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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루 프레이리 : 프레이리 교육사상의 형성 배경

이성우(구미 도량초)

 

혁신교육의 시대를 맞아 최근 교육현장에서 교사들 사이에 ‘학습공동체’라는 기치 아래 독서 모임과 교육이론이나 교육사상서를 탐독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한때 교직사회가 ‘철밥통’에 비유되면서 자기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는 집단으로 사회적 질타를 받던 것에 비하면, 교사들 사이에 뜨거운 면학의 열정이 지펴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교사에게 이론은 정말 중요하다. 혁신 교육의 실천은 혁신적인 교육 이론과 사상 섭렵의 안받침만큼 담보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런 전제 하에서 우리 시대 진보적 교육사상가의 아이콘 프레이리의 교육사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첫 순서로 이 글에서는 프레이리의 교육사상이 형성된 사회적 배경과 프레이리의 삶을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 격동의 브라질 현대사

 

프레이리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그 사상이 형성된 지적 배경으로서 당대 브라질 사회의 정치·문화적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울루 프레이리는 1921년 브라질 북동부의 항구도시 헤시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브라질 경제가 위기에 봉착하면서 단란한 프레이리의 가정에 불행이 엄습해왔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가족 모두가 헤시피 인근의 자부아탕으로 이주하였다. 자부아탕은 빈민 거주 지역이었다. 프레이리 가족은 이곳의 다른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굶주림을 비롯하여 극도의 빈곤으로 인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물질적 풍요를 잃은 대신 프레이리는 가난한 이들의 참상을 이해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방법을 배워갔다. 훗날 프레이리는 자부아탕에서 찢어진 가난을 경험했던 이 시절을 자기 생애의 가장 값진 때였다고 술회하였다(Shor & Freire, 1987: 28-29). 이 시절 프레이리는 굶주림을 참다못해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음식 도둑질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모험’을 통해 어린 프레이리는 기존에 품었던 중산계급의 가치체계를 극복해 갔을 것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꽃 피우는 법인지라, 프레이리의 이러한 일화는 우리 교사들로 하여금 선과 악, 어둠과 빛, 미(美)와 추(醜)에 관한 변증법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교실 내의 모범생과 문제 학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요청한다.

프레이리의 가정에 닥친 경제적 재난은 브라질 사회의 재난과 맞물려 있었다. 프레이리에게 닥친 위기가 프레이리를 성장시켰듯이, 브라질에 도래한 경제 위기는 브라질 역사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기회로 작용했다.

1930년 3월, 대통령 부정선거에 항의해서 무장봉기를 주도한 바르가스가 집권에 성공하였다. 바르가스는 아르헨티나의 페론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포퓰리즘 지도자로 분류된다. 드 카드트에 따르면, 바르가스의 포퓰리즘 정책에 힘입어 그 이전까지 ‘즉자적 계급’에 머물러 있던 도시노동자들이 권리의식을 깨닫고 조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Emmauel de Kadt, 1970: 37).

1954년 바르가스의 사망 후 쿠비체크가 집권하였다. 쿠비체크 정권은 그 매판적 성격으로 인해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거센 불만 속에 1961년 선거에서 쿠아드로스에게 패하여 물러난다. 그런데 쿠아드로스는 취임 후 불과 8개월도 못 되어 보수파의 압력에 굴한 탓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사임하게 된다. 쿠아드로스의 뒤를 이은 것은 부통령 굴라르였다. 바르가스의 계보를 잇는 굴라르의 정책은 처음에는 중도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3년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뒤로 좌익세력의 지지 속에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해갔다.

격렬한 사회적 변화를 겪고 있던 1960년대 초의 브라질에서는 시민운동 차원의 운동 또한 활발했다. 그 중 프레이리와 관련한 의미있는 움직임은 문해교육운동이다. 젊은 시절부터 프레이리는 성인교육에 투신하며 문해교육의 경험을 쌓아갔다. 이 경험 속에서 그는 문해교육과 관련하여 훗날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 ‘프레이리 방법론’을 정립해 갔다.

 

 

□ 프레이리의 등장 배경

 

이 대목에서 프레이리가 브라질의 문화와 교육 부문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고 또 그의 사상이 형성되어 가는 계기가 된 정치적·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토레스는 프레이리의 사상이 무르익어 가던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의 라틴아메리카를 특징짓는 몇 가지 역사적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짚고 있다: ①쿠바혁명의 성공(1959년) ②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사회주의정권의 성립(1962년) ③포퓰리즘 정권하의 대중조직, 특히 노동조합과 좌익 정당의 성장 ④쿠바 혁명으로부터 야기된 급진적 조류에 대해 북미 차원의 대응책으로 마련된 ‘진보를 위한 동맹’의 입안(Torres, 1994: 120-121). 이 일련의 역사적 계기들 가운데 쿠바혁명은 가히 ‘태풍의 눈’이라 할 것이다. 쿠바혁명은 그간 패배를 모르던 오만한 제국에 역사상 최초로 심대한 위기의식을 안겨다주었다.

쿠바혁명이 라틴의 민중들에게 선사한 중요한 교훈 중의 하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도 혁명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루즈벨트의 곤봉정책 아래서 니카라과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사회개혁 시도가 미국해병대의 상륙에 의해 좌절된 뒤,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은 미국의 직간접적인 개입에 의해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미국의 세력권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되던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나라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쿠바혁명을 계기로 그때까지 비교적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나라들을 포함하여 모든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에 변혁의 기운이 충만해 있었다.

쿠바혁명으로부터 받은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미국은 비단 쿠바 한 나라가 자기네 기득권의 범주에서 이탈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기화로 라틴에서의 도미노가 수반될 것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케네디 정권의 ‘진보를 위한 동맹 Alliance for Progress’이었다. 즉, 이 정책은 제 2, 제 3의 쿠바가 탄생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과, 대륙 내에서 사회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고양으로 인해 미국으로부터의 이탈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요컨대, ‘진보’란 자본주의의 유지, ‘동맹’은 미국의 신식민지 라틴국가들의 미국과의 결탁을 의미했던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먼로독트린’에서 ‘곤봉정책’ 그리고 ‘선린정책’으로 시기마다 변신을 거듭해왔다. 그런데 쿠바 혁명 이후의 ‘진보를 위한 동맹’이 그 이전까지의 정책과 다른 점은 라틴아메리카 내의 반미감정이 이들 국가의 사회적․경제적 후진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직시하고,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격차를 가능한 한 좁힘으로써 이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이 정책을 통해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공업개발과 사회개혁의 실현을 위해 10년간 11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뜻밖에도 이 원조의 수혜자 중의 한 사람이 우리의 주인공 프레이리였다. 1963년, 미국은 프레이리의 문해교육방법에 재정적 지원을 했는데 이는 프레이리가 속해 있는 브라질의 북동부권이 쿠바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려는 속셈이었다(Facundo, 1984).

문해교육 문제는 브라질 내의 정치적 이해와도 맞물려 있었다. 당시 브라질에서는 문맹자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특히 농촌 인구의 대다수는 까막눈 탓에 투표를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조건이 보수 엘리트들에게 더없이 좋은 계기로 작용해왔을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반대로 개혁 정부의 입장에선 문맹 퇴치가 절박했던 것이다.

문해교육에 관한 탁월한 역량에 힘입어 프레이리는, 1963년에 교육부장관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북동부개발위원회(SUDENE)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진보를 위한 동맹’ 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의 재정지원을 받아 브라질 북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문맹퇴치를 추진하고자한 굴라르 정부의 입장에서는 프레이리의 문해방법론이 유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서, 브라질 북동부지역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브라질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일 뿐만 아니라, 프레이리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또 교육과 정치 활동을 펼쳐온, 한마디로 ‘프레이리 교육론의 산실’이기 때문에 인간 프레이리의 정체성과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이 지역의 지리적․정치적 환경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브라질 북동부는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지역 중의 하나다. 브리태니커사전에 적힌 대로, “100km만 들어가면, 100년 전의 사회를 만날 수 있는” 이곳은 1888년 노예제의 폐지이후에도 혹독한 위계제에 의해 사회 구조가 편성되어 돌아가고 있었다. 대부분 문맹인 이들 민중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함과 궁핍 속에서 소수의 부유한 지주들을 위해 품을 파는 농업노동자들이었다. 프레이리가 이곳에서 활약했던 시기이기도 한 1960년의 뉴욕타임즈에 소개된 지역 실정을 보면, 75%의 문맹률(국가 평균 수준은 50% 미만)에, 남성과 여성의 평균수명이 각각 28세와 32세였으며, 인구 100명당 출산율이 연간 2.5명인데 대다수의 유아들이 위장병으로 죽어갔다(Barnard, 1981:18-19).

또한, 지정학적으로 북동부는 브라질 내에서 쿠바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따라서, 당시 약한 고리에 해당했던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인도주의의 차원이 아닌 쿠바혁명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이 공산화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Facundo, 1984).

 

 

□ 프레이리는 처음부터 프레이리가 아니었다

 

브라질 북동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농촌연맹과 민중운동세력은 선거를 목표로 폭넓은 인민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헤시피 인민전선은 1946년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좌파 기독교도와 브라질노동자당의 좌익과 사회민주당 등을 포함하여 결성되었다. 인민전선의 전략은 페르남부쿠의 주도(洲都)인 헤시피의 시장을 자기네 후보자로 선출한 다음 주지사의 당선까지도 노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적중하여 전임 헤시피 시장 미구엘 아라에스가 1962년에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미국 정부를 당혹케 했다(Facundo, 1984).

앞서 말했듯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제 2의 쿠바를 막기 위해 케네디 정부는 브라질을 상대로 원조 정책을 실행하는데, 그 사무국을 다름 아닌 프레이리의 활동무대인 헤시피에 설치했다.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당시 프레이리의 정치적 포지션은 진보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프레이리의 가톨릭주의와 반공산주의적 성향은, 브라질 우익 신문에 적혀 있듯이 미국정부에게 그의 문해방법이 안전하다는 보증을 주었다(Facundo, 1984). 미국의 대 브라질 원조 정책의 목적은 브라질 북동부를 순치시키는 것이었다.

정리하면, 1950년대에서 1960년대초까지의 브라질 북동부는 프레이리에게 매우 중요한 역사적 환경이었다. 이 격동의 시기에 프레이리의 사상이 형성되고 발전해갔으며, 그가 자신의 터전인 브라질 북동부를 중심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의표를 찌르는 중요한 사실은 이때 30대 중반의 프레이리의 정치적 성향은 ‘민족주의’였지, 사회의 구조적 변혁을 위한 투쟁을 강조할 만큼 혁명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프레이리는 처음부터 프레이리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프레이리는 자기 생애에 닥친 이런저런 환난과 고통을 통한 계급적 환골탈태, 자신이 즐겨 쓰는 용어로 ‘계급자살 class suicide’을 통해 거듭나게 된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64년 3월 31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 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사흘 만에 굴라르 정권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제 3세계의 여느 쿠데타 정권이 그러하듯, 브라질 군사정권이 맨 처음 취한 조치는 사회변혁운동의 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좌파 운동가들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향한 대대적인 ‘마녀사냥’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프레이리도 그 올가미를 피할 수 없어서 체포되었다. 군사정권이 프레이리에게 씌운 죄명은 민중에게 볼셰비키 혁명의식을 고취시켜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그가 지은 죄가 있다면, “브라질 민중을 너무도 사랑했으며, 민중들에게 정치의식을 고취시켜 그들이 덜 고통 받고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도운 죄”가 전부였다(McLaren, 2000: 145).

비록 70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옥은 사상가 프레이리에게 향후 인식론적 전환에 밑거름으로 작용한 소중한 체험학습의 장이었다. 가도티는 프레이리의 투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옥생활은 프레이리에게 적잖은 심리적 상처와 함께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감옥생활을 통해 교육과 정치의 연관성이 보다 자명해졌으며, 사회의 변화는 고립된 개개인이 아닌 대중에게서 비롯됨을 확신하게 되었다. 감옥이라는 공부거리에 대해 프레이리는, “가장 다양한 조건 속에서 배우고 교육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수감자로서의 경험은 비록 달갑지 않은 것일지언정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다.(Gadotti, 1994: 37)

 

당시 수많은 좌파 인사들이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사법 학살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지만 자유주의적 지식인에 불과했던 프레이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감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감옥을 뒤로 한 프레이리는 그러한 극단적이고도 비이성적인 상황 하에서 그 땅에 남아 있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웅이 되는 것이 내 소임은 아니다. 심지어 나는 혁명이란 영웅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많은 사람들과 죽은 한둘의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Gadotti, 1994: 37)는 다소 청산주의적 색채의 말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한다.

1964년 9월, 프레이리는 볼리비아 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다. 그의 나이 43세에 볼리비아를 기점으로 시작된 망명의 발걸음은 58세에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16년에 걸쳐 계속 되었다. 프레이리에게 망명은 도피가 아니라 소중한 프락시스의 기회였다. 그가 머무른 땅은 피난처가 아니라, 민중들과 더불어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치열한 실천을 통해 프레이리 교육론이 열매 맺었다는 점에서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 인식론의 전환

 

감옥 생활 이후 망명의 세월은 프레이리의 인식론적 전환에 있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이에 대해 엘리아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의 저작을 보면, 어느 구석에도 그가 개량주의적 교육자로부터 혁명적 교육자로 전환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는, 1964년 프레이리가 그의 아내와 다섯 자녀를 데리고 자신의 조국에서 망명한 후에, 자신이 지금까지 참여했던 개량주의적 활동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연히 깨닫게 된 것 같다. 의심할 것도 없이 쿠바 혁명의 성공은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의 많은 좌파들에게 그랬듯이 그의 사상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쿠바 혁명의 성공은 여느 라틴아메리카의 나라에 있어서의 개혁운동이 지니고 있는 취약점들을 분명하게 노정시켰던 것이다. 아마도 이와 같이 해서 프레이리는 개량주의자에서 혁명주의자로 점진적인 변화를 거치다가 1964년의 쿠데타와 그에 따른 비참한 망명생활로 인해 일대 전환을 이루었던 것 같다.(Elias, 김성재 역, 1984: 13)

 

망명 후 프레이리가 맨 처음 머무른 곳은 볼리비아의 라파스였다. 하지만 고산지대 특유의 혹심한 기후 탓에 프레이리의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두 달 만에 칠레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프레이리는 자신의 의미 있는 두 저서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a Practice of Freedom]과 [피억압자의 교육학 Pedagogy of the Oppressed]를 집필하였다.

1967년에 완성한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에서 프레이리의 사상적 정체성은 자유주의적 개량주의와 기독교적 민주주의 그리고 실존적 기독교주의자로 파악된다(Elias, 1994: 9). 프레이리의 다음과 같은 말은 1964년의 군사 쿠데타에 이은 투옥 경험이 자신의 사고 전환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당시 교육과 정치에 관한 자신의 순진했던 관점을 인정하고 있다.

 

군사 쿠데타의 충격을 경험하면서 나는 교육의 본질적인 한계에 관해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쿠데타 이후 나는 정치와 교육 그리고 변혁에 관한 새로운 의식을 갖고서 진실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점은 나의 첫 번째 저서 [비판적 의식을 위한 교육 Education for Critical Consciousness]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는 교육의 정치학에 관한 관점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역사에 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내게 해방을 위한 교육이 함의해야 할 자유를 위한 부단한 과정으로서의 정치적 실천이 우리에게 요구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Shor & Freire, 1987: 31)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을 쓸 때까지만 해도 프레이리의 통찰은 교육과 정치의 연관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교육적 의식에서 정치적 의식으로의 전환”은 1970년의 [피억압자의 교육학]에서 이루어진다.

1965년에서 1968년 사이에 프레이리는 칠레의 대학생 및 교수들과의 교류와 ICIRA(농업개혁지도연구소)에서의 활동을 통해 맑스주의를 접하게 된다. 이 시기에 프레이리는 자기비판을 통해 이전 시기에서 교육의 정치적 성격을 간과한 것이 오류임을 인정한다. 또한, 프레이리 교육사상의 핵심인 ‘의식화’에 대한 관점을 보다 정교하게 정립해 갔다.

이처럼, 프레이리에게 망명은 치열한 실천과 성찰을 위한 프락시스의 여정이었다. 16년간의 망명생활 동안 프레이리는 제 3세계의 여러 곳에서 문해 운동을 실천하였으며, 이러한 실천을 통해 자신의 교육 사상을 경작해 갔다.

 

다음 글에서는 프레이리의 주요 개념을 중심으로 그의 교육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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