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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기고 프레이리 교육사상 2회

 

프레이리의 사상

 

이성우 (구미 도량초)

 

철학의 3대 영역으로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이 있다. 존재론(ontology)은 현실세계 혹은 실재(reality)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것을, 인식론(epistemology)은 인간이 그 실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것을 다룬다. 가치론(axiology)은 가치 혹은 실천의 문제에 관한 것으로서 윤리학과 맞닿아 있다. 어떤 사상체계를 이해함에 있어 이 세 영역을 기준으로 접근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프레이리의 사상을 소개하는 이 글에서도 이런 접근 방식을 취하고자 하는데, 여기서는 프레이리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관해서만 설명하고 가치론 부분은 4회 차 글의 주제인 ‘프레이리와 교육운동’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프레이리의 사상은 변증법적 사유양식을 특징으로 한다. 프레이리를 계승하고 있는 브라질의 교육학자 가도티(Gadotti, M.)는 프레이리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페다고지」가 주관과 객관, 과거와 현재, 기존 지식과 새로운 지식 사이의 변증법적 통일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Gadotti, Reading Paulo Freire, 1994: 43). 따라서 프레이리의 사상에 접근하기 위해선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 하겠다.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흔히 변증법 하면 반사적으로 ‘정반합’을 떠올린다. 그러나 정-반-합이라는 삼분법(Triade)은 변증법에 대해 그리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동전의 양면’이니 ‘양날의 칼’이니 하는 표현들이 변증법적 이치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발전해온 변증법은 역사도 깊고 그 개념에 대해 철학자들마다 다양한 관점을 전하고 있기에 여기서 다 다룰 수는 없다. 변증법은 간단히, 사물의 본질이 끊임없이 변화·발전해 가는 운동성에 있다는 관점, 연관의 맥락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사유양식을 말한다.

자석의 N-S극이나 전기의 양극-음극처럼 사물은 서로 대립적인 두 측면을 지닌다. 이 각각의 측면을 극성(極性)이라 하고 이 두 극성의 조합을 범주쌍 혹은 양극범주쌍(biopolarity)이라 한다. 변증법적 인식론이란 이 상호 대립적인 두 극성을 양자택일적 관점이 아닌 범주쌍으로 묶어 통합적으로 보는 시각을 말한다. 존 듀이는 철학사의 발전과정을 이원론의 극복 과정으로 보았다. 헤겔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변증법이란 말 대신 ‘이원론의 배격’이란 표현을 자주 쓰고 있는데, ‘이원론의 배격’이 곧 변증법적 인식론을 의미한다. 파울루 프레이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이원론의 배격’으로 일관하고 있다.

 

 

변증법적 존재론

 

헤겔과 마르크스의 사고를 빌려와 프레이리는 의식과 세계 사이의 역동적인 연관을 설정한다. 여기서 의식은 주관, 세계는 객관에 해당한다. 철학사에서 주관(subject, 주체)은 철학자마다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다가 칸트 이후 “객관과 마주하여 객관을 인식하는 인간 의식”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주관은 인식의 주체이고 객관은 주관의 인식 대상인데, 주관을 제외한 모든 것이 객관에 해당한다. 또한, 주관성(subjectivity)은 주체(주관)와 관련한 속성 즉 역량이나 의지와 같은 개인적 속성을 말하고, 객관성(objectivity)은 그를 둘러싼 인적·물적 환경이나 조건을 뜻한다.

주관-객관 변증법은 사물에 내재된 주관적 속성(주관성)과 객관적 속성(객관성)을 불가분의 관계로 이해하는 인식론을 말한다. 프레이리는 주관성 혹은 객관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절대시 하는 양자택일적 관점을 단호히 배격한다. 주관주의나 객관주의의 오류는 인식론적 차원보다는 실천적 차원에서 보다 쉽게 이해된다.

 

현실세계를 객관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래디컬한 주장을 제기하는 것, 억압을 인정하고 그것이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주관주의자들의 복지부동에 맞서 싸우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주관성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주관성 없는 객관성은 생각할 수 없다. 각각은 상대방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객관성을 주관성으로부터 떼 내는 것, 현실을 분석하거나 현실 속에서 행위 할 때 주관성을 부정하는 것이 객관주의(objectivism)이다. 반면, 분석이나 행위에서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유아론적 입장을 견지하는 주관주의(subjectivism)로 연결되는데, 이는 객관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행위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주관성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무엇, 즉 인간 없는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주의적 입장은 세계 없는 인간을 가정하는 주관주의적 입장과 마찬가지로 고지식할 뿐이다.(Freire, Pedagogy of the Oppressed, 2003: 50)

 

철학사의 발전과정은 세계를 이루는 근본이 물질이냐 혹은 정신이냐 하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념할 것은 물질 혹은 정신은 선차성(priority)의 문제일 뿐, 건강한 유물론이나 관념론은 둘 중 하나를 절대적으로 취하고 다른 하나를 배격하는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프레이리가 지적하는 객관주의나 주관주의의 오류는 이 둘 가운데 하나에 지나치게 경도된 입장을 보이는 것이다. 객관주의는 대개 기계적 유물론(mechanistic objectivism)의 경향성을 보이는데, 심리학에서 행동주의나 스탈린주의로 상징되는 소비에트의 속류마르크스주의가 이에 속한다. 반면, 주관주의는 현실세계의 객관적 조건은 무시하고 주체의 의식이나 의지 따위의 심리적 속성을 절대시하는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의 관념적 태도를 특징으로 한다.

명색이 진보적 사상가인 만큼 프레이리가 주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문제는 객관주의에 대한 비판인데, 프레이리는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인간 없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같은 입장은 ‘물질’에 대한 레닌의 정의와 상충된다. 레닌에 따르면, 물질이란 인간에게 그의 감각을 통해서 주어지고, 인간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면서 인간의 감각에 의해 모사되고 촬영되며 반영되는 객관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다.

레닌의 정의에 따르면, 세계(=객관)는 인식 주체(=주관)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구 46억년의 역사에 비해 인간이 출현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데, 상식적으로 인식의 주체인 인간이 있기 전엔 세계가 없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러나 프레이리가 말하는 “인간 없는 세계”란 “인간이 없으면 세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가 없는 인식 대상의 존재는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어떻게 해석하든 레닌의 물질론과 프레이리의 관점은 양립이 어려워 보인다. 프레이리의 입장에서 레닌의 시각은 객관주의적 오류로 평가될 것이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프레이리의 이러한 인식론은 현상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프레이리의 주저 [페다고지]에서 이러한 흔적으로 많이 엿볼 수 있다. 프레이리는 훗설의 영향을 받은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세계와의 관계에서 의식과 세계는 동시적이다. 즉 의식은 세계에 앞서 가지도 않지만 뒤따라가지도 않는다. 의식과 세계는 한꺼번에 잠든다.(Freire, 같은 책: 81, 밑줄 친 부분은 사르트르의 말).

 

변증법적 존재론의 핵심은 사물의 본질을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프레이리에 의하면, 객관적 실재의 모든 측면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 객관적 실재(objective reality)는 자연계와 사회적으로 창조된 물질적 실체 둘 다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프레이리에게 세계는 필연적으로 미완의 것이며 영원히 진화한다. “나의 관찰 대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할수록, 나는 그것에 대해 모르고 있음을 더욱 깨닫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생성 중에 있기 때문이다”(Freire and Shor, A Pedagogy for Liberation, 1987: 82). 현실 세계가 변화함에 따라, 관념과 개념, 그리고 태도와 가치, 신념 등, 즉 한마디로 의식과 관계되는 모든 산물들 또한 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계적인 연속의 과정이나 인과관계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 사이의 부단하고 중층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프레이리에게 ‘의식’과 ‘세계’는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다. 즉, 프레이리의 관점에서 ‘의식’이든 ‘세계’든 양자 중 어느 한가지만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프레이리에게 인간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유일한 존재이다. 즉, 인간은 세계 속에서(in) 세계와 함께(with) 존재하는 것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의 의식과 행위는 역사적이다. 인간은 역사를 창조하기도 하고 역사에 의해 창조되기도 한다. 또한, 인간은 의도성을 갖는 점에서도 동물과 구별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노동을 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동물도 물론 일을 한다. 꿀벌은 매우 정교한 기술로 자신이 살 집을 지으며, 쇠똥구리는 과학자 파브르를 경탄하게 하는 방법으로 일용할 양식을 운반하지만, 이들의 행위는 의식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본능의 발로라는 점에서 인간의 노동과는 구별된다. 인간은 프락시스를 할 줄 아는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그저 생명을 존속시켜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세계에 대한 이름짓기(naming)를 해나가는 존재이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에 관한 프레이리의 이러한 설명은 마르크스의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거미는 직조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은 인간 건축가들을 무색케 할 정도로 자신의 집을 짓는다. 하지만 가장 서툰 건축가라도 가장 유능한 꿀벌보다 나은 점이 있으니, 건축가는 집을 짓기 전에 이미 자기의 머리 속에서 그것을 떠올린다는 것이다.(Marx, Capital Ⅰ, MECW vol. 34: 174)

 

 

변증법적 인식론

 

프레이리의 인식론은 그의 변증법적 존재론의 연장선에 위치해 있다. 인식론은 다른 말로 지식론이라고도 불리는데, 지식(knowledge) 또는 앎(knowing)에 관한 프레이리의 독특한 인식론은 우리 교육자들에게 심오하고도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지식은 고정되어 있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지식의 불변성과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프레이리의 인식론은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는 변증법적 존재론과 맞닿아 있다. 인간세계의 변화와 더불어 지식 또한 항구적으로 변해 가는 까닭에 완벽한 앎이나 종국적인 진리는 없다. 프레이리에게 지식은 인간의 실천과 성찰에 말미암아 끊임없이 창조되고 재창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은 고정불변한 절대적 진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process)으로서 언제나 미완의 형태로 존재한다. 지식은 항상 생성중이다. 즉, 앎의 행위는 역사성을 갖는 까닭에 어떤 것에 관한 오늘의 지식이 내일도 꼭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현실세계가 유동적이고 변화하는 만큼 지식 또한 변화한다.(Horton and Freire, We Make the Road by Walking, 1990: 101)

 

앎과 삶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프레이리에게 지식은 객관적 현실을 초월한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물질세계에 기반해 존재한다. 지식은 관념의 작동으로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발견된다. 앎은 삶을 기초로 획득되는 까닭에 삶이 다르면 앎도 달라진다. 인간의 앎은 인간 역사와 문화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절대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지식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삶이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듯이 모든 앎도 그러하다. 식자층의 앎이 농부의 앎보다 반드시 더 가치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전자는 유식하고 후자는 무식하다고 이를 수도 없다. 삶의 내용이 다르면 앎의 내용도 다른 법이다. 대학교수가 아는 것을 농부가 모를 수 있듯이 그 역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다. 프레이리는 말한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없다(Freire, The Practice of Freedom, 1976: 117).

 

앎은 성찰과 행위의 변증법적 통일로 얻어진다.

앎이 인식 주체인 인간의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얻어진다 할 때 그 실천의 메카니즘을 프레이리는 ‘프락시스’라 일컬었다. 마르크스에게서 빌려온 용어 프락시스(praxis)는 그리스어로 이론 또는 인식에 해당하는 ‘테오리아 theoria’에 대응되는 말로 실천 또는 실제의 뜻을 지닌 영단어 ‘practice’와 같다. 그러나 프레이리의 개념 프락시스는 단순한 실천이 아니라 행위(action)와 성찰(reflection)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최초의 인식(성찰)과 실천(행위)은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실천으로 끊임없는 변증법적 지양(Aufheben)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최선의 앎에 도달하게 된다. 성찰과 행위의 두 계기(moment) 가운데 어느 하나가 결여된 형태는 무의미하다. 프레이리는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성찰과 성찰이 없는 행동을 각각 탁상공론(verbalism)과 행동주의(activism)로 일컬으며 비판했다.

 

프레이리의 관점에서 비판적 성찰은 물론 최소한의 사색조차 결여된 행동주의(activism)는 재앙이다. 역으로, 사회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이론 혹은 사색은 현실도피적 이상주의 아니면 창백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프레이리에게 진정한 이론은 역사적 투쟁 속에 뿌리를 둔 모종의 프락시스를 통해서만 만들어진다.(Freire, Education for Critical Consciousness, 2005, Goulet의 서문)

 

이처럼, 프레이리의 프락시스 개념은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을 함의하고 있다. 흔히 “이론과 실제는 별개의 문제”라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론과 실제, 이론과 실천은 함께 나아간다. 이론은 언제나 실천의 이론이며, 실천은 언제나 이론의 실천인 법이다. 이 같은 이치는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을 생각하면 명백해 진다. 과학자는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실험을 통해 마침내 어떤 과학적 원리를 발견해 낸다. 반복되는 실천이 이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반대로 그는 기존의 이론적 지식을 근거로 가설을 설정하고서 실험을 시도할 수 있다. 그의 관념 세계 속에 축적된 이론적 자산을 근거로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실천을 꾀할 수 있는 것이다.

프레이리에게 앎은 필연적으로 변혁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생성 중에 있는 세계를 맞이하는 과업인 것이다. 지식은 추상적인 사고 또는 이론화로부터가 아닌 인간 실천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행위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변혁을 꾀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나는 내 행위에 대해 이론화하는 것이지 이것이 결코 앞서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Freire, Education as Cultural Action, 1971: 2).

 

중립적인 지식은 없다.

지식이 사회적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획득되고 또 앎은 필연적으로 변혁을 의미하는 까닭에 공평무사한 지식,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식은 있을 수 없다. 프레이리에게 모든 지식은 일정한 당파성(partisanship)을 지니기 마련이고 모든 교육은 정치적이다(Every education is political).

프레이리 교육사상의 당파성은 무엇보다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의 제목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알다시피, 우리에게 [페다고지]로 소개된 이 책의 원 제목은 [피억압자의 교육학, Pedagogy of the Oppressed]이다. 이것은 기존의 교육이 억압자의 편에 서서 현상유지를 위해 복무해 왔음을 시사한다. 계급사회에서 교육은 해방을 위한 교육 아니면 길들임(domestication)을 위한 교육으로 존재한다. 프레이리에게 이 둘 외의 다른 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이나 교육이 당파적이라면, 진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와 관련하여 프레이리는 진리가 피억압자의 편에 설 때 획득되고 실천될 수 있다고 한다. 망명이후 프레이리가 하버드에서 객원교수로 있을 때 그의 교육론이 미국 학계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런데 일각에서 그의 교육론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불만을 제기해오자 프레이리는, “나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과 함께’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 경험을 해야만 한다. 내가 쓴 것은 내가 실천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응답했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비 맞는 사람을 돕는 최선은 우산을 씌워 주는 것이 아니라 우산을 버리고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 했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그늘진 곳에 있는 피억압자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으로 프레이리가 선택한 삶은 ‘책 속으로’가 아니라 ‘민중 속으로’였다. 프레이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론과 실천, 성찰과 행위가 통일된 삶을 산 프락시스의 사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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