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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절한 책이야기

 

지나간 그러나 여전히 머물러 있는

 

산은

 

 

1.

 

자연과학 책을 읽으면서 근대적 사고인 주체와 세계의 이분법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나라고 하는 것과 나라고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가 굵은 실선이 아니라 점선으로 바뀌었으며, 그 선조차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면에서 나누어 보면, 인간은 벌레나 심지어는 그릇이나 모니터와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분리되어 있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으며, 언제나 동일한 것이 아니라 늘 변하는 것이다. 또한 나라고 하는 것, 또는 그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 사유의 결과가 아닐뿐더러 고정적이지도 않다.

 

더 생각하게 된 것은 죽음이라는 사건의 어려움이다. 죽음이란 워낙 일상적인 사건이라 가까이 있거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여겨 왔다. 그러나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단위인 세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세포의 지속기간은 생명체 전체의 지속기간과는 달라서 생명체의 입장에서 보면 세포는 언제나 일부가 소멸하고 있으며, 그만큼의 세포가 생성되고 있다. 그러니 나는 항상 죽고 있으며, 항상 생성하고 있는 셈이다. 좀 전까지 나의 부분이었던 것들이 지금은 아닌 것이 되어 가고 있으니,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는 내가 아닌지 분명하지 않다. 어디까지 활동이 정지해야 비로소 죽음이 가능한 지를 생각해 보면 죽음이란, 전체가 일시에 절멸함이란 참으로 어렵고도 난해한 사태이다.

 

또 하나는 시간과 공간의 문제이다. 그토록 자주 들어 왔으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던 상대성이론의 출발이 시간과 공간의 항상성과 동일성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 생각을 위한 범주의 차원이 아니라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시-공간의 차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지연되거나 수축되며, 공간자체가 질량에 의해 휘어진다는 것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알아듣기에는 어려웠다.

 

 

2.

 

살아 온 경험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항상 동일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 오늘날의 시간은 방향을 상실하고, 조각난 채 속도만 남아 있다. 과거와 미래는 그 차이로 인해 존재한다. 이 차이가 삶의 의미와 방향을 만든다. 시간의 문제는 속도에 있다. 동일한 궤도를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로만 질주하고 있으므로, 나와 나의 삶은 일치하지 않고, 방향을 상실한 채 맴돌거나 쓸려가고 있다.

 

지나간 것이라고 다 아름답게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다. 어느 사건을 여전히 소리로, 향기로 기억한다면 그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빛을 발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인터넷은 삶에서 장소를 제거한다. 메시지는 언제나 수취인의 신체를 부정한다. 소셜 네트워크는 소셜하지 않은 욕망의 배설물을 퇴적한다.

 

아주 오래 전 태백산택을 읽었다. 그 책이 출판되던 시대는 4차 산업혁명 같은 맹랑한 시대가 아니어서 다음 권이 출간되었는지는 서점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책이라는 신체의 전시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태백산맥을 통해 삶은 분석적 지식이 아니라, 관계에 있음을 알았다. 염상진, 하대치, 김범우들의 삶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상호 관계에 존재하고 있음을, 삶은 자유롭거나 고독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만들어 가는 것임을 배웠다.

 

그리고는 이내 잊고 살았다. 세계가 나와 분리되었다. 죽음은 소멸이고, 선택 가능한 영역에 있는 쉬운 사건이었다. 삶은 자유롭거나 외로운 사태였다. 사건을 나의 의지와 능력의 문제로 판단하거나, 예상과 다른 결과에 자책했다. 결과인 현상으로부터 필연적인 원인을 찾았다.

 

 

3.

 

조선족, 고려인, 재일동포라는 다른 이름들로 불리는 이들의 신산한 삶에 관한 글이나 다큐를 보았다. 막연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길게는 100여년의 시간을 지속해 낸 그들의 이질성에 대해 낯설기도 했다. 디아스포라(Diaspora)로 일본으로 동북아로 그 너머 중앙아시아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세 여자나 자이니치들의 선택에 지금의 입장에서 변전하는 필요로 재단해서는 안될 일이다. 지금도 여전한 일이다. 더 나은 길이라고 떠난 이들이. 더 나을 것이라고 오는 이들이 있기에. 경계를 넘기 위해 적()의 장벽을 넘는 것은 마찬가지다. 시리아국적을 가진 이들에 대한 경기(驚氣)와 같은. 신념이나 자유의지와는 결이 다른.

 

마침내 화산도(火山島)를 읽었다. 긴박하나 느리고, 절박하나 길다. 저자 김석범은 1925년 오사카(大板)에서 태어나 평생에 걸쳐 제주 4·3 사건에 관련된 작품 집필에 매달렸다. <화산도>는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인 19482월 말부터 이듬해인 19496월 제주 빨치산들의 무장봉기가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의 해방직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배경으로 한다. 작품의 주요 무대는 제주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서울과 목포뿐만 아니라 오사카와 교토, 도쿄도 비중 있게 등장한다. 빨치산들의 무장투쟁 자금의 유입 경로, 재일동포들의 실상과 일본공산당과의 관계 등이 일본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일본어로 쓰인 이 소설을 한글로 번역한 김환기는 이렇게 상찬하고 있다.

 

[4.3]이란 무엇인가. 이 사건은 해방정국에서 전개되고 있던 냉전구도에 대한 제주 민중의 저항이었고, 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선연한 폭력의 기억이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우리에게 남겨진 이 역사의 부채는 사건의 진실을 통해서만이 비극의 되풀이를 막을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 앞에 던진다. 작가는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역사의 수많은 하위주체들에게 강요된 침묵과 억압당한 생채기들을 활성화하는 존재이다.

 

역사문화적으로는 당대 한반도에 존속해온 봉건적인 가부장제, 경제자본, 해외유학, 신세대의 결혼관/자유연애 등등, 해방 직후 제주도의 생태학적 문화지리를 깊이 있게 부조해 내고 있어서, 해방정국의 정치경제의 현실만 담아냈다는 선입견을 정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화산도>는 사회역사, 민속종교, 통신교통, 의식주와 교육에 이르는, 당대의 정치역사성, 사회문화적 지점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작가 자신에게는 필생의 역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기에 <화산도>는 민족의 자화상이자 디아스포라 소설, 저항/고발문학, 세계문학, 국가/자기중심적인 세계에 대한 안티테제의 역할과 기능을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0자 원고지 22천여 매라는 분량도 그러하지만, 1965년부터 시작된 창작의 여정은 30여 년에 걸쳐 언어와 발표매체를 달리하며 이어져 왔고, 마침내 2015, 광복 70주년을 맞는 오늘 모국어의 외피를 입고 한국의 독자들 앞에 등장했다. 전쟁과 폭력을 기억하는 것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이 방대한 노작(역사/휴먼 드라마)을 관통하는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평화를 위한 진혼곡>이라고 생각한다.

 

 

4.

 

두 번째로 소개할 책은 국수(國手). '국수'의 뜻은 나라 안에서 가장 소리 잘하고 악기 잘 다루고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 또한 바둑을 가장 잘 두거나 의술이 가장 뛰어난 사람 등 가장 높은 단계의 예술을 이루어낸 사람들을 가리키던 바치던 말이다. 김성동은 19세에 입산(入山)한 후, 12년간 정진하였으나 1976년 하산한 이후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다. 1970년대 후반 구도(求道)에 목말라 방황하는 젊은 스님의 의식과 행적을 그린 장편소설 만다라(1978)를 출간하였다. 시대의 어둠이나 진리의 부재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던 나는 존재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리고 올해 다시 김성동의 장편소설 국수를 만났다. 이문구의 소설이 그렇듯 그렇지 않은 듯, 읽히듯 읽히지 않은 듯 읽었다. 새로운 말을 배우는 것도 아닌데 소리 내어 읽으면 배인 듯 익숙하나, 문자로 읽으면 낯설어 튕겨 나가는 글자들. 이 소설의 제6권은 國手事典(국수사전)-아름다운 조선말이다. 이 사전은 1~5권 작품 속에 쓰인 조선말을 따로 정리하여 편찬한 사전으로, 어휘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대상을 정리해 놓았다.

 

출판사의 소개글은 이렇게 광고하고 있다.

 

조선왕조 오백년이 저물어가던 19세기 말, 충청도 내포지방(예산, 덕산, 보령)을 중심으로 바둑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소년, 석규와 석규 집안의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명화적이 되는 천하장사 천만동, 선승 백산노장과 불교비밀결사체를 이끄는 철산화상, 동학접주 서장옥, 그의 복심 큰개, 김옥균의 정인 일패기생 일매홍 등 國手속 주요 인물들은 역사기록에 남지 않는 미천한 계급의 인물들로, 서세동점의 대격변 속에 사라져간 조선을 살아낸무명씨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國手130여 년 전 조선의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만, 정치사보다는 민중의 구체적 삶과 언어를 박물지博物誌처럼 충실하게 복원해낸 풍속사이자 조선의 문화사이며, 조선인의 심성사心性史에 더 가깝다. 종래의 역사소설이 사건·정치사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반해, 그 사건들에 직간접으로 맞닥뜨리고 때로는 그것을 일구기도 하는 인물 개개인을 중심으로 거대한 민중사적 흐름을 당대의 풍속사와 문화사 및 정신사적 관점에서 참으로 맑고 아름다웠던 우리말로 서사한다. 동시에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개인적 양식을 이어받으면서 제국주의에 갈가리 찢긴 우리말과 문화와 정신의 뿌리를 생생히 되살려내었다.

 

 

5.

 

이미지들이 분할되는 다이제스트의 시대에 이 긴 이야기들을 주절거리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미 지나가 버린, 결과들이 나타나 있기에 원인들이 분석되어 있는 이야기들이. 소리나 냄새들은 지워져, 시각과 죽음만이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

 

가끔 아이들 앞에 서있을 때, 내가 아이들 입에 공갈젖꼭지를 물리고 눈앞에서 딸랑이를 흔들어대고 있다는 환상이 들 때가 있다. 착각인지, 아니면 실재인지. 분명한 것은 이런 것은 관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속도에 종속된 좋아요 누르기일 뿐이다.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는 아름답지 않다.

 

시간과 공간은 그것이 서로 얽혀 있을 때에 비로소 소리를 내거나 냄새를 되살린다. 술에 취한 당신의 얼굴에, 그리움 같은 언어에, 눈 밑에 깔려 있는 가을의 잎에 우리는 머무를 수 있다. 나의 결심으로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관계에 작동하는 것이다.

 

선생님들께 긴 잎들의 시간, 같은 시-공간에 머무르기를 권하는 이 글이 조심스럽다. 한 분이라도 눈여겨보아 주신다면 그것만으로 이 낡아가는 사람에게는 기쁨이다. 그럼에도 수도관이 언 오늘은 너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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