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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호 [담론과문화] 일상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2008.06.26 17:37

진보교육 조회 수:1727

일상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은하철도 ‖ 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년도 작품, 이하 ‘파마탱’ )는 우리 시대 우리에게 있어서 금기(禁忌) 그 이상이었다. 실비아 크리스텔의 ‘엠마뉴엘부인’은 이미 초등학교때 개봉이 되어 선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설이었다면 베르툴루치의 ‘파마탱’은 개봉조차 금지당한 금단의 그 무엇이었다. 80년대 말, 지금은 허물어 호텔이 되어 버린 서울의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놀랐었는데 마구 삭제 되어 개봉되었다는 그 이후에 소문을 들으면서 이유없이 분개했었다. 인터넷 초고속망의 세상 속에서 손쉽게 파일로 구해 볼 수 있는 요즘에 비하면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영화에 대한 개봉 당시의 논란 자체는 불과 20년 전이지만 옛 시절의 아득한 얘기인 듯하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초상화들
   필림이 돌아가고 색소폰 소리가 애절하게 테마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아일랜드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뭉개진 인물 상(像)이 타이틀로 올라간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구별이 힘든, ‘과연 인간의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드는 처참하게 난도질당하고 총알로 뭉개진 듯한 얼굴이 그리고 눈, 코 그리고 입이 과연 제대로 기능을 할지 의아한 얼굴을 가진 군상들이 나른한 듯 카우치(긴 장의자)에서 누워서 번들거리고 뭉퉁한 몸둥이를 그대로 보이면서 흘러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정신을 기괴한 형태의 얼굴과 육체로 표현한 베이컨의 작품들은 안락한 의자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인간의 위태로움과 기괴스러움 그리고 정신 분열을 보여주고 있다. 본질적으로 노동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노동을 천시하고 하기 싫어 발버둥 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정신의  양립 불가능성 그리고 그 결과로 발생하는 필연적인 분열증세!






파씨(Passy)에서의 첫 만남
   영화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폴(마론 브란도)와 잔느(마리아 슈나이더)가 파리의 파씨 지역의 세느강을 가로 지르는 비르아켕(Bir Hakem)철교의 지하철 밑으로 지나간다. 20세기 초에 만들어져 낡은 지하철은 굉음을 내면서 철교를 지나고 소음에 주인공 폴은 하늘에 대고 욕을 한다. 나폴레옹 3세 이후 부르주아지를 위한 신흥 주택지역으로 급부상한 파씨의 고풍찬연한 아파트의 안에서 둘은 우연히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신분 확인도 안하고 헤어진다. 그 둘이 각각 걸어가는 길가에는 방탄차와 무장 전투경찰이 시위대에 맞서고 있다. 주인공 폴은 미국인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다. 세계 각국을 떠돌아 다녔으며 복싱선수에서 기자 그리고 남미의 혁명단원으로 그리고 지금은 파리의 어느 싸구려 여인숙의 여사장에게 기생하는 남편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것은 과거에 뜨거웠던 열정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심하게 좌절하고 체념하고 돈 많은 부인에게 더부살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폴은 이런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 부정의 방법으로는 단지 모르는 여인(잔느)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해서 끈질기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가학적 성행위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반면 잔느는 대령인 아버지를 둔 그리고 시골에 저택을 상속한 부르주아 계급의 젊고 희망에 찬 아가씨이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기를 거부하는 폴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정체성 확인을 요구하고 폴과의 위험한 줄다리기를 한다.
폴의 아내는 여인숙에 장기 투숙하고 있는 한 남자의 정부로서 남편인 폴이 모르게 오랫동안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폴은 아내와의 부부관계를 통해 과거의 자신의 정체성과의 단절과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의 금전적 종속의 전도(부자인 부인과 무일푼 기생하는 남편)로 인한 마초적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 만큼 폴의 아내 역시 아무런 조건 없는 남녀 관계(정부와의 관계)를 통한 지금의 남편과의 관계(일반적 남녀 관계에서의 주도권은 남성이 가지지만 이 경우에는 역전되어 있다)에서의 해방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잔느는 젊은 영화감독을 지망하는 남자친구를 두고 있다. 모범적 남녀관계와 시간이 지나게 된다면 안락한 부부생활로 이어지는 안전하고 넓은 길에서 이탈하여 정체모르는 폴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위태한 만남을 이어간다.
  폴에게 있어서 아내와의 관계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관계였었다. 아니 어쩌면 일상적인 남녀의 역할(일상적인 자본주의에서 남자는 사회에서 여자는 집안에서)이라는 것 자체가  가정에 들어온 자본주의적 관계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  역전된 역할(돈 있는 아내와 백수인 남편, 돈 때문에 결혼했다라는 주위의 시선)과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로 엮어진 틀에서 폴은 다층적인 원인에의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으리라.
폴에게는 새로운 관계의 맺음(잔느와의) 아니 관계없는 관계, 전인격적인 관계,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정체성을 괄호 안에 넣은 상태의 관계를 희구했었고 그 대상이 잔느였으리라.
그러나 잔느에게 있어 폴과의 관계는 일시적이고 충동적이었기에 그간의 단조로운 안정된 생활과 관계에서의 ‘악센트’나 ‘별미’ 정도에 불과했다. 오히려 계속적인 관계와 만남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리고 늘어나는 불안과 고통 어색함은 일상적 관계맺음의 방식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충동을 확대한다. 끊임없는 상대방에 대한 물음과 존재 확인을 요구하는 잔느는 자본주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처음으로,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나침반 같은 방식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두 연인은 파국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68혁명:  자본주의적 관계 맺기의 회의
  ‘모든 금지를 금지한다’라는 슬로건이 생각나는 68혁명의 좌절과 더불어  ‘파마탱’은 만들어졌다.  영화가 만들어지던 바로 그해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와 정신불열- 앙띠 외디푸스](1972)를 통해 ‘탈주’를 하나의 방책으로 제시했다. 벗어날 수 없는 편집증적 사회의 망(網)들 속에서 개인은 편집증내지는 분열증을 띌 수 밖에 없다. 체제에 순응하는 순간 편집증에 사로잡히고 벗어나려는 순간 분열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편집증과 분열증은 구분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의 상태이다. 들뢰즈와 카타리는 융이나 라이히라는 선구자가 있지만 무의식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우회적인 자본주의 비판을 수행한다. 영화에서 폴은 자본주의적 관계 맺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분열증적 모습을 보인다면 잔느는 자본주의적 관계 맺기에 집착하는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좌파 작가의 아들인 베르톨루치는 영화와 인연을 아버지와 절친했던 좌파 감독인 파솔리니 감독의 조수로서 시작하였다. 파씨즘 체제의 음모를 폭로하는 ‘거미의 계략’과 ‘1900’이란 영화를 통해 좌파 감독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마지막 황제’등으로 그간의 평가를 배신하는 듯하더니 최근 68혁명을 소재로한 영화(몽상가들)로 논란을 만들었다.
‘파마탱’ 곳곳에 감독 자신의 전력과 회한 그리고 불같이 시작되었다가 급격히 사라진 68혁명의 좌절이 영화 여기저기에서 짙은 패배의식으로 묻어나고 있다.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에서 이민자들에 의해 만들어져 유행된 ‘탱고’는 오늘날 가장 퇴폐적인 춤 형식의 하나이다. 남녀가 밀착되어 녹아내리는듯 우수 짙은 선율에 몸을 맡기는 춤에서 과거는 없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발견할 수 없으며 오직 현재만 있는 듯하다.
  탱고를 추는 무도장에서 마지막으로 폴은 잔느와의 관계의 진전을 시도하지만 이미 ‘기괴함’의 거북함을 감지하고 ‘편안함’에 마음을 둔 잔느를 되돌릴 수는 없다. 과거를 버리고 현재에 충실하려고 하는 폴에 비해서 현재에 충실했던 잔느는 이제 미래를 본다.
마지막 잔느의 아파트까지 쫒아온 폴은 이름 없는 강도로 주인의 정당방위에 의해 사살 당한다.
  미시적 혁명, 거시 담론
  68혁명은 전세계 차원에서의 운동이었는가? 아니면 봉기이었는가?
전자에 대한 평가는 주로 자유주의자들의 평가이다. 이전의 각종의 금기와 고래의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와 회의가 시작되는 계기라는 것이다. 실제로 ‘반전’과 ‘평화’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으며 환경문제와 소수자 문제 여성문제 등이 중요한 이슈가 되어 때로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착취관계의 재생산)을 능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68혁명은 현재 진행형이면서 실패하지 않은 혁명이다.
  그러나 봉기의 차원에서 보자면 미쳐 횃불도 들기 전에 꺼져버린 횃불이다.
미시적 권력관계에 초점을 두고 투쟁했던, 지도부와 핵심 없는 수많은 리좀적 투쟁과 구호속에서 권력과 자본은 성적 자유와 문화적 차원에서의 허용의 확대는 허락했지만 자신의 양태를 케인즈주의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확대 강화하면서 본질은 굳건하게 지키고 개인과 사회의 조작과 통제를 오히려 고도화하였다. 허용할 듯 하면서도 핵심은 꽉 쥐어 잡고 변죽만 울리는 형국!  
언제든지 국가와 자본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개인들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기존의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강제한다. 미시적 차원의 허용을 용인하는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 일거에 회수해버린다. 현재 각종의 사회운동 분야가 일정정도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진지는 대륙이 아닌 섬이 아닌지.......고립되어 있으면서 다른 진지와의 연결점 없는 수 많은 산개한 섬들.....
그렇기 때문에 봉기여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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