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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4호 (2017.04.10. 발간)


[담론과 문화]

수지클리닉 이야기

 우리 아이들 한 달 간의 관찰교류기

 

수지_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운명의 순간

  2월 막바지. 방학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억지로 교직원 회의에 갑니다. 부서, 담임 배정 발표가 끝나고 담임이 된 선생님들은 학년별로 모여서 제비뽑기를 합니다.

운명의 순간입니다. 한 해가 편할지 고단할지 견적이 나옵니다. 다들 집어가고 남은 것을 집어 듭니다. 겪어보지 않은 아이들이 대부분이라 전교적 스타를 빼고는 낯섭니다. 작년 2학기(신규 샘이 너무 힘들어해서 수업을 2학기에 바꿈)에 같이 수업한 아이들 외에 아는 이름은 한 명입니다.

 

  올해 우리 학년 담임은 저 말고는 희망자가 없었습니다. 저도 흔쾌히 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년 12월 교과협의회에서 올 해 수업과 담임 학년을 논의할 때 제가 이 학년을 맡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분은 별로였습니다. 나이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더군요. 이제 막 교직을 시작한 샘들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길 수 없었습니다. 요즘 신규들이 얼마나 힘이든가요. 일 많지 애들 힘들지 배려 없지. 이렇게 저는 희망교사가 아무도 없는 애물단지 아이들의 담임이 되었습니다. 2 년간을 희망과 다르게 배치해서 언성 높이게 만들더니 이번엔 희망대로 해주대요?

 

  담임 명단을 보니 모두 낯선 이름입니다. 전입 온 선생님 아니면 기간제 선생님입니다. 제 옆 반 담임 이름 자리엔 신규라고 박혀 있네요. 다들 기피하니 뭐라고 말 못할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운 거죠.

  반 명렬을 받아서 가르치고 담임도 한 선생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센스 있게 웃음 이모티콘을 여덟 명의 아이 이름 옆에 그려주시더군요. 3분의 1 정도네요. 역설적 의미의 이모티콘이었습니다. 요주의 인물들이라는 겁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보시더니 000반에 다 몰렸네 하시더군요. ㅎㅎㅎ 제 손은 자석인가 봅니다. ^^

 


수정이

  개학날이 되었습니다. 교실로 들어가 아이들을 만납니다. 서로 표정이 안 좋습니다. 나나 아이들이나. 대부분은 저 선생 누구? 겪어본 아이들은 미묘한 표정. 젊고 아리따운 선생이 아니라서 미안했습니다.

 

  한 아이가 강당 갈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스타(상습적 무단 결과 등 근태 불량, 학폭에 의한 사회봉사 등)라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찾으러 다니지 않으리라 이미 마음을 정했거든요. 지발로 찾아오겠지. 작년에는 이 아이를 포함한 농땡이 무리들이 수업에 나타나지 않거나 학교 밖으로 사라지면 애들 시켜 찾거나 담임선생님이 찾아 헤매더군요. 곁에서 지켜 본 바 올해 그 무리를 해체시켜야겠다 싶었습니다. 일 년 내내 선생님들이 고생하고 애를 써도 그 아이들의 행동은 고쳐지기는커녕 점점 확대되고 심해졌으니까요. 다른 접근이 필요해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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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당에서의 방학식이 끝나고 청소당번들과 교실로 돌아와 정리를 합니다. 그 아이가 요란스럽게 나타납니다. 사정을 늘어놓습니다. 교실에 오기 싫어 배회한 것을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었던 양 큰 소리로 이야기합니다. 배정받은 반을 몰랐고 반을 몰라 헤매고 있는 자신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헤매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별 말 안하고 내일부터는 교실에 몇 시까지 들어와야 한다고 알려주고 확인 차 말해보라고 하니 시간을 틀리게 말합니다. 시간을 고쳐 말해주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냐고 의미 없는 문제제기를 합니다. 이미 다른 아이들하고는 다 약속했으니 알아서 하라고 별 표정 없이 답해줍니다. 그 시간은 학교 전체의 정해진 시간입니다. 작년에 겪어서 다 알 텐데 굳이 5분을 늦춰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너 알아서 졸업해라고 냉정하게 한 마디 했더니 토라져서 입을 삐죽거리고 잠깐 앙탈(아 짜증나라고 했던가?)을 부리다가 교실 밖으로 나갑니다. 별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완전 아기입니다. 말투나 행동이나.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것 같습니다. 얘기 들어주는 사람을 못 만나서였는지 늘 소리지르듯 크게 말합니다. 학교선생에게라도 어리광부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수정이는 시설 아이입니다. 우리 학교에 그 시설 아이들이 꽤 많습니다. 작년에는 우리 반에만 4명이었습니다. 10퍼센트가 넘습니다. 며칠 후 조금 늦었길래 교실에서 대화를 했습니다. 학기 초라 나눠주고 낼 것이 많았는데 그 아이는 잘 챙겨오지 못했습니다. 느닷없이 저는 고아잖아요라고 하며 제 때 뭔가를 제출하지 못한 것, 늦은 것에 대해 변명을 하더군요. 무심하게 대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변명거리로 이용해 온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피할 일도 비관할 일도 아니지만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년 후면 자립해야 할 이 아이에게 어떤 능력을 키워줄 수 있을지. 커버린 몸과 맞지 않게 마음은 떼쓰는 유치원생입니다.

 


은석이

  형제자매가 이렇게 많은 아이를 직접 맡은 것은 처음입니다. 은석이는 9남매 중 여덟째입니다. 형제수도 화제였지만 행동거지 때문에 유명한 아이입니다. , 누나들이 이 학교 출신입니다. 대단한 말썽꾸러기들이었나 봅니다. , 누나를 겪었던 분들은 은석이가 그중 제일 착하다고 평합니다. 선생님들은 은석이를 애처로워하지만 수업 시간엔 속이 터졌던 모양입니다.

  작년 봄쯤 동아리 시간에 이 아이가 있던 교실을 방문한 기억이 납니다. 좋은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나랑 대화를 나누는 선생님에게 시위라도 하듯 자기를 당장 보라는 신호를 헝겊 필통으로 책상을 사정없이 반복해서 내리치는 행동으로 대신하더군요. 표정은 심술궂고 고집스러워 보였습니다. 체구는 또래에 비해 작았습니다. 우리 반 전체에서 가장 작습니다. 학년 전체를 통틀어도 그럴 것 같습니다. 키 몸무게 모두.

 

  첫 날 눈에 띄는 행동은 없었습니다. 수업시간에 많이 산만했습니다. 짝을 잘 지워줘야 할 것 같습니다. 오며가며 친구들을 자주 건드립니다. 말은 거칠었습니다. 집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학교에서 푸나 싶었습니다. 수업 중에는 저것도 (노트에) 써야 돼요?’ ‘이거 해야 돼요?’라고 수시로 묻습니다. 아침 독서시간에는 지친 기색으로 오늘 힘들어요. 공부 안 할 거예요.’는 말을 제게 하기도 합니다.

 

  작년 담임선생님께 물어봅니다. 아침에 힘들어할 만 했습니다. 엄마가 밥을 해주지 않는다네요. 차비가 없어서 먼 거리를 걸어서 등교한답니다. 제 입으로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심부름 시키려고 했더니 진짜 힘든 표정을 지으며 저 힘들어요한 적도 있습니다. 먹을 것을 자주, 많이 주라고 하더군요. 못 먹어서 왜소한가 봅니다. 손톱은 하도 물어뜯어서 절반밖에 없습니다. 아침마다 불러서 오이도 주고 삶은 계란도 주고 멸치도 먹였습니다. 손위 형제들에게 자주 맞는 모양이었습니다. 구타 정도는 아니지만 손위 형들이 툭툭 치고 못살게 굴고... 아이 스스로 자신은 집에서 구박덩어리라고 생각합니다. 답하기 싫은 질문에는 무조건 몰라요입니다. 은석이는 무슨 반찬 먹니? 등 집과 가족에 대해 물으면 몰라요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그래도 활동적이고 자기표현을 잘하니 다행입니다.

 


승욱이

  선생님들이 가장 골치 아픈 아이로 꼽은 아이입니다. 초반에는 그 정도라는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산만하고 수다스럽다 정도? 3주차 접어들었을 때부터 선생님들이 왜 그랬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수업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이 어떤 아이예요?”라고 이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른 일로 생활지도부실에 갔다가 우연히 승욱이가 영어선생님과 갈등을 겪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주 화가 나 있었고 아이는 선생님이 왜 자기한테 화를 내는 지 이해 못하겠다는 태도였습니다. 승욱이는 어르고 달랬고 선생님에게는 위로와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수밖에. 그래도 직접 선생님께 대들지는 않아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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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이는 말을 못 참습니다. 아이들 표현에 따르면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합니다. 어른에 지극히 부정적이며 매번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 같습니다. 가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을 곧바로 말로 툭 내뱉습니다. ‘못 가르친다’ ‘지루하다’ ‘00시간은 재미있는데 00시간은 재미없다등 선생님이 기분 나쁠 말을 수업시간에 면전에서 합니다. 선생님들이 울컥할 만합니다. 면전에서만이 아닙니다. 저에게도 다른 선생님의 나쁜 면을 얘기합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이죠. 수업 시작하자마자 다짜고짜 전 시간 선생님에 대해 ‘00선생님은 고구마예요라고 합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외모 가지고 그러나? 아닌데? 뭐지? 속으로 그러고 있는데 답답하다고요이러는 겁니다. 고구마는 사이다랑 같이 먹어야지 하고 넘어가긴 했는데...

 

  다행히 저는 좋게 보았는지 칭찬도 받았습니다. 수업 중에 제가 무슨 얘길 하자, “저는 선생님의 그런 마인드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라고 다른 아이들 다 듣게 말하더군요.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는 저에 대해서도 언제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멋대로의 부정적 평가를 말로 내뱉을 테니까요.

 

  대놓고 승욱이에게 얘기했습니다. 비교하고 평가하는 말을 하지 말거라. 사회적 현상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좋지만 가까운 사람들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이해 못하겠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습니다. 숙제를 내 줍니다. 선생님들 장점 한 가지 이상씩 찾아와라. 난감한 표정을 짓습니다.

 

  아이의 사정도 이해는 되더군요. 엄마의 학습강요를 이 아이는 견딜 상태가 아니었는데 장기간 엄마가 너무 무서워 겉으로만 하는 척하며 지낸 듯 했습니다. 주의집중력 등 심리기능 형성과 무관하게 너무 많은 학원 숙제를 어린 나이부터 하느라고 글씨는 갈겨쓰고 뭐든지 대충 

때우거나 안 할 생각부터 하고 공부 왜하냐는 소리를 수시로 합니다. 어른과 학습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자라나 있습니다. 어른들은 이럴 것이란 부정적 선입견으로 멋대로 예단했다가 청소부담을 가볍게 해준다든가 자율종례로 일찍 갈 수 있게 해주는 등 자신의 생각과 다른 조치를 만나면 무척 좋아합니다.

 

  문제는 선생님들뿐 아니라 아이들이 승욱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승욱이에게 편승하는 아이들이 생기면 통제불능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렵니다.

 

  승욱이는 우리 반 행사부원입니다. 3월 생일잔치를 위해 생일축하 메시지용 카드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같이 하는 아이 중 하나가 걔가 그걸 하겠어요?’라는 말을 듣고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그 일을 맡은 아이들을 한 장소에 모아 색지를 나눠주고 같이 하게 시켰습니다. 결국 승욱이도 자기가 맡은 몫을 했습니다.

 

  부정적이고 평가하는 말을 것은 승욱이만의 일이 아닙니다. 정도와 빈도수가 약할 뿐 우리 반 서너 녀석은 흠 잡기, 틀린 것 찾기에 치우쳐 있습니다. 한참을 가르쳐야 할 것 같습니다. 갈 길이 험난합니다.

 


은선

  은선이는 다문화가정 아이입니다. 어머니가 태국인. 하루는 아이가 학교에 오지 않아 집에 전화했습니다. 어머니가 받습니다. 기본적인 것 외에는 의사소통이 어렵습니다. “은선이 아픈가요?” “오늘 학교에 못 오나요?” 정도만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언니의 나이를 감안하면 20년 가까이 한국에서 생활했을 텐데, 한편으로는 기가 막혔습니다. 지전가 선생님과 얘기를 나눠보니 다문화 가정에 이런 경우가 무척 많다더군요. 어머니로서 양육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이도 가족도 모두 힘들었겠다 싶습니다. 성적은 저조하지만 은선이는 그림을 잘 그리고 꼼꼼하게 일을 잘 챙깁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두루 잘 지내지 못하고 위축되어 있습니다. 외모도 약간 눈에 띄는 편이어서 못된 남자아이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은석이를 싫어합니다. 작년에 수학 수준별 수업 하반에서 은석이가 싫은 짓을 많이 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마음이 맞는 함께 다니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은선이는 시력이 안 좋습니다. 부모가 자신에게 인색하게 군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아껴야 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순하게만 보였는데 대화를 해보니 냉소적이고 또래 어른 할 것 없이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상처받을 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집에 전화해서 안경을 맞출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다른 일 하느라 일주일간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생각나서 미안하다 하고 아버지께 전화해서 주말에 맞출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니 자기가 얘기해서 안경을 맞추겠다고 합니다. 월요일에는 안경을 쓰고 올지 기다려집니다. 이 아이가 공부를 잘 할 수 없고 자신감 없이 차가운 마음을 품고 살았던 것이 이해가 됩니다.

 


나머지 아이들

  다른 아이들은 나머지가 되어 버렸네요. 나머지라고 하기엔 아이들 모두 각자의 색깔과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한 달 쯤 지내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아이들 이야기를 풀 기회가 있겠지요. ^^

 

  항상 고민입니다. 눈에 띄고 속을 태우는 아이들을 중심에 둘 것인지 아니면 나머지평범한 아이들을 중심으로 학급운영을 해나갈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생기겠지요. 그런데 이런 걸 생각지 못하고 한참동안을 전자를 택하고 나머지아이들을 그냥 놔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창시절 공부 잘하고 모범적인 아이들을 편애하는 풍토가 너무 싫었기에 소외되고 거칠어진 아이들에게 눈길이 먼저 갔던 모양입니다. 저도 그런 편애풍토의 수혜자일지 모릅니다만. 그보다는 철이 들 무렵부터 돈 많고 치맛바람 센 집 아이들을 선생님이 예뻐하는 걸로만 보여 반발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설프게 접한 계급재생산이론저항이론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폴 윌리스의 싸나이들처럼 저는 그 아이들이 뭔가에 저항하는 걸로 오해했습니다. 지나고 나니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 아이들 신경쓰느라 나머지 아이들을 방치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알아서 잘 하니까라는 생각에 해 준 게 없었습니다. 몇 해 전부터는 말썽꾸러기 녀석들에게 화가 나더군요. 이 녀석들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이 피해를 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면이 있습니다. 말썽꾸러기들에게 에너지와 시간을 뺏기다보면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소홀해 지기 쉽고 그 아이들의 무책임함(학급 내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아 다른 아이들에게 일이 넘어가는 등)과 산만한 수업태도로 다른 아이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균형을 어떻게 맞추어야 하나? 올해는 아이들이 함께 하는 활동을 많이 만들어 관계속에서 아이들 각각이 달라지도록 해보리라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하며 시작합니다.

 

  3월 초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던 대로 하지였습니다. 막상 아이들을 보니 제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될 아이들이 너무나 많고 가족 관계와 친구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꽤 되어서 아이들 간의 관계를 재구성해보기로 했습니다. 튀는 아이들에겐 때에 따라 무심하게 엄하게 대하렵니다. 얌전이들은 따로 만나, 기를 북돋워보려 합니다. 이른바 날라리나 일진은 우리 반에 없습니다. 학년 전체를 둘러봐도 그런 아이들은 없습니다. 개념 없는 아이들이 있을 뿐이죠. 아직까지 수정이도 산만하고 떠들지언정 땡땡이는 치지 않습니다. 우리 학년을 맡게 된 선생님들은 대부분 생각보다 좋은데요?’라 하십니다. 아이들도 1년간 온갖 일을 겪으며 자랐겠지요.

 


청소년들의 놀이-

  청소년들에게 일은 일종의 놀이인가 봅니다. 알바, 비서, 팀장, 미팅, 회식 등의 말을 써가면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면(?) 서로 하려고 합니다.

 

  학급자치회 구성에 석 주나 걸렸습니다. 아이들 파악을 위한 면담에만 열흘이 걸렸고 부서 업무 교과 업무 등 학기 초 업무에 올해는 수업도 많아 아이들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바쁩니다. 11역 정도로 할까 하다가 학급자치회를 부서조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동안은 학급 내 역할을 주고 부서도 만들긴 했지만 부서의 의미는 크게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부서로 떼로 움직이게 만들어볼까 합니다. 명칭은 건조하게 관리부, 학습부, 행사부 그리고 알바부(봉사부?). 학기 초에 알바 뛸 사람?’하고 일 할 아이를 모았더니 서로 하겠다고 난리더군요. 별 대단한 일은 없습니다. 전교 각 학급에 뭔가를 배달하거나 보통 교실 반칸 크기의 수준별 수업교실의 책상이 상태가 안 좋아 학급당 학생수 감소로 교실마다 남는 새 책상을 옮겨 바꾸는 일 등을 그동안 시켰습니다. “아무개야 뭐 해이러면 마지 못 해 궁시렁거리며 할 일을 알바 둘?’ 이러면 손을 번쩍번쩍 듭니다. 그리고 일 값도 소소하게 치뤄줍니다. 대체로 간식을 주는 정도지만, 힘든 일 후에 회식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알바를 학기 초에 했던 아이들 등 너도나도 알바부를 너무 사랑(회식을 사랑?)해서 부서 편성이 곤란할 지경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알바부 지원자 몇 명을 다른 부서로 억지로 보내고 인원이 부족한 학습부와 관리부를 통합해서 세 개 부서를 만들었습니다.

 

  편성 다음부터가 진정한 시작입니다.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려면 혹은 같이 하려면 얼마나 귀찮고 번거로운지 아실 테지요. 차라리 내가 하거나 안 하고 말지... 처음 아이들과 한 일은 생일달력과 학급자치회(행사부 업무), 학급자치법전(학습관리부 업무) 게시물 만들기였는데, 환경미화가 없어진 지 오래 되어서인지 뭘 해야 할지 아이들은 몰랐고 하나같이 학급자치가 뭐예요?’라고 물었습니다. 학생 자치 강조하면 뭐하나요. 자치가 뭔 줄도 모르는데. 환경미화가 없어진 걸 좋아했으면서도 굳이 일을 만들어 고통을 자초하는 내가 좀 이상하기도 했습니다. 교과교실제라 아무도 그런 거 안 만들거든요. 학급시간표도 별도로 만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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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은 했는데 몇날며칠이 걸리고 있습니다. 절반 정도 만든 것을 아이들이 잃어버려서 다시 시작하고... 오후에 남길 수가 없어서 아침, 점심에 틈틈이 하다 보니 진도가 잘 나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반에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이 꽤 많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냥 제목 크게 글씨 써서 여백 꾸미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너무 잘 만들고 있어서 깜짝 놀라는 중입니다. 그리고 만드는 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다른 아이도 옆에서 구경도 하고 도와주면 안 되냐고 묻습니다. 담임의 농간에 아이들이 따라주는 것을 고맙다고 해야 할지...

 

  행사부인 은석이와 승욱은 그럭저럭 자기 일을 잘 하고 있습니다. 카드용 종이 오리고 나눠주고 누구에게 쓰는 카드인지 색깔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여자 아이들은 파닥거리며 움직이는 은석이가 재미있나 봅니다. 은석이 행동에 까르르까르르.

 

  왜 예전에는 이런 걸 몰랐는지. 어린 유아들의 역할 놀이처럼 청소년들은 일을 놀이처럼 여기는 듯합니다. 아직 어른은 아니지만 어른처럼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법 잘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럿이 같이 하도록 해야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책상 나르기는 꽤 힘든 일이었고 위험하기도 했는데, 작업을 자청한 여섯 명의 아이들이 나름 서로 의논을 해가면서 작업을 완수했습니다. 물론 행여라도 다치거나 싸울까봐 제가 졸졸 따라다니며 도와주긴 했는데 엘리베이터도 타게 해주고 무엇보다도 회식이라는 보상에 기대가 커서인지 점심시간 놀기를 포기하고 이틀 동안 그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회식. 비록 짜장면 한 그릇이었지만 저보다 먼저 학교 앞 중국집에 가서 주문도 하고 주인과 협상해서 군만두도 서비스로 받는 걸 보며 예전을 돌아보았습니다. 애들을 내가 억지로 끌고 가보려다가 실패를 거듭한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뭐든지 다 간섭하느라고 혼자서 죽어났죠. 괜히 아이들에게 서운해 하고. 믿어도 되는데 일일이 다 챙기고 돌봐야 할 아이로만 대했습니다.

 

  생일잔치도 학급게시물 만들기도 업무 부담도 큰 마당에 괜히 시작했나 싶지만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입니다. 성향이 너무도 다른 아이들(어떤 아이들은 수줍고 무서워서 학년부 교무실 문 앞에서 서성이며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불쑥불쑥 들어와서 거울도 보고 선생님들에게 말도 막 시키고 자유분방...)이 모여 있는 우리 반이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됩니다. 남은 11개월 간 많은 사건과 갈등도 있을 테지만(이미 한 차례 갈등사건 있었음) 같이 공부하고 일도 하고 놀면서 무사히 올 한 해도 지나가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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