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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57(발간 : 201576)

 

[담론과 문화] 송원재의 역사이야기

일본의 조선출병, 아직 끝나지 않은 악몽

 

 

송원재(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사각형입니다.

 

# 01. 1882830. 제물포 앞바다. 일본군함 히에이(比叡)호 함상

마주앉은 일본 측 전권위원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와 조선 측 전권대신 봉조하(奉朝賀이유원(李裕元)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회담장으로 사용되는 선실을 에워싼 일본군의 총검이 한여름의 무더위를 싸늘하게 식히며 삼엄하게 번쩍거렸다. 전권대신을 수행한 공조참판 김홍집(金弘集)은 아랫배에 잔뜩 힘을 줬지만 자꾸만 다리가 후들거리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하나부사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뭉치가 들려 있었다.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시모노세키(下關)에 들러 이노우에(井上馨) 외무대신으로부터 건네받은 조선정부와의 담판에 관한 훈령조선정부와의 담판에 관한 내훈이었다. 이노우에 경이 조선으로 떠나는 자신에게 문서와 함께 내민 것은 한 자루의 칼이었다. “이번 담판에서 절대로 양보해선 안 될 것은 일본군대의 조선 주둔을 관철하는 것이오. 이는 당장에 조선왕실을 움켜쥐는 고삐이자 장차 대륙출병을 위한 교두보임을 명심하시오. 만약 이번 담판에서 일본군대의 조선 주둔을 약속받지 못한다면 이 칼을 타고 돌아오시오.” 하나부사는 허리에 찬 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일을 그르친다면 살아 돌아오지 말라는 통첩이었다.

 

하나부사가 먼저 무거운 침묵을 깼다. “지난 군란 때 우리 일본국 신민이 입은 희생과 재산 피해에 대해 귀국의 책임을 묻고자 하오. 지난 1876년 강화도에서 처음 수교를 맺은 이래 우리 일본국과 귀국은 평화로운 선린관계를 유지해 왔소. 그런데 귀국의 군졸들이 변란을 일으켜 일본국 공사관을 전소시키고, 귀국이 초빙한 별기군(別技軍)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 소위 등 일본인 수 명을 참살했소. 조선정부가 그 책임을 온전히 지지 않으면 우리 일본국은 군대의 힘을 빌려 직접 변란의 수괴를 잡아 처단하고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밖에 없소.”

하나부사가 씹어뱉듯 내뱉은 말의 뜻은 분명했다. 조선이 만족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서 한양을 들이치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실제로 일본 각의(閣議)에서는 담판이 결렬되면 곧바로 무력행사에 들어간다는 방침을 세워놓은 상태였다.

 

봉조하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적당히 구슬려 돌려보내기는 애당초 그른 일이었다.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조선 정부의 관할 하에 있는 군졸들이 변란을 일으켜 일본인을 살상하고 재산을 손괴했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유원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귀국이 원하는 바를 말씀하시지요.” 담판이 시작되자마자 백기를 든 셈이었다.

하나부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미리 준비해 둔 문서를 던지듯 내밀었다. 문서를 집어 들고 읽어 내려가던 봉조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문서를 곁눈질로 훔쳐보던 이유원의 눈초리도 파르르 흔들렸다. “어떻게 이런…….” 두 전권대신은 채 말을 맺지 못하고 망연자실했다.

 

# 02. 1882830. 경복궁 근정전

담판을 마치고 돌아온 조선의 두 전권대신은 경복궁 근정전 뜨락에 엎드려 식은땀을 흘리며 성상께 결과를 고하고 있었다. 역도들이 불을 질러 전소된 일본공사관 건물을 새로 지어주고 창졸간에 목숨을 잃은 일본인 거류민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이야 지은 잘못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도성 안에 일본 경비병이 주둔하도록 허락하라니……. 일찍이 임진년 왜란 이래 왜병들이 떼를 지어 화포와 총검을 들고 도성에 입성한 적이 없었거늘, 그것은 아니 될 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서슬에 눌려 왜적의 강권을 고스란히 받아왔으니, 댓돌에 스스로 이마를 찧고 자진할지언정 신하로서 차마 못할 짓이었다.

어린 성상의 격노한 목소리가 전각을 찌르릉 울렸다. “일본공사관과 궁궐은 지척이라 왜적들이 마음만 먹으면 한 걸음에 궁궐을 들이쳐 짐을 겁박하려 들 텐데, 이를 어찌 용납하란 말인가! 그리 되는 날이면 삼천리금수강산이 또 다시 왜병들의 칼끝에 놓이게 될 것이 그대들의 눈에는 정녕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 두어 식경 지났을까, 간신히 격노를 가라앉힌 성상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전화(戰禍)로부터 백성들을 구하려면 달리 방도가 없으니 어찌 할꼬……. 그리 하도록 하라. 장차 조선의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구나…….”

 

# 03. 18829.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객관

조선에 나가 있는 전권위원 하나부사로부터 담판이 성사될 것 같다는 전문을 받아 본 외무대신 이노우에는 객관의 창가에 앉아 흡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현해탄에서 불어오는 후텁지근한 바닷바람이 희끗한 수염을 간지럽혔다.

하나부사 군이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었군. 허나 조선이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지. 우리 황국의 군대가 한양에 발을 들여놓는 날이면 조선의 명줄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야. 공사관 경비병의 규모를 놓고 약간의 실랑이가 있긴 했지만 약간 명정도로 한 발 물러선 것도 아주 잘 한 일이야. 도성에 첫 발을 들여놓는 게 어려울 뿐, 그 문만 넘으면 온갖 핑계를 대서 병력을 늘리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일 터……. 1개 소대는 곧 1개 중대가 되고, 1개 중대는 1개 대대, 1개 연대, 1개 사단이 되어 머잖아 조선반도에 일본군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곳이 없을 것이야. 게다가 일본군 병사들이 쓸 병영시설과 유지비까지 조선에 떠넘긴 것은 뜻밖의 수확이군.”

 

그러나 일본이 넘어야 할 산은 크고도 높았다. 조선반도를 일본의 안마당으로 만들려면 가장 먼저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하며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청()의 기세부터 꺾어놓아야 한다. 1876년 일본이 강화도에서 무력시위를 벌여 간신히 조선의 문호를 개방했더니 그 열매를 독차지한 것도 청국이었고, 조선정부 안에 개화당을 길러 조선을 자주국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더니 보수관료들을 앞세워 번번이 찬물을 끼얹은 것도 청국이었다.

그런 청국을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던 민씨 일족이 군졸들이 일으킨 변란으로 떼죽음을 당했으니 이 어찌 통쾌하지 않은가. 사정은 딱하다만 모두 자승자박의 업보이니 누구를 원망하리오. 그 와중에 우리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고 호리모토 소위가 참살 당한 것은 애석하나, 이를 빌미로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고 공사관 경비병의 주둔까지 관철시켰으니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어부지리(漁父之利)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겨우 조선출병의 첫 걸음을 떼었을 뿐 대륙경략의 원대한 꿈은 이제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을 가득 메우고 있는 청군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명목으로든 일본의 군대를 조선에 출병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공사관 경비병의 주둔은 그 시작이 될 것이었다. 청이 서산에 기우는 해(西山日落)라면 일본은 하늘로 치솟는 태양(旭日昇天)이라, 지금은 청군의 위세가 조선을 뒤덮고 있으나 머지않아 하늘의 주인이 바뀌게 될 것이다. 이노우에의 시선은 현해탄을 넘어 조선반도를 지나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중국대륙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04. 1884127일 새벽. 제물포

도망치듯 한밤중에 한양을 빠져나와 서쪽을 바라보고 내달리던 김옥균(金玉均)은 동이 터오는 새벽녘에야 제물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앉아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삼일천하(三日天下)라더니 이리도 허망하게 끝날 줄이야……. 함께 한양을 빠져나온 박영효·서광범·서재필은 어찌 되었을까? 난군(亂軍) 중에 차마 성상을 홀로 버려둘 수 없어 어가(御駕)를 호위하고 청군 진영으로 간 홍영식(洪英植)은 도륙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애당초 다케조에(竹添進一郎) 공사의 허언을 믿은 게 화근이었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청군을 개화당의 장정만으로 대적하기 어려워 일본의 도움을 얻고자 했을 때부터 일은 이미 그르친 것이었다.

 

지난날을 생각할수록 새삼 분통이 터졌다. 임오군란을 수습한 뒤 은공을 내세워 사사건건 간섭을 일삼던 청은 급기야 조선을 속방(屬邦)으로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난을 평정한 뒤에도 물러가지 않고 3,000여 명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는가 하면, 장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시켜 병권을 장악하게 하고 덕국(德國. 독일) 사람인 묄렌도르프(Mӧllendorff)에게 외교권을 맡겨 국정을 농단하였다.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맺어 청국상인에게 내륙무역의 특권을 주는 바람에 조선의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아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청국의 일개 장수가 어전에서 무릇 외교에 관한 일체의 일은 청국에 문의하라고 성상을 겁박하고, 한양에 주둔한 청군의 행패 또한 갈수록 극심하여 백성의 원성이 끊이지 않았다.

기개 있는 젊은 선비들이 뜻을 모아 개화당(開化黨)을 만든 것도 청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조선을 자주 독립국가로 바로 세우려 함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사리사욕에 눈 먼 민씨 척족은 스스로 청의 앞잡이가 되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개화당을 핍박하고 성상의 혜안을 어지럽혔으니, 무장 정변(政變)이 아니고서는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음이라…….

 

김옥균의 초췌한 눈에 형형한 불길이 일었다. 박영효(朴泳孝)가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된 뒤 광주에서 500의 장정을 모은 것도,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 윤웅렬(尹雄烈)이 변방의 장정 500을 모아 신식 군대로 조련한 것도, 일본에 유학 갔던 서재필(徐載弼) 14명의 사관생도들을 급히 귀국시켜 군대의 지휘를 맡긴 것도 모두 정변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천우신조로 때마침 청국과 불국(佛國. 프랑스)이 안남(安南. 인도차이나)을 놓고 청불전쟁(淸佛戰爭)을 벌이자, 청국은 한양에 주둔시켰던 3,000 군사의 절반을 안남으로 이동시키는 바람에 한양에는 불과 1,500의 청군만이 남게 되었다. 이어서 불국의 함대가 청국의 푸젠함대(福建艦隊)를 격파하여 승세를 잡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청국은 조선의 사정을 돌아볼 여력이 없게 되었다.

이에 개화당은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거사에 착수하였다. 때마침 일본에서 돌아온 다케조에 공사도 호의를 보이며 공사관 경비병 150명과 일화 3백만 엔을 군자금으로 빌려주겠다고 넌지시 약조를 하였다. 그러나 거사의 명분이 자주 독립국가의 수립인 만큼 일병(日兵)에게 큰일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호의에 응하되 일병의 소임은 오로지 궁궐 호위와 청군 방비로만 국한하고, 척신 제거와 내정개혁은 개화당이 직접 맡기로 하였다.

거사는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郵政局)의 낙성식 축하연을 기화로 단행키로 하였다. 우선 청국과 내통한 수구척신 가운데 병권을 가진 한규직(韓圭稷) 등과 민씨 척족의 거두 민태호(閔台鎬) 등을 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한 뒤, 낡은 관제를 혁파하고 개화당의 신진관리들을 내각의 요직에 앉혀 국정을 쇄신케 했다. 나아가 각국 외교관을 초빙하여 조선에 자주 독립국가가 들어섰음을 내외에 공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조선이 오백 년 역사상 처음으로 속국의 멍에를 벗고 자주 독립국의 기치를 내 건 쾌거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1,500명의 청군이 예기치 않게 창덕궁을 급습하자 방비를 맡은 일병은 본국의 훈령에 따라 전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급작스럽게 철병하였고, 개화당의 남은 장사와 사관생도만으로 청군을 대적하기는 중과부적이라, 눈물을 머금고 훗날을 기약하며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한양에 남은 동패들은 민씨 척족에게 추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개화당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이제 와서 땅을 치고 통탄한들 무엇 하랴…….

청군의 수가 적음만 알고 급습에 대비하지 못한 죄, 일본의 허무맹랑한 약조를 철석같이 믿고 방비를 맡긴 죄, 백성들이 개화당의 정강정책을 두둔하고 엄호하도록 감화시키지 못한 죄, 돌아보면 한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이 모두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탓하리요…….

 

김옥균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개화당의 역도들을 추포하라는 통문이 제물포 진영에 이미 당도했을 것이다. 기찰포교들이 몰려나와 포구를 막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제물포항에 정박한 일본 상선에는 다케조에 공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일단 일본으로 몸을 피한 뒤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 05. 1885418. 중국 톈진(天津)

일본의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훙장(李鴻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리훙장은 그런 이토의 눈길을 심드렁하게 흘려보내며 얼굴을 창밖으로 돌렸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난 뒤 조선에서 일본의 입지가 급격히 좁아지고 있었다. 한 발만 더 뒤로 밀리면 벼랑 끝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일본 공사가 개화당의 거사를 돕기 위해 공사관 경비병을 동원한 것이 들통 났을 뿐 아니라, 개화당이 민씨 척족들을 도륙내고 국정을 독단하도록 방조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일본이 뒤를 보아주던 젊은 개화당 관료들은 역도로 몰려 대부분 참살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청군의 반격으로 간신히 권좌를 되찾은 민씨 척족은 물론, 개화당에 이끌려 허수아비가 되다시피 했던 국왕도 일본에 대해 극도의 불신과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다. 일본은 역도들을 사주한 배후로 몰려 조선 천지에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더니, 일본은 조선에 발을 딛기 위해 십 년 동안 공들여 온 일들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몰린 것이다. 조선에서 이대로 청에 밀린다면 일본은 좁은 섬에 갇혀 더 이상 옴치고 뛸 데가 없다. 장차 일본의 국운이 이 담판의 결과에 달렸다고 생각하니 천근만근의 바윗돌이 이토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 갑신년 조선의 정변은 우리 일본과 무관한 일이오. 일본공사관 경비병의 일부가 출동하여 조선의 왕궁을 에워싼 것은 사실이나, 이는 개화당의 무도한 병사들이 조선의 왕을 해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소. 귀국의 군대가 왕궁에 들어와 역도들을 처단하고 변란을 수습하자 우리 일본이 스스로 철병을 결정한 것도 귀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었소. 하여 우리 일본국은 이번 일을 기화로 조선에서의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오.”

 

리훙장은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고 이토를 지그시 바라보며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이 자는 청국을 두려워하고 있다. 개화당 역도들의 뒤에 일본이 있음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인데, 이 자는 애써 무관함을 강변하며 감히 관용을 청하고 있다. 이대로 조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몹시도 통탄스러울 게야. 어찌 해야 좋을까? 끝까지 일본의 책임을 묻기로 하자면 우리도 끝을 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청국은 달걀을 쌓아놓은 듯 다급한 형세(累卵之危)에 놓여 있지 않은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가까스로 진압한 것이 불과 몇 해 전인데 서구열강의 침탈은 날로 그 강도가 심해지고 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쳐 조정의 위엄은 사라진 지 오래고 청조(淸朝)의 명운도 장담할 수 없다.

조선에 나가 있는 병사들까지 불러들여야 할 판국에 일본과 또 전쟁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당장의 승기를 잡을 수는 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는 날이면 늪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적당히 달래서 더 이상 다른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이토 역시 리훙장의 지친 얼굴에서 청이 처해 있는 고단한 상황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 늙은 여우가 저울질을 하고 있구나. 일본과 전쟁을 벌이자니 형편이 여의치 않고, 이대로 덮고 넘어가자니 조선의 종주국으로서 체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청에게 명분을 주어 체면을 살려주고 일본이 실리를 취하는 것도 가능할 터, 이거 판이 재미있게 되어가는구나.”

 

이윽고 리훙장이 밋밋한 얼굴을 들고 이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담판이 시작된 지 몇 시간이 지났지만 이토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마음을 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토도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맞받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리훙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 청도 조선에서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오. 이는 청의 속방인 조선에게도 이롭지 않을 뿐더러, 자칫 청과 일본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소. 허나 그와 같은 위험을 피하려면 우리뿐 아니라 귀국도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오.”

이토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청은 조선에서 청·일 양국 간에 무력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 조선에서 분쟁이 장기화되면 더 이상 손을 쓰기 어려운 처지다. 만일 청이 조선을 독차지하려 한다면 조선에 눈독을 들이는 일본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조선에서 무력충돌을 피하려면 일본과의 협상이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결론은? 청은 조선의 안정화를 위해서라면 체면을 구기지 않는 범위에서 어느 정도 양보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토는 리훙장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조선에서 양국 군대가 충돌하는 것은 우리 일본국도 원치 않는 바이오. 그러나 청국이 조선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는 지금, 우리만 군대를 철수시킬 수는 없소. 만약 귀국이 조선에서 철병한다면 우리 일본도 즉각 철병할 것이오. 또 조선에서 다시 변란이 일어나 청·일 어느 한쪽이 군대를 파병할 때는 상대방에게 미리 알린다면 우발적 군사충돌을 막을 수 있지 않겠소?”

리훙장의 머리도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자가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으려 하는구나. 청국이 처해 있는 곤궁한 처지를 이용해 제 잇속을 챙기려는 속셈이다. ·일 양국군의 동시철병 동시출병이라……. 청의 북양함대(北洋艦隊)가 있는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서 조선은 지척이라 출병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황해바다를 가로질러 반나절이면 올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함대가 요코스카(橫須賀) 항을 출발하여 현해탄을 건너 조선반도의 남서해안을 따라 북상해서 제물포에 도착하려면 빨라야 4~5일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리훙장은 마음이 느긋해졌다. 동시출병이라고는 하나 지척에 있는 청군이 먼저 조선에 상륙하여 사태를 종결시킨 연후에야 일본군이 도착하게 되는 셈이니, 일본군은 닭 쫓던 개꼴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 조선의 조정은 왕비를 비롯해 친청파 민씨 척족들이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작은 섬나라의 오랑캐들이 잔재주에 능하다지만 어찌 대륙을 호령하는 대붕의 뜻을 짐작하겠는가?

리훙장은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토와 리훙장은 서둘러 조약문서에 도장을 누른 뒤 악수를 나누고 협상장을 빠져나갔다.

 

청으로부터 거센 비난과 질책을 각오했다가 양국군의 동시철병 동시출병이라는 예상 밖의 성과를 얻어낸 이토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본국에 전문을 보내 담판 결과를 보고했다. 정변의 실패로 궁지에 몰렸던 일본이 거꾸로 조선에서 청국과 동등한 군사권을 얻었으니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려운 담판을 성사시킨 이토의 앞날에도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조선은 장차 이토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줄 기회의 땅이 될 것이었다.

 

# 06. 1894610. 전라도 전주(全州) 감영

전봉준(全琫準)은 전주감영 관아의 대청마루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록 양반이라고는 하나 가세가 기울어 평생 농사를 지어 온 그의 얼굴에는 여느 농민과 다를 바 없는 깊은 주름살이 패여 있었다. 동학군이 처음 봉기한 것이 4월이었으니 벌써 두 달 전이었다. 보국안민(輔國安民제폭구민(除暴救民)의 기치를 걸고 충청·전라 양도의 농민을 모아 파죽지세로 전주성을 점령한 것이 불과 열흘 전, 그 동안 동학군의 손에 맞아죽은 탐관오리가 몇이고 관아의 곳간을 열어 빈민을 구휼한 것이 몇 차례던가……. 젊은 접주들은 이대로 군세를 몰아 도성을 들이치기를 소원하였으나, 전봉준이 그리 하지 못한 것은 못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군의 군세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관군은 태반은 농민과 무뢰배들을 급히 끌어 모은 잡병들이라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으나, 청과 일본의 움직임이 끝내 수상쩍었던 것이다. 자력으로 동학군 진압에 실패한 조정은 청에 원병을 요청했고, 청의 북양대신 리훙장은 나흘 전 제독 예즈차오(葉志超)와 딩루창(丁汝昌) 휘하의 군사 2,800명을 조선에 급파하여 충청도 아산에 상륙시켰다.

더 다급한 일은 일본군의 출병이었다. 갑신년 청군의 개입으로 정변이 실패하여 기세가 꺾인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시킨 뒤에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청군의 조선출병 소식을 듣자마자 일본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톈진조약을 구실 삼아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오시마(大島義昌) 소장이 지휘하는 제5사단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요코스카 항을 출발한 일본군 선발대가 어제 인천에 상륙하여 곧바로 서울로 진군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고, 뒤를 이어 8,000여 명의 본대가 인천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도 전해졌다.

관군 하나만 상대하기도 벅찬 터에 청·일 양국군이 합세하면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일본의 속셈이 동학군의 진압에 있지 않음이 분명한 이상, ·일군의 동시출병이 어떤 파장을 미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장차 조선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전봉준이 깊은 탄식을 뱉고 있을 때 급사가 급히 뛰어 들어와 아뢰었다. “초토사가 당도했습니다.”

 

전봉준은 내실로 자리를 옮겨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과 마주앉았다. 싸움터에서 이미 여러 차례 조우한 터라 낯이 설지는 않았으나 초토사의 얼굴에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초토사가 땀을 훔치며 단도직입으로 말을 꺼냈다.

장군, 일이 다급하게 되었소. 어제 일본이 조선출병을 결정하여 선발대가 지금 도성에 들어와 있소. 성상께서는 급히 교지를 내려 동학군과 교전을 멈추고 화의를 맺으라 하시었소. 화약(和約)이 맺어지면 이를 앞세워 청과 일본에 철병을 요구하겠다 하시었소. 조정과 동학군 사이의 묵은 원한은 일본군을 물리친 연후에 풀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전봉준의 형형한 눈빛이 홍계훈을 쏘아보았다. 이 자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달갑잖은 일본군을 하루빨리 내보내고 싶은 마음은 진심일 것이다. 일본군에게 출병의 명분을 주지 않으려면 청군의 철병도 동시에 요구해야 한다. 다행히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서 철병하게 되면 동학군으로서는 급한 불을 끄는 셈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두 나라 중 하나가 철병을 거절하면? 아마도 청·일이 조선을 놓고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의 기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꺾이고,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은 또 다시 갈가리 찢길 것이다. 아아, 그것은 아니 될 말이었다.

 

바야흐로 보리를 수확하고 모내기를 준비할 때였다. 호랑이처럼 용맹한 동학군도 본디는 농민인지라 농토를 돌보기 위해 야밤에 군영을 탈주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한 해 농사에 식구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지라 그 자들을 무작정 탓할 수도 없었다.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오늘은 가부간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전봉준을 천천히 몸을 일으켜 탁자에 놓인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들어 찬찬히 훑어 내려갔다. ‘탐관오리 징치’, ‘불량한 유림 징벌’, ‘토지 평균분작(平均分作)’, ‘천인차별 폐지’, ‘집강소(執綱所) 설치’, ‘청상과부 개가허용……. 폐정개혁안에는 수백 년 동안 켜켜이 쌓인 백성들의 피맺힌 원한과 절절한 소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것을 차마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홍계훈은 전봉준의 마음을 눈치 챘다. “성상께서는 장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하시었소. 또한 동학군이 점령하고 있는 모든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이를 차질 없이 시행토록 하라고 약조하시었소. 그러니 장군께서도 오늘을 넘기지 말고 화약을 맺어 성은에 보답하도록 하시오.”

전봉준은 말없이 지필묵을 꺼내 화약문서에 수결(手決. 자필서명)을 놓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싸움에 중간 매듭이 지어졌다.

 

# 07. 1894611. 일본국 대본영

내각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집무실을 서성거리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청군의 조선출병을 빌미삼아 일본군의 출병을 전광석화로 밀어붙이긴 했지만 형세는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대규모 출병에 놀라 즉시 철병을 요구해 왔고, 한 술 더 떠 어제까지도 창칼을 맞대고 싸우던 농민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어 일본군의 출병 명분을 없애버렸다. 청장 위안스카이도 오토리(大鳥圭介) 공사를 불러 조선의 사태가 진정되었으니 청·일 양국군이 즉각 철수할 것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할 구실이 사라진 것이다.

내각의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조선출병을 기화로 간신히 불만을 눌러놓긴 했지만, 조선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고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반대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토는 정치생명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었다. 이토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조선은 나에게 기회의 땅이 아니라 무덤이었단 말인가…….”

 

이토는 머리를 짜보았지만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동시출병은 달콤한 꿀이었지만 동시철병은 쓰디쓴 독이었다. 톈진조약이 발목을 잡고 있는 이상 덫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었다. 길은 그 너머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청국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하는 무모한 도박이었다. 내각의 승인을 얻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토가 살 길은 하나 밖에 없었다.

이토는 결연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거꾸러질 수는 없다. 전쟁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법, 개전을 선포하고 총리대신인 내가 국정의 전권을 장악하면 대세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조선출병을 줄기차게 외쳐 온 군부의 강경파도 나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고, 오래 전부터 조선시장 진출을 꿈꿔 온 자본가들도 다투어 군자금을 낼 것이다. 전쟁을 핑계로 1억 황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기동전과 전격전을 장기로 삼는 황군의 이점을 충분히 살린다면 승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과거에는 조선이 나에게 희망의 땅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중국이 희망의 땅이 될 것이다.”

 

이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전쟁의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 이토는 조선공사 오토리에게 급히 전신을 보냈다.

 

“1. 위안스카이가 제시한 공동철병안을 거부할 것.

2. 대신 청에 조선내정 공동개혁안을 제안할 것.

3. 협상이 결렬되는 즉시 조선 주둔군은 전쟁에 대비할 것.”

 

위안스카이는 이 제안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난 것이다.

 

# 08. 18947~ 18954. ·일 전쟁

이토의 예상대로 위안스카이가 일본이 제안한 조선 내정 공동개혁안거부하자, 일본은 청에 1차 절교서(絶交書)’를 보내고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단행하겠다고 통보했다. 조선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러시아와 미국은 리훙장의 요청에 따라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18947월 중순 청에 2차 절교서를 보내는 한편,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영국을 끌어들여 영·일 신조약(英日新條約)을 맺고 개전을 서둘렀다.

 

오토리 공사는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1894623,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조정 안팎에 신망이 높은 김홍집을 앞세워 친일내각을 구성했다. 한 달 뒤 일본군은 아산만에 상륙한 청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일 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1894725, 일본 해군이 서해의 풍도(豊島) 앞바다에 정박한 청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청국 군함과 청군을 태운 영국 수송선 가오슝호(高陞號)를 격침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일본군은 729, 아산을 출발하여 한양을 향해 북상해 오던 청군을 경기도 성환에서 맞아 싸워 손쉽게 격파했다. 해전과 육전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청군을 밀어붙였다. 육군은 육로를 거쳐 평양에 집결한 청군 14000명을 사흘에 걸친 혈전 끝에 격파하고, 해군도 청국 함대를 격침시키고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일본군은 승리를 확정짓기 위해 곧바로 중국 본토 공략을 서둘렀다. 10월 하순, 일본군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진격하는 한편, 2군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하여 11월 하순 청의 해군기지가 있는 여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점령했다. 다음해 22일 청국 북양함대의 본거지인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공략했다.

일본군이 본토까지 유린하게 되자 다급해진 청은 강화회담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더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교섭을 거부하고 전투를 계속해 3월 중순에는 랴오둥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청은 그제야 리훙장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해 시모노세키로 보내 강화회담 재개를 서둘렀다. 일본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의 팽창을 경계하는 열강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18954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강화회담을 마무리 지었다.

이로써 청은 조선의 종주국으로서 지위를 잃었고 대신 일본은 조선반도 안에서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열강의 묵인도 작용했다. ·일 전쟁은 결국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말았다.

 

# 09. 189411~ 12. 동학군의 마지막 전쟁

전봉준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일본군의 철병을 위해 조정과의 묵은 원한을 잠시 거두고 화약까지 맺었건만 왜적들의 움직임은 갈수록 수상쩍었다. 연이어 들려오는 소식은 전봉준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일본군은 철병은 고사하고 돌연히 군대를 동원하여 성상께서 거하시는 궁성을 들이쳤고, 내정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친일 관료배들을 앞세워 국정을 농단하려 들었다. 나아가 이를 만류하는 청에 맞서 일전불사(一戰不辭)의 결기를 부리며 전쟁까지 벌이고 있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기치는 왜적의 침탈로 부질없게 되었다. 이제 왜적과 양이(洋夷)의 침범에 맞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부르짖어야 하는가…….

총포로 무장한 신식 군대와 함포로 중무장한 전함을 죽창과 화승총만으로 막을 수 있을까……. 전봉준은 충청·전라의 모든 접주들에게 급히 파발을 띄워 2차 봉기를 알리는 통문을 보냈다.

 

동학군의 2차 봉기는 요동반도와 산둥반도에서 청군과 전쟁을 벌이던 일본에게는 간과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비록 개전초기 승세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동학군이 후방을 교란하여 병참 보급을 막는다면 큰 낭패였다. 일본군 대본영에서는 이노우에 공사를 시켜 조기진압 방침을 세우고 조선 관군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한양으로 북상하던 동학군은 신식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저지선을 끝내 뚫지 못했다. 우박 쏟아지듯 내리꽂히는 기관총탄 앞에 붉게 물든 동학군 병사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수도 없이 돌격을 감행했으나 일본군 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호응을 약조한 충청 이북의 북접(北接)도 겁을 집어먹었는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동학군은 1118일 목천 세성산 전투에 이어 124일부터 나흘 동안 치러진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결정적 타격을 입고 패퇴하고 말았다.

훗날을 기약하고 피눈물을 쏟으며 지리산 자락으로 숨어든 전봉준과 김개남(金開南) 등 동학군 접주들은 1224일 밀고자의 제보로 관군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됐다. 마지막 희망의 불꽃마저 사그라진 것이다. 전봉준은 일본으로부터 작위(爵位)와 은사금을 주겠다는 회유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고,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수를 남긴 채 형장의 이슬로 스러졌다.

 

時來天地皆同力(때 오니 하늘과 땅이 모두 힘을 모았으나)

運去英雄不自謀(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찌할 수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백성 사랑하는 바른 도리를 아직 잃지 않았거늘)

愛國丹心誰有知(나라 사랑하는 붉은 마음을 누가 있어 알아줄꼬)

 

# 10. 2015. 미국·일본·한국

2015429,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는 백악관에서 만나 일본 자위대의 작전범위를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로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일 방위협력지침 개정안에 합의했다. 이로써 일본 자위대는 일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일본 주변으로 무력행사 범위를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도 당연히 일본 주변지역에 포함되었다.

한반도와 주변지역에 유사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본 자위대는 미군을 후방에서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전투에 직·간접으로 참가할 수 있게 됐고, 휴전상태인 한반도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자위대에 전투병 지원을 요청하면 자위대는 합법적으로 한국에 출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없는 전범국가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바뀜에 따라, 아베 총리는 자위대를 전쟁을 할 수 있는 군대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했다. 자위대는 명목상으로는 군대가 아니지만 자위대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전투력과 군사장비, 최첨단 기술력은 서구의 웬만한 국가를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현재 정보수집위성인 광학5호기 발사에 성공했고, 마음만 먹으면 장거리 유도탄 개발은 시간문제다. 해상 자위대도 항공모함 급 호위함인 이즈모함의 실전배치를 완료한 상태다. 이즈모함은 헬기 탑재형 중형 항공모함으로 잠수함 탐지와 공격에 최적화된 기종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일본 주변지역에서 잠수함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는 중국이고, 다음은 북한이다.

 

한국의 언론들은 종전의 자위대 역할은 자국민 보호, 국제구호 성격이 강했지만, 앞으로는 동맹국 미군의 군사활동 지원을 위해 파병규모를 확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우려를 표명했지만, 한국 국방부장관은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파병문제는 한··일이 서로 협의하여 구체화할 문제라며 책임 있는 답변을 피했다.

데니스 블레어 일본 사사카와 평화재단 이사장은 최근 미국상원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해 한반도에서 유사사태 발생 시 일본은 미국·한국과 공동으로 북한군 격퇴에 나설 것이라며, “일본 자위대가 방위임무를 많이 맡으면 맡을수록 좋다고 말했다. 미국 국가정보국장 출신으로 미국 내 대표적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블레어 이사장은 또 한반도 유사시 한국에 대한 미군의 지원은 주로 일본으로부터 나온다일본이 주일 미군기지 방어에 더 노력하고 방위력을 전진배치 할 경우 미국과 한국군의 방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블레어 이사장은 현재 한국에서는 이런 논의를 하는 것조차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막상 (북한군 또는 중국군이 쏜) 총알이 날아다니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한·일관계가 해빙국면을 맞음에 따라 2015년 하반기부터는 한·일 간 군사교류도 본격화할 전망이다. 2015624, 한국정부의 소식통은 올가을 쯤 한·일 국방당국의 과장급 또는 국장급 정책실무회의가 예정돼 있다한국 육··공군도 각각 일본 자위대와 실무급 교류가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20155월 한민구 한국 국방부장관과 나카타니 겐(中谷元) 일본 방위성장관이 싱가포르에서 가진 회담의 후속조치로, 실무급 협의를 통해 한반도 지역에서 일본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절차와 범위, 방식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오는 10월에는 한국 해군과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참가하는 수색·구조훈련(SAREX)도 실시될 예정이다.

 

# 에필로그

역사는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같음다름을 헤아리는 눈이 없는 자에게 역사는 아무런 교훈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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