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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문화1]

네로보다 더한 네로, 아로아보다 더한 아로아

최정민(진보교육연구소 교육문화분과)

가사노동을 전담하고나서 맨 처음 바뀐 문화적 변화는 이른바 ‘애덜’ 프로를 시청해야한다는 점이다. 리모컨 사용권을 빼앗기고 조용히 골방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행복이다. 이를 두고 아동 학대(방임)라고 한다면 욕먹을 각오는 되어있다. 그런데 문제는 밥을 떠먹이며 어쩔 수 없이 시청하는 경우다. ‘보니 하니’라는 애덜이 보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MC도 마음에 안 들고 재미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다. 특히 길들여진 언어사용은 짜증난다.

하지만 군계일학이 있었으니 바로 ‘프란다스의 개’다. EBS에서 저녁 7시 좀 넘어 시작한다.(이미 종영했다. 그 뒤를 미래소년 코난이 잇고 있다) 주인공이 죽을 수도 있다는 예외를 보여준 최초/최후의 애니메이션이다. 일본에서는 네로를 살려달라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애절하게 외쳤다는 후문이다.

아로아의 아빠는 아로아가 가난한 아동노동자 네로와 친구가 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긴다. 물론 막판에는 후회하지만, 죽은 뒤에 무슨 소용인가. 때는 1870년 19세기 말이니 우리로 따지면 고종이 왕이 되고 나라 안팎이 소란스러운 시대였다. 이 때 ‘프란다스(프랑드르) 지방은 네덜란드의 독립으로 무역의 중심지가 암스테르담으로 이동되어 곤란한 지경이었으나 이후 1863년 스헬데강의 통행권을 매수해서 막 발전하기 시작하는 단계이다’(백과사전 참조) 따라서 대도시 안트베르펜 배후지인 농촌지역의 민중의 삶은 지금의 유럽과 판이한 과거였을 것이다.

네로는 조실부모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우유배달을 하며 힘들게 살지만 밝게 살아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마저도 돌아가시고 동네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면서도 미술대회에 그림을 출품하게 된다. 만약 여기서 네로가 1등이 되고 그래서 훌륭한 화가가 되었다라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프란다스의 개는 우리의 기억에 오래남지 않았을 것이다. 네로의 그림은 뽑히지 않았다. 이건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다. 정식학교를 다녀 본적도 없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던 네로가 자질은 있었겠지만 낙선이 당연하다.

네로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루벤스의 그림을 보며 성당에서 눈을 감는다. 파트라슈와 함께. 일본과 한국의 수많은 아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면서 말이다. ‘프란다스의 개’라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도 있고 에니메이션 주제가를 다시 부른 이승환의 노래도 있으니 우리세대의 감동은 유별나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잘 울지 않는다. 그 정도의 죽음은 그 아이가 보았던 여러 죽음에 비해 스펙타클하지 않다. 서든데쓰에서 피를 튀기며 자신이 쏜 총에 죽는 적군과 엽기시리즈의 황당 시츄에이션, 테러리스트에 죽어간 인질 동영상을 보았던 터라.


1830년 벨기에 헌법에 교육권을 명시했지만 실제로 1914년 이래 6세에서 14세까지 의무교육이었고, 1983년에 6∼18세로 바뀌었다. 당시 벨기에 1인당 국민소득을 넘어선 대한민국은 의무교육은커녕 살인적인 경쟁 입시로 감성은 매말러 간다. 네로는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지만 20세기 유럽은 교육과 의료만큼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책임지는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2만불 국민소득 시대를 열었지만, 우리의 ‘네로들’은 전문적인 그림공부는 커녕 싸구려 보습학원에서 국영수 공부에 매진한다. 하지만 남은 것은 비정규직으로 자신의 행복을 미래로 연기한 엄마의 요통과 관절염뿐이다. ‘네로들’은 나름 노력했지만 생소한 이름, 열악한 환경, 고액의 등록금을 내야하는 대학을 나와 실업 청년으로 상징되는 파란 츄리닝만 남았다.

국민 모두가 입시 로또에 당첨되려고 그렇게 인생을 걸었지만 95%가 망했다. 유럽엔 더 이상 네로가 없지만 찬란한 대한민국에는 죽은 네로보다 더한 살아있는 네로들이 널려있다. 상류층의 대한민국의 유소년들은 조기유학, 어학연수로 엑서더스가 진행중이다.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의 고통도 크다. 일종의 배부른 고통은 어른들의 욕심에 기인한다. 아로아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로 아로아가 네로와 친하게 지내기보다는 영국에 유학을 가서 열심히 공부하기를 원했다. 어린 나이에 영국에 간 아로아는 향수병에 걸려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다.

19세기말 유럽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교육현실의 차이점은 하나다. 유럽은 출구를 찾았고 우리는 찾고 있는 중이다. 네로보다 더한 네로를 아로아보다 더한 아로아를 대한민국 학교에서 찾는 것은 쉽다. 입시폐지가 우리 아이들의 행복을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아는 어른들을 찾는 것은 더 쉽다. 다만 그들은 말한다. ‘여러분 얘기 맞는데요. 그게 될 까요?’ 그 다음은 우리의 몫이다. 긴 겨울이 시작된다. 땅속의 죽은 듯 얼어있던 파가 겨울이 지나면 다시 살아난다. 그렇게 겨울을 넘긴 파는 유난히 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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