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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문화] 윤주의 육아일기

새로운 종이 나타났다!

김윤주 /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1. 고심
삼십 대 후반. 생에서 마주하는 드잡이가 무엇이든 대단히 무서울 것도, 설렐 것도 없는 나이였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도, 그렇다고 완벽 마스터한 것도 없는, 그저 그런 목전의 불혹은  평화롭고 여유로웠다. 다만  ‘자식’, 그 미지의 영역만이 아직 공포와 환상의 나대지로 남아,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인가, 이대로 속편하게 살 것인가를 오래도록 가늠케 했다.

"내가 태어나서 제일 잘했다고 여기는 건 단언코 엄마가 된 것이었어요"
"애를 낳아야 인생을 알지. 새로 태어나는거야,  완전히. 암만!"
"애 땜에 참고 사는 거야. 애만 아님 이렇게 안 살아"
"애 클 때까지는 아무것도 못해"

지인들과  tv 속 연예인들이 매일매일 자식의 신비와 올가미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증언을 종합컨대 그 나대지는 생의 대박이거나 쪽박이었고,  그 이전에 체험한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천상의 그 무엇으로서, 치명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열렬히 아기를 갈망해본 적은 없다. 어차피 내 일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이고, 나는 정념과 열정의 화신이었으므로 결핍감은 없었다. 돌이킬 수 있는 시시한 사랑만 하다 간대도 여유만만 홀가분인생 낫 배드~.
그러나 대체 자식이 뭐길래~?에 대한 호기심은 뱃속에 가만히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가임기가 시들어간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마다 매진임박을 외치는 쇼 호스트처럼 째깍째깍 초침소리를 내게 울려대었다. 크레센도~.  


#2. 임신과 분만.
오랜 심사숙고가 무색하게 아기는 덜컥. 예고 없이 날아들었다.
노산의 위험을 경고하는 세간의 우려 덕분에 줄곧 공포심과 위기감을 가져왔지만 헛걱정,  거뜬하더군. 복중 태아와의 섬세한 교감, 출산의 폭풍 감격에 대한 숱한 헌사들에 환상도 가져왔지만 웬 걸, 별거없더군.

이 뱃 속에 진짜 아기가 살고 있다니ㅡ실감 안 남.
내가 진짜 이 아기를  낳았단 말인가ㅡ 실감 안 남. 이 아기가 내 새끼라니ㅡ실감 안 남.
술먹고싶어 – 실감 남.  애기가 건강해서 천만다행 ㅡ실감남. 내가 뚱뚱해졌네ㅡ 실감 남.
잠 못 잠 ㅡ완전 실감남. 매일매일 아기를 돌보느라 꼼짝 못한다ㅡ 폭풍 실감남.

간증으로 들어오던 천상의 것들은 모두 실감나지 않았고, 실감나는 것들은 온통 땅 위의 것들. 다만 3kg 남짓이던 아기가 안으면 바스라질  여린 꽃잎같아, 바라만 보고있어도 연민이  솟구치던 감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 아기가 아홉 달이나 내 몸 속에 살았었다는 것도,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핏줄이라는 것도 실감나지 않았지만, 이토록 무력하고 여린 존재가 나로 인해 세상에 왔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리라 다짐했던 조리원의 나날들.
뭐 그건 그거고,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 같은 ‘나엄마'의 신비는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동시에 현실조건과 사회통념에 속박된 영혼이다.  다만 여기에 아기로 인한 행복과 고단함, 간절한 기도가 첨가되었으며, 생활패턴과 관심사가 다소 변했지만, 이런 변화는 취업이나, 연애, 발병, 사회적 각성 같은 인생의 다른 사건들도 불러온다.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를 돌봄으로써 고양되고 성숙해지는 이 느낌을 사랑하지만,  이전의 내가 미숙했거나 뭘 몰랐던 것 같지도 않고, 이런 기쁨을 모르고 죽었다면 참으로 원통했겠군 싶지도 않다. 부모됨 역시 새로운 관계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의 일례일 뿐.

부모됨과 모성에 대한 헌사의 과잉에 대해 언제 한 번 찬찬히 짚어보고 싶지만 지금은 패스~ 아기엄마는 시간에 쫓기니까ㅋ. 다만 분명해 보이는 것은 사적이면서, 일반적이면서, 가치 있는 체험은 늘 과장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군대 얘기 같은 것들. 내가 직접 겪었으니까 생생하지, 대부분의 남들도 직접 겪었으니까 잘 통하지, 게다가 세상이 가치 있다고 인정해주니까 자랑스럽지~. 그렇게 신나서 말하는 가운데 “결혼하고 애를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 같은 말을 거침없이 하게 되는데,  나는 아주 철없는 부모들과 대단히 성숙한 부모 아닌 사람들을 숱하게 보았으므로 저건 거짓말.  
사적이고 일반적이면서 세상이 독려하는 일일수록 단언을 조심해야 한다. 그게 설령 본인에겐 생생한 진실일지라도. 그런 일일수록 말이 소외와 배제,  사랑과 삶의 가치를 획일화하고 사회적 보수성을 재생산시킨다.


#3. 수유, 감동적이다.
내 사춘기 때부터 여자의 유방을 다들 가슴이라고 불렀다.(후대에는 이조차 망극하여 슴가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나니~). 가끔 누가 '젖'이라고 지칭하면 뭔가 디게 폭력적이고 징그럽게 느껴졌다. 귀엽던 어린 몸이 어느덧 아기를 낳고 먹일 처녀의 몸으로 성숙했다는 게 부끄럽던 시절이기도 했고, 누군가가 내 몸을 생물학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에 어린 마음에 성적 수치심을 느꼈던 것 같다.
달걀을 풀어놓은 것 같은 걸쭉한 초유가 처음으로 내 몸에서 흘러나오던 그 때서야...아! 비로소 나는 인문학적 몸에서 생물학적 몸으로  전화했다. 그 어떤 수치심도 없이.  엄마 될 준비를 하는 신기한 나의 몸! 내 몸에서 쥬스가 나온다니! 것도 아주 영양가 높게 생긴!

“젖몸살은 없어?” “젖 잘나와?” 이제 모두 내 가슴을 젖이라 부르건만 전혀 징그럽지 않다. 왜냐면, 귀여운 아기 입장에서 말해주는 거니까. 당연하고 자연스런 아기의 양식.  

수유한 지 칠개월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경이롭다. 내 몸에서 나오는 엑기스를 먹고 아기가 저렇게 몸집이 두 배가 되고, 뽀얘지다니!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던져진다 해도 아기는 엄마만 있으면 생존가능하고 심지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는 사실. 아! 나는야 엄마느님. 아기 입장에서 생각해봤더니 오우! 자신만의 식량샘이 빌트인 되어있는 따뜻한 몸을 가진 존재라니, 아기에게 엄마는 얼마나 애틋하고 무한한 존재란 말이냐 싶어 모골이 송연하다.
#4. 극강의 불면증, 지옥이 이런 거구나!
처음엔 잠이 쏟아졌다. 그러나 램수면에 접어들어 꿀잠으로 미끄러질 찰나에 아기는 깨곤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한 달이 지날 때쯤, 몸은 스스로 각성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봐야 한창 좋을 때 깰 거잖아, 그러니 걍 안 자.’ 몸의 말소리가 들렸다.
잠이 모자라는 것과 아예 못 자는 것의 차이를 알았는데, 잠이 모자라면 자고싶지만, 아예 못 자면 죽고싶다. 아침이 밝으면 다시 하루종일 아기를 안고, 젖주고, 놀아줘야 하므로 나중이란 없다. 지금 못자면 땡인데,  뻑뻑 빠질 것 같이 뜬 눈, 머리는 지끈. 커피 백 잔 마신 듯한 각성상태, 내 나라는 백야.   그렇게 밤엔 불면증과 싸우고 낮엔 강도 높은 육아노동을 해내는 초인적인 하루하루를 보낸 지 석 달이 지나고 있었다.

직업상 늘 바른 말을 사용해야 하므로 일상에선 듬성듬성 얼빠진 말투를 즐겼던 나는 내 입이 거친 것에 대해 하등의 문제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시기, 욕의 문제점에 대해 온 몸으로 깨달았으니, 유머와 친밀감을 즐기기 위해 선별적으로 사용해온 거친 말은 심신이 한계 상황에 다다르자 스스로 주권을 탈취하고 칼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자고 싶은데 각성상태가 지속되던 한밤중마다 의지와 무관하게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욕하지 않고는 터져버릴 것 같은 환장할 짜증.  “미친년아, 자라 자! 왜 안 자냐고!” 그렇게 쌍욕을 동원해가며 정신을 진정시켜 마침내 가까스로 눈이 감길 때쯤이면 어김없이 아기의 울음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아 진짜 저 새끼가… !’ 차마 아기에겐 내뱉지 못했으나 맘속으로나마 기어코 뱉어야 속이 풀렸다. 밤중에 깨 우는 것은 아기의 당연한 습성이므로 아기에겐 죄가 없고, 나도 전혀 아기가 밉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의사상담도 하고, 수면유도제도 먹어보았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다가 아기가 6개월 지날 때쯤 자연스레 호전되었다. 아기가 자기 근육을 사용하여 뒤집고 기어다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의 주 양육자라는 각성은 누그러들고, 이렇게 귀엽고 작은 식구 하나가 늘었구나는 든든함이 가슴을 채웠다.


#5.  새로운 종이 나타났다!
남편과 가족들 모두 이름을 부르는데, 나는 아직 '아기'라고 부른다. @@이라는 개체성보다 아기라는 종 자체가 내겐 너무 새롭고 신기해서  '아기야' 라고만 불러도 온 마음에 귀여움이 가득 차기 때문에.
내가 어린일 적,  우릴 보고 새싹, 새싹 하는 동요와 동시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 그러다 어른이 되고서  화분을 키웠는데 ,  에나멜 처리를 해놓은 듯 빤들빤들 돌돌 말린 새 잎이 푸석한 큰 잎 사이를 빼꼼히 나오면서 예쁘게 펴질 때,  아! 저게 새싹이구나 했던 기억이 있다.  외할머니는 아기를 보면 “강아지” 혹은 “새인간” 이라고 하시곤 했는데, 그 또한 그닥.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갓난아기가 자라는 걸 들여다보니 새싹, 강아지, 새인간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진짜 새잎이구나. 내 몸 속에 돌돌 말고 있던 작은 몸을 쭉 펴기까지  얼마나 용트림을 해댔던가. 비단처럼 매끈한 피부, 청색과 검은 동공이 어우러진  큰 눈동자.  사십 년 된 내 몸에서 요렇게 따끈따끈한 신상인간이 나왔다니! 비몽사몽 감은 눈과 짜리몽땅한 몸으로 젖을 파고들어 쪽쪽 빠는 모습이며,  영혼과 감정은 뚝뚝 묻어있으되 자의식은 전혀 깃들지 않은 날 것의 표정. 별 거 아닌 흑백모빌만 봐도 입을 제비새끼처럼 벌리고 팔다리를 파닥거리는 내 앞의 저 아기는 강아지인가, 사람인가, 반인반수인가


#6. 자장가 감수성
잠 오면 자면 되지, 잠투정은 왜 할까. 아기가 혼자 잠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멘붕~.  알고 있는 모든 동요를 출산 후 100일간 다 불러본 듯 하다. 자장가를 부르다 보니, 우리나라 옛 동요 노랫말들이 이토록 슬프고 아름다웠구나! 나른하고 단조로운 선율과 어우러지니 더욱 처연하다. 사실 동시나 동요라는 것은 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어린이를 흉내내어 쓴 것이므로 – 그러니까 아이들한테 동시를 쓰라, 동요를 만들라고 하면 안 된다.  가슴에서 우러나는 자기 이야기는 모든 게 시와 노래이므로, 그 내용이나 화자가 어리다고 해서 위계를 두는 건 옳지 않다. 자칫 아이들은 자기 마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바라는 동심을 흉내내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동요 가사가 다가와 앉는다. 보일 듯 말 듯 따오기 소리에 엄마 가신 하늘 나라를 그리는 아이,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배가 혼자 쓸쓸하게 떠다닐 것을 엄마 품에 안겨서도 근심하는 아이, 비단구두 사오마 약속하고 돈 벌러 서울간 오빠를 그리워하는 아이, 일엽편주처럼 창공을 한가로이 가르는 반달 토끼배….슬픈 노랫말의 최고봉은 섬집아기다. 생계를 위해 엄마가 굴 따러 간 사이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제 팔을 베고 홀로 잠드는 아기를 그린 1절과, 그런 아기가 걱정되어 다 못 찬 굴바구니를 메고 모랫길을 달려오는 가난한 엄마의 심정을 그린 2절. 부르다 울컥한 게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자장가 부르기는 나의 감수성만 잔뜩 일깨우고 아기를 재우는 데는 늘 실패했다. 내 불면증이 극심해지면서 아기보다 내 잠이 급선무가 되자, 나는 나를 재우는 노래를 틀고 자기 시작했다.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전곡과 슈만 <시인의 사랑> 전곡. 신기하지, 아기도 이 음악을 들으면 스르르 잔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거냐, 독어를 좋아하는거냐? 아니아니 아니라오, 엄마의 잠든 숨소리를 좋아하는 것일테지.

아기가 더는 기다려줄 수 없나보다. 아마도 육아일기를 쓰는 동안 늘 마무리는 이렇게 뜬금없고 황급할 것이다. 아기엄마가 아기 재우고 컴퓨터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심정은 몰래 제 방에서 야동을 보는 중학생의 심정과 같다. 그 분이 오시는 순간 언제든 급끝내야하는 바로 그 심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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