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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어느 관념적인 평등주의자의 넋두리

2001.11.08 14:03

정은교 조회 수:1826 추천:4

어느 관념적인 평등주의자의 넋두리

어느 관념적인 평등주의자의 넋두리

정 은 교 (잡필가)

 

  이번 글에서는 '평등'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잠시 컴퓨터 화면을 우두망찰 들여다 보노라니, 얼마전 TV에서 비춰준 한 늙수구레한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숲 속의 잠자는 공주가 아니라) 거리의 잠자는 아줌마가 있다.'는 시민의 제보를 받고 TV 카메라가 찾아갔다. 그 여인은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오뎅을 팔고 있었는데, 손님이 말 걸 때 빼고는 시도 때도 없이 졸음에 빠져드는 것이다. '여기 떡볶이 2인분 주세요!'하는 말이 들리면 부시시 눈 떠 접시 챙겨 건네고는 또 어느 새 스르르 잠의 나라로 미끄러져간다. 보드라운 베개와 이불이 감싸주는 고급스런(?) 꿈나라가 아니라, 대형버스의 굉음이 귀를 찢는 바람찬 한길 가에 그것도 꾸부정하니 선 채로! 저러다 떡볶이판에 머리를 처박지나 않을까, 위태로운 자세로! 손님 중에 동정심 없는 사람은 다들 값도 치르지 않고 달아났을 것이다. 취객들의 발길도 끊기고,  쓰레기만 무심히 나뒹굴고, 딴 노점상들이 수레 챙겨 귀가길을 서두르는데도 여인은 꼼짝않고 서서 졸았다. 새벽이 어슴츠레 밀려올 무렵, 가까스로 눈 뜬 여인이 집으로 향한다. 두세 시간 눈 붙이고 다시 나와 이번에는 옥수수와 떡이 담긴 함지박을 내려놓고 쭈그려 앉는다. 거기서도 틈만 나면 존다. 오후에는 집으로, 어둑한 지하실 단칸 셋방으로 돌아가 오뎅이랑 떡볶이랑 수레에 차릴 것들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인은 졸 틈은 있어도 몸 눕힐 겨를은 없다. 먹을거리 장만이 끝나면 어김없이 거리의 도돌이표 쳇바퀴 일터로 돌아온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여인은 큰 빚을 졌다고 했다. 남편은 3년 전 이 세상을 떴다. 아들놈 하나 있는 것이 나이는 차고 넘친 성인이건만 무슨 말 못할 병에 시달려 제 어미를 봉양하기는커녕 얹혀 사는 눈치였다. 3년 전부터 여인은 잠 한 숨 변변히 자지 못했다고 한다. 매연과 소음으로 뒤덮인 거리에서 함지박 옥수수, 팔아봤자 몇 푼이었겠는가. 꼬깃돈도 아쉬워 여인은 24시간, 장삿길에 나섰다. 병이라 할 만큼 졸음에 빠져드는 그 증세, '만성 수면 결핍'이 낳은 결과가 분명하지 싶었다. 왜, 예전에 군대에서 경계 근무 섰는 병사들 중에 두 눈 버젓이 뜨고서 잠자는 재주꾼들(?), 있었다지 않은가. 믿거나 말거나...

  왜 사누? 그 여인은 왜 사시는고? 오로지 돈 벌려고 산다. 빚 갚으려고. 아들놈 건사하려고. 살기 위해 버는 것이 아니라, 벌기 위해 산다. 인생의 목적이 그것이고, 애오라지 실낱같은 삶의 낙이 그것이다. 어디 잠깐 쉴 터도, 겨를도 베풀어주지 않는 야멸찬 서울 하늘 아래서 그저 '돈 버는 기계'가 되어 몸을 놀린다. 목숨 이리 질긴 것을. 기계만큼 질기고 로봇처럼 무심한 것을. 임성훈이가 진행하는 프로였던가. 그저 호기심꺼리 건지러 찾아간 TV 카메라에도 눈살 찌푸릴 줄 모르는 무표정한 얼굴. '평등'을 말하려니 그 얼굴부터 떠오른다.         

  우리 사회에는 '평등'이란 낱말을 귀에 담기만 해도 두드러기 돋는 사람이 꽤 된다. '평준화를 해체하지 말라고? 쯧쯧, 쟤네는 획일적이고 관념적인 평등주의자, 못 말리는 꼴통들이야!'하고 쑤군거리는 소리도 곳곳에서 들었다. 그 소리 들을 때마다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생각난다.

  하나는 일찍이 30대 후반에 학벌에서 밀려 어엿한 회사를 내쫓기듯 관둔 뒤로 엄벙뗑덤벙뗑 지내다가 지금은 어느 구멍가게 회사에서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쥐꼬리 봉투 받아 간신히 입 안의 거미줄을 걷는다. 그곳마저 문 닫았을 때 어디로 갈 수 있을지, 지켜보는 사람이 불안하다. 한 분은 퇴직금도 못 모으고 회사를 관둔 뒤로, 오래도록 벌이가 없다. 무슨 수로 사는지 알지 못한다. 극도로 그악스럽게 허리띠를 졸라댄다는 사실만 어렴풋 안다. 한 분은 핸들을 잡고 살아왔는데, 얼마 전에 수족이 떨리고 바보가 되어가는 알츠하이머병인가에 걸려 꼼짝없이 극빈자로 전락할 일만 남았다. 월남전 고엽제 탓일지도 모른다며, (되든 안 되든) 신청을 넣어 놨는데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그 보상 타는 날 뿐이다.  처조카놈은 끔찍한 교통사고로 거진 외팔이가 되었다. 제 잘못이 커서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어찌 살아갈지 막막한 놈이다. 등 따습게 사는 사람이 벼랑 끝 인생을 만나봐야 도와줄 바도 그닥 없어서 마음만 불편하고, 그래서 우리 부부는 문병도 가지 않았다. 한때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평범한 소시민으로 돌아온 지기(知己) 중에는 휘청거리며 사는 사람이 많다. 사교육시장에서마저 고용 불안을 겪느라, 사람 볼품이 없어져서 학생운동의 동지였던 부부가 지금은 웬수 사이로 바뀐 경우도 있었다. 몇 달 전에는, 행려병자(行旅病者)로 쓰러진 한 후배를 시립병원에 넣게끔 도와달라며 대학 동기한테서 연락이 왔길래 몇 푼 알량하게 송금했다. 보시라! 이렇듯 '20 대 80 사회'의 출현을 말해주는 사례는 고개만 잠깐 돌려도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그 뿐이랴. 강남 사람이라고 다 호시절을 노래하는 것 아니다. 친척 아재 중에는 경제 고도성장의 시절에 S대 좋은 학벌 살려 견실한 엔지니어로 넉넉히 살다가 유망 대기업 월급쟁이 사장까지 해먹고 은퇴한 분이 있다. 박통 전통의 은혜를 망극하게 입었으니, 무엄하게 대든 전교조 같은 무리들을 당연히 뱀 보듯, 벌레 보듯 바라보는 사람이다. 두둑한 퇴직금 굴려서 화려한 금리생활자로 느긋이 지내는 줄 알았는데, 얼마 전 만났더니 쬐그맣고 초라한 중소기업의 월급쟁이 사장으로 다시 취직해 있더라. 은행 이자만으로는 넉넉한 살림이 보장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놈의 사회는 내로라 하는 기득권 계층마저 제 앞날을 안심하지 못하게 하는 '위험 사회' 아닌가.

  우리는 왜 애써 '평등!'을 끄집어내는가? '불평등'만 눈에 띄었다 하면 배알이 뒤틀리기 때문에?1) 이웃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설설 아파오기 때문에? 그래, 우리는 심통 사나운 사팔뜨기들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지배엘리트들이여, 제발 부디 우리 '사팔뜨기'들을 너그러이 보아 달라. 숲 속의 공주는 하다못해 관음증의 눈요기꺼리로 나름의 상품값이라도 발휘하니 거뜬히 저 하나를 건사하겠지만 거리의 잠자는 아줌마들에게는 자신을 옹호할 삼팔따라지 끗발도, 너스레 늘어놓을 주변머리도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들의 입이 되어줄 사람도 몇은 있어야지 않겠는가. 앞만 보고 세계화 고속도로를 내닫는 사람에게는 거리의 한 풍경이, 아스팔트 포도의 한 부분으로 닮아버린 자취 없는 아낙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곁눈질할 줄 아는 사람이 그들을 본다.

  우리는 왜 '교육불평등'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대학 시절 귀동냥으로 덩달아 주워섬긴 마극사주의(馬克思主義)의 단순 조잡한 이분법을 못 벗어나서? 주입 암기식 교육/학습의 폐해가 이 동네에도 나타났다? 행여 오해하지 마시라. 우리도 '교육 불평등'을 자나깨나 왼 것은 아니다. 요즘부터다. 청년실업자가 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훨씬 웃도는 요즘! 문래동 쇠 깎는 공장들이 와르르 문 닫고, 그 요란했던 벤쵸 기업, 이름도 영어라서 더 멋진 'IT 산업'도 허상(虛像)임이 까발겨진 요즘! 경제가 오로지 '뉴욕 금융가'에 목매달고 사니, 교육 또한 가관이라. 영어 공용화론이 버젓이 판치고, 상류층 자제분에게는    '조기 유학'이 당연한 코스가 돼버리고, '영어 투자 능력'이 심층면접을 좌지우지하고, 기여입학제를 공공연히 떠들고, 서울대는 8학군 자녀들의 독무대로 거의 굳어가는 요즘!  '돈이 돈 벌고, 돈이 사람 키운다'는 속담이 진리로까지 격상되어가는 요즘! '20 대 80의 사회'가 '위험 사회'로까지 치닫는 요즘!

  몇 달 전엔가, 한나라당의 어느 금뱃지께서는 전교조를 가리켜 '사회주의자 집단'이라 서슬 퍼렇게 꾸짖었다. 걔들이 전교조 간부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고, 그리하여 김일성이나 레닌의 책을 학습했는지 압수 수색하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겉도 속도 다 빠알간 큰일 저지를 토마토 쯤으로 여긴 것 같지는 않다. 아마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란 자립형 사립고 따위에 질색팔색하는 '평등주의'란 뜻 정도겠다. 그런데 우리 '평등주의자'들은 과연 '평등'을 지고지선의 가치로 신봉 암송 복창 맹종하고 있는 것일까? 만해 한용운은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이 멀었다'고 부풀게 노래했거니와, 우리도 '평등!'의 아우성 구호만 들으면 두 근 반 세 근 반, 가슴이 두 방망이질 치는 것일까?

   넘겨 짚지 마시라. '자유''정의'다양성''관용''행복'프라이버시'... 온갖 가치들이 서열표의 1등을 먹으려고 갖은 쟁투를 다 벌이고 있는데 어찌 언감생심 '평등=독불장군'의 꿈을 꾸겠는가? 잠깐만 헤아리시라. 오오랜 인류 역사가 바로 '정복과 살육, 착취와 불평등으로 얼룩진 역사'였거늘, 어찌 우리가 섣부르게 '평등의 실현!'을 장담하겠는가.  

  일찍이 인류의 선현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디 감히 산술적 평등까지 넘봐? 비례적 평등만으로 만족혀!" 단칼에 오금을 박아버린 적 있다. 그가 말하는 '비례적 평등'의 잣대가 꼭 온당한지는 의심스럽지만, 산술적 평등의 달성이 까마득한 과제임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불평등을 덜어내는 길로 한 발씩 나아갈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평등!' 왈짜패가 거리를 온통 휘젓고 다닌다는) 모함과 덮어씌우기에 당해오지 않았던가? 근대의 역사에서 패권을 휘두른 가치는 오히려 '자유'였던 것을!  '평등주의'라는 낱말이 그저 좁은 뜻만 담은 보통명사에 지나지 않은 데 견주어, '자유주의' 개념은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라는 사실만 떠올려도 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평등주의'가 떠올려 주는 나라들이 지금 쪽을 못 쓰고 있는 반면, 자랑스레 '자유주의'를 떠벌이는 나라/무리들은 마음껏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이를테면 테러 박멸의 명분으로 초법적 군사행동의 자유를 누리는 미국)

  우리는 흔히 다음과 같은 선입견을 갖게 마련이다. "'자유!'를 외치는 사람은 이 사회의 약자가 틀림없어! 무언가 누구에겐가 짓눌리고 있으니 절규하는 것 아니겠어?" 많은 경우, 그 외침에는 진실이 들어 있다. 예나제나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누구의 자유인가?

   그들은 연약한 개인의 마스크를 쓰고서 사상 토론의 마당에 나타난다. '개인'이 강성한 '국가체제/기구'와 맞서는데 보나마나 게임의 승패는 뻔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조금이라도 '억압'을 휘두르지 않은 국가는 없었으니, 정의는 당연히 '개인'편에 쏠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떤 개인인가?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공동체의 구속을 본디부터 싫어하는 개인. 언제 어디서든 자신만만한 개인. "나는 다르단 말이야! 나의 '차이'를 뭉개려는 자는 가만 두지 않겠다!" 자신을 돋보일 문화자본을 넉넉히 보유한 개인. 소유와 영업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개인. 세계화 물결 속에서 얼마든지 헤엄칠 수 있는 개인!

  볼품없는 약자들은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노동조합에 기대거나, (실업에 시달리는 유럽 백인 하층민들처럼) 하다못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네오나치스트 정당에라도 기댄다.  그들에게는 '개인적 자유'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하다(노동기본권과 사회적 복지권 따위). 그런데 이것은 자유주의가 보장해주지 못한다. 아니, 솔직히 말해, 보장하기를 싫어한다.

  우리는 '자유!'를 입버릇처럼 외고 다닌 사람들일수록 파쇼 국가에서 더 톡톡히 은덕을 입고 살았음을 겪어서 안다. '자유총연맹'은 파쇼 국가의 충견들 아니었던가. '사학 경영의 자유!'를 금과옥조로 받드는 사학의 '주인'들께서는 전교조에 가입할 임금노예들의 자유를 근엄하게 짓밟아오지 않았던가. 호랑이의 자유와 사슴의 자유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을 헛 살아도 한참 헛 살았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는 '평등이 제1의 가치'라고 우길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다. 세상에, 자유민주주의 체제께서는 (조건의 평등, 결과의 평등은 관두더라도) '기회의 평등(그리고 법 앞의 평등)' 요거 하나는 학씰하게 보장해 준다고, 요란스레 떠들어 왔건만, 보장해 주기는 개코를 보장해 주었는가? 세계 최고의 학벌 사회에서 기회는 무슨 놈의 기회? '평등'이 얼마나 천덕꾸러기로 취급받는지, 소름 끼치게 아는데 우리가 헛꿈을 꾸겠는가. 헛제삿밥의 김칫국을 자시겠는가?

  생각해 보시라. 자본주의의 운영 원리를 과감하게 바꾸지 않고서는 때려 죽여도 평등 대동 사회가 오지 못한다. 대동 사회는 참으로 더디게 오는 것이요, 자본주의가 인간의 탈을 쓰는 그 만큼만 사회적 불평등이 덜어질 뿐 아닌가. 우리는 그 원인으로서 자본주의의 기제를 문제삼지, 그 결과로서 불평등과 평등 실현 여부에 조바심 내서 목 매달지 않는다. 그 기제를 그대로 놔두고 그저 불평등의 격차가 염려되어 소득재분배 미봉책 따위만 추구할 때, 국가재정을 방만하게 꾸린 케인즈주의의 오류가 생겨난다.(누이 좋고, 매부 좋고! 자본가 좋고, 노동조합 좋고!)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다.  

  우리는 다만 '자유와 평등이 함께 가자!'고만 요구할 뿐이다. "자유, 고거는 무조건 좋은 것 아녀? 내 말에 반대하는 놈은 자유민주주의 국시를 부정하는 놈이여!"하고 단세포처럼 떠드는 사람들에게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일깨워줄 뿐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당장 떠오르는 뜻은 <두 가치 간의 사회적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실을 말하자면 자본가 집단과 노동자 계급이 얼마쯤이라도 '공존'할 기반을 찾아야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쯤의 뜻은 여전히 절충적이다.

   누구의 자유와 권리, 무엇의 평등인가? 일부 유산계급의 선택의 자유와 소유의 권리, 그리고 명목뿐인 법 앞의 평등이냐, 아니면 대다수 민중의 사상과 결사의 자유, 노동기본권과 실질적인 민주주의냐? 제한된 계층만 기회와 재화를 누릴 때, 그 제한된 민주주의와 계급 분열 아래서는 '자유'도 온전히 꽃필 수 없다. 소유와 선택과 영리행위와 개성 표현의 자유는 만발할지 몰라도, 시인 김수영이 희구했던 학문과 언론의 자유는, 자유주의를 비판할 자유는, 자유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변혁시킬 자유는, 대동(大同) 사회를 만들어갈 자유는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의 깃발 아래서 문화적 보수주의 기류와 인종주의 풍조가 떼거리로 창궐하고, (인두껍을 쓰고서) 버젓이 약소민족을 짓밟는 깡패국가주의가 서슬퍼렇게 나대는 꼴을 우리는 지금 미국에서 본다.2) 자유주의자들은 마치 자유와 평등이 꼼짝없이 대립되는 것인 양 떠들어대지만, 현실에서 대립하는 것은 '일부 유산계급의 자유/권리 ↔ 대다수 민중의 자유/평등' 아닌가. 민중은 비단 불평등에 고통 당할 뿐아니라, 곳곳에서 옥죄어드는 부자유에도 신음하고 있다!

  자유주의는 오로지 국가의 경제적 규제를 허무는 데만 눈독 들이는 신자유주의든, 소수자(마이너리티)의 권리 회복을 돕는 혁신자유주의든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제1의적 가치로 두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물론 혁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사회 양극화 논리에 대한 '반성'을 깔고 있으니 그 점에서는 막가파들과 분명히 구별해줘야 하겠지. 그러나 여전히 '개인의 소극적 자유'에 은밀히 공감대를 두고 있는 혁신자유주의는 대동 사회의 적극적 실현에 늘 머뭇거린다. 정국이 삐딱한 구도로 굳어지면 이들 중에 역사 진보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무리가 수두룩하게 생겨난다. 한때 진취적 지식인이었던 손학규가 몇 해 전에 '진보적 자유주의자 어쩌구'하는 책을 펴냈더군. 한나라당에서 권력의 단맛을 즐기며 사는 주제에, '진보적 자유주의'라니 이는 제 멋에 겨워 언어를 항칠하는 짓 아닌가.

  한 개인을 탓하자고 꺼낸 말이 아니다.  '자유'가 패권을 휘두르는 시대에는 그 자유주의 사상을 어떻게 고치고 다듬든 간에 대빵/대장 자유주의의 품 안에 포섭되기 마련이라는 냉엄한 사실을 들춰내려는 것이다. '대세론'을 거스르지 못하므로, 그들은 적당한 지점에서 비판을 멈춘다. '자유'를 으뜸으로 치부하는 한, 자유주의 현실경영 논리가 획기적으로 타파되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열어제치기는 도통 어렵다. 그러니 대세론에 무릎 꿇고, 때로는 그들과 똑같은 언행으로 슬그머니 복귀한다. 부처님 손바닥(-한나라당) 안에서 뛰노는 어린 손오공(-'권(圈)' 출신들)처럼!

  자유주의는 국가주의 비판에서 출발했댔다. 이것이 얼마나 겉 다르고 속 다른 비판인지는 지금의 미국 지배세력이 두 이데올로기를 '띵호아! 따봉!'의 양수(兩手) 겹장으로 휘둘러대는 꼴 하나만 떠올리시면 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정치 지형이 좀 달랐다. 냉전의 앞잡이로서, 자유 사상을 장식품 쯤으로나 달고 다녔던 막가파 국가주의자들이 워낙 행세해 왔던지라, '국가주의 비판'은 아직도 신선한 냄새를 풍긴다.

  문제는 (혁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를 너무 우습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교육부가 휘두르던 권한의 상당 부분을 단위학교에 넘기기만 하면 국가주의 교육체제가 타파될 것처럼! 그래서 영국의 국가주의 교육체제가 타파되었는가? '자율경영'의 구호 아래, 오히려 국가주의/관료 입김이 더 강해진 것이 현실 아닌가? 교육부분을 넘어서 볼 때 문제는 더 분명해진다. 자본주의는 초기의 소생산자 자본주의에서 경쟁과 독점의 불가역(不可逆) 과정을 거쳐 세계적 차원의 독점자본주의 체제로 옮겨왔다. 국가의 힘은 갈수록 커졌다. 미국 국가의 국가주의 앞에서는 백두산 호랑이도 질금질금 오줌을 지리지 않는가? 못 말리는 계급사회에서 잘난 애비 덕에 날라리 부시가 백악관까지 입성했지. 부시는 우스운 놈이지만 미국 국가주의는 무서운 권력/실력을 뽐낸다.

   한때 포스트포디즘 어쩌구, 국민국가는 쇠퇴하고 세계화/지방화 추세가 뚜렷해지니 그에 대비하자는 둥, 한가로운 이야기를 읊은 논자들이 있었다. 물론 1세기 전, 동학군 때려잡던 조선왕조나 지금 미국 월가 눈치만 살펴 노동운동 때려잡는 한국정부나 다 대국(大國) 섬겨 연명하자는 초라한 포부의 소유자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멀리서 느긋이 오더(order) 때리는 워싱턴과 청와대와 전경련(全經聯)을 한 묶음으로 살핀다면 한국 국가권력의 (또는 국가 층위의) 힘은 갈수록 더 막강해진다고도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발달할수록 국가/관료의 힘이 더 커지는 '경향 법칙'부터 확인해 두자는 말이다.3)

  우리는 '요/순/우 시절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꿈'을 포기할 까닭은 없지 않은가. '꿈'을 품고 있어야 그쪽을 향하여 단 한 발이라도 나아갈 것 아닌가. '꿈'을 버리지 않는 정신이라야 하다못해 한나라당과 기득권세력의 앞잡이로 변절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 꿈이 뭐냐면 '있는 듯 없는 듯한 국가의 존재'다. 중매자/중개꾼으로서는 더 구실해 주되, 억압자(살벌한 '공권력')로서의 악역에서는 손을 뗀 국가! 한때 공공연히 구호로 나돌았던 '국가의 사멸!'을 꿈으로서는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멸의 과정이 아주 더디리라는 사실도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4) 왜냐면 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과감한 자기반성 자기수정의 길로 접어들지 않는 한, 갈수록 더 강성해지는(...그런 경향을 띠는) 국가/관료주의 체제와 맞서 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서방 자본국에 견제 구실 해주던 동구권이 무너져버리고 아직 못된 송아지(-세계화) 코에다 코뚜레도 못 뚫은 시대 아닌가.

  나는 "'차이'를 존중하라!"느니, "현대(근대) 사회에서 탈주하라!"느니 떠드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솔직히 쪼끔은 역겹다. 뿌리깊은 여성 차별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남/녀의 서로 다른 점을 세심하게 살피는 일이야 백번 옳다. 소수 민족이 박해받는 사회에서 그들을 이해하자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훌륭하다. 구체적인 억압의 현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따질 때는 '차이의 철학'이 한 몫 단단히 한다. 그러나 걸핏하면 '차이 존중!'의 현수막을 내거는 사람들은 위태로와 보인다. 대동소이(大同小異)로다. 사람 형편은 크게 같고, 자질구레한 부분만 서로 다른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저마다 뿔뿔이 자본의 논리에 복속하여 가냘픈 삶을 꾸리는 개인주의 문화가 더 깊어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흩어지고 고립된(=소외된) 개인들을 크게 하나로 묶는 일에는 그토록 무신경할까? 남과 북의 민중이 하나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민중이 더 큰 하나로 묶이는 장구한 과제를 위하여 '차이의 철학'이 얼마나 흔연히 복무할까?

  탈주론자들도 그렇다. 블랙박스 같은 국가체제를 어쨌든 허물고 보자는 말도 참 가볍다. 국가기구를 민중의 뜻을 담아 운영하게끔 개조하고 민주화하는 일이 선결 과제 아닌가. 단위학교의 권력구조를 수평화하는 일(교장권력의 축소), 교원의 집단적 전문성을 대표할 전교조를 파트너로 대접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 것 아닌 일인 양, 고개 돌리고서 무슨 국가체제를 허문다는 말인가. 이론의 진실성을 가려주는 것은 세월이다. 해와 별이 몇 번만 떴다 지고나면 탈주론의 참신함도 무섭게 낡아버릴 터이고, 그들 대다수는 주류 사회에 터 잡고 앉아 거죽만 새로운 이론적 멋부리기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국가와 공교육체제에서 탈주할 것을 오매불망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몇 개 쯤의 대안학교 설립을 요청하는 것이야 경청할 필요도 있다. 그쯤의 신중한 행보가 아니라, 목놓아 자율학교(차터 스쿨)을 외치거나, 황홀하게 '다양성/선택권'을 읊어대는 사람이 적지 않다.5) 자율학교/자율경영이야말로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 아니던가. '다양성/선택권!'을 표방한 정치가는 빌리 브란트와 미테랑이 아니라 새처와 레이건과 부시였다. 진취적인 지식인 쳐놓고 지지하는 이, 아무도 없었던 꼴보수 정치인들!

  이들은 '가장 가난한 계층에게 더 많은 교육 기회를' 주자는 갸륵한 발언도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에게는 교육불평등이 깊어지는 현실을 타개할 방책이 무엇인지, 따져 물어야 한다. '빈말'은 내놓지 마라! 아마 누군가는 미국의 흉내를 내서 '빈민의 자녀에게도 사립학교 선택권을 주자!'고 선심성 공약을 내놓을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갸륵한 공약이로되, 미국 일부 지역에서 이 공약(='바우처 체제'라 일컫는 교육구매권 제도)가 한때 실시된 데는 이 제도에 대한 백성의 거부감을 달래고자 보수 정치인들이 잔꾀를 부린 배경이 있다. 트로이의 목마 작전이라고나 할까. (빈민층을 위한다는 구실로 들여와서는 중산층이 그 열매를 따먹는다!) 그런데 빈민가 흑인 중에 똑똑한 몇 아이가 교외 백인거주지역 명문고에 다닌다 한들, 그것이 흑인 전체의 운명을 얼마나 바꿔 놓을까? 오히려 똑똑이 몇이 빠져나간 도심지 슬럼학교는 더 똥통으로 빠져들지 않는가?

  미국 어느 주의 방송국에서는 5-6년쯤 전에 교육현실을 알리는 다큐멘타리를 찍었다고 한다. 도심지 슬럼지역과 교외 백인지역의 고등학교 여건/환경을 비교하는 내용이었단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나, 아니면 청소년들의 달콤유치한 사랑을 담은 싸구려 미국 영화의 학교 배경을 한번 떠올려 보라. 우리나라 대학 뺨치는 건물과 너른 잔디밭을! 그리고 오래 전의 영화「To Sir with Love」의 한 장면, 비가 줄줄 새는 교실과 컴퓨터를 만져본 적도 없는 무지렁이 학생들을 떠올리라. 천당과 지옥 사이쯤 아닌가? 다큐멘타리가 바로 그런 내용이었단다. 이 다큐멘타리를 주 의회에서 방영했더니 부시 만큼의 꼴통들인 공화당 의원들도 얌전하게 입을 다물더란다.

  한국의 교사들이여, 우리의 무력함과 민주/진보운동의 갈팡질팡과 기성 언론들의 꺼떡없음과 세계화 대세(?)의 강철 대오를 한탄하지 마라. 인류는 이보다 더 야만스런 상태를 겪어 오늘에 이르지 않았던가. 다만 여지껏 우리가 누려온 소시민적 안락함이 너무나 취약한 것이었음만 확인하자. 분노는 힘이다. 한숨과 절망도 힘이 된다. 그러니....

  길가의 버려진 돌멩이가 벌떡 일어나 외치듯, 앉은뱅이 나자로가 몸을 일으키듯, 남은 목숨에 생명의 불을 붙여서....

  일어나 증언하라!!!   
주--------------------------
1) 나는 조한혜정에게 관심이 많다. 나름의 신선함을 띤 담론으로 우리 문화계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와 한 통속으로 노는 구석이 많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에서 그의 글을 유심히 살피는데, 그는 생각 얕은 부르조아는 아니므로 두드러지게 허튼 의견을 표명한 적은 없다. 그런데 김진애라는 사람이 있다. 여성으로 무슨 건축회사 대표인가를 지내고 있으니 꽤 실력있는 사람이겠다. 조한혜정의 글에 이 사람을 극구 칭찬한 대목이 있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일간신문의 칼럼에 이 사람이 뭐라고 썼는고 하니, '나는 평등만 외고 다니는 사람이 싫다. 왜 열심히 일해서 큰돈 번 사람들을 그렇게 질투하고 시기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졸부'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큰 뜻이 없다. 이 땅의 유산계급이 분단체제의 억압적 국가권력의 품 안에서 특혜 누리며 커왔다는 점에서는 너나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김진애의 불평이 얼마나 얍삽한 막가파 발언인지 너끈히 짐작할 것이다. 그리고 탈근대론과 신자유주의가 얼마든지 배를 맞출 수 있다는 사실도 헤아릴 것이다.   
2) 90년대 들어, 소련쪽 위협이 사라지자 미국은 새로운 적으로 '불량(=깡패)국가' 과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불량배'라는 사실을 미국 전략사령부의 95년 비밀보고서에서 확인한다. "전쟁 억지책의 요점은 미국의 치명적 이익이 공격당할 경우, 비이성적으로(!) 반드시 보복하는 국가로 비쳐야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닉슨대통령의 '미치광이'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우리의 적들은 우리가 미칠 수도 있고, 예측이 불가능하며 가공할 파괴력을 지녔음을 직시해야 겁에 질려 우리 요구에 순응할 것이다!" 노암 촘스키의 「불량국가(두레 펴냄)」를 참조하라.
3)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생산력 사회화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국가는 이윤 창출을 위한 사회적 조건을 정비하는 임무가 더 막중해진다. 경제위기의 예방을 위해서도 국가는 시장 개입을 포기할 수 없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진출에 따라 국가 내부에서도 계급 갈등이 일어나므로 계급관계에 대한 국가의 중재/개입 필요성도 커진다. 「시민사회와 시민운동」(한울 펴냄)에 실린 김세균의 글 참조.
4) 그러기 때문에 민중운동은 당면 목표로 '국가관료체제의 민주적 통제' 수준으로 내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민주화'란 국가관료제가 궁극적으로 소멸해야 완성되는 것이다. 그 최종적인 소멸은 가까운 장래에 기약하기 어렵지만, 머나먼 길이라 하여 지레 포기할 까닭이 없다. 대중 자신이 공적 업무를 직접 관장하는 일, 그 첫 출발은 언제든 시작해야 한다. 이를테면 교원단체가 '교육과정 개선위원회'에 큰 발언권을 갖고 참여하는 일도 그 실마리가 될 수 있다.
5) 이들 나팔꾼들의 실천적 타당성 여부를 가늠해보는 주된 잣대는 과연 이들이 '교육민주화'의 과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다. 마치 지금의 전교조가 교육주체로서 충분히 존중받고 발언권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치부하고, 은근히 전교조 견제에 열 올리는 사람이라면 그의 머릿속에는 '민주화' 과제가 들어 있지 않다. 여지껏 전교조는 애써 저항을 엮어냈을 때라야 가까스로 저들한테 얼마쯤 대접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부르조아민주주의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어서 언제든 부르조아독재와 내통한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들이 노골적으로 독재를 편드는 것은 아니지만, '교원집단의 정치적 배제'에 침묵하고 그 '민주주의의 결여'를 묵인해온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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