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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교육도 공공재다_천희상역

2001.02.08 18:40

제럴드그레이스 조회 수:2050 추천:2

교육도 공공재(公共財)다

교육도 공공재(公共財)다
-경제학의 지배에 맞설 필요에 대하여

제럴드 그레이스
옮긴 이 : 천 희상 (번역가)

  이 책의 제목인 '교육과 시장'은 1980년대에 줄곧 일어났던 주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인 테마였으며, 90년대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논쟁의 양쪽은 공교육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공교육 서비스를 어떻게 베풀어야 효과적이냐에 대해 견해차이가 너무 뚜렷하다. 이 논쟁을 다룬 논문은 톰린슨(1986), 힐게이트 그룹(87), 데일(89), 볼(90), 교육그룹의 문화연구팀(91), 그린(91), 사이먼(92)이 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손지희가 창간호에 서평을 쓴 '교육과 시장'의 제10장을 옮긴 것이다. 손지희의 서평을 참고하라.)

 이 논쟁을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몇몇 사회에서 '교육의 본질'에 대한 기존의 사회민주주의적 합의(컨센서스)가 주로 자유시장 경제학의 시각에서 나온 신우파의 주장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도전받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영국과 뉴질랜드의 경우, 그들의 사회민주주의적 컨센서스에 의하면, 교육이란 하나의 공공재로서, 국가가 무상으로 모든 시민에게 널리 베풀어야 할 중요한 서비스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바탕에는 모든 국민에게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게 베풀어져야 한다는 정신이 깔려 있다. 80년대 신우파의 주장은 교육 역시 공공재가 아니라 시장에서 사고 파는 하나의 상품으로서, 이 교육이란 상품은 국가의 개입이 줄어들수록 소비자(학생과 학부모)에게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주장은 국가가 손을 떼고 시장력(市場力)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길 때에만 효율성 및 기회 평등이란 면에서 가장 알맞은 해결책을 베풀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문제들은 '공공 정책의 수립'에 아주 기초적인 사항인지라, 이 논쟁에는 되도록 많은 시민이 참여할 필요가 있다. 몇몇 정치인, 이데올로그, 교육자, 경제학자에게만 맡겨둘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핵심 지지자는 언론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자신만만한 민주주의 사회의 지지자에 틀림없다. 이러저러한 '특수 형태의 기술적 판단'의 옹호자들이 80년대에 대중강연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려 했다는 것이 이 장에서 밝히려는 논지의 하나다. 이들 기술적(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입장의 전략은 (그들이 세우는) '실제 세상에서는' 현대의 전향적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몇몇 강력한 개념들과 법들이 작동하고 있다고 계속 내비치는 것이었다. 사회과학 영역에서 그런 주장들은 학문적 훈련을 대표하는 이러저러한 전문가들에 의해 행해질 수 있다. 사회학자들과 교육자들이 60년대와 70년대의 대중 강연에서 너무 지나칠 만큼 인기를 누렸다는 비난이 몇몇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해 집단들로부터 나왔다. 이런 비난에 대한 흔한 반론의 하나는 '상식' 또는 '실제 세계의 경제학'에 대한 동시대의 호소이다. 80년대에는 그런 주장들이 아주 자신만만하게 (가끔은 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경제학의 특수 버전들을 부르짖은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이 장의 소제목인 '경제학의 지배에 맞설 필요에 대하여'는 필자의 주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경제학자들과 경제학 강연을 이용하는 인사들에게 '교육이란 시장에서 사고 파는 상품의 하나'이지, 예전의 생각처럼 공공재가 아니라고 주장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물론 시장 원리의 작동이 모든 시민들이 받을 수 있는 교육서비스의 질을 높일 것이라고 내세울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 자신이 '현대의 교황(敎皇)'을 자처할 권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독트린과 믿음과 성좌(聖座) 선언이 어떤 공공정책 논쟁에서든 요지부동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평하게 말한다면, 이런 식의 로마 카톨릭의 암묵적인 요구들은 경제학을 하는 사람들 내부에서나 통용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그런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은 전략적 판단에서인지, 여러 정부에서 '자문 역할'을 자청하고 나서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이 장의 논지는 교육이란 하나의 공공재이며, 따라서 주로 국가에 의해 무상으로 모든 시민에게 제공돼야 한다는 것이다. '주로 국가에 의해'란 표현을 쓰는 까닭은  종교 기관이나 봉사 기관에 의한 무료의 교육제공을 포함시킨다는 뜻이다. '무상'이란 표현은, 교육 비용이 엄청나다 해도 이 비용은 공공 조세 제도에 의해 충당해야지, '사용자 부담'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경제학과 교육 : 가시적 주장과 불가시적 주장

  87년 뉴질랜드 재무성의 경제학자들은 데이빗 레인지 수상의 차기 노동당 정부를 위해 중요한 교육정책 문서 하나를 작성했다. 이 재무성 적요서(말이 적요서이지 분량이 295쪽이나 된다.)는 명백히 뉴질랜드에서의 교육 문제에 대한 공공 토론 그리고 앞으로의 교육정책 수립에 그 태동적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이 보고서는 발표된 뒤로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다.(미들톤90, 맨슨92 참조할 것). 그러나 이  문서는 뉴질랜드에서만 주목받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이 보고서는 몇몇 시장경제학자들이 교육에 대해 품은 가정과 전략을 전례없이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는 얘기다. 그동안 교육에 대한 공개적인 공식 토론에서는 보통 커리큘럼이 '전달'되고, 학부모가 '소비자'가 되고, 학교가 '아웃풋' 지표로 평가받는 식의 '언어 변화'에서 비롯하여, 교육의 점층적 상품화는 더 암묵적이고 불가시적(不可視的)으로 표출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교육의 상품화는 암시적으로 표출되었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것이 통례였음에 견주어, 뉴질랜드 재무성의 이 보고서를 보면 고맙게도 시장 경제학에서 나온 입장들을 아주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공개 토론을 위해서는 꽤 도움이 된다.

  뉴질랜드 재무성에서 나온 이 제안들은 '네 개의 상호 연관된 주장'으로 이뤄져 있다. 첫째는 대중이 교육을 공공재로 믿으면서도 공공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인식이 막연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교육정책과 사회정책에 대한 논쟁을 활성화시키려면 공공재가 무엇인지, 경제학이 더 확고하고 분석적으로 명확한 개념을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셋째는 경제학의 통찰력이 이런 식으로 적용될 때 교육이 공공재의 지위를 주장할 수 없고 사실상 시장에서의 상품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넷째는 교육제공에서의 국가 '개입' 때문에 교육에서 더 큰 효율성과 평등성을 베풀 수 있는 시장의 능력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언어 자체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형식이 될 수 있다. 뉴질랜드 재무성의 필자들이 국가의 '개입'이라는 언어를 끊임없이 구사하는 속셈은 모종의 자연적 과정(시장)에 정부가 인위적으로 끼어들고 있다는 인상을 은연중에 풍기려는 뜻이다. 앞의 세 주장은 다음 구절에서 서로 엮인다.

   개인들뿐만아니라 사회에도 오랫동안 혜택을 베푸는, 교육의 투자 혜택은 '교육이 시장에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의 배경일지 모른다. 교육이란 정부가 개입해야 할 자연스런 영역으로 간주되기 쉽다. 왜냐하면 교육은 사회재 또는 공공재이며, 사비용과 교육에서 비롯되는 이득 사이의 공평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 경제학자들이 쓰는 기술적 의미에서는 교육은 사실상 '공공재'가 아니다 ... 순수한 공공재는 '비배타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개개인은 그 공공재(예컨대 국방)의 향유에서 배제될 수 없다. 순수한 공공재는 또한 '비경쟁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그 공공재를 향유하는 또다른 개인의 한계 비용은 제로이다.(예컨대 비어 있는 객차) 순수한 공공재는 또한 비정위성(非定位性)을 갖고 있다. 즉 그 가치는 공급을 제한당하지 않는다.(예컨대 威信財) ... 형식적 교육의 제공 그리고 공인된  수료증의 제공은 이 범주들에 들어가지 않는다. 개개인은 제공에서 배제될 수 있으며, 의무 학령이 아닌 사람들은 배제된다. 제공의 한계비용은 제로가 아니다. 수료증의 가치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 희소성에 있다. 이렇게 교육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다른 상품들의 주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뉴질랜드 재무성, 1987, 33쪽)

  재무성 보고서의 다음 언급, "공개토론장에서는 논쟁이 교육정책의 발전을 둘러싼 심층적 이슈와 딜레마에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 재무성 경제학자들이 그 분야에 다소의 정력을 쏟고 있다고 암시한 언급, "제3장에서 교육에 대한 섹션은... 경제적 개념들로 표현된다. 우리는 그런 접근법이 유용한 통찰력을 주는 방법이라고 믿는다.."고 하는 언급에 뒤이어서 위엣 주장들이 나온다는 것을 지적해 두자.

  여기서 이용되는 전략(이데올로기적 술수)은 교육이 공공재라는 '느낌'에 지배되어온 공공정책의 한 분야에서도 경제학의 확고한 기술적 분석은 그 반대로, 교육은 상품의 하나임을 예증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개념 변화가 이뤄지고나면 교육 정책과 교육 제공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의 생각이 가능해진다. 이리하여 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라는 주요명제까지도 얼마든지 수정가능한 대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넷째 주장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컨대 정부의 개입은 선택의 자유를 위축시킴으로써 개개 시민의 책임감을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어떤 형식적 컨센서스 없이도 자유로운 선택을 추구하려는 개개 행동의 집적을 통해 알맞은 해결책에 도달하려는 사회 자체의 자기조종 능력까지도 약화시키기 쉽다. 정부의 개입은 그 자체의 내부 동력을 낳으며, 그리하여 문제를 일으킨다. (위엣책 41쪽)

  경제학의 이런 확고한 언급이, 과학 아닌 독트린으로서 경제학이 지닌 두 특징적인 가정, 즉 '자기조정 능력'같은 실체가 존재하며, 이 실체가 교육을 위한 시장 상황에서 작동할 때, '알맞은 해결책'을 전달할 것이라는 가정을 내포하고 있음을 새삼 일깨워야겠다.

  앞에서도 암시했듯이, 이런 유형의 주장들은 지금 영국이나 딴 몇몇 나라에서 벌어지는 교육변화의 본질에서 암묵적이다. 뉴질랜드 재무성의 경제학자들이 공개논쟁에 값진 공헌을 한 것은 '시장 주도의 교육'이라는 개념과 가정과 정책 결과를 분명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석이 그 최대의 인민주의적 호소를 달성하는 곳은 '교육에 대한 정책 결과의 수준'에서이다. 일단 교육의 상품화와 시장화가 달성되고나면 '소비자 주권'이 수립되어야 한다. 재무성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핵심 요소는...  선택을 통해, 정보 흐름을 극대화함으로써, 교육 제공자의 고객인 가족, 부모, 개인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재무성 경제학자들이 볼 때, 이것이 기존 공교육 시스템의 기본 약점, 즉 '소비자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기피증'을 극복할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개개인이 공적 서비스에 대해 알맞은 정보를 받아야 한다는 명제에 누가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적 서비스에 대한 더 큰 참여에 의해, 공적 서비스에 대한 더 큰 의사결정에 의해, 개개인이 권한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명제에 누가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특정한 주장의 이데올로기적 술수는 그런 권한 부여가 시민 관계인 공적 서비스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객 관계인 시장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사회에서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이 부과하는 것보다 시민들이 공적 서비스에 대해 더 적은 정보, 더 적은 참여를 갖고 있다고 논증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이런 상황이 고객 관계인 시장의 도입에 의해 뿌리째 개선될 것이냐 아니냐는 부분적으로 경험적 조사의 문제이다. 이 단계에서의 경험적 증거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90년의 첩과 모우, 91년의 그린은 이스트할렘에서 시장 베이스의 '학교개혁'이 꽤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93년의 볼은 거꾸로, "시장은 다양성, 경쟁, 선택 이데올로기를 통해 계급화와 차별화의 재발명과 정당화 메카니즘을 제공한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적 문제만이 아니다. 교육 서비스에서 시민으로서의 개인을 교육 소비자로서의 개인으로 대체하는 것은 '교육과정 자체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바꿔 놓는다. 고객들이란 거래를 할 때 사적인 이득과 사적인 수확을 극대화하는 데에 열성이기 마련이다. 시민이라는 개념은 일련의 더 넓은 사회적/정치적 책임감을 함축한다. 시장/고객 문화에서 교육에 대한 분명한 위험 하나는 민주주의 교육과 관련된 문제들, 즉 교육기회의 평등성을 촉진한다든가 도덕적/사회적 공동체적 가치를 북돋는 문제들은 그 뿌리가 흔들리든가, 적어도 곁가지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교육을 공공재로 간주한다면 이런 것들은 분명히 가장 중요한 영역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경제학의 기술적 언어에서는 이런 것들이 <외부적 문제>의 범주로 전락하고 만다. 외부적 문제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정의는 "한 개인의 행위가 또다른 개인의 효용에 영향을 미치는 곳이면 그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문제라는 것이다. (코웬 92). 그들은 경제활동의 더 광범한 사회적/환경적/정치적 결과를 언급한다.(툴리 93)

  고전 정치경제학과 견주어 현대 경제학의 한계가 아주 분명해지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정치경제학은 늘 경제과정과 시장상황이 한 사회의 더 폭넓은 사회문화적 정치적 특징들과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왔다. 현대 경제학은 종종 이 관련성을 맺는 데 실패해 왔고, 기껏해야 '외부적 문제'라는 말로 그들을 '주변화'해 왔다. 경제학의 교육에의 적용은 따라서 종종 조야하고 환원주의적 분석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러한 적용에서 나오는 정책 취지들은 기계론적으로 지나치게 단순화되기 쉽다. 그렇다 해서 교육의 경제학 /정치경제학에 대한 미묘하고 세련된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정치적으로 선호되는 교육경제학의 행태는 조야하고 환원주의적이다. 그런 경제학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육 정책에서 경제학에 맞서기

  교육 정책에서 경제학의 지배를 물리칠 길이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장 경제학이 교육부문에서 내세우는 언어, 개념, 가정, 분석 방식을 요지부동의 것, 또는 권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논거를 세우는 일이다. 이런 형태의 주장은 특히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공공재에 대한 좁고 기계론적 개념을 거부하며 교육분야에 적용하기에 더 알맞은 대안적인 공공재 개념을 부르짖는다. 두 번째 전략은 경제학에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담론에 공공재 개념에 대한 내적인 모순과 혼란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논증되기만 한다면, 그런 특징들을 결여한 공공정책 분야에 '경제학이 개념적 엄격성을 제공했다.'는 주장들은 주제넘는 허풍이라 반박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 반지지(反支持)

  첫 번째 대응방안의 예.  뉴질랜드재무성의 입장에 반대하는 내 주장은, 뉴질랜드 시민들이 그런 분석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부득이한 이유가 없으며, 사실은 오히려 그들이 그것을 왜 받아들여선 안되는지 중대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우선 뉴질랜드 재무성은 '아동' '학력' '교육 과정'을 이야기하는 기존의 교육론을 없애고, 그것을 '인풋' '아웃풋' '생산기능'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교육론으로 대치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교육시스템의 작동에 대단히 비인간적이고 기계론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둘째로 교육이 국가에 의해 모든 시민에게 무상으로 제공돼야 하는 공공재라는, 뉴질랜드에서의 기존의 민주주의적 컨센서스는 '교육이 상품'이라는 명제에게 도전받아 왔다. 이것은 뉴질랜드에서의 교육서비스의 점진적인 민영화를 위한 개념적 기반으로 쓰였을 것이다. '이것이 바람직하다.'는, 뉴질랜드 시민들의 아무런 분명한 요구도 없이 말이다. 셋째로, 교육이 '시민의 권리'라는 뉴질랜드의 강력한 전통이, '교육은 소비자를 위한 하나의 선택'이라는 명제로부터 도전받아 왔다. 이것은 참여민주주의, 교육평등, 사회적공동체적 가치의 고취에 대한 '뉴질랜드의 약속'을 심각하게 깨뜨렸다. 웰링턴의 취임 강연에서 나는 '공공재로서의 교육'이라는 대안적 개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육이라는 것이 그 기본 목적의 하나가 그들의 계급이나 인종 또는 성(性)과 관계없이 또한 그들이 어떤 지역에 사는지 묻지 않고, 개성의 발달을 부추기고 모든 시민의 예술적/창조적 능력을 북돋는 것이라면 그것이 공공재입니까, 아닙니까? 교육이라는 것이 모든 시민에게 도덕성, 사회성, 타인에 대한 우호적 책임감, 합리적이고도 협동하는 자세 등을 키우는 것이라면 그것이 공공재입니까, 아닙니까?

  뉴질랜드의 민주주의를 위한 궁극의 기반, 참여적/지성적 정치과정의 궁극 기반은 그 국민의 교육, 그리고 그들이 시민의 권리에 대해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분명히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교육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기본 조건을 제공하는 한, 그것은 공공재의 자격을 털끝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레이스, 88, 214쪽)

  필자는 이 논문 끝머리에서 공공재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공공재란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공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로서, 모든 시민에게 생활의 질을 높여주고 그 개개인들의 '서비스 지불 능력'과 상관없이, 그들이 도덕적/지성적/정치경제적 능력을 얻게끔 촉진시킨다. (위엣책 218쪽)

  이런 정의를 내리면서 필자는 경제학자들이 '공공재의 핵심 특성'으로 인정하는 '비배타성'이라는 기준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따라서 필자는 또한 '지불 요구' 또는 '지불 능력'이라는 기본 문제에도 주목했다. '비배타성'이 적용되는 것은 어떤 개인들이나 그룹들이 공공재 누리기에서 배제당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간주될 때이다. 이러한 정의 속에서는 국가, 지방단체, 교회 같은 기관에 의해 사용자에게 부담 주지 않고 제공되는 교육시스템은 공공재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다.

                   기술적 비판

  물론 공공재의 대안적 개념을 세우는 것은 경제학 개념 자체를 부려 써서 경제학에 맞서는 것보다 덜 강력할지 모른다. 툴리는 이 후자의 방법을 썼다. 재무성 자료를 자세히 검토한뒤 툴리는 그들의 '성좌(聖座) 선언'이 아주 많은 내적 모순과 모호함을 감추고 있음을 논증했다. 툴리는 다음 몇몇 주장을 제공한다.

  첫째, 경제학자들이 한쪽 끝에는 (국가 개입을 요구하는) 순수한 공공재를, 또다른 끝에는 (시장의 관심사항인) 사적인 상품을 놓고, 그들을 '연속체'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재화와 서비스가 이 연속체 위에서 각각 어디 놓이느냐는 문제를 놓고 경제학자들 간에도 다툼이 분분하다.  둘째는, "사회적 응집력, 법과 질서, 경제 성장이라는 견지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주된 구성원을 이루는 공동체나 사회에 이득을 줄 것 같은" <외부적 문제>를 다룰 경우, 경제학 이론은 "교육과 학교는 '비순수' 공공재로 취급될 수 있으며, 이들 외부적 문제를 얻으려면 교육이 그 제공을 보장할 국가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고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라고 암시한다는 것이다.  

  툴리의 논문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경제학에는 교육정책 및 그 실행에 상당한 '예측력'을 가지고 적용될 수 있는 '권위적 법칙들이나 엄격한 개념들이 존재한다.'는 신화를 깨뜨린다는 점이다. 툴리는 이 문제와 개념들이 경제학 내부에서든, 더 넓은 사회에서든 논쟁의 주제라는 것을 논증했다. 경제학에서 쓰이는 공공재 이론을 직접 다룬 한 강력한 비판에서 말킨과 윌다프스키(91)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의 불일치는 '객관적 준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들 주장을 지지한다. 그 불일치는 무엇이 공공재에 속하는지/안 속하는지 참으로 잡다한 의견이 존재함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공공재란 공중(公衆)이 공공재로 취급하기로 결정한 재화이다. 우리에게 시장의 준거가 통용되기를 바라지 않는 영역들이 있음은 자명하다.

  *우리는 여지껏 검토한 바와 같이, 공공재에 대한 정의를 사물 그 자체의 기술적 속성에 바탕하여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 공공재 이론의 결점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경제 '과학'이라는 미명으로 그들의 개인적 가치관을 대중에게 강요하기 쉽다.

  *이른바 공공재의 '기술적 분석'이라는 허울을 쓰고서가 아니라, 우리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내세워 공공정책을 분석할 필요가 있게끔 만드는 것은 공적인 것들과 사적인 것들 사이에 있는 이동 가능한 경계선이다.(말킨과 윌다프스키, 91, 373쪽)

  기술적 합리성(이 경우는 경제학)의 지배가 직접적인 '반지지'에 의해서뿐 아니라 그 자체의 내부적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술수를 폭로함으로써도 반격될 수 있다. 이것은 낙관주의의 대의이다.

     우리의 가치관을 분명히 밝히는 것에 대하여 : 공공재로서의 교육

  말킨과 윌다프스키가 주장하듯이, 공공재로서의 교육의 문제는 민주적 공개토론에 의해 판가름되어야지, 권위적 전문가들에 의해 결정돼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들 전문가는 물론 공개토론에 참여해 나름으로 발언할 권리는 갖고 있다. 교육학자로서 필자의 기여는 이 장의 앞부분에서 밝힌 바 있다.

  요컨대 필자의 입장은 교육이란 공공재로 간주돼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이 무상으로, 널리, 기회평등하게 제공되어야 다른 공공재의 발생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교육은 민주주의 사회의 효과적인 작동에 필수불가결하며, 시민의 지적 능력 고양과 참여욕 고취에 불가결하다. 그것은 도덕적 공동체적 가치관과 책임감을 기르는 데 강력한 원천이 된다. 교육은 학교 제도를 통해, 모든 학생들의 지성적 창조적 능력의 고양을 위해, 그리고 이 고양 과정이 학생의 계급, 인종, 성, 그리고 그/그녀의 비용지불 능력과 연관되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약속 하에서, 민주적으로 제공되는 공적 서비스를 대표한다. 교육은 그 과정에서 모두에게 공평하고 평등한 기회를 주면서 구성원들의 재능 자원을 극대화시킨다는 사회적 공공적 가치를 전제로 한다. 이런 교육이 공공재가 아니라면 대관절 무엇이 공공재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주장이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교육-시장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교육이 공공재라는 입장이 인정된다 할지라도, 교육이라는 재화의 국가 제공, 또는 공적 제공이 반드시 필수적이라고 인정받는 것은 아닐 터이다. 요즘의 경제학에는 공공재도 사적으로 시장에서 제공될 때 더 효과적이 아니냐 따지는 문헌도 있다.(코웬 92).

  미국에서의 논쟁을 검토한 뒤, 레빈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요컨대 사적인 시장은 미국 민주주의 사회에 대단히 기본적인, 교육의 공익적 산물을  생산하는 데에는 태생적인 한계에 맞닥뜨릴 것이다." 교육의 공익적 산물들을 위해 시장 문화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처할지 더 많은 경험연구가 쌓일 때,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앞서의 논의를 감안할 때, 그 속성상 공동체보다 시장을 우선에 놓고, 늘상 개인의 이윤과 이득을 위한 전략에만 골몰하며, 세상을 시민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소비자의 관점에서 개념화하고, 도덕성/윤리성과 관련된 문제를 '주변화'시키기 일쑤인 '시장 문화'가 과연 공공재로서 교육을 효과적으로 베풀 알맞은 문화인지는 지극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