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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 69_담론과문화_전쟁의 민낯

2018.07.11 18:33

희동 조회 수:219

눈동자의 몽상록

전쟁의 민낯

 

눈동자(진보교육연구소 회원)

 

 

.... 그 6월에 아들을 잃은 밥집 할머니가

넋을 잃고 앉아 비를 맞는 장마철.... -신경림의 ‘장마’

 

2차대전때 소련 민중이 겪은 참상을 증언하는 책을 읽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 얼굴을 하지 않았다’(문학동네 펴냄)! 원서는 5년 전에, 번역서는 3년 전에 나왔는데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무게 있는 책이라 싶어 여기 (서평 말고) ‘소개문’을 쓴다. 저자는 이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탔는데 너무나 당연한 수상受賞이다.

 

식민지민족해방투쟁과 한국전쟁을 다룬 우리 작품이 여럿 된다. 김산의 ‘아리랑’, 조정래의 ‘태백산맥’, 윤흥길의 단편 ‘장마’, 제주 4.3을 다룬 영화 ‘지슬’ 등등. 거기 전쟁의 참상이 군데군데 묘사되긴 했어도 멀찍이 떨어진 관찰자의 눈으로 흐릿하게 살핀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쟁터를 겪은 당사자 수백 명의 육성을 모아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다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다. 베트남전쟁을 다룬 미국 영화 ‘지옥의 묵시록’처럼 작가가 (현실에 가깝기는 하되) 가상의 무대를 그려낸 것이 아니라 다 실화다. 같은 참상도 더 보탤 것 없는 실화로 전달될 때 그 울림이 더 크다.

나는 이 책을 내리닫이로 쭈욱- 읽어나갈 수 없었다. 너무 기막힌 장면이 나오면 얼른 책을 덮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며칠 지난 뒤, 다시 책장을 열어 찔끔찔끔 읽었다. 여러 인터뷰의 모음이니까 그래도 되고, 내용이 너무 무겁다 싶으면 이 책의 3분의 1쯤만 읽어도 된다.

 

소녀들은 전사戰士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저자는 주로 여성 참전자들한테서 인터뷰를 모았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시작된 소련의 ‘대大-조국 전쟁’에 여군도 백만 명이나 참가했단다(영국 20만, 독일 50만). 간호병, 통신병, 취사빨래병이 대부분이었지만 탱크와 비행기를 몰았던 여군도 꽤 있었다.

면담자들이 너나없이 증언한 얘기는 누구라도 전쟁터에 나가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나이 어린 소녀는 나이를 속이고, 키가 작은 소녀는 관리들한테 ‘붙여 달라’고 바락바락 울면서 대들었다. 엄마가 말릴까봐 도망쳐 나와서 (군대를) 지원한 소녀도 있다. 진짜 전쟁은 적군을 죽이는 것이다. 통신병으로 배치받은 소녀는 ‘소총수가 되게 해달라’고 부대장한테 생떼를 써서 결국 허락을 받아냈다.

요즘 휴전선을 지키는 남한 군인이나 용산 기지에 출퇴근하는 미군한테 이 얘길 들려주면 뭐라고 대꾸할까? 1960년대말 미국 군인들 사이에서 ‘베트남전쟁, 정말 싫다’는 맹렬한 집단정서가 발동한 뒤로, 유럽 열강의 사회에서는 반전反戰의 정서가 완강하게 자리잡았다. 지배층이 꼬드기는 전쟁이 과연 ‘정의로운 전쟁’인지 의구심도 짙어졌을 뿐아니라 돈 놓고 돈 먹는 사회는 ‘탈영웅 사회’로 갈 수밖에 없다. “왜 내(우리)가 희생돼야 하냐구?”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낯설어진 ‘영웅적 자기 희생’의 에토스가 75년 전의 유라시아 대륙에는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영웅적으로 살았던 시절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초인超人이 되는 것이 인류의 꿈이라면 그 역사를 부디 잊지 마세요!”

 

물론 소녀들까지 기꺼이 참전하려고 했던 데에는 유물론적 이유도 쬐끔 있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은 ‘레닌그라드 봉쇄’ 시절에 그나마 군인으로 살아야 덜 굶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어떤 지경으로 갈지, 처음엔 대부분 몰랐으므로(소련 민중은 위대한 소련군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거라고 생각들을 못했다) 그 이유로 참전한 소녀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터. 혁명사회에서는 사람들한테 칭찬 듣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 자기 마을에 남아 있는 소녀들은 싸움터로 나아가는 소녀를 부러운 눈으로 우러르기 마련이다.

 

소녀들이 어찌 살았을까

 

여군들은 여자라서 겪는 핸디캡이 더 있었다. 물자가 풍족해진 요즘이야 덜하겠으나 그때 가난한 소련에서는 여군을 위한 배려가 거의 없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았을 때에야 간신히 여자용 속옷을 지급받았다. 키 작은 여성들이 커다란 남자 군복을 입고는 옷을 질질 끌었다. 생리가 끊긴 여군도 많다. 행군 도중에 생리가 시작됐는데 생리가 뭔지도 몰라서 “저, 부상 당했어요.”하고 알린 귀여운 여군도 있었단다. 용변用便도 문제였다. 열댓 명이 발동선에 타고 바다에서 왼종일 작전을 벌이는데 지휘관 한 명만 여자였다. 지휘관이 어디 숨어서 눌 데가 없어 꾹꾹 참다가 (임시 변통으로)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웃픈 이야기다.

 

남자 군인들과의 화합은 어려움이 없었다. 우애가 넘쳤다. 부대에 소녀 병사가 한 명만 있어도 사기士氣가 올라갔다. 지휘관들은 ‘어디 여자들까지 전쟁터에 불러야 하나’ 하고 자괴감에 빠지거나 ‘저 꼬맹이들이...’하고 가엾어했다. 소녀들은 그 연민의 눈길이 영 불편했다. 하지만 가끔 수작을 붙이는 남자도 있었다. 다음날, 십중팔구十中八九 죽을 것이라며 감상感傷에 젖어서 “우리, 죽기 전에 사랑 좀 나눌래?”하고 추근댄다. “꺼져, 병신아!” 곧 죽게 생겼는 부상병이 환하게 웃으며 “가운을 벌려서 가슴을 좀 보게 해달라. 아내를 오래 못 봤다.”고 간호병한테 간청했다. 얼버무리고 도망쳤다가 조금 뒤 되돌아 가보니 그 군인은 웃는 얼굴로 죽어 있었다. 어느 여군도 다음날의 죽음을 예감했다. 상관을 조르고 졸라서 예쁜 속옷을 얻어 입었다. 다음날 (그 옷을 입고) 하늘나라로 갔다.

 

전쟁은 사람의 진을 뺀다. 탱크부대에 배속된 간호병은 (탱크 안이 비좁아서) 탱크에 매달려 따라 갔다. 가다가 아군 부상병을 발견하면 뛰어내려 그를 응급처치한 뒤 데려와야 한다. 체중 50kg 여성이 체중 80kg의 건장한 부상병을 들쳐 업어야 할 뿐 아니라, 싸움터에 널부러진 소총까지도 집어왔다. 전쟁 초기에는 무기가 절대 부족했기 때문에 적군이 흘리고 간 총까지 집어오는 것이 큰 임무였다. 불붙은 탱크에 들어가서 사람을 꺼내올 때도 있었다. 온 몸에 불이 붙어 뛰어나온 병사의 살이 타면서 연기가 나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간호병의 속옷도 피로 물들었다.

부상병이 많으니 간호병이 격무에 시달렸다. 나흘 밤낮을 환자들 사이로 뛰어다니다가 누구 발에 걸려 넘어졌다. 고꾸라지자마자 잠이 들었다. 누가 그녀를 깨우려는 것을 지휘관이 말렸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은 부상병도 있었다. 부상당하고서도 (잠을 못 잔 탓에) 곯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다들 그가 죽은 줄 알았다.

또, 전쟁은 참혹하다. 백병전(육박전)이 벌어지면 뼈가 뚝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짐승 울음 같은 비명이 하늘을 뒤덮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여군들은 세월이 한참 지나도 여전히 ‘전쟁’을 겪었다. 밤마다 꿈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전쟁터에 사람이 돌아올 때

 

여자라서 더 끔찍했고 여자라서 그나마 대접받은 경우도 있다. 독일군은 여군은 포로로 잡지 않고 그냥 총살했다. “여기, 괴물이 있다.”며 병사들 앞에 데려가 구경거리로 삼거나.

그래서 여군들은 자살용으로 (옛 남파 간첩들의 독침이 아니라) 총알 두 개씩 갖고 다녔다. 실제로 독일군이 간호병의 눈알을 도려내고 가슴을 잘라 죽인 경우가 있었다. 한편, 여자라서 총을 쏴대지 않은 경우도 있다. 적군과의 중립지대에 부상병이 엎으러져 있어서 간호병이 그를 구하러 가야 했다. 총알이 날아오는 곳으로! 겁을 물리치려고 그녀는 벌떡 일어나 노래를 계속 불렀다. 목청껏 부르니까 총소리가 멈췄다. “어디서 여자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거냐?” 간호병이 바퀴 달린 썰매에 부상병을 태워 돌아오면서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내 등에만 쏘지 마라. 머리를 맞혀 달라. 부상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그녀가 돌아갈 때까지 독일군은 총을 쏘지 않았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사람들이 숭고해지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 교도소 도서실에 뛰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방송으로 노래를 틀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를! 그거, 무슨 성스러운 가스펠 음악이 아니라 어느 난봉꾼이 여자를 홀리는 유혹의 노래일 뿐이다. 그런데 운동장을 거닐다가 어디서 울리는 음악을 들은 순간, 교도소의 죄수들은 부활한 예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문득 숭고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 교도소 안에서 난생 처음으로 음악을 들었던 것이다!

독일군은 전쟁터라는 데는 여자가 감히 올 곳이 아니라고들 (속으로) 여겼으리라. 그런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사람 마음이 일렁일 노래를 부르는 데 차마 그 여자를, 그 사람을 쏠 수는 없다. 그 순간, 독일군들도 ‘쇼생크 탈출’의 죄수들처럼 숭고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저 여자가 제 할 일을 할 때까지는 우리, 착한 사람으로 돌아가야 해.” 물론 거기까지였다. 딴 전장에서도 간호병 여럿이 (부상병을 데려오려고) 기어나가자 독일군이 한동안 총쏘기를 멈춘 적 있었다. 하지만 ‘인간으로의 복귀’는 오래 가지 않았다. 밤중이 되어서는 그 간호병들도 총에 맞기 시작했다.

 

전쟁 막판에 간호병이 부상 당한 독일군 장교와 마주쳤다. 독일군이 몰리던 때이니까 그 쫓기던 장교가 간호병을 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가 마주친 사람이 여군임을 알게 된 장교는 허탈하게 웃고는 권총을 멀리 던져 버렸다. 그런데 마침 전투기가 날아오는 바람에 그 독일 장교랑 간호병이랑 또다른 소련 부상병이 좁은 참호 속으로 급히 피신했다. 참호 속 세 사람! 간호병은 장교와 부상병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부상병은 독일군에 대한 증오심을 걷잡지 못했는데 간호병 자신은 장교가 신사도(?)를 발휘한 덕분에 제 목숨을 살리지 않았는가. 그녀는 둘다 응급처치하는 데에 성공했다.

 

기막힌 장면들, 순간들

 

“적군을 어떻게 사람으로 대할까?” 하는 문제는 소련 민중한테 참 어려운 과제였다. 독일군은 상대방(곧 소련) 군대만 겨냥하지 않았다. 민간인 모두를 무차별로 죽였다. 20세기 들어, 열강들 간의 전쟁은 (19세기까지 기껏 쌓아올린) 전시법戰時法을 다 파토내는 쪽으로 흘렀다. 서로 민간인은 건드리지 말아야 전쟁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소련군이 덧없이 무너지고, 민중이 맨주먹으로 독일군에 맞섰으니 그들 민중한테 적군에 대한 증오심이 얼마나 사무쳤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인터뷰를 인용한다. “운전병으로 포탄 상자를 날랐다. 죽은 독일군 두개골이 차바퀴에 깔려 바드득 소리가 날 때마다 정말로 행복했다.” “독일군을 붙잡았다. 총살은 성에 안 찬다. 총검을 마구 꽂고 조각조각 썰었다. 눈0이 터지는 순간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놈들이 우리 마을 사람들을 장작에 태워 죽였기 때문이다.”

민중의 마음을 공감하려면 실제 사례를 더 돌아봐야 한다. “독일군이 마을을 마구 휘젓고 다니는 광경을 어느 중년 여성이 봤다. 그녀는 그대로 쓰러져서 팔다리가 마비됐고 곧 죽었다.” “빨치산에 참여한 여성이 세 살 배기 아이를 데리고 전선에 갔다. 그녀의 임무는 약품과 붕대를 구해 오는 일이다. 아이를 포대기로 싸서 그 안에 숨겨서 가져 오는데, 검문소를 지키는 독일군한테 의심을 사지 않아야 한다. 일부러 소금으로 아이를 문질러서 아이 몸에 열이 오르게 했다. ‘티푸스에 걸렸다’고 독일군에게 둘러대고 통과했다. 숲에 도착해서 엉엉 울었다. 동료들도 눈두덩을 문질렀다.”

“빨치산의 은신처가 들통 나서 깊은 숲 속 늪지대에 숨었다. 여러 날을 목까지 늪에 잠겨 지냈다. 여자 통신병이 갓 낳은 아기가 울어대자 부대장이 부하더러 통신병한테 명령을 전하라는데 다들 벙어리가 됐다. 그녀가 스스로 눈치 채서 아이를 물 속에 처박았다.”

“엄마가 게슈타포한테 붙잡혔다. 독일군이 작전 나갈 때마다 엄마를 데리고 나가 (지뢰가 묻혔는지) 먼저 밟게 했다. 빨치산 지휘관이 (독일군 맨 선두에 선) 우리 엄마를 쏘라고 할까봐 조마조마했다. 포로로 붙잡힌 독일군을 보면 달려들어 이빨로 물어뜯고 싶었다.”

 

“소련군이 진격하다가 어린애를 만났다. 우리 엄마가 독일군을 좋아했다고, 엄마를 죽여달라고 졸라댄다. 할머니가 뒤따라 오면서 그애, 제 정신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여자가 정신을 잃고 길에 쓰러져 있는데요, 눈을 뜨고서도 바닥을 설설 기더군요. 캐물어 봤더니 독일군이 자기 가족 모두를 헛간에 몰아넣고 갓난애를 공중에 던지라고 명령하더랍니다. 쏴서 맞히는 놀이를 한다고! 여자가 차라리 제 손으로 죽이겠다고 갓난애를 패대기쳤답니다. 그뒤로 여자가 ‘나는 죽었다’하고 스스로 믿는 거였어요.”

(관련된 시 하나 : 예전에 무명無名의 시인인, 필자 어머니의 동창생의 시를 읽은 적 있다. 생존하셨다면 94세다. “......나 안 갈래, 나 여기서 죽을래! 총알 쏟아져내리는 길 한복판에 숫제 벌렁 누워버린 어린 것/ 폭격에 놀라 잃어버린 신발 대신 헝겊 조각 감은 발가락 사이 찌걱찌걱 배어오른 피고름 피고름/ 나 안 갈래! 나 죽을래!”)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민중에게 ‘측은지심’은 얼마쯤 살아 있었다. “저는 군대 가서 독일군을 증오하며 살았는데요, 어느 마을 사람들이 독일군 포로들이 빵을 구걸하자 나눠 주더군요. 그걸 보고 충격 받았어요.”

“빨치산에 간 오빠가 인민재판을 열어서 누구를 ‘반동’이라고 때려죽이더군요. 그러고는 ‘내 동생!’하며 나를 안으려고 해서 ‘오지 마, 이 살인자야!’하고 소리질렀어요. 그뒤로 그는 제 곁에 오지 못했습니다. 그 오빠도 전쟁통에 죽었어요.”

“전쟁이 끝나고 독일군과 소련군의 주검이 다 뒤섞여 줄줄이 누워 있었지요. 비가 오면 그 주검들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온 마을이 꼬박 한 달을 매달려서 다 묻어주었습니다.”

전쟁은 끝났는데...

 

......끔찍한 전쟁이 끝났다. 소련은 통틀어 2800만 명이 풀꽃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군인 900만, 민간인 1900만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피해를 겪었다.

그런데 승전국으로서 소련의 여군들은 남자들과 동등하게 사회적 보상(대접)을 받지 못했다. 남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호기롭게 무용담을 늘어놨고, 그래서 인생의 힘들었던 한 시절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군 대부분은 자기가 참전했다는 사실을 쉬쉬하고 숨겼다. “전쟁터에서 남자들과 뒹굴며 지냈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을라구?” 성적性的인 정숙貞淑함이 여전히 강조되던 시대였다. 동료 군인들은 소녀들을 우애로써 맞았지만 싸움에 앞장서지 않은 민중들은 그런 진취성이 충분히 체화되지 못했다. 사회주의 인간형으로 덜 성숙했던 사람이 태반이다.

참전을 숨겨야 시집간다며 상이군인 증빙서류를 찢어버렸다가 나중에 몸이 아파서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할 때에 발을 동동 구른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어떤 여군은 부상으로 두 다리가 다 분질러졌다. 그 꼴로 차마 고향 어머니를 뵐 수 없어 이름 모를 곳의 요양원을 전전했다. 30년이 지난 뒤에야 소식 듣고 찾아나선 지기知己 덕분에 어머니를 상봉했다. 안 봐도 그 자리는 눈물의 바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라(언론)에서 여군들의 전공戰功을 기리는 사업을 시작했다. 소련권의 사회주의가 권력의 골조를 세우는 데는 위력이 있었을지 몰라도 민심을 두루 헤아리고 북돋는 면에서는 아주 엉성했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저자는 옛 소련의 일부였던 (폴란드 동쪽에 붙어 있는) 벨라루스 사람인데 벨라루스는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기풍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그곳 정부가 ‘전쟁의 참혹한 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을 꺼려서 이 책의 출판을 한동안 막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렇게 이적利敵 효과를 발휘할 내용으로 안 보이는데 말이다. 저자는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책도 썼다. 벨라루스는 체르노빌 낙진의 후유증을 집중적으로 겪은 곳이다.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내는 것이 진짜 역사라면 그는 진짜 역사가다.

 

진인眞人들의 자취

 

혹시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2차대전에 승리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사수死守하는 길과 사회주의를 후퇴하더라도 민중의 엄청난 희생을 막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 사이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수?” 물론 하나님도 계시지 않지만 질문 자체도 현실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소련은 전쟁에 말려 들어갔지(스탈린은 ‘독소 불가침 조약’를 맺고는 세계 좌파들한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능동적으로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서다. 침략을 막아낸 것도 스탈린 덕분이 아니라 민중이 젖먹던 힘까지 다 짜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꺼내는 까닭은 민중이 그렇게 영웅적으로 싸웠는데도 그 강렬한 역사의 교훈이 후손에게 변변히 전해진 것 같지 않아서다. 그럴 거라면 더 일찍부터 ‘전쟁 아닌 길’을 애써 찾았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말했듯이 전쟁통에 아름다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면담록 곳곳에는 소녀들이 어떤 심정으로 전쟁터로 향했는지가 수없이 표현돼 있다. 한 학급 모두가 기차를 타고 줄곧 혁명가를 부르며 소풍 가듯이 즐겁게 전쟁터로 떠났다. 새가 날아가다가 추위로 얼어붙어 추락하는 그런 곳으로! “나라(인민)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나섰어요.” 정의로운 전쟁에 나선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요즘 우리는 ‘전체 속의 나’로 살아가는가?

카스트로가 잠깐 광기狂氣를 부린 적 있다. 1962년말 쿠바에 미사일 위기가 터졌을 때다. 미국의 협박에 맞서 그는 후루시초프한테 편지를 보냈다. “핵전쟁? 까짓 거, 합시다! 우리(쿠바와 소련) 민중은 진인眞人이요, 나머지 세상엔 낡은 사람들로 가득하오. 진인眞人을 살릴 수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죽어도 좋소.” 핵의 무서움을 잘 아는 지금 우리가 볼 때, 그것이 미친 생각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아무튼 그때 그들은 그런 광기狂氣를 품고 살았다. 다시 오지 않을 광기일까?

한때 진인眞人들이 살았음을 잊지 말자. 조국의 위대함을 믿고, 세상에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 그 진인眞人은 러시아에도, 중국과 한국에도, 아프리카 대륙에도 살았다. 사회혁명의 시대에는 사람이 사람다워진다. 혁명이 퇴조한 뒤로, 그 세대는 매머드처럼 사라져가고 있다. “유럽인들은 코카콜라를 사랑하고, 이슬람전사들은 죽음을 사랑한다.”는 현대판 격언도 있는데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스베틀라나의 면담록은 늙어버린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으로 가득하다. 처음 제안 받고는 ‘만나기도 싫고 떠올리기도 싫다’고 고개를 저은 사람(여성)이 많았지만 한번 말문이 트인 사람은 면담 내내 울고 소리를 질렀다. 말하다가 가슴이 턱 막혀 심장약을 먹거나 구급차에 실려간 경우도 있다. “40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살았어요!” 전쟁의 트라우마가 너무 격렬해서 시장market에 다니지 못했다는 여군도 있다. 붉은 고기 살점이 내걸린 정육점 앞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 자기는 전쟁터에서 ‘살아 있음’을 느꼈지, 고향에 돌아와서는 삶을 산 것 같지 않다고도 했다. 전쟁터에서 귀환한 뒤의 삶은 그들에게 ‘후일담後日譚’일 뿐이다. 한 인생, 징하게 살다간 분들한테 엎드려 절한다. 부디 우리의 텔레파시가 시베리아의 청명한 대기를 건너 그들에게 전해지기를....

 

더 좀스러워진 우리가 맞설 수 있을까

 

끝으로, 우리의 미래를 잠깐 점쳐 보자. 21세기 인류사회에 ‘대조국전쟁’ 같이 참혹한 전쟁이 다시 일어날 조짐은 없을까? 소소한 전쟁이야 앞으로도 줄곧 터지겠지만 그렇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는 커다란 전쟁이 터질 가능성은 다행스럽게도(!) 작아 보인다. 세계를 주름잡는 부르주아 지배층이 반세기 사이에 교양 있고 착한 사람들로 바뀌어서? 무슨! 더 탐욕스러워졌겠지 그럴 리가!

사실은 제3차(또는 제4차) 세계 대전大戰이 벌어질 개연성이 높아진 측면도 있다. 미국-유럽 연합과 중국-러시아 연합 사이에! 2008년에 세계대공황이 터졌기 때문이다(자본 역사에서 세 번째 맞는 큰 파고波高). 호전광 아베나 미국 네오콘의 욕망대로라면 대전大戰이 이미 열두 번도 더 일어났다. 하지만 전쟁의 군사기술적 사회경제적 조건이 크게 달라진 탓에 나라간 갈등을 대전大戰으로 키우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워졌다. 그때는 독일이 영국을, 일본이 미국을 넘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의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커졌다. 엄청난 핵무기 플러스 우주에서 쏘아댈 무기들!! 당분간 누구도 대들 수 없다.

 

또 세계경제가 훨씬 긴밀하게 얽혀들었다. 전쟁이 터지면 두 쪽 다 경제가 큰 타격을 입는다. 그래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짓밟는 것은 앞으로도 지속되겠지만 열강끼리 ‘정면’ 충돌하는 것은 서로들 조심할 것이다. ‘1억 명이 (몇 년 안에) 생매장되는 참사’는 덜 걱정해도 되므로 다행일까? 하지만 그런 안도감은 너무나 웃기는 얄팍한 감정이다. 큰물처럼 우리를 휩쓸 난제難題들이 수없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기후변화, 농업붕괴, 성장동력 소멸...)

 

그러니까 잊지 말자. 바늘로 살갗을 찔러서라도 인류의 어리석었던 재난들을 우리 몸에 낱낱이 새겨 두자. 메멘토 모리! 온 몸이 뭉개지면서 죽어갔거나 간신히 살아남은 그때의 뭇 사람들이 우리의 전례前例다. 사람됨 면에서는 그 선조들이 생존/고용살이에 쫓기고, 뿔뿔이 원자原子들로 흩어져 있는 우리보다 훨씬 그릇이 컸다. 좀스러워진 우리가 더 커지고 깊어진 사회적 위기를 맞닥뜨려야 한다. 인류는 시간에 쫓기고 있는데 (세상을 내다보는) 지혜라도 어서 깊어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