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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열공]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 더 절실하게

2010.04.20 18:23

진보교육 조회 수:1263

[열공]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 더 절실하게

이철호/학벌없는사회


인간의 언어가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의 하나는 접사를 사용하여 새로운 단어를 형성해가는 것이다. 접사의 사용이란 기존 단어의 앞이나 뒤에 특정한 의미를 가진 표현을 덧붙이는 것으로, 예를 들어 tele를 다른 말 앞에 붙이면 tele-vision도 되고 tele-phone도 된다. 접사의 편리함은 이렇게 형성된 단어들 사이에 공통적인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는 점이고, 이는 한국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접사는 그것 자체가 융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했기 때문에 어엿하게 사전에 등록된다. 이미 그 의미가 사회화되었다는 의미다. ‘위기’ 역시 마찬가지의 쓰임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자본의 축적과 재생산의 위기가 시작된 1970년 이후 위기라는 말은 어디에 놓아도 그럴 듯하게 어울려 나갔다. 가족, 축적, 노동, 희망, 교육 등 아무 자리나 제 자리인 것처럼 버틴다. 그 중에 너무 일상화되어 고정되어버리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의 하나가 노동의 위기다.
노동과 계급적으로 반정립하고 있는 자본은 대결하고 극복해야 할 위기를 모면하고 전가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오고 있으며, 이미 성공한 듯이 보인다. 자본은 먼저 위기 자체에 대한 분석과 대응으로부터 출발한다. 간단하게 위기라고 하지만 이는 전체로서 서지 않는다. 위기라는 전체는 다양한 세부를 구성요건으로 한다. 파국의 상황일 수도 또는 전조 일수도 있으며, 실제의 위기상황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존재의 부정이거나 단지 금전적인 손실 정도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crisis라 통칭할 수 있는, 파국이나 공황이라고 종종 번역되는 위기를 risk로 대체한다. 그리고 리스크를 ‘정도를 계량화할 수 있는 객관적 불확실성(Measurable & Objective Uncertainty)’으로 정의한다. 간단한 정의의 조작으로 위기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의 유한성에 기인한 미래상황에 대한 예측능력의 부족으로 야기되는 것으로 항상 존재하지만 인간의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지면 감소 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 위기가 리스크로 통칭되는 위험으로 바뀌어 자본은 존재를 부정당하는 위기를 해치워 버렸다. 이제 위기는 언제나 닥치는 것이며,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더 많은 부 축적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위기는 리스크를 넘어 위태(hazard), 사고(peril), 손해(loss) 등으로 자리를 비켜준다. Hazard(위태) 는 사고(peril)로부터 발생하는 손해의 발생가능성을 일으키거나 손실의 규모를 증가시키는 행위 또는 여건(condition)이다. peril은 위태의 구체적인 실현을 의미하며 손해의 원인이 되는 사고 그 자체를 말한다. 손해(loss)는 우연한 사고로 인하여 발생하는 불의의 경제적 가치의 상실 혹은 감소의 의미로 가진다. 이제 자본에서 위기는 사라졌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노동은 위기라는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위기가 일상적인 어려움부터 존재의 부정까지 중층적으로 얽혀 있음에도 이를 위기로 통칭되어 공포로 이미지화되고 있는 듯하다. 노동운동 더 구체적으로 노조 운동 위기 논쟁의 전개과정을 보면 이는 명확하게 드러나 노동운동의 시작부터 그리고 가장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에도 위기 논쟁의 불씨는 지펴져 왔다.
구체적으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지난 20여 년간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은 ‘위기’, ‘위기 논쟁’의 역사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사회에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평가, ‘위기’에 대한 진단과 그 극복방향,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의 목표와 발전방향 등을 둘러싼 ‘위기 논쟁’은 ‘노동운동의 노선’ 논쟁과 맞물려 크게 3차례 진행되어 왔다.
1차 위기 논쟁은 1991년 5월 전노협 총파업 이후 노동운동 위기론을 둘러싸서 주로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2차 위기 논쟁은 1998년 1~2월의 정리해고제 잠정합의 이후에 민주노총의 정체성의 위기를 둘러싸서 진행되었으며, ‘사회적 합의주의’가 논쟁의 초점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3차라 할 수 있는 위기 논쟁은 2004년 노무현 정권의 등장 이후 전면적인 대노동 이데올로기 공세(‘노동귀족’, ‘그들만의 노동운동’ 등)와 민주노총의 비리 사건 등으로 재현됐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최근의 위기 논쟁은 과거와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고, 동시에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과정이 맞물려 민주노조의 위기 역시 더욱 확대되고 있다는 점, 과거의 위기가 주로 민주노조운동의 상층 지도부의 문제였다면, 지금의 민주노조 위기가 현장에서 동력 상실이라는 위기를 함께 동반하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지난 10여 년간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의 결과 노동자 내부 분할과 위계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는 위기라는 점 등이다.
더욱 문제는 민주노조가 내부 위기에 대한 극복 방안을 마련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민주노조를 무력화하거나 민주노조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려는 이명박 정권과 자본의 공세가 더욱 거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총 탈퇴 공세’, 전교조와 공무원노조에 대한 탄압, 그리고 2009년 말 복수노조 금지조항 유예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등을 골자로 한 노동관계법 개악에 이르기까지 그 공세는 숨 돌릴 틈 없이 전방위적이다. 이러한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대해 민주노조의 주체들은 ‘정파 폐해론’ 이상의 어떤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위기의 노동운동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는 민주노조가 총체적인 위기, 자칫 그 존립 이유마저 잃어버릴 수 있는, 그 극복이 ‘정파’의 폐해를 극복하면 가능할 것처럼 부당하게 여론몰이 되는 상황에 대한 대답이다.
‘1부. 위기의 노동운동’에서는 90년대 중반 이후 전면화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민영화 등)에 민주노조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그 결과 민주노조는 물론 노동현장조차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진단하면서, 그 극복방향으로 ‘반자본의 변혁노선’을 분명히 해 나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2부. 노동운동의 혁신’에서는 지난 20여 년간 민주노조 전략의 두 축이었던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산별노조 건설’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진보정당운동 중심의 정치세력화와 조직형식 전환 중심의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양날개론’을 극복하고, 계급적 정치세력화와 계급적 산별노조를 건설해 나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2009년에 다시 유예된 민주노총의 임원직선제가 민주노조의 혁신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 구체적으로 진단하고, 나아가 민주노조운동이 페미니즘적인 문제의식을 적극 수용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3부. 더 아래로’는 전교조, 공무원노조, 공공부문, 사무금융노조, 그리고 이주노동자 문제 등 산별노조와 그 산하 현장에서의 위기 상황에 대해 생생하게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진단 속에서 전교조의 근본적인 전환, 통합 공무원노조의 이후 투쟁 방향, 계급적인 노동현장 단위의 건설, 현장에서 노동조합주의를 뛰어넘는 전망, 그리고 이주노동자와의 적극적인 연대를 절실하게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던 대중파업에 대한 분석을 통해 ‘준비된 파업’, ‘조건부 파업’, ‘합법의 틀에 갇힌 파업’의 한계를 뛰어넘어 2009년 쌍용자동차 77일파업에서 보여준 대중파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복원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4부. 더 왼쪽으로’는 민주노조운동에서 그간 꾸준히 제기되어 왔던 ‘사회연대전략’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연대 문제와 노동복지, 사회복지 문제를 계급적인 관점에서 다시 재구성해 나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위기의 노동운동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는  ‘위기’ 논쟁이 사실 ‘자본축적의 위기’가 민주노조운동과 그 주체들에게 투영된 결과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위기’ 논쟁이 자기 성찰적인 논쟁, 자신을 혁신시켜 나가는 논쟁이 아니라 논쟁의 목표 자체를 잃어버리고 자학적인 논쟁이 되어 버릴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미덕은 동지들의 목소리라는 데에 있다. 이론적인 공허함이나 콘 목소리의 외침이 아니라 소줏잔을 앞에 놓고 자신의 삶을 그리고 희망을 털어놓는 동지들의 얼굴이 책장마다 펼쳐지고 있다. 그 자리에 나도 함께 할 일이다.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 그리고 더 절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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