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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 69_담론과문화_문래동연가2

2018.07.11 18:30

희동 조회 수:137

문래동연가 2

 

정은교(진보교육연구소 회원)

 

1. 젊음이 깃든 거리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로 온다

( ............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로 가고 있다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애린 일인가. 그것은 그저 다소곳이 앉아 있는 소극적인 행동이 아니다. 온 정성과 영혼을 다 기울여 불확실한 미래를 버팅겨내는 능동적인 결단이다. 한용운이 노래했듯이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고(‘님의 침묵’)”, 니 몸이 오고 있지만 실은 내 마음이 더 앞질러, 더 간절하게 너한테로 간다. 지극한 기다림은 자못 종교적이다.

철공소 골목에 젊은이들이 찾아온다. 문래동에 예술촌이 들어선 덕분인 것 같다. 이들의 ‘밀당’ 속에 ‘문래동 연가’가 탄생함직도 하다. 그런데 쓸데없는(?) 걱정일지 모르겠는데 찾아오는 외지外地의 발길들로 하여 행여나 땅값이 뛴다면? 홍대 앞이나 경주 황리단 길이 겪었듯이 조물주보다 더 높으신 분이 자릿세를 더 올린다면? 젠트리피케이션(원주민 내쫓기)의 유령 때문에 철공소 사람들의 주름살이 더 깊어진다면? 아무튼 창문 밖 여름의 가로수 잎이 제법 싱그럽다. 문래동은 맨체스터나 디트로이트나 울산처럼 저물어가지 않기를 부디 바란다.

 

 

 

3. 삶의 마지막 고샅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빈대떡을 굽고 쐬주를 판다

잔을 들면 쐬주보다 먼저 벚꽃잎이 날아와 앉고

저녁놀 비낀 냇물에서

처녀들 벌겋게 단 볼을 식히고 있다

벚꽃 무더기를 비집으며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이얀 달이 뜨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빈대떡을 굽고 쐬주를 파는

삶의 마지막 고샅 북한산 어귀

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

처녀들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 -신경림의 ‘봄날’

 

북한산의 두 모녀母女도, 문래동의 노파도 삶의 마지막 고샅길을 걸어가고 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생자필멸生者必滅! 노송老松이 죽어가는 곳에 새 풀잎이 돋고, 노인이 떠나가는 이승에서 청년이 제 젊음을 뽐내리라. 청담동 로데오 거리의 처녀들이 벚꽃잎처럼 달덩이처럼 눈부시다면 이는 오로지 문래동 노파의 고단한 발품 덕분이다.

 

사라지는 노을이여! 짙은 어둠만 남긴, 한때 성장에 도취했던 시절의 영광이여! 부디 내일의 빛을 불러 모으라. 내일의 태양은 저절로 떠오르지 않는다.

 

 

 

4. 돌 속에서 벗어날 날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의 ‘남해 금산’

 

 

‘돌 속’에서는 생명이 살아 숨쉴 수 없다. 생명이 사랑을 꽃피우기는 더구나 불가능하다. ‘그 여자’한테 ‘돌 속’은 수천 년 그들을 꼼짝달싹 옥죄어 온 가부장家父長 질서 같은 것이겠다. 나와 너는 그 ‘돌 속’ 같은 치명적인 장벽으로 하여 도무지 만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남해 금산 앞바다에 뿔뿔이 떠 있는 외로운 섬들이다.

 

자본 체제의 쳇바퀴에 다들 휘말린 현대 사회는 넋 없는 ‘돌 속’ 같다. 저마다 관계가 어긋나 말을 잃어버리고, 삶이 산산 조각났다. 가슴 곳곳에 실금이 가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포도鋪道 위 잿빛 삶에 생명의 기운이 다시 움트려나? 그리하여 떠나간 여자가 돌아오려나? 부디 그녀가 탈없이 제 인생을 잘 꾸려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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