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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공교육 개혁, 그 빛과 그림자]를 읽고

 

김태정 / 평등교육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집행위원장

 

1. 진보와 개혁 그리고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 ‘진보’라는 단어는 그 의미가 변질되고 있는 듯 하다. 한때 ‘진보’는 현존 자본주의질서를 극복하는 대안적 개념이었으나 이제는 현 집권세력에 대해 반대만 하면 모두 진보가 될 판이다. 최근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시도가 그러하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과정에서 확인되듯이 반한나라당이라는 기치하에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권하에서 신자유주의정책을 펼쳤던 인물들은 물론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도 ‘진보대통합’의 대상 혹은 ‘민주-진보진영’의 당당한 한 구성주체가 되고 있다.

민주당 혹은 국민참여당과 같은 신자유주의개혁분파 혹은 자유주의정당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자들이 주로 써먹는 논리는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이라는 최악이 다시 당선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민주당(혹은 진보진영의 일부 인사가 참여하는 민주연립정부)이라는 차악이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의 실천적인 귀결은 대중의 정치행위를 단지 선거 때 표를 던지는 것으로 왜곡 축소시키고 있으며, 이렇게 대중을 수동화하고 대리주의를 고착시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노동조합과 제도정당안의 관료집단 및 일부 명망가들의 이해와도 맞물려 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과거 정권하에서 신자유주의정책을 펼쳤던 자들의 뻔뻔한 변명들이 다시 터져 나온다. 요지는 “자신들은 결코 신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며, 재벌과 보수언론 및 국가관료들의 저항, 그리고 민주노총과 같은 이익단체들의 반대로 ‘개혁’을 완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조는 교육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심지어 ‘교육개혁’을 위해서는 규제완화와 자율의 확대, 책무성의 강화, 다양성과 선택권의 확대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한나라당과 이명박정부의 정책과 자신들의 그것은 다르다는 궤변을 늘어 놓는다. 예를 들어 현 정부의 일제고사가 문제이지 국가단위 학업성취도는 불가피하다는 둥, 현재와 같은 학교선택제가 문제이지지 고교특성화정책이나 특목고 등은 유지해야 한다거나, 심지어 책무성을 위해서는 교원평가는 불가피하다는 식의 논리가 그것이다.

이렇듯 자율, 책무성, 선택권 등의 개념은 단지 수구 보수주의자들것의 아니라, 신자유주의개혁분파인 자유주의세력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진보를 자칭하는 세력 예를 들어 일부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들 조차 이러한 신자유주의 논리에 갇히고 있는 형국이다.

한편 한국에서 자칭 ‘교육개혁’을 수행하고자 했다는 자유주의정치세력, 혹은 이주호로 상징되는 현 정권의 교육정책 또한 바로 ‘교육개혁’을 그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게다가 이들은 미국의 교육정책을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한 모델로 삼아왔다. 예를 들어 단위학교책임경영제, 일제고사, 고교다양화와 학교선택제, 교원평가제와 성과급 등은 자율성, 책무성, 선택권이라는 개념과 따로 떨어져 설명할 수 없으며, 그 상당부분은 미국 등으로부터 도입(혹은 차용)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미국의 ‘교육개혁’, 특히 학업낙오자방지법(NCLB)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교육정책이 종국에는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그 교육정책의 입안자이자 실행자였던 사람의 입에서 최근 터져 나왔다. 1991년부터 2년간 부시정부에서 교육연구개선실 차관보로 일했으며, 빌 클리턴 행정부때에는 연방학업성취도검사를 주관하는 운영위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다이안 래비치(Diane Ravitch)’가 최근 저서를 통해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문제점을 자기반성적으로 고백하였다. 그녀는 “학교운영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선택권을 보장하는 대신 책무성의 이름으로 학교의 성과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공교육의 질이 전체적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믿음이 오류로 판명 났으며, 최근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지난 20년간 진행된 미국의 교육개혁은 결국 실패한 것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최근 번역된 최근 다인앤 래비치의 [미국의 공교육 개혁, 그 빛과 그림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진보’를 가장한 혹은 ‘개혁’이라는 미명하게 가려진 신자유주의교육정책의 실상과 그 파괴적 결과를 다시금 되새겨보고자 한다.

 

2. 학업낙오자방지법(NCLB)과 미국판 일제고사의 실상

 

2008년 이명박정부의 등장과 함께 일제고사가 부활되어 전면 실시되면서, 미국판 일제고사와 그를 강제하게 된 학업낙오자방지법(NCLB)이 간간이 언급되곤 하였다. 특히 일제고사를 옹호하는자들은 “선진강대국인 미국에서도 일제고사를 하고 있다”면서 그 근거로 바로 이 학업낙오자방지법(NCLB)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래비치는 학업낙오자방지법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심각한 오류를 갖고 있다고 단언을 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그녀의 주요 주장을 소개해 본다.

 

우선 시험자체가 극히 한계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살아있는 인간의 능력을 계량화하려는 시도와 그 결과를 가지고 책무성을 연결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잘 지적하고 있다.

 

“ 인간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수 있는 결정에 시험을 활용하는 것은 확실히 큰 문제다. 표준화된 시험이 어떤 능력을 평가하는 정확한 수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회 의원들은 고사하고 일반 대중 역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시험이 온도계나 기압계처럼 과학적으로 유효하고 객관적이며, 오류투성이인 인간의 판단이 배제된 측정방식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시험 점수는 표준단위나 도량등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의 눈금처럼 무언가를 정확하게 잴 수 있는 수단이 아닌 것이다.” (231쪽)

“ 과도한 시험준비는 시험의 목적 자체를 왜곡한다. 시험의 목적은 배운 내용과 지식을 평가하는 것이지, 높은 점수를 내는 것이 아니다. 코레츠는 시험을 중요하게 취급할 때 생기는( 즉, 시험을 기반으로 책무성을 부과할 때) 문제는 학생 학업성취도 평가 기구인 시럼이 부패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242쪽)

“ 코레츠는 의학, 직업훈련, 산업, 여타 분양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목표 왜곡 현상을 분석하여 예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뉴욕의 많은 심장학 전문의는 주 정부에서 사망률 점수표를 발표하기 시작한 이래 심각한 심장질환 환자들에 대한 수술을 중단했다. 많은 의사가 나쁜 점수를 받지 않으려고 위험 부담이 큰 환자의 수술을 거부했기에 수술을 하면 살수 있는 환자들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유사하게 항공 산업계에서 정시 착륙에 대한 상부 보고가 의무화 됐을 때, 회사 측은 예산 비행시간을 조정함으로써 통계를 조작했다. 그 결과 정시 도착 통계는 무의미해졌다.” (243쪽)

 

다음 제도자체의 부작용이 너무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로 래비치는 학업낙오자방지법이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의 이해관계와 연계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는 한국도 결코 예외는 아닐 것이다.

 

“방과후 학습 및 시험 서비스 제공업체에는 커다란 수익과 대형산업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방과 후 학습, 시험, 시험준비 자료를 제공하는 회사들은 연방정부, 지방정부에서 해마다 수십억 달러를 받아 챙겼다. 그러나 그들이 미국학생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162쪽)

 

또한 이 제도의 또 다른 문제는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국가가 일률적으로 강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이던 국가가 대중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할 때 제시된 목표는 미사여구에 불과하고 실상은 다른 목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학업낙오자방지법(NCLB)의 경우 그 실제 목적은 교원에 대한 통제이고, 학교와 교사에 대한 구조조정과 공립학교의 민영화였다.

 

“학업낙오자방지법 내용 중에서도 가장 해로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모든 학생이 2014년 까지 읽기와 수학과목에서 ‘능숙’해져야 한다고 명시하는 부분이다. 이 마법의 날까지 모든 학생은 한명도 빼놓지 않고 읽기와 수학에서 능숙해져야 한다. 여기에는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학생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 홈리스 가정 학생이나 사회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아이들, 혹은 모든 사회적 여건을 갖추었으나 학교수업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도 예외없이 포함된다. 그리고 만일 이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학교와 교사는 결과에 따른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164쪽)

“2006년에서 2007년까지 연간 학업성취 적정 향상도에 도달하지 못한 학교는 2만 5000곳에 달했다. 2007년에서 2008년을 기준으로 그 숫자는 전체 공립학교 35.6%에 달하는 3만 군데로 늘었다. (중략) 시계가 2014년을 향해 움직일수록 더 많은 공립학교들이 폐쇄를 강요당하거나 차터스쿨로 이행될 것이다. 아니면 주 정부기구에서 통제권을 넘겨주거나 민영화되거나 또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어야 할 것이다.” (167쪽)

 

특히 가장 큰 문제점은 교육과정의 파행인데 한국에서도 이는 여실히 확인된바 있다. 래비치는 이 법의 가장 커다란 문제 중 하나는 바로 교육과정이 파행으로 치닫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시험성적을 가지고 학교와 교사의 책무성으로 연결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학업낙오방지자법이 의도하지 않았던 사태가 벌어지지 시작했다. 읽기와 수학이외의 과목 수업 시간이 축소된 것이다. 여러학교에서 역사, 과학, 예술, 지리 과목 시간은 두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쉬는 시간까지 줄어들었다. 학교의 연간 학업 향상도 계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과목은 읽기와 수학뿐이었고, 이들 과목에서도 시험대비에만 집중하게 됐으며 모두 시험 점수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많은 학교구가 시험준비자료와 활동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응시 기술과 전략은 지식에 우선했다. 교사들은 전년도 출제 문제로 학생들을 시험에 대비시켰고, 문제는 해마다 거의 같은 형식으로 출제됐다. 학력이 저조한 학생이 많은 대도시 학교에서는 시험준비와 연습이 일상학습의 중요한 부분이 됐다.”(171쪽)

“ 선다형 문항에 답하는 기술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하지만 11학년 학생들에게 지문을 주고 짤막한 답을 써 보라고 하자, 절반이 쩔쩔 맸다. 성적이 낮은 학교구든 높은 학교구든 읽은 지무는 토대로 증거를 제기해 보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지각있는 답을 써내지 못했다. 선다형 시험에서 동그라미를 치는 기술은 습득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방금 읽은 내용을 설명해보라는 질문을 했을 때는 특히한 상황이 심각했다.” (172쪽)

“ 역사, 지리, 시사 등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수학문제는 답을 추측해서 맞혔으며, 과학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수학문제는 답을 추측해서 맞혔으며, 과학에 대한 일반 지식은 경악할 정도로 부족했다. (중략)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교사들과 헌신적인 학교장은 주와 연방법의 요건에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들은 성공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을 받았을 뿐이었다.” (173쪽)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한국에서 2008년 일제고사 부활되면서 바로 성적조작 파문이 일었던 것처럼 미국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특히 성적을 올리기 위한 학교간 경쟁이 심화되고 학생들의 성적이 내려가면 구조조정과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교직원들의 불안감은 결국 불법적인 비리와 각종의 반교육적인 행태가 횡행했다고 한다.

 

“학교장이나 교사가 시험 점수를 제출하기 전에 학생이 기재한 답을 수정하거나, 사전에 문제를 유출하면서 면직된 사례가 여러번 보도된 바 있다. 심지어 체계적으로 점수를 조작한 적도 있다. (중략) 해마다 수만명에 이르는 학생이 부정행위를 하고도 발각되거나 처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졸업하려면 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11학년 학생들 사이에서 부정행위가 공공연했다. (중략) 차터스쿨의 부정행위 비율은 전통적인 공립학교보다 약 4배나 높게 나타났다.” (235쪽)

“ 대다수 학교장은 성적이 낮은 학생의 입학을 제한함으로써 학교 평균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략) 학교선택제가 대도시 학교구에서 보편화할수록, 소규모 학교와 차터스쿨은 가장 교육하지 어려움 학생집단을 입학시키지 않게 된다. 이런 학교들은 우선 응시 학생의 학부모인터뷰를 의무화한다. 성적이 낮은 학생의 학부모는 상위 학생 학부모보다 인터뷰네 출석할 확률이 낮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는 왜 학교에 입학하고 싶은지 설명하는 에세이를 요구할 수 있다. 아니면 출석률이 좋지 않은 학생의 입학을 거부할 수도 있다. 나아가 영업학습 대상자나 특수교육이 필요한 학생을 제한할 수도 있다.”(236쪽)

“선택에 따라 입학할 수 있는 학교는 평균을 깍아 먹을 학생에게 다른 학교로 전학하라고 강권하거나, 아니면 낙제시켜서 결국 학교를 떠나게 한다. 그렇데 되면 낙오학생을 ‘걷어낸’ 학교는 더 좋은 학교처럼 보이고, 그와 동시에 일반 공립학교는 더욱 질 낮는 학교처럼 보이게 된다.” (237쪽)

“ 평균성적을 올릴 또 다른 방법은 성적이 낮은 학생집단의 주 학업성취도검사 참여율을 낮추는 것이다. 학교는 이런 학생들에게 중요한 시험이 있는 날 결석을 권하거나, 시험 바로 전 날 정학처분을 내리기도 한다. 때로는 특수교육 대상자가 아닌데도 연간 학업 진전도를 충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하위집단(백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히스패닉, 아시아계) 학생들을 특수교육 대상자에 넣기도 한다. 또는 학교에서 제공하지 않는 특수교육 학습에 이들을 배치함으로써 결국 다른 학교로 전학 가게 하는 경우도 있다.” (237쪽)

 

그런데 미국에서 학생들의 성적과 교사의 임금이나 심지어 학교가 폐쇄되는 등의 사태가 초래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이 바로 책무성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책무성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책무성이라는 단어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책무라고 할 때 그것은 책무 혹은 의무를 뜻하는 responsibility로 이해되는 것에 비해, 미국에서는 responsibility 대신 책임이라는 뜻을 갖는 accountability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런데 accountability는 어떤 결과에 대해 보고할 책임이 있는 상황 특히 회계보고, 통계 따위의 보고를 하는 것과 연결되어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런데 교육행위를 마치 회계를 보고하듯 학생의 성적을 상부에 보고하는 것으로 축소 왜곡하는데 이 만큼 적절한 어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한국에서는 책무성이라는 말을 교사와 국가권력이 구분 없이 사용하지만 실상 신자유주의정책을 입안하고 강행하는 국가 및 교육관료들은 그것을 미국에서 사용되는 책임을 묻는 accountability로 이해하고 있다면 교사 및 시민단체들 그것을 전통적인 교사의 책무, 의무라는 개념으로 책무성을 해석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즉 우리는 충실히 미국모델을 따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교묘하게 만들어 놓은 책무성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3. 학교선택제와 인가학교(Charter school)의 문제점

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의 프레임에 갇힌 일부의 교육 시민 사회단체들 심지어 교원노동조합의 간부들조차 교육에서 다양성의 부여 그리고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며, 특성화학교나 혁신학교와 같은 이른바 자율학교가 마치 문제의 해결책인 듯 호도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마치 진보적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선택’이라는 개념은 마치 소비자가 제품을 비교하고 선택하여 구매한다는 상품논리에 다름 아니다. 이에 따르면 제품의 다양성을 구비해야만 소비자의 선택권도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제품이 있어도, 또 아무리 질 좋은 제품이 우리 눈앞에 있어도 우리에게 구매능력이 없다면 그 선택권은 허구에 불과하다. 마치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화려한 백화점의 쇼윈도와 넘쳐나는 외제차 광고와 고급아파트 광고가 소외감만 커지게 할 뿐인 것처럼.. 학교선택권과 학교다양성이라는 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선택의 자유라는 것이 단지 미명에 지나지 않음은 미국의 사례에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래비치에 따르면 선택의 자유는 그 출발에서부터 기득권층 혹은 사회진보에 반하는 자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였다. 일예로 1954년 미국 대법원이 인종에 따른 학교분리를 금지하는 판결을 내리자 보수적인 남부에서는 (인종)통합학교 입학을 원하지 않는 백인 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사립학교 설립을 장려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때의 학교 선택은 이들 백인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학교선택제가 전면화된 것은 1980년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였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였던 밀턴 프리드먼의 영향을 받은 레이건은 학교 선택제, 특히 바우처제도를 옹호하고 나섰다.

바우처(voucher)의 사전적 의미는 증서 또는 상품권 등의 뜻이다. 원래는 마케팅에서 특정상품의 판매를 촉진하고 고객의 충성도를 확보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법 중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사회보장제도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학교 바우처 제도라고 하면 공·사립을 불문하고 학생이 다니는 학교에 재정이 투입되는 제도이다. 즉, 만약 학생이 사립학교에 가고자 할 경우 공립학교에 지원되는 만큼의 돈을 학생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지원한다. 형식상으로는 학생은 정부로부터 바우처를 받아서 사립학교에 등록금 대신 납부하고, 사립학교는 정부에 바우처를 제출하고 재정을 지원받는다.

프리드만의 최초 제안에 의하면 바우처는 해당학교가 ‘최소한의 특정 기준’에만 부합한다면 모든 학교(종교단체, 영리 및 비영리기관, 공공기관을 막론하고)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바우처제도를 매개로 모든학교가 민영화되는 진정한 학교선택제가 구축되면 모든 학생은 학부모가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한 학교에 입학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우처 제도는 주 단위의 표결에 부쳐질 때마다 큰 차이로 거부됐다. 바우처 옹호자들은 교원노조의 정치적 공세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어찌 됐든 대다수유권자가 바우처제도를 거부한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반면 공립학교 선택제는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거주지역이 아닌 타 구역 공립학교로 전학하거나, 고등학생은 학년에 상관없이 공공 및 민간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 학교선택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선택제를 주장하는 이데올로그들은 학생들의 학업성취수준이 낮은 것은 ‘학교에 대한 직접적 민주적 통제를 선택한 미국이 치르는 대가’라며, 교원노조 등 이해집단 들 때문에 교육개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학교선택제를 도입하면 이해 집단의 기득권이 약해지고, 경쟁의 긍정적인 힘을 불러일으키면서, 학업성취도 수준이 우수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논란을 거듭하면서도 1998년 바우처 학생들의 종교학교 입학이 허용되자 빠르게 확산되었다.

바우처 제도가 찬반논란에 속에 겨우 도입된 반면, 이른바 인가학교 즉 차터스쿨은 다양한 세력들이 동의속에서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바우처제도를 종식시키는 대안으로 이를 수용했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공교육에 대한 규제 완화 및 공교육체제에 경쟁을 도입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았다. 일부 교육자들은 차터스쿨이 학습동기가 낮은 학생을 도와 중퇴율을 낮추기를 기대했다. 일부 기업가는 이 학교들을 교육 산업계의 거대기업을 성장하는 관문으로 여겼다. 소수인종집단은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가르칠 피난처로 여겼다. 그야말로 다양한 이해관계들이 착종된 혼합체였다.

민간이 운영하는 공립학교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놀랍게도 차터스쿨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은 전미 교원노조 회장이었던 앨버트 샌커라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새로운 학교가 실험적이며, 교수법 및 교과과정의 주요문제점을 해결할 임무를 띨 것이고, 다른 학교에도 도움이 되는 성과를 낼 것이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가 1993년에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차터스쿨의 비판자가 되었다. 왜인가? 이는 차터운동이라는 새로운 교육산업에 자본이 뛰어드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주장이 실상은 ‘자기 입맛대로 하는’ 기업가들의 손에 넘어 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실제로 차터운동은 교원노조에 더욱 적대적이 됐다. 차터 운영자들은 자신의 뜻대로 교사를 고용하거나 해고하고, 연봉 지급 일정을 정하고, 성과별로 차등 지급하며, 근무 연건을 통제하고, 근무 시간을 늘릴 수 있는 권한을 원했다.

학교선택의 다양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교육을 상품으로 전제하고, 이 상품을 공급하는 자 즉 학교간의 경쟁을 통해서 소비자인 학부모에게 이득을 줄 것이라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른바 학부모가 얻을 수 있는 이득 즉 학교선택의 다양성을 위해 도입한 제도들이 과연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향상시켰는가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우선 바우처제도를 보자. 래비치의 글에 따르면 1995년 중반만 해도 찬반 논자마다 그 결과가 달랐으나, 2009년에 이르면 바우처제도를 연구한 학자들의 보고서가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즉, 바우처가 고등학교 졸업율, 대학 진학률, 직장 연봉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학업성취도 부문에서 인상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바우처제도록 사립학교에 학생일 빼앗긴 공립학교 시스템이 개선됐다는 증거도 없었다. 일부 학교에서 실적이 있었으나, 이는 새로운 경쟁에 직면한 교사들이 학업성취도검사 대비에 집중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다음 인가학교로 번역되는 차터스쿨이다. 연구결과들은 매우 부정적이다. 예를 들어 필라델피아의 학교민영화 성과를 분석한 연구결과에 근거하면 민간이 운영하는 학교는 평균적으로 일반 공립학교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또 차터스쿨의 경우에도 학업성취도가 일반 공립학교고 경험한 이상의 향상 수준을 통계학적으로 구분할 방법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고 한다. 오히려 부작용은 커졌다. 인사 및 재정 비리는 물론이고, 평균성적이 내려갈 것을 우려해 이른바 빈곤층 학생입학을 기피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성적이 좋은 차터스쿨의 경우에도 문제가 많은데, 예를 들어 성적인 낮는 학생들이 중퇴율이 높고, 교칙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교사의 이직율도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차터스쿨이 인종분리를 낳기도 하였는데, 이는 학부모들이 인종적으로 같은 학생비율이 높은 학교를 선택하기 때문이었다. 또 학교간의 서열도 심화된다. 대체로 차터스쿨을 가난한 지역에서 학습 동기가 가장 높은 학생을 입학시키고, 그 결과 같은 구역에 있는 일반 공립학교는 추첨에서 떨어진 학생들을 받아들인다. 때문에 래비치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차터스쿨이 늘어나고 재능있는 아이들이 그곳에 입학하면, 일반 공립학교는 추락의 궤도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미국의 공교육과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진정 불길한 시나리오다”(222쪽)

“ 지금의 차터스쿨은 경쟁과 선택이라는 자유시장 모델을 전파는 주체가 되고 있다. (중략) 성적이 낮은 학생, 학습동기가 가장 낮은 학생을 일반 공립학교로 내쫓아 이 학교들을 불구로 만들 것이다, 차터스쿨을 찬성했던 사람들의 목적이 이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차터스쿨이 여러지역에서 공교육의 전통적 개념을 무너뜨리는 주체가 됐다는 점이다” (223-224쪽)

 

그러면 차터스쿨에 대한 오바마 정부의 태도는 어떨까? GM노동자들에 대한 구조조정의 과정, 그리고 금융자본에 대한 퍼주기에서 이미 확인한 것처럼 시장과 경쟁 중심의 패러다임은 오바마 또한 전임자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히려 주 의회에 차터스쿨의 상한제를 없애라고 촉구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50억달러의 기금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4. 미국의 신자유주의 교육시장화의 역사와 래비치의 한계

 

주지하다시피 미국에서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등교육과 관련된 논란은 이른바 1957년 ‘스푸트니크 충격’에 의해 시작되었다. 미국보다 아래라고 여겼던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대륙을 넘어설 수 있는 로켓 기술을 소련이 먼저 보유하면서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의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미국의 지배계급에게 공포와 위기감을 준 것이다. 이를 계기로 보수주의자들은 중등교육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수학과 과학 등 ‘핵심교과’의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대학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였고, 자유주의자들의 반격이 지속되면서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은 좌초된다. 1960년대 후반 전세계적으로 반전운동이 확산되는 등 진보진영이 득세하면서, 미국 중등교육의 경우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즉, 중등교육이 보편화되었지만 인문계열과 자연계열로 이원화되어 있었고, 자본가계급의 자녀는 인문계열에, 노동자계급의 자녀는 실업계열에 각각 과잉대표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졌다. 결국 1976년 고등학교의 형식적 계열화는 폐지된다. 그런데 그 당시 계열화의 폐지는 실상 대학 등 고등교육의 양적인 팽창과 맞물린 결과였다. 이제 학생의 계열화는 중등 이후의 과정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형식적인 계열화의 폐지는 학생이 미래의 진로를 조기에 결정해야 하는 단점을 줄이고, 자신의 진로에 맞게 교과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이점을 주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이는 교육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직업주의 원리가 교육제도를 규정하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학습의 양(학점 수)이지 학습 지식의 질이 아닌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학생들은 교과 선택을 할 때, 학술적 교과보다는 실용적 기술교육이나 생활교육을 선택하거나, 상위대학의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도 높은 지적인 집중력을 요구하는 수학과 자연과학을 기피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물론 계급적 인종적 문화적인 배경에 따른 계열화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와 달리 실업계교육을 통해 숙련, 반숙련 노동자를 육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등교육은 사실상 상급대학의 진학을 희망하는 상위 10% 학생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전락했다. 여기에 70년대 말 경제위기로 국가의 재정위기에 봉착하면서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이 전면화 되었다. 80년대는 이른바 ‘지식기반경제’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는 시점이었고 신보수주의자들은 사립학교 학생이 공립학교 학생보다 영어와 수학 등에서 학업성취가 높으며 상위권 대학 진학률도 높다는 근거를 들어, 교육비지불보증제도(Voucher System)을 활용하여 공립학교의 사유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중등학교의 소유형태를 전환시키려는 시도는 조세부담이 커질 것을 우려한 백인중산층의 저항으로 좌초되었다.

이제 신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전략을 짜야했다. 그것은 학업성취도의 차이는 학교의 소유형태가 아니라 제도적 환경 즉 경쟁 때문에 발생한다는 논리를 도입하는 것이다. 그 결과 공립학교를 사립학교처럼 운영하여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육비지불보증제도가 확대되고 이른바 인가학교(Charter school), 특성화학교(magnet school) 등이 도입되었다. 물론 학생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학교간 경쟁을 통해 교육의 질을 제고한다는 논리였다. 당연히 교사평가제를 도입하교 교사 간 경쟁을 유발시키고, 교사를 전문직업인으로 규정하여 교원에 대한 교육과 통제를 강화하였다.

인가학교(Charter school)는 공립학교를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단체가 공적인 재원으로 운영하는 학교를 의미한다. 인가학교의 이사회는 학교를 직접 운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조직에 운영을 위탁할 수도 있다. 물론 영리기업에게도 학교운영을 위탁할 수 있다. 인가학교는 1991년 미네소타주에 처음 도입된 후 미국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2009년 현재 4,624개 학교에 약 154만명의 학생이 재학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과소교육을 해소한다는 명분하에 졸업시험제가 실시되고, 학교의 성적을 공개하여 학생들이 학교를 선택할 때 참조할 수 있게 하였다. 또 학생의 성적에 따라 학교에 대한 재정지원이나 교사의 급여를 차별화하는 책임성(accountability)원리를 도입했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들은 2001년 아동낙오방지법 혹은 학업낙오자방지법(NCLB)에 의해 전국적으로 실행되었다.

이 법은 수학과 독해분야의 연간학업성취목표를 설정하고, 학생의 95% 이상에 대해 시험을 실시하도록 규정한다. 저소득층 지역의 학교들은 이 목표를 성취할 때만 연방정부로부터 예산을 받고, 그렇지 못할 경우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다. 이법에 의해 교육예산은 증가했다. 그러나 중등교육이 단지 대학진학 외에 별다른 전망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같은 강도 높은 조치들은 오히려 고등학교 중퇴율을 높혔다. 결국 학생의 선택권강화와 책임성을 강조한 신자유주의 교육은 그 미명과는 달리 실제로는 우등학생과 열등학생을 분리하고 열등학생에 대한 교육기회를 사실상 차단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래비치의 글에서 흥미로운 점은 교육을 상품화 시장화하려는 자들의 동기가 정치적, 경제적인 면도 있지만 동시에 심리적인 요인도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물론 이 심적인 동인은 물질적 기초 즉 정치적, 경제적 이해의 다른 측면이다.

 

“ ‘국가처럼 사고’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시장개혁’이라는 개념은 특히 매력적이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해 상황을 발전시킨다는 애덤 스미스의 말 속에는 무언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다. 교육부문에서 시장의 힘에 대한 믿음이 커지면서 어떤 사람들은 곤경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성적이 나쁜 학교, 무기력하고 학습동기가 낮은 청소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특히 그렇다. 읽기 교수법이나 시험성적 올리기와 같은 지긋지긋한 문제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대신, 교육체계의 관리방법과 구조를 다시 설계하고, 인센티브와 제대 등에만 신경 쓰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이나 교육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도 상관없다.” (28쪽)

 

래비치는 자신의 과거를 반성적으로 회고하면서, 학교선택제나 책무성강화운동과 같은 개념이 미국교육의 딜레마를 해결해 줄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면 래비치의 대안은 무엇일까? 나의 상식으로는 당연히 신자유주의교육정책을 당장 폐기하고 교육의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적인 책임을 확장하는 등의 구조개혁의 주장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답은 다소 엉뚱하게도 다음과 같다.

 

“ 학교선택제와 책무성 강화운동이 미국내에서 추진력을 얻어 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나는 교과과정과 교수법 이 두가지 운동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30쪽)

“ 학교를 개선할 가장 획기적인 방법은 학교 시스템을 어떻게 조직하고 관리하며 통제할 지를 두고 옥신각신 다투는게 아니라, 교과과정과 교수법을 발전시키고 교사들이 일하고 학생들이 배우는 여건을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가 개탄해야 할 대상은 학교의 구조가 아니라 건전한 교육적 가치의 부재다.”(332쪽)

 

위 인용에서처럼 래비치가 비록 과거 자신의 신자유주의행적을 반성적으로 회고하고 있음에도 본질적으로는 신보수주의자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거나 혹은 현 체제를 유지 온존하는 수준에서의 약간의 개혁을 고민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다음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 교육은 인적 자본을 개발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중략) 시민이 역사, 정부, 경제의 작동방식에 대해 잘 모르거나 무관심하다면 민주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또 아이들에게 과학, 기술, 지리, 문학, 예술을 가르치는데 태만하다면 우리사회는 번영할 수 없다. 우리세대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과제는 교육의 르네상스를 여는 것이며, 이는 최근 연방 정부에서 계속 강조하는 기본적 학습기술 그 이상을 의미한다. 진정한 르네상스는 모든 학문 분야에서 깊은 사고를 거친 지식과 행동방식의 정수를 가르치려 할 때 시작된다.” (330쪽)

 

위 주장을 보면서 우리는 2008년 공황이후 최근 디폴트 선언위기를 겨우 면하였으나 종국에는 파국적 위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이는 미국사회의 내적 모순을 읽을 수 있다. 미국의 위기는 미국만이 아니라 미국으로 상징되었던 신자유주의의 역사적인 몰락이 될 것이다. 상품이 될수도 없고, 결코 되어서도 안되는 교육과 같은 공적부문 마저 시장의 논리로 재편한 결과는 매우 참혹하다. 이는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제국의 몰락이 그랬던 것처럼, 구래의 사회적 관계가 새로운 생산력과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았던 로마제국의 말로와 너무나 유사하다. 이런점에서 래비치의 주장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몰락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규로 들린다. 안타깝지만 ‘인적자본’이라는 개념을 고수하는 한 래비치가 원하는 ‘르네상스’는 오지 않을 듯 하다.

래비치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반성적으로 회고하며 나름의 대안을 제출하고 있으나, 그것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래비치가 강조하는 교과과정과 교수법이 의미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교육자체가 자본의 요구(혹은 자본주의적 욕망)로부터 독립적으로 작동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진정한 대안은 교육을 보편적인 권리로 만드는 것이고, 지식을 인류공동의 자산으로 공유하는 것 뿐이다.

지난 수십년간 자본과 그 이데올로그들은 지식 특히 축적된 지식을 고정자본처럼 사유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과연 지식은 개인들의 노력의 산물로 사유화될 수 있는 것인가? 지식의 발전이라는 것은 그것이 늘 획득되고, 분배되며, 접근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지식이 사적인 아닌 사회적으로 축적되고 저장된 지식들을 전제로 하는 것 아닌가? 또 이러한 지식들을 영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전승(교육)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닌가? 일찍이 맑스가 말했듯이 모든 지식은 “(인류의) 연합된 지성”이 아닌가?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자들은 ‘인적자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교육은 인적자본에 대한 일종의 투자행위’가 된다. 그러나 개인의 교육 즉 나의 인적자본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다. 교육은 분업화된 사회에서 다른 모든 사람의 교육 없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누군가가 알고 있는 지식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운 지식이다. 모든 사람이 교사이자 동시에 학생이다. 이 때문에 교육과 지식은 본질적으로 아주 탁월한 공적재산이다.

답은 매우 명확하다! 교육은 상품이 아니다! 교육은 보편적 권리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제공되어져야 한다. 그것이 교육을 살리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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