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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참실] 교사 8년차 ‘참교사’ 되기를 포기하다.

2009.03.25 14:59

진보교육 조회 수:1390

[참실]  ‘참실’에 대하여
            교사 8년차 ‘참교사’ 되기를 포기하다.
                                                                            맑은눈 /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1.참교사가 되고 싶군하!!!

# 내가 생각해도 참 아름다웠던 신규시절
처음 교사가 되고 나서  누구나 그렇겠지만 가장 많이 봤던 책은 참교사가 되기 위한 매뉴얼 3종 세트라고 할 수 있는  ‘빛깔이 있는 학급운영’과 ‘우리교육’과 ‘함께여는 국어교육’이었다. 각종 연수도 가고 참실보고 대회도 가면서 내가 배운 것은 ‘교사가 어느 정도 시간과 품을 들여 아이들과 행복한 일상을 꾸려갈 수 있을까’였다. 그 때 나의 마음속에서 꿀럭 꿀럭 마그마처럼 용솟음치는 욕구는 ‘내가 아이들에게 인정받는 교사가 되고 싶다’,‘아이들은 뭔가 부족하고 나의 노력으로 1년 안에 그 부분을 바꿀 수 있다’,‘교사가 열심히 하면 아이들끼리 서로 싸우지 않고 깨끗하며 지각과 조퇴도 없는 아름다운 교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는 아마 나는 때리지 않고 헌신하고 웃으면서 아이들을 대하니까 아이들이 지각과 조퇴를 하지 않을꺼‘라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물론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이제는 내가 뭔가를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그런 기대를 갖지 않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다. 익숙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들의 상태가 너무 열악해서 뭘 요구할 입장이 못된 다는 것이다. 나 같아도 학교에서 학원에서 하기 싫은 공부를 계속 하며 365일의 노동을 견뎌야한다면 지각, 무단 조퇴 등의 일탈 들이 계속 일어날 것 같다. 학교에 들어오면서 내 몸을 다시 돌아봐야하는 일상적인 인권침해가 계속  된다면 억압이 있는 순간에만 굴종하는 그런 비열한 모습을 보일 것 같았다. 그런 인권침해를 좀 고쳐보려고 학생회 담당교사를 맡았다. 학생회 일이 잘 굴러가고 학교운영위원회를 분회가 장악하여 두발규정 개정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은 나의 이런 고민이 조금은 해소되었다.

#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그런데 학교를 옮기고 보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합원끼리도 의견이 안맞고 거친 애들일수록 다잡아서 학교에 적응시켜야한다는 ‘온정주의에 바탕한 근대적 학생위하니즘’ 이 교사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조합원 선생님들 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기도 하였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 “내가 원래 생각했던 전교조를 중심으로 학생 인권이 개선되기는 무척 어렵겠구나. 학생과 교사간에 교사가 권력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명예 혁명을 이루기는 정말 어렵구나” 그리고 학생회 활동에도 시들해졌다. 학생회 자체가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 할 뿐 아니라 정해진 테두리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 자체로 탄압을 받아야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생회 아이들은 캠페인 같은 것을 조금 해줘서 학교측의 신뢰를 얻으려고 했다. 아이들에게 이런 주고받기식 정치의식이 생기는 것이 교육적인지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수많은 학급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그 활동을 좋아하거나 고마워하거나 할꺼라는 기대를 하다가 이제는 내가 즐거워서 하다보니 내가 즐겁지 않은 해에는 하기 싫어졌다. 즉 실천으로서의 지속성이 없어진 것이다. 즉 나의 헌신에 대해 결과를 바라지 않으니 하는 재미가 안나고 나를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니 나를 분명히 잡아주는 무언가가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교사로 인정받고 싶은 건가?’
‘인기를 끌고 싶은 건가?
‘나를 올바른 곳으로 인도해준 선생님으로 인정받고 싶은건가?’

2. 무엇을 할 것인가?-거짓말과 미친파티

#헷갈려! 헷갈려!
그러던 차 내가 있던 관내 학교에서 두발자유 시위가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학생이 징계위기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회를 통해 그 학교에 연락을 취했고, 다행이 좋은 분회 선생님들로 인해 그 학생이  징계를 받은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부장 선생님과 그 학교의 조합원 선생님들한테는 상처가 된 모양이었다. 그 이후 학교가 개판되어서 모두 생활지도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어쨌든 해방의 주체는 학생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교사들이 서로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위에 저항하기 보다는 힘이 약한 학생들을 억압하는데 익숙해져있었고, 그것이 없어지면 교육을 포기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 인권운동과 접속하게 되었고, 지역의 학생들을 모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서에서 이런 모임을 주도 했으나 내가 속한 학교외의 학생들이 모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있던 학교에서 꾸준히 나오던 부학생 회장 아이가 두발자유운동을 하다 엄마에게 나와의 관계가 걸리면서 학부모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분회의 별다른 지지와 지원을 받지 못했다. 당시 우리 분회는 조직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좋은 학교 자원학교 만들기’사업에 교육복지를 함께 하여 교육복지 사업 전체와 멘토링, 방과후학교의 강좌등 많은 일들을 조합원이 나눠서 맡고 있었다. 임대아파트 한 중간에 있었고, 다른 일반 아파트 주민으로부터 기피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교육복지 사업을 통해 기초생활수급자 아이들을 중심으로 담임이나 대학생 멘토링과 문화사업, 방과후 학교를 했다. 방과후 학교는 영어, 수학 중심이었고, 수급자 아이들 중에는 빵 때문에 오는 아이들도 많았다. 수급자 아이들 중에서 공부에 의욕이 있고, 그나마 따라가는 아이들이 성과를 내주었고, 나중에는 그 아이를 외고에 보내기 위해 학원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물론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도 국토순례나 방과후 학교에서 사귄 친구를 통해 학교생활의 재미를 느꼈다. 어쨌든 그 기초수급생활자 아이들의 찌질함은 돌봄의 대상이었다. 교육복지에 헌신하셨던 조합원 부장님 표현에 의하면 “그 아이들은 ‘두발 자유’와 같은 정치적 권리를 누릴만한 여력이 없다”고 하셨다. 즉“‘정서적인 결핍’과 ‘물질적인 결핍’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교육복지를 통해 그런 것들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고 하셨다. 학생회장들과 함께 하는 나의 운동은 엘리트주의적이라고 지적하셨다.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이론에 보면 물론 생존의 욕구가 먼저라지만 “정서적 결핍에 대한 욕구가 사실 아이들 스스로 느끼는 1차 적인 억압과 결핍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학교에 오면 내 머리조차도 내 맘대로 할 수없고, 교사든 힘센 학생이든 권력자가 내 몸에 손을 댈 수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게  과연 그렇게 배부른 욕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건 내 머릿속만의 생각일뿐  나는 슬금슬금 그 활동에 침울해지기 시작했다.
#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
- ‘학생’넌 누구냐?
거짓말-남부청소년인문학아카데미
고등학교 내신을 내고 남부지회 활동을 하면서 촛불이 왔다. 촛불을 일으킨 10대들을 보고 다시 학생사업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대학생도 청년실업으로 자본주의에 위축되어 노예가 된 지금 10때가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처음 학생회장들을 만나서 사실 같이 밥을 먹는데 좀 뻘쭘했던 것 같다. 축제를 하거나 신문을 만들자는 얘기까지는 했는데 왠지 어떻게 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청소년대상으로 한 1회적 모임은 쉬우나 일상사업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따이루가 방학 때 나다 강의를 듣는 것을 보고 남부에서 그런 강의를 해보면 어떨까 둘이서 얘기했고, 즉각적으로 준비가 이루어져 하게 되었다. 나다에는 청소년인권과 관련된 하지만 학생들에게 재미있는 그런 강좌를 원했고, 2번 정도의 사전모임을 갖고 강좌를 시작했다. 그전에 촛불에 나왔던 남부지역학생중 얼굴을 알았던 학생들과 그 밖에 학교에서 잘 개기는, 촛불 같은 거 쫌 좋아하는 학생들을 모아달라고 했고, 분회장 선생님들과 기타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학생들이 모여 평균20명 정도 5회에 걸쳐 강의를 들었다. 사실 강의의 내용이 대부분 학교의 억압체제에 관한 내용들이어서 나조차도 이런 센 강의를 아이들과 터놓고 함께 이야기해도 되나? 위에 거짓말 포스터 참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부분 학교 체제 자체에 대한 것이 많아서 사실 그런 부분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의 개인적 실천들이 정말 미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애들을 때리든, 웃으면서 하든, 헌신을 하든 지각을 못하게 하는 것이 학교에서 요구되는 담임의 역할이고 어떤 방법을 쓰던 간에 그렇게 아이들을 관리해야하는 역할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부모의 대부분의 역할이 관리의 역할이라고 말할텐데, 사실 부모가 우리나라처럼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나라는 없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학부모와의 연대를 어떤 방향으로 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철저한 사적인 양육을 통해 형성된 학부모의 ‘내새끼니즘’과 싸우지 않고 그냥 연대하는 것은 언젠가 폭발할 화약을 안고 일시적 화해를 하는 것이다.
사실 청소년을 그냥 어른과  같은 동등한 주체로 본다면  ‘돌봄’은 장애인, 이주노동자 , 성소수자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한 주체들이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조해야할 공적인 사회의 의무일 뿐 그에 대한 권리로 청소년을 억압하게 하는 것이 별로 논리적이지 않다. 따라서 공적인 양육이 사회제도적으로 정착된다면 이러한 면에서 서구 사람들이 아이들을 따로 재우거나 일찍 영유아 시기부터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을 특별히 그들의 혈연관계에서 벗어난 개인주의적 속성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실 우리나라도 그런 사회적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면 누구나 육아의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
청소년은 누구의 자식이거나 누구의 제자로서가 아니라 그 인간 자체로서 정치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를 누려야하는 것을 좀 더 많은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아이들의 싸가지 없는 행동이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내 수업을 안듣는 것은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시험을 통해 강제적으로 지식을 주입할 수밖에 없는 지금 시스템에 나름의 방법으로 저항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수업방법의 개선과 노력으로 좀 더 많은 아이들의 동의를 얻으려고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몇 명을 의무적으로 낙오시키는 시험을 매년 봐야하는 지금의 시스템에서 문자질이든, 떠드는 것이든, 반항이든, 잠자는 것이든 아이들이 나름의 저항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정당하게 표출할 기회가 차단된다면 말이다.  마치 분회가 힘이 센 곳에서는 분회가 부장까지 모두 장악하여 학교를 잘 운영하느라 그 안의 분회원은 그 흐름에서 실천을 하느라 바쁘지만 꽉막힌 학교에서는 교직원회의에 안간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태업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들이 학교의 규칙을 잘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참실인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자치에 대한 고민도 바뀌었다. 나는 지금 시스템이 좀 제한적이더라도 회의를 통해서 정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별로 중요한 내용도 아닌데 자치라는 형식을 맞추려고  자리배치, 쓰레기통을 어떻게 놓을까 물론 소소한 것들을 회의하는데 나도 지치고 애들도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문제 말고도 고민할 문제가 많은데 ‘자치’를 위해서 그런 걸 회의하면서 내가 민주주의 교사입네 하는 것이 낯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마치 학교에서 교장, 교감들이 인사나 업무분장, 교육과정 등 정말 중요한 것은 지들 맘대로 하면서 교직원 연수를 언제, 어디로 갈까 뭐 이런 사소한 문제는 정밀하게 의견 수렴할 때처럼 말이다.
지각지도도 그랬다. 자기장점 100개 쓰기, 전화, 같이 등교 등등 인권친화적인 방법으로 아이들의 지각지도를 하기 전에 “‘지각지도’를 왜 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지각처리는 이미 아이들에게 불이익인데 내가 지도를 하는 것은 이중의 처벌을 하는 것은 아닐까?, “개인의 지각이 반분위기에 영향을 미치는게 사실일까? 조퇴나 연가가 노동자의 권리라면 지각이나 조퇴도 아이들 입장에서 권리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지각지도가 의미없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상의 실천은 아름다고 숭고한 일이었지만 시스템의 불합리성을 배제한 채 열심히, 잘 해야 한다는 논리, 아이들을 사랑하자는 구호에 갇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혼란스럽게 되었다.
‘지각을 하던 아이가 지각을 안하게 되면 나의 학급운영은 성공한 것인가?’
‘꿈을 갖게 한다고 하지만, 아이의 집안환경이나 실력이나 흥미, 적성을 봐도  의사가 되기 어려운데 너의 꿈이니 소중하다고 그 아이를 북돋아주는 것이 내가 해야할 일인가?’
‘자치활동 시간도 없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남겨서 라면도 끓여주고 하면서 학급행사를 강행하는 것이 내가 해야할 일인가?
‘입시지도를 열심히 하여 그 아이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 내가 할 일인가?’
‘학생과 학부모에게 인정받아야 된다는데 그들은 모두 이해관계가 같을까? 잘살고 공부잘하는 학생과 아침저녁으로 일을 해서 아이들을 챙기지 못하는 부모와 아이들은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 미친 파티
미친파티는 거짓말에 참여했던 아이들과 축제 자원봉사형태를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던 아이들이 모여서 계획했던 파티였다. 강의를 계속하는 것이 좀 지루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축제준비를 하고 싶다고 해서 꾸린 건데, 꾸리는 과정은 온갖 이전 참실 자료집 지역 축제에 있고 확실한 것은 이름, 포스터 , 내용까지 모두 학생들이 준비하고 조남규샘과 유성희샘과 나는 연대의 정신으로 시다바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다음 과 같았다.

‘헐.. 미친(美親)파티라매.. 이딴거 가지고 놀라는 거야?’라고 생각했겠지만, 원래 미친파티는 이런게 아니였긔.ㅋ-처음엔 우리의 모습이 공부에 찌든, 공부만 하는 똥덩어리가 아닌 , 여러 사람과 친해질 수 있고 공부 외에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미친 파티를 준비했삼.-3-
우리를 공부기계로 밖엔 안보고 공부로 고문하는 사회를 비웃어주기 앞서 우리끼리 놀고 즐기고 단합하는 그야말로 미친 파티지. 2가지 뜻을 담고 있어. 그래봤자 어른들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근데 마침 교육청, 서울시청이 포스터 내용 중 ‘이명박 바보’라는 멘트가 대통령을 모욕하는 집회라고 우기면서 하자센터를 협박했고 장소 예약은 강제 취소, 우리는 파티 바로 전날 일방적인 통보로 모두다 쫑친거삼..-_- 우린 쫌 놀겠다는 것뿐인데 왜 지들끼리 오바임? 스스로 뜨끔하는 거야-_-?? 아무튼... 이렇게 와줬는데..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 우리도 너무 허무하고 어이없다..하..^^ 과연 이 분위기에서 또 할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내년에 이런 파티를 다시 기획할거고 그땐 꼭 제대로 한번 놀아보자☀
ps. 이 아름다운 세상/ 명 쾌한 세상/박 수를 보내자/즐 거운 세상~
물론 이 포스터를 보았을 때 ‘이명박바보’가 내심 걸리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이들의 생각을 검열하는 것이 싫어서 그냥 갔다. 여기에 대해서도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이 달랐지만 세상을 아는 우리들의 눈으로 사전 검열하여 승리의 경험을 줄 것인가? 함께 벽에 부딪히고 그것을 극복할 경험을 할 것인가가 지금 우리의 과제이다. 연대를 해도 전교조는 자본력과 성인이라는 문화자본이 있는 권력집단인데 동정이 아니라 연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존의 권력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는 것이 청소년인권활동가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니어야 할텐데......... 동등한 관계의 연대를 꾸리는 것이 내가 학급에서 아이들과 ‘사랑’의 차원을 넘어서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바탕이 될 것이다.

3. 아직도 나는 매트릭스의 안과 밖 사이에 끼여 있다.

# 공교육 시스템 자체가 문제인데, 공교육 시스템이 없으면 전교조도 없는 거 아니야?
사실 교사 노동조합이라는 것도 근대의 공립학교 시스템의 산물이다. 귀족 교육 시대의 가정교사들은 노조가 없었을 것이다. 전국민이 배워야하는 학교가 생기고 그에 지속적으로 공무원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교사 노동조합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학교가 거짓말이라는 강의를 조합원 돈으로 하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거짓말 강의가 학교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동의 경작지와 사적인 경작지 중에서 사적인 경작지가 개인적으로 더 많이 남는데 공동의 이익을 위해 공동의 경작지에서 일을 할 것인가? 사적인 경작지에서 일을 할 것인가? 이런 논의를 통해 자본주의의 핵심과제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이런 강의를 아이들과 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예쁘고 고운 것’만을 보여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신화를 깨야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만 지나면 세상의 쓴맛을 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잘난 것을 그대로 표현하면 왕따 당한다는 것을, 남에게 양보만 하면 자기 것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남을 밟아야한다는 것을............ 이런 상황에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미담을 강조하면서 무조건 적인 배려와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교육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살벌한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은 관계와 연대의 끈을 찾는다. 누구에게나 둥지가 필요하다. 그 때 내가 누구의 손을 잡아야하는지, 누구와 함께 해야 공동의 이익을 찾을 수 있는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왜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깨닫게 하는 교육,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교육의 수혜를 받을 수 있다는 교육의 공공성을 지켜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배움을 방해하는 ‘입시’,‘국가수준의 강력한 교육과정’,‘교육과 자본의 연결고리’등에 대해 싸우고 그런 매트릭스에 대해 학생들과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전근대적인 교사상을 주입받은 채 자기 인생에 사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이런 것을 이해하기는 무척 어렵겠지만, 이에 대해서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학생들의 진정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면에서 지금의 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한 채 학생에 의한 평가를 내세우는 것은 학생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탈을 쓴 학력주의에 평가를 내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궁극에는 구조적으로 뒤틀려있는 이 교육 속에서 나 개인이 아이들에게 헌신하여서  이상한 시스템을 아이들이 견딜만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서로 믿음과 정이 있으니 아무리 힘든 세상도 버텨나가자는 몰핀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머리가 복잡해진다.

# 교사가 학교를 잘 견디게 하는 것이 참실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소위 말하는 참실 활동이라는 데 대해서도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보통 참실 활동을 통해 학교생활의 재미와 보람을 찾는다고 한다. 그래서 독서, 테니스, 볼링 등 여러 가지 소모임을 지원하고 그것을 활성화해야한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전교조의 품안에 있지 않을 뿐 학교 안에는 많은 작은 모임들이 있다. 교사가 행복해야 좋은 에너지를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고,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교사의 행복이 왜 아이들의 행복으로 전파되지 않을까? 혹시 학교 전체가 정상이 아닌데 ‘소모임의 즐거움’이라는 몰핀을 맞고 그저 지금의 ‘학교’를 지키는 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 이런 것은 참실 사업이라기보다는 조직 사업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조합원들의 화합을 다짐으로써 조직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 때는 학급운영모임이나 봉사모임과 같은 ‘헌신’이 서로의 ‘헌신성’을 칭찬하며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런 것은 ‘헌신’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다. ‘헌신’은 좋은 일이지만, ‘헌신’을 못한다고 조합원의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참실은 “지금의 매트릭스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행복을 끌어내 상대적으로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일까? 지금 시스템에 균열을 내고 이게 매트릭스일 뿐 속아서는 안된다고 아이들을 일깨우면서 현실에서 끊임없는 충돌과 모순을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일까?”를 고민하는 것이 되어야한다. 참실의 논리가 개인의 헌신에 갇혀서는 안된다.  그리고 교사들의 소모임은 그냥 우리가 즐거워서 하는 조직 강화활동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취미로 소모임을 하면서, ‘참실 활동’이니까 뭔가 교육적 성과를 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다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교과모임에 가서 대안교육과정에 대해 열심히 고민하여 교과서 만들면 학교에는 일제고사가 들어와 그 교육과정에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는 경험을 했다. 7차 교육과정이 들어오면 선택형교육과정이 되고 교과서가 검인정이 되어 우리말 우리글을 정규교재로 채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학운위는 입시에 도움되는 것 외에는 채택하지 않으려고 한다. 학교안에서 열심히 아이들과 만나면서 느끼는 기쁨은 눈에 보이는 성과와 칭찬이 있으나 하고 나면 허무하고 그렇다고 맨날 집회나가고 학교에서 쌈닭처럼 살고 아이들한테  니네는 88만원세대니까 노동운동을 해라고 말할 수 도 없고, 맨날 학교에서 쪼이니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이 계속되니 어느 것을 선택해야하나?
  확실한 것은  지금 시스템 안에서 깔끔한 교실을 만들고 무결석 반 등으로  학급운영도 잘하고 모든 학부모, 동료교사에게 학생들에게 실력으로나 인성교육으로나 모두 인정받고  이런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하는 것이 ‘참교사’라면 이런 욕심은 버리고 싶다.
내가 지켜가야 하는 것과 버려야하는 것을 구분해내고 누구에게 칭찬받고 누구에게 욕먹는 것이 옳은 것인지  함께 토론하고 , 욕먹어야하는 순간에 함께 욕먹음에 동지애를 느끼는 그런 집단이 전교조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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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 [차례] 진보교육 45호 (2012.6) 진보교육 2012.06.25 902
730 [권두언] 멘탈붕괴 시리즈, 진정함과 새로움으로 타고 넘는다. file 진보교육 2012.06.20 674
729 [특집] 1.교육혁명을 다시 사유하다 - 수업혁명, 학교혁명, 체제혁명의 총화로서의 교육혁명 file 진보교육 2012.06.20 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