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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3호 (2016.12.21. 발간)


[담론과 문화]

정은교의 몽상록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역사 공부에 관한 잡설


정은교 -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퇴직한 뒤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아니, 학교에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으니 학교를 벗어나 더 본때있는 교사가 되고 싶기까지 했다. 그런데 씁쓸하게도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내 다니던 학교에서 (9월에 시작하는) 방과후학교에 강좌를 신청했는데 신청 학생이 너무 적어서 그만 (강좌를) 철회했고, 그 뒤로도 학생들 인문학 공부동아리를 규합해 보고자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는데 아직 뚜렷한 진전이 없다.


   그러다가 아, 100만 촛불을 만났다. 그 촛불이 처음 타오를 무렵, ‘민중의 소리사이트에 아이들아, 촛불을 함께 들자!”고 호소하는 글을 올렸더랬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서슴없이 일어설 줄은 미처 몰랐다. 글을 쓸 때는 중동고등학교 학생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원광고등학교에 대자보가 붙는 정도였는데(중고생들이 떨쳐나선 것은 선거권 연령을 얼마든지 16세로 내려도 된다는 강력한 논거다), 그 글이 인터넷에 오르고 불과 일주일 만에 4.19 때의 학생 진출 같은 광경이 일상사日常事가 돼 버렸다(4.19의 주역을 대학생으로 알고 있는 분이 많을 터인데 시골 읍내에선 초등학생이 혁명의 주역이었다). 시대를 뒤늦게 읽어내는 글의 하찮음이여!


   아이들은 학교 교사들의 격려 덕분이 아니라 저 스스로, 또는 부모의 응원에 힘입어 거리로 뛰쳐나왔다. 쓰디쓰게 확인하는 것은, 아이들은 먼저 현실에서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어야, 비로소 배움을 생각하게 되고 (학교 밖에서) ‘공부 도우미를 찾을 거라는 사실이다. 박근혜게이트가 기성 질서에 대한 (대다수 학생들의) 소박한 믿음들을 산산이 깨주었으니 이제 참교육 참공부를 위해 모여라!”하고 수월하게 권유할 수 있게 됐다.


   각설하고, 이 글에서는 역사 공부와 관련해 이것저것 <넋두리>를 늘어놓겠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있()!”는 데 대해서는 요즘 중고교 학생들이 웬만큼 알고 있지만 우리는 기존의역사 교과서 자체가 (‘역사의 망각선동세력이 날뛰는 때에) 충분한지도 물어야 한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식민주의 비판은 충분한가?

 

   (한국사+세계사) 교과서가 식민주의를 웬만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침략으로 벌어진 일,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노예무역, 중국과 인도 민중의 저항(태평천국의 난, 세포이 항쟁), 그리고 일본의 침략 등등에 대하여 소상히 밝혔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할까? 이승만이 독재자로 단죄되고 박정희가 쿠데타 주모자로 격하된 민주화 시대에는 그쯤의 비판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쯤만 알아도 진취적인 역사의식을 품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시절인가? 수구보수세력이 즈그덜 생각(아집)2세 국민들한테 강제로 내리먹임하겠다고, 벼르고 별러서 사상 전쟁war에 일떠나선 시절이다(그놈들은 이 싸움이 전쟁이랬다). 그들을 물리치는 데에는 기존 교과서만으로 미약하다. ‘(1948) 건국절이라는 게 뭔가? 1919년의 임시정부를 역사의 기억에서 (단번에든, 서서히든) 지워버리겠다는 속셈 아니냐. 항일독립투쟁의 의미를 아이들 뇌리에서 깡그리 지우겠다는 그야말로 야심찬(?) 세뇌洗腦 작전이 아니냐그러니까 식민주의 비판의 필요성이 훨씬 엄중해졌다. 교과서가 이러저런 사건과 숫자의 밋밋한 나열에 머물러서는 학생들이 식민주의가 나쁘다는 것을 막연히 머리로만 받아들인다. 또 꼴통 보수세력의 선전 선동을 자꾸 듣고 나면 헷갈리게 마련이다. “식민주의는 나쁘지만 일제 강점기 밑에서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도 했네? 그럼 친일파도 욕해서는 안 되겠네?”

   그래서 문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의 감성과 영혼을 울리는 얘기들이 역사교과서 부록에든, 국어교과서에든 실려야 한다. 이를테면 채만식의 태평천하의 한 대목, 친일파 윤직원 영감이 지금(=일제日帝 치하)이야말로 태평천하라고 울부짖는 대목을 싣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누군지 굵직한 명단을 덧붙이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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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텐토트의 비너스얘기도 집어넣자. 1811(=유럽에서 위대한 근대시민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던 시절), 런던에서는 사람을 닮은 희한한 짐승의 전시회가 열렸다. 남아프리카에서 붙들려온 사르키 바트만이라는 여성이 (엉덩이가 크다는 이유로) 짐승으로 분류되어 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됐다. 구경꾼들은 그녀의 벌거벗겨진 몸뚱이를 (심지어 국부局部까지) 눌러대고 찔러대며 낄낄거렸다. 그 전시회장에서 유일한(존엄한) ‘사람은 온갖 끔찍한 모욕에 시달리면서도 참을성 있게 견딘 사르키 바트만뿐이었다. 사람들이 짐승으로, ‘짐승이 사람으로, 변증법적인 반전反轉이 일어났다!

   조선인들은 일제日帝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았는가? 1900년대에 일본 여러 도시에서도 짐승전시회가 열렸다. 아이누인과 대만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거기 전시됐다! 이 벌거벗은 사실을 앞에 놓고서 어찌 식민주의(제국주의)를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정신착란적인 얘기를 꺼낼 수 있을까?

   조셉 콘래드가 1899년에 펴낸 소설 어둠의 심연도 한 대목을 국어 교과서에 길게 싣는 게 좋다. 교역선 선장 말로우가 식민지 장사꾼 커츠를 찾아서 콩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탐험 이야기로서 그곳은 벨기에가 다스리던, 아프리카에서 가장 악명 높던 식민지였다(교과서에도 벨기에 통치자들의 만행이 쬐끔 소개돼 있다). 교과서는 유럽의 사회문화 발달 항목 따로, ‘식민주의항목 따로, 기계적으로 서술했는데 그래서는 식민주의가 어째서 역사적인 죄악인지를 풍부하게 드러낼 수 없다. 노예 통치에 앞장선 커츠는 영혼이 악마한테 전당잡혔다고 작가 콘래드가 고발하고 있는데 이는 제국주의 침략의 단물에 도취한 19세기말 유럽 문명 전체의 타락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렇게 문학(철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어찌 학생들한테 ‘(식민주의라는) 사태의 깊이를 깨우쳐줄 수 있을까. 식민주의가 저지른 이러저런 죄상罪狀들을 누누이 일러줌과 더불어, 슈퍼 1급의 학자가 정성들여 쓴 에세이도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 식민주의가 왜 <역사적인 범죄>인지 서슬 퍼렇게 단죄하는! 단편적인 사실史實을 아무리 잔뜩 늘어 놓는다 한들, 그게 왜 죄악인지 깊게 들여다보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얘기를 더 듣지 않고서는 학생들의 역사 공부가 완성되지 못한다.

 

   국사 교과서와 관련해, 한 가지 짚을 대목이 있다. 교과서는 19세기말에 조선 사회에서 여러 가지 개혁운동이 벌어진 것으로 서술한다. 독립협회가 독립신문을 펴냈으며, 근대 문물(전기, 철도)이 들어왔으며 근대 교육이 시작되었으며... 그런 것들이 얼마쯤의 역사적 의의를 띠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한 가지 커다란 사실을 빠뜨림으로써 그 의의가 지나치게 강조됐다. 1894년 동학군이 패배함에 따라 조선은 실질적으로 그때부터 예속 국가 상태로 굴러떨어졌다. 조선의 조정은 한갓 꼭두각시! 국가의 핵심은 군사력이 아닌가. 예속 국가의 지배층이 무슨 개혁(가령 같은 해의 갑오개혁)을 벌인다 한들 그것이 갖는 의의는 하잘것없다. 제국주의에 맞서 새로운 주체(민중)를 일으켜 세우는 일과 관련된 것(가령 의병운동의 성장)만이 의미 있는 사회적 실천이었다. 요즘도 우리는 한국이 변변한 주권이 없는 국가임을 잊고 산다. 사드와 한일군사정보협정이 일방적으로 진행되고서야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다.

   또 덧붙이자. 다들 알다시피 교과서는 한국사든 세계사든 최근의 현대사, 20세기말 이후를 날림으로 서술해 놨다(우리가 정작 직시해야할 때는 바로 이 때인데도). 탈냉전과 테러와의 전쟁,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간단히 언급해 놨지만(고작해야 현상 기술), 전세계가 남북南北의 두 쪽으로 얼마나 첨예하게 갈리고 있는지, 3세계 국가들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가령 요즘 러시아가 개입해서 시리아 정부를 살려 놓으니까 미국 지배세력은 차선次善의 목표로 국가 해체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미국) 혼자 다 먹기 어려우니까 여럿이 나눠먹기 하자는 거다. “너희는 국가를 갖출 주제가 못 돼! 변변한 국가 없이 살아라!” 그러니까 수많은 난민이 쏟아지는 중동 사태는 식민주의 비판의 연장선에서 (교과서가) 담아내야 한다. ‘신식민주의개념을 들이대야 비로소 지금의 현실이 설명된다는 말이다. ‘식민주의문제는 역사에서 살펴봐야 할 여러 항목 중의 (대수롭지 않은) 하나, 지금은 어느덧 과거가 돼버린 어떤 일이 결코 아니다. 이를 분명히 밝혀야 교과서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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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온전한 역사책을 쓸 수 있는가?

 

   백지白紙 상태에서 교과서를 접하는 학생들은 역사 교과서에 역사가 (빠짐없이 또는 온전히)’ 담겨 있는 줄 안다. 그럴까? 천만에!

   우선 역사학자들이 무엇을 모를 지부터 생각해 보자.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페르시아 제국 등)이 어떤 진전을 이뤄냈는지, 그곳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까맣게 모른다. 전해오는 사료史料가 전혀 없으므로! 아프리카는 더 심각하다. 아프리카인들은 (유라시아 대륙과) 따로, (부족들이 저마다) 고립된 문명을 일구어 왔기 때문이다. 대부분 문자文字가 없었으니 저희끼리라도 공통된 (정신) 문명을 꾸리기가 어려웠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인더스 갠지스 문명이야 황하-장강 문명에 유추해서 짐작해볼 건덕지라도 있다. 동아시아 문명은 풍부한 사료를 전해주고 있으니까. “페르시아 제국에서도 옛 동아시아의 제자백가 같은 사상이 생겨났을 꺼야. 나라를 어찌 다스릴지, 비슷한 고민을 했을 터이니까.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와 공자, 노자는 서로 생각이 통했을 거야.” 그런데 아프리카의 역사를 지금 어슴푸레하게라도 되살릴 길은 있을까?

   ‘사료 없음뿐 아니라 편견도 커다란 문제다. 누구의 눈길로 보느냐는 문제!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임을 부인할 수 없는데 교과서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두 쪽의 눈길을 대충 얼버무렸다. 각 나라(그것을 주도하는 지배층)들의 찬란한 역사에다가 민중이 능동성을 발휘한 대목을 얼마쯤 구색 갖춰 섞어 놓기! 교과서를 대충 훑고 나면 인류 문명, 좀 시끄러운 구석도 있었지만 아무튼 대단한 것이구나!”하는 인상을 얻게 된다. 정말 그런가?

   베냐민은 밑바닥 사람의 눈길로 보자면 세상이 언제나 비상시국非常時局이랬다. 한 군데 떠올리자. 미얀마의 소수민족 가운데 로힝자족이 있다(인구 130). 다른 소수민족들은 그래도 중앙정부가 가끔 포용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국가가) 아예 국적마저 빼앗아 버렸다. 온갖 학살과 약탈의 만만한 대상으로 굴러다니다가 보트 피플이 됐다. 이들더러 세계사책을 쓰라고 하면 뭐라고 쓸까?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면?

   그러니까 역사학(곧 사료 탐구)만으로 역사책을 쓸 수 없다. 문자 없이 문명을 일궈온 아프리카인들의 역사는 인류학과 문화예술의 도움을 받아야 그 흔적이라도 그려낼 수 있다. 혹시 사료를 다 갖춘다면 씌어질 수 있을까? 신이 옹근 존재라면 온전한 역사책도 어쩌면 나올 수 있겠지. 하지만 신 또는 정신분석학에서 일컫는 대타자大他者는 일관성이 없고 자기모순적이고, 어떤 보증도 없고 적대에 의해 빗금 쳐진 어떤 존재다. 은밀하게 줄을 당기는 어떤 섭리의 존재가 아니라 비틀거리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장치다. 급진신학자들이 말하듯이 신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원해야 할 노릇이다. 그러니까 (지배계급의 눈길과 피지배계급의 눈길로 갈린 세상에서) 우리는 온전한 역사책에 한 걸음, 두 걸음 더 다가서는 노력만 쏟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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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역사책을 온전히 쓰는 일은 책상 앞에 머무르는 것(=사료를 탐구하는 일)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세월호 사건은 대중이 그 사건을 잊도록 대한민국 국가(!)가 집요하게 윽박질렀다. 애통하고 원통한 사람들이 끈덕지게 싸우고서야, 지금 기억 교실이 불완전하게나마 대중의 뇌리에, 또는 상징계에 자리잡았다. 대한민국 국가가 그동안 19805.18의 광주를 기억하게끔 강박한(몰아붙인) 힘이 어디서 나왔는가. 다들 두려워서 슬며시 떠나는데도 끝까지 남아, 전남도청을 사수死守하다가 죽어간 투사들의 멸사봉공滅私奉公 덕분이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기념식이고, 교과서에 한 줄 써넣기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1991년 중앙정보부는 노동자 박창수를 밀실로 붙들어다가 전노협(전국노동자협의회)을 탈퇴하라!”며 모진 고문을 퍼부었다. 박창수는 내가 전노협인데 내가 나를 어떻게 떠나라는 거냐.”며 거부하다가 죽었다(고문의 결과였는지, 살해당했는지). 그런 투사들의 음덕蔭德 덕분에 여지껏 민주노조운동이 버텨올 수 있었는데 정작 그런 투사들의 발자취는 대중의 눈길에서 까맣게 사라졌다. 1126, 광화문의 200만 촛불집회 무대 위에서 가수 안치환이 마른 잎 다시 살아나라는 노래를 불렀다. “꿈이라 뉘 말하는가, 되살아오는 세월을. 가슴에 맺힌 한들이 일어나 하늘을 보네...” 그 노래를 들으며 5.18의 광주가, 전태일과 박창수가, 숱한 투쟁의 세월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그가 대중한테서 잊혀져가는 70~80년대 민중투쟁의 역사를 (감격스레) 호명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지금 민중들의 투쟁 덕분이었다. 싸우지 않고서는 우리의 과거를 구원해낼 수 없다. 모든 싸움이 다 패배한다 해도 끝내 패배해서는 안될 싸움이 기억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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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는 미래의 비전을 담고 있는가?

 

   교과서를 읽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들더러 뭘 하며, 어떻게 살라는 거지?” 그저 온갖 사실과 숫자들만 늘어 놨을 뿐이다. 군데군데 일깨움을 주는 대목은 있지만 책 전체를 꿰뚫는 어떤 지향성이 없다.

   역사 교과서가 보여주는 가장 큰 구멍은 국가 이전의 인류의 삶을 서술한 대목이다. 그저 어떤 물질생활을 했냐는 주목注目밖에 없다. 구석기를 거쳐 신석기 혁명! 그리고 농업 혁명! 그 기나긴 시대를 짤막하게(날림으로) 서술하고는 국가 시대로 바쁘게 넘어간다. 석기 시대는 너무 후진 시대이고, 칭찬해줄 구석은 생활 도구를 발명해내는 슬기로움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란다. 과연 그러한가?

   먼저 생산도구에만 주목하는 역사 서술은 산업혁명을 의기양양하게 뽐내던 18~19세기 사회진화론 시대의 얄팍한 눈길의 소산所産임을 짚어 두자. 지금의 성숙해진 인류학의 앎을 간단히 간추리자면 이렇다. 사람들이 정주定住하기 시작했고, 그럼으로써 (범위가) 커져가는 사회를 온전히 꾸릴 지혜를 모아낸 것이 새로운 석기石器보다 더 막중하다. 유랑하는 밴드(작은 동아리) 사회에서는 사회 성원들끼리 평등자유를 꾀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까짓 거, 수틀리면 (너희들 곁을) 떠나지 뭐!” 정주定住함에 따라 불평등이 차츰 싹트던 씨족(부족) 사회에서 평등자유를 유지하려면 정치적 지혜를 모아야 하고, 불평등을 키우려는 힘과 치열하게 대결을 벌여야 한다. 사람들의 흔한 통념은 이런 것일 게다. “원시 씨족(부족) 사회는 당연히 또는 자연스럽게 국가 사회로 옮아가게 돼 있었어.” 삐에르 클라스트르는 이런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씨족(부족) 사회를 지탱하는 원리는 국가를 거부한다는 거야. 지배층이 따로 생겨난다면 성원들의 평등자유 관계가 무너지거든.” 그 원리를 무너뜨리고 난 다음에야 국가가 들어설 수 있었다.

   ‘원시 공산제사회에 대한 맑스의 서술은 중요한 한 대목을 짚은 것이긴 해도 너무 소략하고 불완전하다(그 시절, 인류학의 성과가 빈약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말리노프스키와 마르셀 모스 이후로, ‘증여 경제’(또는 호수互酬 경제) 개념이 자리잡았다. 전자가 생산양식에 의거한 개념이라면 후자는 좀더 폭넓은 교환양식에 의거한 개념이다. 증여 경제는 국가(폭력을 독점한 지배층)의 원리를 반기지 않는다. 요즘 개혁적인 지방자치체의 물적 지원에 힘입어 사회적 경제를 탐색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이들도 증여 경제를 이론적 배경의 하나로 입에 올린다. 이것이 우리가 국가 이전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관념이라는 사실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교과서는 이러저런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말고 역사가 꾸려져 온 기본 원리 또는 흐름을 굵직하게 짚어줘야 한다. 여지껏은 생산양식의 구분에 따른 맑스의 역사발전 단계론이 많이 인용됐더랬는데 이는 (가리타니 고진이 간추린) 교환양식론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호수(증여) 경제로부터 약탈/재분배 경제(국가의 원리)와 상품 경제(자본주의의 기초)를 거쳐 어소시에이션(사회주의) 경제로 옮아가기!

 

   왜 증여경제에 주목하는가? 아득한 옛 과거로부터 오래된 미래를 엿볼 수 있어서다. 기원전 만 년에서 기원전 2천년까지(곳에 따라서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인류가 살아온 살림살이 방식이다. 요즘의 우리는 그 시절을 까마득히 잊고 살지만, 국가 없이 증여 경제를 누리며 살아온 시절이 국가에 복속돼 살았던 시절보다 훨씬 길다(옛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고대 국가가 일찍 탄생하기도 했으나 나머지 지역은 그러지 않았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폭력을 독점한 지배집단이 세우는) 국가의 틀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품은 사회상社會像은 아무리 소박한 것이라 해도 그 핵심에 있어 요즘의 우리보다 훨씬 진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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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여 경제의 진취성(=평등세상에 대한 지향)을 재도입하려는 시도는 근대 사회주의 운동에 와서 시작된 게 아니다. 이미 일찍이 보편종교(기독교와 불교)가 증여경제를 더 높은 수준에서 회복하려는 어소시에이션 경제의 출발점이었다. 우리는 로마제국이 만민을 포용하는 국제법(만민법)을 실행하는 등 진취적인 문명임을 잘 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4세기)는 그 역사적 의의를 얼마쯤만 수긍했다. 그는 국가가 정의justice를 팽개치면 강도 패거리와 다를 바 없다지 않았는가. 그뿐 아니라 국법이 신법神法보다 한참 아랫길이라 했다. 국가라는 것을 어떻게든 지양돼야할 존재로 본 것이다(‘하느님의 나라를 어디 인간 내면 속 자기 위안의 세계로 쪼그라뜨리지 마라). 물론 보편종교들의 드높은 취지는 곧 제국(국가)에 포섭돼 차츰 퇴색했지만 그 뒤로 아주 죽어버리지는 않았다. 끊임없는 종교개혁 운동들(기독교 이단, 미륵불교)에는 그 지향성이 살아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신법神法을 단순히 종교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어소시에이션(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추구(선포)로 읽어내는 일이다.

 

   요즘 우리는 민주주의의 후퇴 현상(극우 정치세력의 발호 등) 뿐 아니라, 근대 자체로부터 퇴행하는 조짐까지 겪고 있다. 유럽연합의 상위 기구 차원에서 엘리트 몇몇이 사회경제를 주물러 대서 국민국가들을 껍데기만 남기는 재봉건화 흐름이 유럽에 출몰한지 오래다. 어느 교육부 관리 놈이 민중은 개돼지일 수밖에 없다고 입방아를 찧고,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야하고 뇌까린 해프닝도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스멀스멀 출현하는 신분의식). 근대 비판을 뿌리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봉건은 악이요, 근대는 선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들이대고 우리 역사를 읽었다. “봉건 조선왕조? 그거, 썩어문드러져서 망했지. 성리학? 케케묵었어. 유길준과 최남선이 결국에는 친일의 길로 갔지만 어쨌든 근대 사회의 몸부림은 (조선왕조 때보다) 훨씬 나은 거야. ? 더 잘 먹고 잘 살게 됐으니까... 어쩌구저쩌구.” 하지만 근대 이전 사회의 제국帝國의 원리와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화의 논리를 견줘 보자. 몽고제국과 로마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이 어디 딴 동네 사람들을 겁나게 착취하고 차별해서 제국을 이뤄냈던가? 그들은 종교적 민족적 관용에 의거했기에(의거한 만큼) 제국의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조선왕조의 임금들이 어디 지금의 자본가계급과 이명박근혜 정권만큼 지독하게 민중을 수탈하고 폭력으로 짓눌렀던가? 근대의 지배담론(이데올로기적인 겉옷)인 자유민주주의의 진취성이 소진된 지는 이미 오래다. 서아시아의 정치사 책을 들춰보면 20세기 들어 오스만제국(1300~1922)으로부터 서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독립했던 것은 어쨌든 잘한 일이라고 전제해 놓고 서술했다. ‘민족 자결의 이념이 당연히 옳다는 얘기다. 그런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그 결과가 어떤가? 제국의 붕괴는 유럽의 부르주아지들한테만 이로운 것이었다. 20세기 후반, 그곳에 이슬람주의가 뜻밖에(!) 부활한 것은 자주 평등의 지역질서 실현에 대한 (일그러진 또는 한참 미달하는) 꿈의 소산所産이다. 근대 역사를 고쳐 읽자. 제국의 통치 원리에 만족하자는 말이 아니다. 근대의 국제질서는 그것보다도 퇴행했다는 말이다.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탐색, 이를테면 UN 같은 것의 환골탈태가 절실하다. 제국의 원리를 더 높은 차원에서 회복해야겠다.

 

덧대기 : 자본은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며(자기를 재생산하려면 그래야 한다) 굴러가는 영혼 없는 자동기계다. 자본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그게 (전면화 될 경우) 사회를 얼마나 파괴하는지 전혀 모른다. 사회에 대한 자본의 무관심(!)은 자못 성스럽기까지 하다. 현실의 자본가들은 어떤가? 조무래기 자본가들이야 사람 모습을 대부분 갖췄고, 그들 자신이 대자본에 삼켜질 때는 피눈물도 흘린다. 하지만 잘 나가는 왕초 자본가들은 점점 (기괴한) 자동기계를 닮아간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이 곧 사회라는 정신착란적인 세계관에 도취돼 있으므로. 자본주의 체제는 반드시 보편화(세계화)’됐어야 할 것도 아니었고,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한테는 미래가 꼼지락거릴 여지마저 사라진다. 뒤늦은(하릴없는) 깨달음이겠지만 인류 사회는 이 길, 곧 상품 경제의 전면화쪽으로 오지 말았어야 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19~20세기 세계 사회주의운동이 승리할 수도 있었다).

 

   요컨대 교과서는 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을 담아내야 한다. 지금의 세계 질서가 갖고 있는 어두운 구석을 여지없이 파헤치고 새롭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션 경제)에 대한 지향을 밝히지 않고서 아이들의 눈을 틔워줄 수는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불러 온다면 그는 그것이 신법神法이라고 못 박을 것이다. 교과서는 인류가 맞닥뜨린 이러저런 문제를 건성으로(!) 읊어 놨다. “환경위기, 국가간 분쟁, 빈부격차 어쩌구...” 아이들은 책을 덮는 순간, 거기 적힌 얘기들을 잊어버린다. 활자들이 머릿속에서 죄다 휘발해 버린다. “지금 대다수 인류는 야만의 시대로 돌아갈 위험이 아주 높아. 너희들, 어쩔래? 전쟁이 터지거나 기후 재앙이 닥쳐온다면(일부 나라의 민중은 이미 겪고 있는 일인데) 어떡할 거냐?”하고 정색正色하고서 질문을 던져야 비로소 공부가 시작된다. 아이들을 생각(배움)의 길로 다그치지 않는 책은 책이 아니다. 그러니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 보자.

 

 

국가도 자살하는가?

-역사의 교훈을 얻으려면

 

   사람은 자살할 줄 아는 짐승이다(드물지만 돌고래도 자살할 줄 안댔다). 절망에 휩싸여 앞뒤 가리지 않고 제 목숨을 절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가끔은 미래의 희망을 어슴푸레 그리며 치열하게 제 목숨을 헌납하여 사람들을 울린 경우도 있다(전태일을 비롯한 수많은 열사들).

그런데 국가도 자살하는가? 그렇다! 히틀러의 나라가 대표적인 경우다. 침략전쟁에 나서고 애꿎은 유대인을 학살한 주체는 나치당만이 아니고 독일 국가 자체였다. 한번 비탈길로 치닫기 시작하니까 걷잡을 수 없어졌다. 그래서 제3 제국은 간판이 뜯겨 나가 쓰레기통에 처박혔고, 독일 민중은 헌법을 크게 고쳐 쓰고서야 새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이 자살이 아니고 뭐냐. 3제국의 역사적인 범죄가 낳은 후과後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데, 이를테면 그 사건 이후로 독일의 학문이 줄곧 침체 상태에 빠졌다. 숱한 학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망명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2차 대전 이후로도 (범죄국가의 시민이 무슨 염치로 진리를 입에 올리겠냐며 다들 주눅이 들었기 때문에) 도무지 학문의 고결한 기풍을 꽃피울 수가 없었다. 아시는가? 19세기에 칸트와 헤겔의 독일 관념론 철학이 꽃피어 났던 비결은 오로지 프랑스혁명의 가슴 벅찬 감동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40년 전에 일본의 지식인 여럿이 일본의 자살이라는 공동 저작을 냈다. 로마제국의 빵과 서커스가 말해 주듯이 국가는 안으로부터 무너지기 마련이라며 일본의 장래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4년 전에는 일본의 자살이라는 공동 저술의 가상 소설이 나왔다. 국제 자본의 농간으로 일본이 경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민생고民生苦에 따른 폭동이 일어나고... 일본 국가가 장기 침체의 경제를 간수하지 못하고 외국(중국) 투기꾼에 휘둘리는 등 국가 경영의 능력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잿빛 전망이 담겨 있다.

   일본 지식인들의 걱정은 아직 기우杞憂일른지도 모르지만, 미국은 최근에 진짜로 자살할 뻔했다. 2013년 말의 이야기다. 미국은 정부가 얼마만한 액수까지 빚을 질 수 있는지 그 최고액 한도를 법으로 정해 놓고 있다. 루즈벨트 때 자본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런 법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지만) 미국은 줄곧 정부 빚이 늘어났다. 후기 자본주의는 빚으로 자기모순을 메꾸는 체제 아니냐. 그러니까 빚을 늘릴 때마다 법에 명시된 그 숫자를 고쳐야(늘려야) 하는데 그동안에는 (좀 귀찮은 일이긴 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거, 고치지 않으면 미국 정부가 당장 국가부도 사태를 맞는데 그걸 괜찮다고 여길 미친놈들이 미국 의회에 그리 많지 않아서다. 그런데 2013년에는 사정이 달랐다. 미국 공화당에 눈먼 티파티 운동(=연방정부를 확 찌그러뜨리자는 주장)’ 패거리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이들은 국가부도도 불사할 기세였다. 미국 공화당이 미치광이 행보를 보인 게 트럼프가 약진한 작년부터가 아니다. 국가 디폴트(채무 불이행)와 연방정부 셧다운이 닥쳐오기 이틀 전, 모든 언론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덕분에 가까스로 법 개정이 이뤄졌다. 디폴트가 선언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미국 경제가 엉망이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중국과 일본, 한국이 잔뜩 사들인 거액(얼마쯤 될까?)의 미국 재무부 채권도 휴지조각이 돼버린다. 이 세 나라 민중도 (B-52폭격기로부터) 집중 폭격을 맞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언제 어떻게 뒤흔들릴지 모른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은 그런 일이 없는가? 박근혜게이트가 터졌을 때, 나는 , 꼴통 보수세력이 드디어 자살골을 넣었구나!” 싶었다. 지금 자살골을 넣었다는 말이 아니라, 일찍이 그들이 비아그라 박근혜를 대통령 후보로 뽑아 올린 짓이 자살골이었음이 지금 소급해서(뒤늦게) 드러날 거라는 얘기다. 물론 그게 지금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그 작자를 민중이 단칼에 쫓아냈을 때 그럴 터이다. 그 치가 혹시라도 탄핵을 회피하고 임기와 제 뱃속을 그럭저럭 채운 뒤, 멀쩡한 꼴로 청와대를 떠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국회 탄핵 표결을 앞둔 때에 이 글을 쓴다). 그럴 경우, 뒤죽박죽이 되는 동네는 친박파와 조중동 쪽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세우지 못한) 대한민국 국가 자체가 되겠지. 우리는 그랬을 때의 나라꼴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현재의 향배向背가 과거의 의미를 다시(!) 규정해 넣는다.

   다음 경우는 어떠한가? 십수 년 뒤 어느 날, 경주에서 강도 7.5의 지진이 터져 거기 원전 두어 군데가 고장이 나고 방사능이 철철 쏟아져 나오는 경우는? 동남부 지역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사람 살 곳이 못 돼 버릴 때는? 그때는 국가뿐이 아니라 한국 사회모두가 (말 그대로) 자살해 버린 셈이 된다. 그때 자살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모두가 날마다 자살용 수면제를 털어 넣고 있음이 그때 (소급해서) 확정된다. 우리가 어떤 사태 앞에서 도무지 속수무책이 될 때, 그것을 자살아닌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지금 지배세력이 별다른 견제도 받지 않은 채 원전 가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어쩌면 (국가를 넘어) 한국 사회의 자살을 초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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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교훈은 참으로 무겁다. 후쿠시마 원전이 무너지기 전에는 그게 어김없이 터질 일일지 단언할 수 없었다. “그럴 가능성(확률)은 아주 드물지. 그런 걱정일랑 아예 관두자.” 하지만 사고가 터진 뒤에 바라보자면 그 일은 어김없이 터질 일이었다. 1류 선진국이라면서 발전소 건설/관리가 대충대충이었으니까 아니 터질 수 없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더 엄격히 관리했더라면) 예방할 수도 있었던 일이 분명하다. 세상을 어느 쪽 관점에서 봐야 할까? ‘역사의 교훈을 얻는다는 말은 사후事後의 관점에 서겠다는 결심이다. 벌어진 일을 오롯이 떠맡겠다는 결단! 후쿠시마를 겪고 나서, 우리는 그런 불행이 우리한테도 (더 끔찍하게) 벌어질 수 있음을, 그것이 잠재 필연적인 것이자 아직은 우리의 자유가 발휘될 수도 있는 일임을 무겁게 새긴다. “우리 죽은 뒤에 대홍수가 나건 말건...”하고 외면하는 천민자본주의 유아론자唯我論者들만이 그것을 확률의 문제로 치부한다.

 

덧대기 ; 고등학교 교과서는 칼뱅의 예정설을 너무 소략하게 소개해 놨다. “인간의 구원 여부는 신이 미리 정해 놨는데 그게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뭔 얘기람! 그거 정신착란적인 얘기가 아니냐는 대꾸도 나올 만하다. 고등학교 샘이 학생들한테 너희가 좋은 대학에 갈지, 말지는 이미 신이 결정해 놓은 일이야. 너희가 열심히 공부하든 말든. 그러니까 열심히들 공부해!”하고 말한다면 학생들이 뭐라 반응할까?


   예정설을 얼핏 들으면 신이 미래에서, 최후의 심판(곧 결정적인 사건) 뒤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보자면 지금 우리가 벌이는 짓들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가 훤히 보일 터. 하지만 달리 생각하자면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신이 무엇일지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따른다. 지금의 우리를 소급해서 돌아다 보는 신은 우리 바깥에 스스로 있는 어떤 초월적인 남other이 아니다. ‘또 다른 우리일 뿐이다! 먼 훗날의 남들과 응답하기를 바라는, 후손들 앞에서 떳떳하고 싶은 우리! 정말로 사람답게, 깊은 눈길로 살고 싶은 우리! 그 목소리에 따르자는 지상至上 명령으로 예정설을 수용할 때, 거기서 참된 자유가 싹터 나온다. 북미의 선주민 호피족들한테는 이런 속담이 전해져 온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다린다.” 우리가 세상이 겪고 있는 갖가지 문제를 자기 일로 떠안을지, 외면할지를 우리는 사후事後의 우리로서 판단해야 한다.

 

   ...오랫만에 온 누리에 민심의 촛불이 타올랐다. 미친바람이 불어 때로는 흔들린다 해도 그 촛불은 끝내 꺼지지 않으리라. 뭇 사람이 살아야 하니까 말이다. 다들 살고 싶어 촛불을 든다. 그 촛불에 옛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선인先人들을 구원해낼 존재는 바로 우리들이리라. 우리 자신을 구원해낼 존재도 바로 또 다른 우리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기다린다. “서럽다 뉘 말하는가,♪♫ 흐르는 강물을. 꿈이라 뉘 말하는가, 되살아오는 세월을...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

 

   뒤풀이 : 박근혜게이트가 터지고 나서, 대뜸 역사의 반복테제를 떠올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비극으로 터져 나온 사건은 어김없이 희극적인 사건으로 반복되기 마련이라는! 나폴레옹의 패배는 건달 조카 나폴레옹 3세가 설쳐대다가 몰락함으로 인해 더 확실한 것이 됐다...등등. 박근혜의 경우는 어떠한가? 정신분석학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숭고한 존재만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존재도 불멸의 차원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거룩한 정치지도자로 찬양받는 작자가 대중 앞에 연설하러 나오다가 아뿔싸, 바지가 튿어져서 팬티가 다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점잔을 빼며 연설에 들어간다. 청중한테 어떻게 비치겠는가. 또 다른 얘기로, 소설 속 주인공과 놀아난 정부情婦가 어느 날 매몰차게 버림받자 자살하려고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었는데 아뿔싸, 설사약을 잘못 먹고 몇 시간을 화장실에서 고생한다. 이런 것이 희극에서 순수한 수준의 불멸성이라고 한다. 자기의 (상징적) 죽음을 견뎌내는 우스꽝스러운 숭고함! 우리는 지금 청와대에 들어앉아서 자신의 정치적 생명 연장을 위해 분투하는 박근혜한테서 어떤 외설적인 생명의 몸부림을 목도하지 않는가? 지구촌 모두한테 파란 알약(비아그라)’으로 놀림감이 된 작자가 저 자신은 애국자라고 자못 경건한 척 포즈를 취하면서 비-죽음(곧 죽음보다 못한 삶)을 버팅기고 있다. 우리는 멀쩡한 사람이 아니라 불멸하는 유령과 맞닥뜨린 셈이다. 끔찍한 일이지만, 다행스런 것은 박근혜가 (상징계에서) 죽을 때, 박정희도 따라 죽는다는 사실이다. 오호라, 눈먼 백성들의 죽은 아버지박정희와의 싸움이다.




04-담론과 문화(68-9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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