고, 실험 조사 과정에서 검사하고 검증한다.

 

나는 우리가 고등심리기능을 얼마나 원시적이고 단순하게 해석해왔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인격에 대한 더 복잡하고 더 통합적인 어떤 개념에 의존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는 자발적 주의나 논리적 기억과 같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기능을 이러한 통합적 인격과의 관계로부터 설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연구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가설을 정당화하고 점진적으로 실험적으로 검증된 지식으로 바꾸기 위해 그 차이를 메워야 했음은 이해할만 하다. 우리는 이러한 기능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발생적으로 전제된 인격과 우리 설명이 제공한 상대적으로 단순한 기제 사이의 차이를 메울 요소를 우리의 조사로부터 선택해야 했다.

 

앞선 조사에서 이미 우리는 내가 말하고자 계획한 주제를 우연히 발견했다. 내가 이 글을 심리적 체계에 대하여라고 불렀을 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발달 과정에서 다양한 기능들 사이에 발달하며, 해체 과정에서 해소되거나 병리적 변화를 겪는 복잡한 연결이다.

 

유년기의 생각과 말의 발달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기능들의 발달 과정이 각 기능 내부의 변화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것은 주로 이 기능들 간의 원시적 연결, 즉 동물학적 측면에서 계통발생을 특징짓고 초기 단계의 어린이 발달을 특징짓는 연결임을 보았다. 이 연결과 관계는 어린이의 후속 발달 과정에서 동일하게 남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과 말의 발달 영역에서 근본적 생각 중 하나는, 생각과 말의 관계를 결정하며 모든 발달 단계와 손실 형태에 적합한 고정된 공식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각 발달 단계와 각 손실 형태에서 우리는 고유하고 변화하는 관계들의 집합을 본다. 내 보고는 바로 이 주제에 전념한다. 주된 (극도로 단순한) 생각은 발달 과정에서, 특히 행동의 역사적 발달에서, 우리가 전에 연구했던 것만큼 기능들이 그렇게 많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이는 우리의 오류였다). 그 구조와 그 운동 체계는 많이 변하지 않는다. 변화하고 수정되는 것은 오히려 관계, 즉 기능 자신들 간의 연결이다. 이전 단계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무리(배열)가 출현한다. 따라서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전환할 때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기능 내 변화가 아니라, 기능 간 변화 즉 기능 간 연결, 기능 간 구조의 변화이다.

 

우리는 기능들 간에 확립되는 그러한 새로운 유동적인 관계의 출현을 심리적 체계라 부를 것이며, 불행히도 이러한 너무 광범위한 개념에 일반적으로 첨부되는 모든 내용을 부여한다.

 

내 자료의 배열에 관한 몇 마디. 조사 과정과 그 설명 과정이 종종 반대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나에게는 이론적으로 모든 자료를 논의하고 실험실에서 수행된 조사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자료를 포괄하는 일반적인 이론적 관점이 아직 없기 때문에 이를 할 수 없으며, 성급하게 이론화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나는 밑에서 위로 진행하면서, 체계적인 방식으로 특정한 사실의 사다리를 간단히 제공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실제적인 이론적 개념을 가지고 전체적인 사실들의 사다리를 포괄할 수 없으며, 아직 그들 간의 사실과 연결을 논리적으로 배열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고백한다. 밑에서 위로 감으로써, 나는 수집된 엄청난 자료, 즉 다른 저자들에게서 종종 접할 수 있는 자료를 보여주고, 이 자료가 주된 역할을 하는 해결책을 위한 문제와의 연관성을 보여 주고 싶을 뿐이다. 나는 특히 병리학에서 실어증과 정신 분열의 문제와 발생 심리학에서 청소년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이론적 고찰은 지나가면서 말하도록 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우리가 그 이상은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1

 

감각 과정과 운동 과정 간의 관계에서 가장 기초적인 기능으로 시작하도록 하자. 현대 심리학에서 이러한 관계의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진술된다. 심리학에서 문제는 그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연합이 발달하는가였다면, 현대 심리학에서 문제는 그 반대로 그들 사이의 분열이 어떻게 발달하는가이다. 이론적 고찰과 실험 모두는 감각운동계가 정신생리학적으로 통합적 전체임을 보여준다. 이 관점은 특히 형태주의(Gestalt) 심리학자들(신경학적 관점의 골드슈타인, 심리학 관점의 쾰러, 코프카 등)에 의해 옹호된다. 나는 이 관점에 유리한 모든 고찰을 언급할 수는 없다. 나는 단지 실제로 이 문제에 전념한 실험 조사를 주의 깊게 연구하면, 우리가 운동 과정과 감각 과정이 어느 정도로 통합적 전체를 나타내는지 보게 된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따라서 어떤 문제에 대한 유인원의 운동 방안은, 감각장에서 형성된 동일한 구조의 동일한 과정의 역동적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뷜러의 의견과 반대로, 유인원이 지적으로 과업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장을 통해 해결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쾰러와 다른 사람들의 납득할만한 시도를 알고 있다. 이는 아이데틱(직관상을 보는 사람)에서 목표를 향한 도구의 움직임이 감각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한 옌쉬의 실험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감각장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문제는 감각장에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

 

이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면, 동물학적 자료에 제한하거나, 매우 어린 아이나 이 과정이 정서적 과정에 최대한 가까운 성인을 다룰 때, 감각운동 통일이라는 관념이 충분히 확인된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갈 때,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다. 감각운동 과정의 통일, 운동 과정을 감각장에서 확립된 구조의 역동적 연속으로 만드는 고리가 파괴된다. 운동 체계는 감각 과정에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게 되고, 감각 과정은 직접적 운동 충동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된다. 그들 사이에 더 복잡한 관계가 발달한다. 이러한 고찰은 결합된 운동 방법을 사용한 루리야의 실험을 새롭게 조명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이 정서적 형태로 돌아가자마자 운동 자극과 감각 자각 간의 직접적 연결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정서적 반응의 영향 하에서 행동할 때, 여러분은 그의 운동 행동으로부터 그의 내적 상태와 그의 지각의 성격을 다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초기 발달 단계를 특징짓는 구조로의 회귀를 관찰할 수 있다.

 

유인원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 실험자는 어떤 상황을 등지고 유인원을 마주하여 유인원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유인원의 행위만을 보는 것만으로, 실험동물이 무엇을 보는지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루리야가 결합된 운동 방법이라 부르는 것이다. 움직임의 특성을 통해 우리는, 말하자면, 내적 반응의 곡선을 추론하는 것이다. 이는 초기 발달 단계의 특징이다. 어린이는 운동과 감각 과정의 직접적 연결이 매우 자주 사라진다. 당분간 (뒤따라오는 것을 무시하면) 우리는 운동 과정과 감각 과정이 서로 상대적(심리적)인 독립성을 획득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첫 발달 단계를 특징짓는 이 통합체, 이 직접적 연결이 존재를 멈춘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인). 쌍둥이에서 저차적 형태의 운동 체계와 고등 형태의 운동 체계에 대한 연구 결과(유전적 요인과 문화적 발달 요인의 분리에 관한), 차이(differential) 심리학의 관점에서도 성인의 운동 행동은, 명백히, 그의 원래 체질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동 체계와 다른 인격 영역, 즉 다른 기능들 사이에 발달하는 새로운 연결, 새로운 관계로 특징지어진다는 결론을 이끈다.

 

이 생각을 이어나가 나는 지각에 집중하고 싶다. 어린이의 지각은 어떤 독립성을 획득한다. 동물과 달리 어린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면서, 즉각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한 동안 어떤 상황을 관찰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추적할 것이다. 우리는 지각이 생각과 자발적 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발달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가 말했듯이, 수용 방식에서 어떤 내적 성장과정이 일어나며, 대상을 지각하는 어린이는 그것의 도움으로 대상을 다른 대상 등과 비교한다. 이 연구는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었으며, 다른 연구들은, 지각이 다른 기능들, 특히 말과의 복잡한 종합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지각의 후속 발달이 놓여 있다는 것을 충분히 명백히 보여주었다. 이 종합은 너무 복잡하여, 병리적 사례를 제외하고는, 우리 중 누구에서도 지각의 모든 주요 패턴을 뽑아낼 수 없었다. 나는 가장 단순한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스턴이 했던 것처럼 그림의 지각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그림의 내용을 전달하면서 어린이는 개별 대상들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그림에서 묘사된 것을 실행할 때에는 개별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 모든 그림 전체를 묘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지각이 다소 순수한 형태로 연구되는 코흐의 실험에서, 어린이, 특히 농아 어린이는 구조적 형태에 따라 모양을 완전히 구축하고, 적절한 형태, 즉 색 반점을 재현한다. 그러나 이 블록의 지칭에 말이 개입되자마자, 우리는 처음으로 구조가 없는 무질서한 화합물을 얻게 된다. 어린이는 구조적 전체에 포함시키지 않고 블록을 옆에 나란히 놓는다.

 

순수한 지각을 불러일으키려면 우리는 특정한 인공적 조건에 놓여야 하는데, 이는 성인 대상 실험에서 가장 어려운 방법론적 과업이다. 실험에서 피실험자에게 무의미한 형상을 제시할 필요가 있어, 그에게 어떤 대상이 아니라 기하학적 형상을 제공하는 경우에도, 지각에는 지식이 덧붙여진다(예컨대, 이것은 삼각형이다). 그리고 쾰러가 말하듯, 사물이 아니라 시각을 위한 물질을 제시하려면, 시각적 인상만 남도록 최대한의 속도로 사물이나 대상의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의미 없는 결합을 보여야 한다. 다른 조건 하에서는 그런 즉각적 지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일련의 지적 기능들, 특히 지각이 상실된 형태인 실어증에서(특히 O. 푓즐이 관찰한), 우리는 지각이 우리 안에서 진행되는 복합체에서 다시 어느 정도 분리된다는 것을 본다. 나는 현대인의 지각이 본질적으로 시각적 생각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기보다 더 쉽고 간단하게 이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각하는 대상을 보는 동시에 지각하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지식은 지각과 동시에 오며, 당신은 실험실에서 그 둘을 분리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운동 체계로부터 분리된 후, 지각은 기능내적이 아닌 방식으로 계속 발달한다. 발달은 주로, 지각이 다른 기능들과 새로운 관계를 획득하고, 새로운 기능들과 복잡하게 결합하여, 어떤 새로운 통합 체계에서 그것들과 함께 작용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일어나며, 그 통합 체계는 분해하기 매우 어렵고 그 분해는 병리학에서만 관찰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우리는 기능들 간의 관계를 특징짓는 원래의 연결이 해체되고 새로운 연결이 발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끊임없이 마주치게 되는 일반적 현상이며,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단순한 실험에서 관찰된다. 나는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첫 번째는 강하게 매개된 온갖 과정, 예를 들어, 그림을 이용해 낱말을 기억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이미 우리는 기능들의 이동과 마주친다. 그림을 통해 일련의 낱말을 기억하는 어린이는 기억뿐 아니라, 상상 그리고 유사점과 차이점을 감지하는 능력에 의존한다. 따라서 암기 과정은 자연적 기억 요인이 아니라, 즉각적 기억의 자리를 대신하는 많은 새로운 기능들에 의존한다. 레온티에프와 잔코프의 연구 모두에서, 암기의 일반적 요인의 발달이 다른 곡선을 따라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자연적 기능들의 개편과 대체, 그리고 경험적 실천 속에서 논리적 기억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생각과 기억의 복잡한 합금의 출현을 관찰한다.

 

잔코프의 실험은 다음의 주목할 만한 사실로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매개된 기억에서는 생각이 전면에 나서며, 발생적이고 차별적인 관계에서 사람들이 나누어지는 것은 기억의 속성이 아니라 논리적 기억의 속성에 따른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생각은 본래 의미의 생각과 크게 다르다. 성인에게 카드를 통해 50개의 낱말을 기억할 것을 제안하면, 그는 기호(카드)와 그가 기억해야 할 것 사이에 정신적 관계를 확립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생각은 그 사람의 실제 생각과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불합리하게도, 사람은 그가 기억할 것이 옳은지 그른지, 그럴듯한지 아닌지에 관심이 없다. 우리 중 누구도 기억을 할 때, 결코 문제를 해결할 때 하는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 자체를 특징짓는 모든 기본적 기준, 요인, 연결이 암기를 목적으로 하는 생각에서는 완전히 왜곡된다. 이론적으로 우리는 암기에 있어 모든 생각 기능이 변한다는 것을 사전에 말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실천적이거나 이론적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생각의 모든 연결과 구조를 고집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생각과 결혼할 때 기억이 변할 뿐 아니라, 생각 자체가 그 기능을 바꾸며,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논리적 조작 연구에서 알고 있는 그 생각이 아니다. 모든 구조적 연결, 모든 관계가 변화되며, 기능들의 이러한 대체 과정이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새로운 체계의 형성이 된다.

 

한 단계 올라서 다른 연구 결과에 주의를 돌리면, 우리는 새로운 심리적 체계 형성에서 여전히 또 다른 규칙성을 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를 사태의 과정으로 끌어들여 이 보고서의 중심 문제인, 뇌에서 이 새로운 체계들의 관계, 생리적 기질과의 관계를 조명한다.

 

어린이들의 고등 기능 과정을 연구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다. 각각의 고등 행동 형태는 발달 과정에서 무대에 두 번, 처음에는 집단적 행동 형태, 즉 상호심리적 기능으로, 그 다음에는 심리내적 기능, 즉 특정한 행동 방식으로 등장한다. 너무 흔하고 따라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장 명백한 사례는 말이다. 처음에 말은 어린이와 그를 둘러싼 사람과 사이의 접촉 수단이지만, 어린이가 스스로에게 말하기 시작할 때, 이것은 집합적 행동 형태가 개인적 행동의 실천으로 전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심리학자의 아름다운 공식에 따르면, 말은 타인을 이해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현대의 실험 연구로 돌아서면, 우리는 전학령기 어린이의 생각이 그들 집단에서 논쟁이 출현하기 전에 출현하지 않는다는 것을 피아제가 처음으로 진술하고 확인했음을 확립할 수 있다. 논쟁을 하고 논거를 제시할 수 있을 때까지 어린이에게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요소를 제쳐두고, 나는 이 저자들이 제공한 하나의 결론을 나 자신의 방식으로 약간 변형하여 언급할 것이다. 생각은, 특히 전학령기에, 논쟁 상황이 내부로 전이됨에 따라, 자신과의 토론으로 출현한다. 어린이 놀이에 대한 그로스의 연구에서, 행동 조절과 놀이 규칙에 대한 복종에서 어린이 집단의 기능이 주의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다음과 같다. 따라서 각 고등 기능은 원래 두 사람 간에 공유된 것이었다. 그것은 상호적 심리 과정이었다. 한 과정은 나의 뇌에서 일어났고, 다른 과정은 나와 논쟁을 하는 다름 사람의 뇌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내 자리야”, “아니야 내 자리야.”, “내가 먼저 차지했어.” 여기서 생각 체계는 두 어린이에게 나누어진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말하고, 당신은 나를 이해한다. 그 후에야 나는 자신에게 직접 말하기 시작한다. 전학령기 어린이는 모든 시간을 자신을 향한 말로 채운다. 그에게는, 그 기능들의 처음 연결에서는 주어지지 않았던, 새로운 연결, 새로운 관계가 기능들 간에 출현한다.

 

이는 자기 행동 숙달에 특별한 중심적 가치를 갖는다. 이 과정의 발생에 대한 연구는 각각의 의지적 과정이 원래 사회적, 집단적, 상호심리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는 어린이가 타인의 주의를 장악하거나, 반대로, 원래 집단적이었던 행동 수단과 형태를 자신에게 적용하기 시작한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엄마는 무언가로 어린이의 주의를 끈다. 어린이는 지시에 따라 엄마가 가리키는 것에 주의를 준다. 여기서 우리는 언제나 분리된 두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나서 어린이는 직접 자신의 주의를 돌리기 시작하고, 스스로 자신에 대해 엄마의 역할을 하면서, 처음에는 분리되어 있던 기능들의 복잡한 체계가 그에게 생겨난다. 한 사람은 명령하고 다른 사람은 수행한다. 인간은 스스로 명령하고 스스로에게 복종한다.

 

실험적으로 나는 관찰 중인 한 소녀에게서 유사한 현상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상적 관찰을 통해 누구에게나 알려져 있다. 어린이는 전에 성인들이 명령했듯이, 자신에게 하나, , , 출발!”이라고 명령하기 시작하며, 그 뒤를 이어 스스로 자신의 명령을 수행한다. 따라서 원래 두 사람에게 존재했던 기능들의 통합이 심리적 발달 과정에서 출현한다. 고등정신기능의 사회적 기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문화적 발달의 역사에서 우리에게 그 의의가 그토록 커 보이는 기호가 (기호 발달의 역사로 증명되었듯이) 원래 접촉 수단, 타인에게 작용하는 수단을 형성한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실제 기원을 고려할 때, 모든 기호는 접촉 수단이며, 우리는 더 폭넓게 사회적 성격을 지닌 특정 정신 기능들 간의 접촉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전이되었을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의 기능을 결합하는 동일한 수단이며, 우리는 뇌와 최초 연결이, 말 덕분에 가능했던 그런 복잡한 관계를 기호 없이는 형성할 수 없을 것임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접촉 수단은 또한, 이러한 기능들이 개인 기능이 되어 개인적 행동 스타일로 성장할 때 출현하는 복잡한 심리적 연결을 형성하는 기본 수단이 된다.

 

한 단계 더 올라가면, 우리는 그런 연결을 형성하는 다른 흥미있는 사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대개 어린이에게서, 어린이가 대상의 의미를 바꾸는 놀이 과정(모로조바의 실험)에서 그것을 가장 자주 관찰한다. 나는 이를 계통발생적 사례를 통해 설명을 시도할 것이다.

 

원시적 인간에 대한 책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유형의 사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원시적 인간의 생각의 독특한 본성은 종중 우리가 가진 기능들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다거나, 어떤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능들이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다른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선교사로부터 아들을 선교 학교에 보내라는 제안을 받은 카피르에 관한 레비-브륄의 관찰 사례이다. 카피르에게는 이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웠고 그는 이 제안을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 꿈꿔 보겠다.”고 말한다. 정당하게도 레비-브륄은 우리들이라면 여기서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할 상황이라고 말한다. 카피르는 그 일에 대해 꿈꿔 보겠다.”고 말한다. 그에게 꿈은 우리에게 생각이 하는 것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꿈의 법칙은 그 자체로 카피르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기 때문에 이 사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인간의 뇌가 인간 역사의 과정에서 본질적인 생물학적 진화를 겪었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원시적 인간의 뇌가 우리와 뇌와 다르거나 열등한 뇌이거나 우리와 다른 생물학적 구조를 가진다고 가정할 이유가 없다. 모든 생물학적 조사는 생물학적으로 말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인간이 인간이라는 완전한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가정하게 한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인간의 역사적 발달이 시작되기 전에 끝났다. 그래서 우리와 원시적 인간의 생각 사이의 차이를, 원시적 인간이 다른 생물학적 발달 수준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 진화와 역사적 발달 개념을 대한 서투른 혼합이 될 것이다. 꿈의 법칙은 어디서나 동일하지만 꿈이 수행하는 역할은 완전히 다르며, 우리는 그런 차이가 카피르와 우리 사이에 존재할 뿐 아니라, 로마인들은 그들은 인간 발달의 다른 단계에 있고 사태를, 타키투스의 말에 따르면, “여성처럼 꿈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기와 이성을 통해해결할 것이기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서 그 일에 대해 꿈꿔 보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이 로마인들도 꿈을 믿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꿈은 징후이자 징조였다. 로마인은 어떤 일에 대해 나쁜 꿈을 꾸게 되면 그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로마인에게 꿈은 다른 기능들과 다른 구조적 관계를 맺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을 보더라도, 당신은 다시 꿈과 새로운 관계를 얻게 될 것이다. 신경증을 특징짓는 꿈과 성적 욕망 간의 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발견이 신경증을 바로 여기 그리고 지금으로 특징짓는다는 프로이트 비판가 중 한 명의 말은 극도로 흥미롭다. 신경증에서 꿈은 성적 욕망에 기여하지만 이는 일반적 법칙이 아니다. 이는 추가 연구가 필요한 문제이다.

 

더 나아가면 당신은 꿈이 여러 기능들과 완전히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많은 다른 과정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우리는 생각이 처음에는, 스피노자의 표현으로, 정념(passion)의 노예이지만, 이성을 지닌 사람은 정념의 주인임을 본다.

 

위의 카피르의 꿈 사례는 단순한 꿈의 사례라기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복잡한 심리 체계 전체의 형성에 적용가능하다.

 

나는 하나의 근본적 결론에 여러분의 주의를 돌리고 싶다. 카피르에서 새로운 행동 체계는, 레비-브륄과 다른 프랑스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이 꿈에 관한 집단적 표상이라 불렀던,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표상으로부터 발달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대답을 하면서 그런 체계를 창조한 것은 카피르 자신이 아니었다. 꿈에 대한 이러한 표상은 카피르가 속한 부족의 이데올로기의 일부이다. 꿈에 대한 그러한 관계가 그들의 특징이다. 그것은 그들이 전쟁, 평화 등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특정한 이데올로기 체계, 이런 저런 기능에 부착된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의미로부터 직접적으로 발달한 심리적 기제를 갖게 된다. 원시적인 민족들에 전념한 많은 흥미로운 미국의 연구에서, 우리는 그들이 유럽 문명에 참여하고 유럽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그것들에 흥미를 갖고 그것들이 가져올 가능성을 평가하기 시작함을 본다. 이 연구들은 원시적 인간들이 처음에는 책 읽기에 부정적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몇 가지의 매우 단순한 농기구를 받고 책 읽기와 실천 사이의 연결을 본 후에, 그들은 백인의 작업을 다르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생각과 꿈에 대한 재평가는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 원천을 갖지만, 이제 이는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흥미를 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사람이 취한, 꿈에 관한 새로운 관념이 어떻게 출현하는지, 새로운 개인내적 행동 형태가 카피르의 꿈과 같은 체계로 어떻게 창조되는지 본다.

 

한편으로 어떤 새로운 체계는 사회적 기호뿐 아니라, 이데올로기 그리고 어떤 기능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획득하는 의미와도 연결되며,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행동 형태는 주위 환경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사람이 취한 새로운 내용으로부터 발달한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후속 연구에서 필요로 하는 두 가지 계기이다.

 

 

2

 

초기 발달 단계에서 알려져 있지 않고 상대적으로 늦게 발달하는 복잡한 체계와 관계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우리는 관계가 변화하고, 이행적 연령기에 새로운 인간의 발달과 형성에 근접하여 생겨나는 새로운 관계가 발생한, 매우 복잡한 체계에 도달한다. 지금까지 우리 연구의 단점은 우리 자신을 초기유년기에 국한시켜 청소년에게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연구 관점에서 청소년 심리학을 연구할 필요성에 직면했을 때, 나는 이 단계가 유년기와 대조되는 정도에 놀랐다. 여기서 심리적 발달의 본질은 연결의 수적 증가가 아니라 연결의 변화에 있다.

 

청소년 심리와 연결된 엄청난 어려움은 청소년의 생각에 대한 연구에 의해 야기되었다. 사실 12세 어린이와 비교할 때, 근본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출현이라는 의미에서, 14~16세의 청소년의 말에서 변한 것은 거의 없다. 당신은 청소년의 생각에서 일어나는 일을 당신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따라서 청소년의 기억과 주의는 학령기에 비해 새로운 것을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특별히 레온티에프의 연구 자료를 본다면, 당신은 청소년기의 특징이 이 기능들의 내적 전이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학령기 어린이에서 논리적 기억, 자발적 주의, 그리고 생각에서 외적이던 것이 청소년에서는 내적인 것이 된다. 연구에 따르면 여기서 새로운 측면이 출현한다. 우리는 이러한 외적 조작이 많은 내적 과정들과 복잡한 합금과 종합에 참여하기 때문에 내적 전이가 일어남을 본다. 그 내적 논리 때문에, 그 과정은 외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다른 모든 기능들과의 관계가 달라지고, 새로운 체계가 형성되고 강화되어 내적이 된다.

 

이행적 연령기의 기억과 생각에 관한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흥미로운 재배치를 지적할 수 있다(약간 단순화하여). 당신은 이행적 연령기 이전에 어린이 생각에서 기억이 담당하는 엄청난 역할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린이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상당 정도 기억에 의존함을 의미한다. 독일 연구자 C. 뷜러는 어떤 과업을 해결할 때 어린이들의 생각을 특별히 연구하고, 기억이 완전히 발달한 어린이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구체적 사건을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신은 두 소녀에 대한 A. 비네의 고전적인 불멸의 실험 사례를 기억할 것이다. 승합마차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다음의 대답을 얻었다. “부드러운 좌석이 있는 마차, 많은 숙녀들이 앉아있다, 마부는 딸랑소리를 낸다.

 

이행적 연령기를 보자. 당신은 청소년에게 기억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함을 보게 될 것이다. 이행적 연령기 이전의 어린이 생각이 기억에 의존하고 생각하는 것이 기억하는 것을 의미했다면, 청소년에게 기억하는 것은 주로 생각에 의존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특정한 논리적 순서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들의 재배열, 관계의 변화, 모든 결정적 기능에서 생각의 선도적 역할을 우리는 이행적 연령기에 관찰할 것이며, 그 결과 생각은 많은 다른 기능들 중의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다른 심리 과정들을 재배열하고 변화시키는 기능임이 판명되었다.

 

 

3

 

동일한 서술 순서를 유지하고 기저에 놓여 있는 심리-논리적 체계로부터 더 높은 수준의 체계의 형성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모든 발달 과정과 붕괴 과정의 핵심이 되는 체계에 도달한다. 이 개념 형성은 이행적 연령기에 처음으로 완전히 성숙하고 모양을 갖추는 기능이다.

 

지금 개념에 대한 어느 정도 완전한 심리적 발달 학설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단지 심리적 연구에서 개념은 (그리고 이는 우리 연구의 최종 결과이다) 내가 말했던 것과 같은 유형의 심리적 체계로 나타난다고 말해야 한다.

 

지금까지 경험 심리학은 개념 형성 기능의 토대에 이런 저런 개별 기능 추상화, 주의, 기억 특징의 부각, 특정 이미지의 처리 을 놓으려 했으며, 이와 함께 각각의 고등 기능이 자신의 유사물, 낮은 차원에서 자신의 대리인(기억과 논리적 기억, 직접적 주의와 자발적 주의)을 갖는다는 논리적 관념에서 출발했다. 개념은 수정된, 재가공된, 모든 여분의 부분에서 해방된 이미지, 일종의 정교화된 관념으로 간주되었다. 갈톤은 개념의 기제를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한 건판에 찍힌 집합적 사진에 비유했다. 거기서 공통 특징은 강조되고, 임의적 특징은 서로 흐려진다.

 

형식 논리학에서 개념은 일련의 특징들에서 선택되고 그 일치하는 계기들에서 강화된 특징들의 총체이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 프랑스인, 유럽인, 인간, 동물, 생물 등의 가장 단순한 개념을 취한다면, 우리는 구체적 특징의 수로는 점점 더 빈곤한 일련의 점점 더 일반적인 개념을 얻게 된다. ‘나폴레옹이라는 개념은 구체적 내용에서 무한히 풍부하다. ‘프랑스인이라는 개념은 이미 더 빈곤하다. 나폴레옹에 적용되는 모든 것이 프랑스인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개념은 훨씬 더 빈곤하다. 등등. 형식 논리는 개념을 대상 집단과 동떨어진 특징들의 총체, 공통 특징의 총체로 간주했다. 따라서 개념은 대상에 대한 우리 지식의 빈곤화를 통해 발달했다. 변증법적 논리는 개념이 대상에서 추상된 특징들의 총체라는 형식적 도식이 아니며, 대상에 대해 훨씬 더 풍부하고 완전한 지식을 제공함을 보여주었다.

 

일련의 심리적 연구들, 특히 우리의 연구는, 심리학에서 개념 형성 문제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공식화로 우리를 이끈다. 훨씬 더 일반화된, 즉 훨씬 더 많은 양의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 어떻게 형식 논리학이 생각하는 것처럼 더 빈곤해지지 않고 내용에 있어 더 풍부해지는가에 대한 질문 이 질문은 연구들에서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얻으며, 더 원시적인 우리 생각 형태와 비교하여 그 발생적 단면에서 개념 발달을 분석하는 데에서 확증을 발견한다. 연구는 피실험자가 새로운 개념이 형성되어야 하는 문제를 풀 때, 일어나는 과정의 본질은 연결의 확립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피실험자가 주어진 대상과 유사한 다른 여러 대상들을 찾으려 할 때, 그는 이 대상과 저 대상 간의 연결을 찾는다. 그는 집합적 사진에서처럼 일련의 특징들을 뒷면으로 제쳐 놓지 않으며, 반대로 과업을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는 연결 형성으로 구성되며,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다른 대상과의 연결 속에서 그것을 연구한다는 사실로 인해 풍부해진다.

 

예를 하나 들겠다. 예컨대 놀이 카드 위의 9라는 숫자의 직접적 형태와 수 9를 비교하자. 카드 위의 9는 우리의 개념 ‘9’보다 더 풍부하고 구체적이지만, 개념 ‘9’는 카드의 9에는 없는 일련의 전체적 판단을 자신 안에 포함한다. ‘9’는 짝수로는 나누어지지 않고, 3으로는 나누어지며, 3의 제곱이고, 81의 제곱근이다. 우리는 ‘9’를 일련의 전체 숫자와 연결시킨다 등등. 따라서 심리적 측면에서 개념 형성 과정이 실제 전체를 찾는데 있어, 주어진 대상과 일련의 다른 대상들 간의 관계를 발견하는 데 있다면, 성숙한 개념에서 우리는 그 관계들의 전체 총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세계 속에서의 위치를 발견할 것이다. ‘9’는 언제나 일반 법칙을 따르는 끝없는 운동과 끝없는 조합의 가능성에 관한 전체 수 이론에서의 특정 지점이다. 주의를 끄는 두 지점이 있다. 첫째, 개념은 집합적 사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개념은 대상의 개별 특성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그 관계, 그 연결 속에서 인식되는 데 있다. 둘째, 개념의 대상은 수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현대 심리학 연구가 보여주듯, 일련의 전체적 판단에 대한 경향이다. 한 심리학자는 묻는다. “사람들이 나에게 포유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심리적으로 무엇에 상응하는가?” 그것은 생각을 펼칠 가능성, 궁극적으로 세계관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동물 세계에서 포유류의 위치, 자연 속에서 동물 세계의 위치를 찾는 것, 이것은 통합적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념이 일정한 법칙적 연결로 인도된 판단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각각의 개별 개념을 다룰 때, 모든 본질은 우리가 전체 체계를 다룬다는 데 있다.

 

피아제는 12~13세 어린이에게 두 특징 긴 귀와 짧은 꼬리 또는 짧은 귀와 짧은 꼬리를 가진 동물 을 동시에 결합하는 과업을 제시했다. 어린이는 주의 장에 하나의 특징만 있는 과업을 해결한다. 어린이는 개념을 체계로 다루는 것을 하지 못한다. 어린이는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특징을 숙달하지만, 모든 것을 개별적으로 숙달한다. 어린이는 개념이 하나의 체계로 작동하는 종합을 다루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내 생각에 헤겔에 대한 레닌의 지적은 흥미롭다. 그는 가장 단순한 일반화의 사실 조차도 외적 세계의 법칙성에 대한 무의식적 확신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가장 단순한 일반화를 할 때, 우리는 사물을 존재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법칙적 연결 속에서 특정 법칙에 종속된 것으로 의식한다. 현대 심리학의 무한히 매혹적이고 중심적인 개념 형성에 관한 문제의 중요성을 지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행적 연령기가 되어서야 이 기능의 최종적 공식화가 일어나며, 어린이는 다른 생각 체계, 즉 복합체 연결로부터 개념적 생각으로 이행한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어린이의 복합체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선 복합체 체계는, 주로 기억에 의존하여 정돈된 대상에 대한 구체적 연결과 관계의 체계이다. 개념은 자신 속에 더 넓은 전체 체계에 대한 관계를 포함하는 판단 체계이다. 이행적 연령기, 이 연령은 세계관과 인격이 형성되는, 자기의식과 세계에 대한 일관된 개념이 출현하는 연령이다. 그 토대에는 개념적 생각이 있으며, 우리에게 현대의 문화적 인류의 모든 경험, 즉 외적 세계, 외적 현실과 우리의 내적 현실은 특정한 개념 체계로 표상된다. 개념 속에서 우리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형식과 내용의 통합을 발견한다.

 

개념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도달한 후속 내용을 아직 전혀 미리 결정하지 않은, 특정한 준비된 체계, 특정한 생각 형태를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르그송은 유물론자와 같은 방식으로 개념으로 생각하며, 그들 모두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할지라도 동일한 생각 형식을 소유한다.

 

모든 체계가 최종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바로 이행적 연령기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심리학자에게 이행적 연령기의 열쇠가 무엇인가, 정신분열의 심리학으로 넘어갈 때 더 분명해질 것이다.

 

부제만은 이행적 연령기 심리학에 매우 흥미있는 차이를 도입했다. 그것은 심리 기능들 간에 존재하는 세 유형의 연결과 관련이 있다. 일차적 연결은 유전적이다. 누구도 특정 기능들 간에 직접적으로 수정 가능한 연결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예컨대 감정 기제와 지적 기제 간의 관계의 체질적 체계가 있다. 다른 연결 체계가 확립된다. 그것은 외적, 내적 요인의 만남 과정에서 확립된 관계, 환경이 나에게 부과한 관계이다. 우리는 어린이에게 무례함과 잔인함, 감상성이 어떻게 조장되는지 안다. 이것은 이차적 연결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행적 연령기에 발달하고 발생적 차별적 측면에서 인격을 실제로 특징짓는 삼차적 연결을 갖는다. 이 연결은 자기의식의 토대에서 형성된다. 이미 언급된 카피르의 꿈의 기제가 여기에 속한다. 기능들이 통일된 행동 체계를 형성하도록 해당 기능을 다른 기능과 의식적으로 연결할 때, 이는 우리가 자신의 꿈, 그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의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형성된다.

 

부제만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심리 간의 근본적 차이를 다음에서 본다. 어린이를 특징짓는 것은 직접적 행위라는 하나의 심리적 측면뿐이다. 청소년의 특징은 자기의식, 외부에서 자신을 보는 태도, 성찰, 생각할 뿐 아니라 생각의 토대를 의식하는 능력에 있다.

 

정신분열과 이행적 연령의 문제는 누차 근접했다.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라는 용어가 이를 가리킨다. 임상적 용어로서 그것은 처음의 의미를 상실했지만, 독일의 크레치머와 우리의 블론스키와 같은 가장 현대적인 저자들조차 이행적 연령과 정신분열이 서로에 대한 열쇠라는 관념을 옹호한다. 이것이 외적 유사성에 기반하여 수행되는 것은, 이행적 연령기를 특징짓는 모든 특성이 정신분열에서도 관찰되기 때문이다.

 

이행적 연령기에 불분명한 특징으로 존재하던 것이 병리학에서는 극단까지 나아간다. 크레치머는 심리적 측면에서 성적 성숙의 격렬한 진행 과정이 약하게 진행되는 정신분열 과정과 구분될 수 없다고 훨씬 대담하게 말한다. 외적 측면에서 볼 때 여기에는 진실의 조각이 존재하지만, 나에게는 문제 설정 자체와 저자들이 도달한 결론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정신분열 심리의 연구에서, 이 결론은 입증되지 않았다.

 

실제로 정신분열과 이행적 연령기는 반대 관계에 놓인다. 정신분열에서 우리는 이행적 연령기에 형성된 기능들의 붕괴를 관찰하며, 한 지점에서 만날 때 그들의 운동은 정반대를 향한다. 심리적 측면에서 정신분열에는 수수께끼같은 그림이 존재하며, 가장 훌륭한 현대적 임상의들에서 조차 우리는 징후형성 기제의 설명을 찾지 못한다. 즉 이 증상들이 어떤 경로로 일어나는지 보여줄 수 없다. 임상의들 간의 논쟁은 정서적 둔감성이나 블로일러에 의해 제안된 diaschisis (그것은 정신분열이라는 이름에 원인을 제공했다) 중 지배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은 지적, 정서적 기능의 변화보다는 오히려 존재하는 연결의 파괴에 있다.

 

정신분열은 내가 말하고 있는 주제에 관한 엄청난 양의 자료를 제공한다. 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제시하고, 다양한 형태의 모든 정신분열의 발현이 하나의 원천에서 발생하며, 정신분열 기제를 설명할 수 있는 특정한 내적 과정이 그 토대에 있음을 보여주고자 노력할 것이다. 정신분열에서는 우선 개념 형성 기능이 붕괴되며, 그 후에야 기이한 일이 시작된다. 정신분열은 정서적 둔감으로 특징지어 진다. 정신분열은 사랑하는 부인, 부모, 자식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킨다. 다른 극단에서 민감함에 대한 둔감성의 묘사, 어떤 충동의 부재는 고전적인 반면, 블로일러가 바르게 말하듯, 비정상적으로 강화된 정서적 삶이 관찰된다. 예컨대 동맥경화와 같은 다른 어떤 과정이 정신분열과 결합할 때, 임상적 그림은 급격히 변하며, 경화증은 정신분열 환자의 감정을 풍부하게 하지 않고 기본적 증상만 변화시킨다.

 

정서적 둔감성과 정서적 삶의 빈곤함과 함께 정신분열 환자의 모든 생각은 그의 정서로만 결정되기 시작한다(슈토르히가 지적하듯). 이는 하나의 동일한 혼란, 즉 지적이고 정서적인 삶의 관계의 변화이다. 블론델은 정서적 삶의 병리학 변화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뛰어난 이론을 개발했다. 이 이론의 본질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면에 나온 병적 심리적 과정에는(특히 정신박약이 없는 경우), 무엇보다 집단적 삶의 결과로 획득된 복잡한 체계, 즉 우리에게 가장 나중에 생겨난 체계의 붕괴가 일어난다. 관념, 느낌 모든 것은 변하지 않고 남지만, 모든 것은 복잡한 체계에서 수행했던 기능을 상실한다. 여기서 카피르에게 꿈이 미래 행동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 이 체계는 붕괴하고 혼란, 즉 독특한 행동 형태가 나타난다. 다시 말해 정신과 클리닉에서 심리적 붕괴 중 눈길을 끄는 첫 번째 것은, 한편으로 가장 늦게 형성된 체계,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기원을 가진 체계의 붕괴이다.

 

이는 정신분열에서 특히 분명한데, 정신분열은 형식적 측면에서 여기서 심리 기능이 보존된다는 즉 기억, 성향, 지각, 주의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불가사의하다. 여기서 성향은 보존되며, 착란에 빠져 자신이 궁궐에 있다고 말하는 환자에게 교묘하게 질문을 하면, 당신은 그가 자신이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 일어나는 형식적 기능 자체의 보존과 체계의 붕괴, 바로 이것이 정신분열을 특징짓는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 블론델은 정신분열 환자의 정서적 혼란에 대해 말한다.

 

개념 체계와 함께 주변 환경이 우리에게 부과한 생각은 우리의 느낌도 포함한다. 우리는 그냥 느끼는 것이 아니다. 느낌은 우리에게 질투, 분노, 공격, 모욕으로 의식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경멸한다고 말하면, 느낌의 명명이 이미 느낌을 변화시킨다. 어쨌든 느낌은 우리의 생각과 어떤 연결에 들어간다. 기억이 내적 생각 과정의 일부가 되어 논리적 기억이라 불리기 시작할 때 기억에서 일어난 일과 유사한 무언가가 우리에게 일어난다. 어디서 표면의 지각이 끝나고 이것이 특정 물체라는 이해가 시작되는지 구별하는 것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지각에서 시각장의 구조적 특징은 이해와 함께 종합되고 합금으로 주어진다), 우리의 정서에서도 똑같이 우리는 개념으로 표현된 연결의 자각 없이 순수한 형태로 질투를 경험하지 않는다.

 

스피노자 이론의 토대는 다음과 같다. 그는 결정론자였고, 스토아 학파와는 반대로 인간이 정서에 힘을 가지며, 이성은 정념의 질서와 연결을 바꾸어, 정념을 이성에 주어진 질서와 연결과 일치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피노자는 올바른 발생적 관계를 표현했다. 개체발생적 발달 과정에서 인간의 감정은 개인의 자기의식과 현실에 대한 의식의 관계 모두에 대한 일반적 태도와 연결된다. 타인에 대한 경멸은 그 사람에 대한 평가, 그에 대한 이해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 복잡한 종합이 우리 삶이 일어나는 곳이다. 정서나 감정의 역사적 발달은 주로 그들에게 주어진 원래 연결이 변하고 새로운 질서와 연결이 출현한다는 사실에 있다.

 

스피노자가 바르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정서에 대한 인식이 정서를 변화시키고 수동적 상태에서 능동적 상태로 전환시킨다고 말했다. 나의 외부에 있는 사물을 생각하는 것은 그 사물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지만, 정서에 대해 생각하는 것, 정서를 자신의 지성이나 다른 과정들과 다른 관계에 위치시키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삶에서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정서는 개념과 복잡한 체계를 이루어 작동하며, 여성의 정절에 관한 마호멧교도의 개념과 연결된 사람과 여성의 정절에 대해 반대의 관념 체계와 연결된 사람의 질투가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감정이 생겨나는 어떤 생물학적 뿌리는 분명히 남아있을지라도, 이 느낌이 역사적이며, 다른 이데올로기적, 심리적 환경에서 본질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복잡한 감정은 역사적으로만 출현하며, 그 자체로 역사적 삶의 조건에서 생겨난 관계들의 결합을 나타내고, 감정 발달 과정에서 그들의 융합이 일어난다. 의식의 병리적 붕괴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학설의 토대에 이 관념이 놓여 있다. 여기서 이 체계의 붕괴가 일어나고, 여기부터 정신분열 환자의 정서적 둔감이 비롯된다. 정신분열 환자에게 망나니처럼 행동하고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나요?”라고 말하면, 그는 완전히 냉정함을 유진한다. 그에게 이것은 최고의 모욕이 아니다. 그의 정서는 분리되어 이 체계와 별개로 작동한다. 정반대의 태도도 정신분열 환자의 특징이다. 즉 정서는 그의 생각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그의 생각은 감정적 흥미와 욕구에 봉사하는 생각이다.

 

정신분열을 끝내기 위해, 나는 이행적 연령기를 이루는 기능처럼, 우리가 이행적 연령기에 그 종합을 관찰하는 이 기능들은 정신분열에서 와해된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복잡한 체계는 붕괴되고, 정서는 초기 원시적 상태로 돌아가 생각과의 연결을 상실하고, 당신은 개념을 통해 이 정서들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일정 정도 당신은 어떤 정서에 접근하기도 매우 어려웠던 초기 발달 단계에 존재하던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른 연령의 아이를 모욕하기는 매우 쉽지만, 훌륭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그를 모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여기서 경로는 우리와 완전히 다르며, 정신분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를 요약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체계와 그 운명에 대한 연구는 정신 과정의 발달과 형성뿐 아니라, 붕괴 과정에도 유익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연구는 우리가 정신과 클리닉에서 관찰하고, 그 어떤 기능(예컨대 실어증에서의 말 기능)의 심각한 하락 없이 일어나는 극도로 흥미있는 붕괴 과정을 설명한다. 이는 미세한 뇌 손상이 그런 심각한 손상을 일으키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전체 뇌의 쇠약과 유기적 변화에서 우리가 사소한 심리적 변화를 보게 되는 반면, 정신분열과 반응적 정신병에서는 성인 행동의 관점에서 전체 행동의 완전한 혼란을 보게 된다는 심리학의 역설을 설명한다. 이해의 열쇠는 뇌 발달에서 주어지는 것과 같은 기능들의 연결로부터 직접적으로 생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했던 체계로부터 생겨나는 심리적 체계에 관한 관념에 있다. 정서적 둔감, 지성의 붕괴, 과민성과 같은 정신분열의 심리적 징후들은 자신의 통일된 설명, 자신의 구조적 연결을 발견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끝내고 싶다. 정신분열의 세 가지 주요 징후 중 하나는 사회적 환경으로부터의 고립으로 귀착되는 성격의 변화이다. 정신분열 환자는 점점 더 사교성이 없어지며 극단적 상태에서는 자폐증이 된다. 우리가 말한 모든 체계, 즉 사회적 기원의 체계는 자기 자신과의 사회적 관계로 이루어지며, 우리가 앞에서 말했듯이, 집단적 관계의 개인 내부로의 이행으로 특징지어진다. 주변과의 사회적 관계를 상실한 정신분열 환자는 자기 자신과의 사회적 관계를 상실한다. 임상의 중 한 명이 이론적 수준으로 올리지 않고 아주 잘 말했듯이, 정신분열 환자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타인과의 대화를 멈출 뿐 아니라 말을 통한 자기 자신과의 소통도 멈춘다. 사회적으로 구축된 인격 체계의 붕괴는 상호심리적 관계인 외적 관계 붕괴의 다른 측면이다.

 

 

4

 

나는 두 가지 주제를 더 다룰 것이다.

 

첫 번째는 심리적 체계와 뇌에 관해 이야기해 온 모든 것으로부터 내려진 우리에게 극도로 중요한 결론에 관한 것이다. 나는 모든 고등심리기능이 생리적 관점에서 그 심리적 부분이 구축된 방식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구축된 기능에서 직접적인 생리적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골드슈타인과 겔브의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생각을 먼저 설명할 것이다. 골드슈타인과 겔브는 실어증에서 기본적 생리 기능에 해당하는 개념적 생각 기능이 손상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미 골드슈타인과 겔브는, 일찍이 같은 책에서 실어증은 원시적 인간을 특징짓는 생각 체계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주장할 때의, 스스로와 모순된다. 실어증 환자가 기본적 생리 기능에 손상을 입어, 원시적 인간이 위치한 생각 단계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원시적 인간에게는 우리에게 존재하는 기본 생리적 기능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즉 원시적 발달 단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롭고 기본적인 기능이, 뇌 구조의 형태론적 변화 없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그러한 근본적인 재구조화가 인간 뇌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이미 골드슈타인과 겔브의 이론은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나 거기에는, 모든 복잡한 심리 체계(카피르의 꿈, 개념, 그리고 인격의 자기의식) 이 모든 관념이 궁극적으로는 특정한 뇌 구조의 산물이라는 사실로 귀착되는 자체의 진실이 있다. 뇌에서 떼어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체 질문은 생리학적으로 뇌에서 개념적 생각에 상응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뇌에서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하려면, 사전에 구조적으로 새겨져 있을 필요가 전혀 없는, 기능의 결합, 새로운 종합, 새로운 체계들을 위한 조건과 가능성을 뇌가 포함한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나는 현대의 모든 신경학이 이를 가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뇌 기능들의 무한한 다양성과 불완전성을 점점 더 많이 본다. 뇌에는 새로운 체계의 출현을 위한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훨씬 더 옳다. 이것은 기본 전제이다. 그것은 레비-브륄의 작업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한다. 프랑스 철학 학회의 최신 토론에서 레비-브륄은 원시적 인간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그의 뇌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기능과 관련하여 뇌가 생물학적으로 변했다고 가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신은 뇌를 도구로만 이용할 뿐이며, 그 결과, 하나의 도구의 다양한 적용, 즉 뇌가 아니라 정신이 발달하는가?

 

사실 나는 우리가 말했던 형태로 심리적 체계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여기에 존재하는 실제 연결, 실제의 복잡한 관계를 상상할 뛰어난 가능성을 우리가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느 정도 고등 심리 체계의 국지화라는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와도 연관된다. 지금껏 그것은 이중으로 국지화되었다. 첫 번째 관점은 뇌를 균일한 덩어리로 간주하고, 뇌의 각 부분이 균등하지 않고 심리 기능 형성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 관점은 분명히 지지될 수 없다. 따라서 그 후에는, 예컨대 실천 영역 등을 구분하면서, 개별 뇌 영역에서 기능들이 파생되기 시작했다. 영역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정신 과정에서 관찰하는 것은 개별 영역들의 공동 활동이다. 이 생각은 의심이 여지없이 더 옳다. 우리는 일련의 개별 지역의 복잡한 협력을 갖는다. 정신 과정의 뇌 기질은 고립된 구역이 아니라, 전체 뇌 기구의 복잡한 체계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이 체계가 사전에 뇌 구조 자체로 주어진다면, 즉 뇌 속의 개별 부분들 간에 존재하는 연결로 완전히 종결된다면, 개념이 출현하는 연결들이 뇌 구조 속에 이미 주어져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사전에 주어지지 않은 더 복잡한 연결이 여기서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즉각 이 문제를 다른 차원으로 넘길 것이다.

 

매우 거칠게나마 도식적으로 이를 설명해 보겠다. 일찍이 두 사람 사이에 나누어져 있던 행동 형태(명령과 실행)가 인격에서 결합된다. 예전에 그것들은 두 뇌에서 일어났다. 한 뇌는, 말하자면, 낱말의 도움으로 다른 뇌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들이 한 뇌에서 함께 결합될 때 우리는 이러한 그림을 얻는다. 뇌의 점 A는 직접적 접속을 통해 점 B에 도달할 수 없으며, 그것은 그것과 자연적 연결에 있지 않다. 뇌의 개별 부분들 간의 가능한 연결은 말초신경계를 통해, 외부로부터 확립된다.

 

그런 생각을 통해, 우리는 일련의 많은 병리학적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뇌 체계에 병변을 가진 환자가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할 상태는 아니지만, 그것에 관해 자기 자신에게 말하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는 임상적으로 유사한 분명한 그림을 파킨슨병 환자에서 관찰한다. 파킨슨병 환자는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당신이 그에게 걸음을 내딛으세요라고 말하거나 마루 위에 종이를 둘 때에야, 그는 걸음을 뗀다. 파킨슨병 환자가 계단을 얼마나 잘 다니는지 평평한 마루 위를 얼마나 잘못 다니는지 모두가 알고 있다. 환자를 실험실로 데려 가려면, 마루 위에 종잇조각을 죽 펼쳐 놓아야 한다. 환자는 걷고 싶지만, 자신의 운동 기능에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는 이 체계가 손상된 것이다. 파킨슨병 환자는 마루에 종이가 펼쳐져 있을 때는 왜 걸을 수 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설명이 존재한다. 하나는 사피르가 제공했다. 파킨슨병 환자는 당신이 그에게 말할 때 팔을 올리고 싶지만, 이 충동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당신이 요구를 다른 (시각적) 충동과 연결할 때 그는 올릴 것이다. 보조 충동은 주요 충동과 함께 작용한다. 그림을 다른 방식으로도 제시할 수 있다. 그에게 팔을 올리도록 하는 체계가 지금 손상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뇌의 한 점을 외적 기호를 통해 다른 점과 연결할 수 있다.

 

파킨슨병 환자의 운동에 관한 두 번째 가설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파킨슨병 환자는 주변 말단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기호를 통해 자신의 뇌의 이런 저런 지점들 간에 연결을 확립한다. 이것이 그렇다는 것은 파킨슨병 환자의 소진 실험으로 확인된다. 그것이 오직 파킨슨병 환자를 끝까지 소진시키는 문제라면, 보조 자극의 효과는 증가하거나, 여하튼, 휴식, 회복과 비등하고, 외적 자극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최초로 파킨슨병 환자들을 묘사한 어떤 러시아 저자는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소리(드럼, 음악)라고 지적했지만, 후속 연구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 주였다. 나는 파킨슨병 환자에서 사태가 정확히 이렇게 진행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붕괴 과정에서 우리는 매 걸음마다 그런 체계가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관찰한다.

 

내가 말하는 모든 체계는 세 단계를 통과한다. 처음은 상호심리적 단계. 나는 명령하고, 당신은 실행한다. 그 다음은 외적 심리 단계. 나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은 내적 심리 단계. 외부로부터 자극된 뇌의 두 지점이 하나의 체계로 작용하는 경향을 갖고 피질내 지점으로 바뀐다.

 

이 체계의 향후 운명에 대해 간략히 논술하겠다. 나는 차등 심리학의 단면에서 내가 당신보다 주의력이 약간 많다는 이유로, 나는 당신과, 당신은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다. 사람들의 사회적 생활에서 본질적인 그리고 실천적으로 중요한 성격학적 차이는 우리의 개별 지점들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 관계, 연결들에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정적 의미를 갖는 것은 기억이나 주의가 아니라 사람이 얼마나 이 기억을 이용하는지, 그것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카피르에게 꿈이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았다. 우리에게 꿈은 어떤 본질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심리적 생활의 기생충이다.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공회전하고 있는 무익한 지혜가 얼마나 많은가, 생각하지만 전혀 행동에 관여하지 않는 마음은 얼마나 많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다르게 행하는 상황을 누구나 기억한다. 나는 거기에 극단적으로 중요한 세 차원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었다. 첫 번째 차원은 사회적이고 계급 심리적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부르주아를 비교하고 싶다. 좀바르트가 생각했듯이 요점은 부르주아가 근본적으로 탐욕스럽다거나, 생물학적 선택이 아끼고 모으는 것이 중요한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창조한다는 데 있지 않다. 나는 부르주아보다 더 인색한 노동자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태의 핵심은 사회적 역할이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성격학적 연결이 사회적 역할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사회적이고 계급적인 유형은 외부로부터 사람에게 도입된 체계로부터 형성된다. 그것은 인격으로 이행된,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의 체계이다. 노동 과정에 대한 직업도표적 연구는 이에 기반한다. 각 직업은 이특정한 연결 체계를 요구한다. 전차 운전수에게 예컨대 정말로 중요한 것은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주의력을 갖는 것이라기보다 주의를 올바르게 활용할 줄 아는 것이다. 그의 주의는 작가라면 가질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차등적이고 성격학적인 관점에서, 특정 비율로 예컨대 정신분열이나 조울증 체질을 낳는 일차적인 성격학적 연결과, 완전히 다르게 생겨나는 연결, 즉 불성실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과 기만적인 사람, 몽상가와 사무적인 사람을 구별하는 연결을 본질적으로 구분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당신보다 덜 정확하다거나, 당신보다 더 많은 거짓말을 한다거나가 아니라, 개체발상에서 개별 기능들 사이에 관계의 체계가 생겨난다는 데 있다. 레빈은 심리 체계의 형성이 인격 발달과 일치한다고 바르게 말한다. 가장 아름다운 영적 삶과 함께 윤리적으로 가장 완전한 인간 인격을 지닌 최고의 경우에,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체계의 출현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론이 있다(나는 그것을 약간 바꿀 것이다). 영혼은 모든 발현, 모든 상태가 하나의 목적에 관련되도록 할 수 있다. 여기서 단일 중심 체계, 인간 행동이 최대 집중이 생겨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단일한 관념은 신, 즉 자연의 관념이다. 심리적으로 이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실제로 개별 기능들을 체계로 인도할 뿐 아니라, 전체 체계를 위한 단일 중심을 창조할 수도 있다. 스피노자는 이 체계를 철학적 측면으로 제시했다. 삶이 단일한 목적에 복종하는 본보기가 되고, 실천적으로 이것이 가능함을 증명했던 사람들이 있다. 심리학 앞에는 그러한 유형의 통일된 체계의 출현을 과학적 진실로 보여 줄 과업이 놓여 있다.

 

나는 흩어져 있긴 하지만, 모든 것이 밑에서 위로 나아가는 사실들의 사다리를 제시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지적하면서 끝내고 싶다. 나는 모든 이론적 고려를 거의 생략했다. 나는 우리의 작업이 이런 관점에서 조명되고 위치지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모두를 통합할 이론적 힘이 없다. 나는 매우 큰 사다리를 제시했지만, 이 모두를 포괄할 관념으로 일반적인 생각을 제시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몇 년 동안 키웠지만, 사실로 입증되었는지 아닌지 끝까지 감히 표현하지 못했던 근본적 생각에 대해 밝히고 싶었다. 우리가 당면한 과업은 가장 실무적이고 상세한 형태로 이를 밝히는 것이다. 나는, 주어진 사실에 기대어, 모든 문제가 기능 내부만의 변화가 아니라, 연결의 변화와 이로부터 생겨난 무한히 다양한 행동 형태에 있다는 나의 근본적 확신을 표현하고 싶다. 그것은 새로운 종합, 새로운 접합 기능, 그들 간의 새로운 연결 형태가 특정한 발달 단계에서 생겨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체계와 그 운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체계 그리고 그 운명 내 생각에 우리의 다음 작업의 알파와 오메가는 이 두 낱말에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