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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는 지금2]

해는 다시 떠오른다 - 베네수엘라의 국민투표 부결에 대하여

정은교 (양강중)

12월 2일 베네수엘라에서 날아든 소식은 중남미의 변혁 바람에 기대를 품어 온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65%쯤의 찬성은 넉넉히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개헌 국민투표에서 49%의 표를 얻어 간발의 차이로 개헌이 부결되었다는 것이다. 차베스는 자신의 지지 대중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했지만 그 당혹감을 선뜻 씻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개헌하려던 내용이 무엇인지, 왜 예상밖의 결과가 일어났는지는 뒤에 따지기로 하고, 이 사태가 어떤 파급효과를 불러올지부터 잠깐 살핀다. 이야기를 잠깐 이웃나라로 옮긴다.

베네주엘라의 이웃에는 근대 남미의 혁명가 발리바르의 이름을 딴 볼리비아가 있다. 최근의 대선에서 사상 최초로 원주민 출신인 ‘모랄레스’가 당선되었다. 중남미는 수백년 스페인 통치의 결과로 원주민 숫자가 줄고 ‘메스티조’라는 혼혈인 인구가 늘어났는데 볼리비아의 경우는 원주민이 인구의 60%로 다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 인종 구분이 그대로 계급 구분과 일치하니, 볼리비아 원주민들의 사회적 설움이 얼마나 깊었을지 짐작이 간다.
이들의 전폭적 지지로 드디어 수백년 하층민의 대표가 권력을 쥐었으니, 세상을 바꾸는 든든한 주체가 형성될 법도 하련만 볼리비아의 변혁 도정은 가시밭길이다. 9개 주 중에, 원주민은 3개 주, 농촌에 밀집해 살고 있고 백인과 메스티조(혼혈인)이 6개주, 대도시에서 정치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계급적 설움이 깊어서 자기들이 대표를 밀어올리기는 했지만, 문맹(文盲)이 태반이고, 사회정치 의식이 많이 낙후돼 있다. 농촌에 주로 모여 살기 때문에 도시의 정치생활에 기민하게 참여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자기들의 대표가 추진하는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개헌에 대해 기득권을 놓기 싫은 우익세력이 극성스레 반발하는데도 모랄레스 정권을 엄호하는 정치행동에 강력하게 나서지를 못했다. 6개 주에서 우익의 소요 사태가 일어났는데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서 혁명파가 자기들의 안전 지대인 군대에 들어가서 제헌의회를 소집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모랄레스 정부는 개헌여부 국민투표를 맞아, 베네주엘라의 ‘개헌 가결’에서 힘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던 터.
이웃한 에콰도르는 볼리비아보다 진도가 더 늦어서 아직 개헌안이 의회를 통과하지도 못했다. 베네주엘라의 국민투표 결과는 이 두 나라의 변혁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베네주엘라의 일이 단지 그 나라만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개헌하려는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차베스는 1998년 ‘제5 공화국 운동’을 발판으로 집권하자마자 제헌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를 치르고 1999년 12월 새로운 볼리바리안 헌법을 제정하는 국민투표를 벌였다. 제헌의회와 신헌법은 중앙정부의 집행 입법 기관에 포진한 ‘구 지배세력’을 청산하는 효과를 톡톡히 가져왔다.
차베스는 올 초부터 두 번째 헌법 개정을 준비해 왔는데 볼리바리안 헌법의 10%에 해당하는 33개 조항에 대한 변경사항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사회주의적 소유형태를 보강한다 ; 국가(public) 소유, 사회적 소유, 집단 소유, 혼합 소유, 사적 소유의 5 가지로 소유형태를 다양화. 주민 저축은행과 주민 소유의 협동조합 장려.
② 1일 6시간 노동제 도입. 초과근무 강제 금지
③ 비생산적 토지 금지. 탄화수소 사적 이용 금지. 공공 이익이나 전략적 성격을 띤 재화와 용역의 남용 금지.
④ 중앙은행의 독립성 폐지. 거시안정화 기금 폐기. 석유의 국가 통제.
⑤ 생산적 고용 촉진. 자영업자들을 위한 사회 안전기금.
⑥ 미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예비군’ 창설. ‘반제국주의 전쟁’ 명시.
⑦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임기 6년에서 7년으로.  
⑧ 주(州)나 중앙정부의 권력 외에 주민평의회(노동자, 농민, 학생평의회 등)을 국가권력의 하나로 명시.  
⑨ 사회적 미션이 관료 기구를 대체할 권리 보장.

베네주엘라 지식인의 자평(自評)으로는, 사적 소유권, 국가 기구, 시장 이 셋의 변혁과제 중에 소유문제에는 토지 개혁 등 약간의 진전이, 국가기구는 수구 지배세력의 현저한 청산을 통해 큰 진전이 있었던 반면, 시장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신헌법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내용은 ⑧,⑨의 민중권력을 둘러싼 문제다. 신헌법 초안 16조는 ‘콤뮨’을 국가의 기본 조직구성단위로 설정한다. 각각의 콤뮨은 여러 현존하는 주민평의회들로 이뤄진 자치기관인 바, 민중의 동의가 있는 경우 이들이 일정 관할 구역과 영토를 설정하여 국가기구를 대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궁극적 목표의 하나인 ‘국가 소멸’을 부분적으로 단행하려는 생각이다. ‘사회적 미션’에 관한 규정도 헌법에 넣어서 이들이 전통적 행정기구를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개헌안 부결의 원인이 무엇일까?

‘개헌 부결’ 소식을 알리는 미국 언론들의 보도에는 흐뭇한 기쁨이 묻어났다. 베네주엘라 우익세력들과 더불어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 사태에 미국이 노골적으로 개입한 것 같지는 않다. 우익세력의 반발이 상당히 힘을 받았더라면 덩달아 나섰을지 모르지만, ‘개헌 부결’에서 우익의 반발이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 차베스 정권은 여지껏 받아온 표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는데 이는 차베스 지지층 일부의 이반으로 설명해야 한다.
차베스는 지난 선거에서 700만 표를 얻었는데 국민투표에서는 불과 440만 표를 얻었을 뿐이다. 우선 우익세력의 저항이 ‘표 이탈’에 다소 작용했을 수는 있다. 이들은 과격한 인상을 줄이기 위해 ‘개헌에 반대할 뿐, 차베스 정권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며 온건한 기조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들을 탓해서는 의미있는 반성을 끌어내지 못한다.

혁명 세력 내부에는 대세가 차베스에게 가니까 출세를 위해 달라붙은 기회주의자들도 적지 않다. 그것은 아니라 해도 ‘민족 자립’ 정도의 문제의식만 품고 있거나 사민주의 개량주의 운동관을 지닌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실제로 기층 운동가 중에는 차베스가 추진한 사회주의 연합당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 대단히 불신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몰려들었다는 말이다. 차베스가 대중의 신망을 받고 있고, 기득권세력을 몰아내는 데에 찬성했기 때문에 여지껏 따라왔지만, 막상 ‘사회주의 개헌’이 닥치자 그 가운데는 이를 받아들이기를 꺼린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실제로 차베스의 측근으로 군부의 핵심인물이었던 전 국방장관이 ‘개헌 반대’에 앞장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게다가 관료집단을 척결할 내용을 담은 개헌안에 대해 관료세력 중에 반발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차베스에게 ‘비상 대권’을 부여하고, 종신 집권을 허용한 개헌안이 개헌 찬성을 견인해내는 데에 취약한 고리가 되었다. “혼자 독재하려고 한다”는 우익세력의 악선동에 차베스 지지층 일부의 이탈이 겹쳐서 개헌에 대해 악인상을 낳았다. 개헌의 본질은 사회주의로의 변혁, 주민평의회의 강력한 건설 등인데 ‘독재냐, 민주냐’가 대립 지점인 것처럼 왜곡이 일어났다.
“연임 제한이 없는 나라는 아주 많다. 루즈벨트는 4선이나 했다. 프랑스는 총리 소환제도 없는데 베네주엘라는 대통령을 소환할 수 있다. 그런데도 ‘독재’라 비난한다”고 차베스 세력은 볼멘 소리를 했지만, 그런 불평이야 ‘사후 약방문’에 불과하고, 헌법 개정에서 ‘너무’ 많은 내용을 밀어붙인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사회주의 입법을 먼저 해놓고, ‘연임제한 폐지’ 등은 나중에 벌일 일이 아니었을까.  
농민들 중에 정부에 대한 실망이 늘어났을 수 있다. 토지개혁이 실속 있게 단행되지를 못해서 토지를 나눠 받은 농민들도 이를 되팔고 도시로 떠났다고 한다. 아직도 농촌에는 대지주들에게 테러 당하는 농민이 적지 않다. 얼마나 되는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농민의 민심 동향도 다소 작용했으리라 보인다.  

앞날이 어찌 될까?

개헌 부결로 하여 차베스 정권이 결정적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다. 몇 차례의 내전을 통해, 차베스 정권에 대한 민중적 지지가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不可逆)의 흐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차베스의 임기는 2013년까지이니, 아직 시간도 그들의 편이다.
하지만 그 파장은 만만치 않다. 기세좋게 진군해 가던 흐름이 ‘일단 멈춤’을 강요당했다. 한풀 꺾인 우익세력이 문제가 아니라, 주체 세력을 어떻게 추스르느냐가 화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사실 저쪽(기득권세력)이 쿠데타를 벌이는 등, 악수를 두어줬기 때문에 그 반사 이익으로 힘을 받은 면이 크지요.”하고 그곳의 기층 활동가들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견결한 사회주의 지향성으로 무장한 주체 세력의 규모는 아직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고민이 뒤따른다. 600만명이나 조직해 놨다는 사회주의연합당을 가다듬는 것부터가 발 등에 떨어진 불이다.
본래 기득권 세력을 ‘반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대안’에 대해 분명한 믿음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는 기성 사회의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개념이다. 기성 사회에서 무엇이라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소유권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소(小)자산층이 선뜻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차베스 정권의 변혁이 민족혁명의 지점에서 사회혁명의 지점으로 올라서려고 할 때, 기존의 지지층 일부가 이탈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이다.
문제는 ‘이탈’은 쉬운데 새로운 실천에 떨쳐 나서는 것은 수월하지 않다는 점이다. 기층 노동자계급이야 빼앗길 ‘내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사회적 소유’가 ‘내 것’의 소유로 실감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고립된 개인을 넘어서는 사회적 각성이 따르지 않는 한, 기층 민중이 적극적인 변혁의 주체로 나서는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다. 우익세력이나 개량세력은 원기왕성하게 정치행동을 벌이는데 기층 민중의 맞대응은 늘 미약하다. 그래서 이 취약한 정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그곳의 활동가들은 ‘인간 중심의 사회주의’ ‘문제는 주체다’ ‘cultura(문화)가 중요하다’는 말을 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그들의 앞날이 어찌 될지, 지금으로서는 자세한 전망을 내놓기 어렵다. 당분간은 혼미 상태를 면치 못하리라. 그렇더라도 큰 퇴각까지 염려할 것은 없어 보인다. 미국이 마구잡이로 개입할 형편은 못 되고, 우익세력에게는 사회적 신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부의 개량세력을 추스르는 문제가 화급할 터인데 그들의 변혁 구상이 ‘교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를 통해 교훈도 얻는다면 얼마 뒤에는 새로운 구상을 내놓을 것이다. (‘반복’은 위대한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듯이)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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