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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 [담론과 문화] 2. 피에타와 구원자

2012.10.15 15:25

진보교육 조회 수:832

[담론과문화]2

피에타와 구원자  -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은하철도 / 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

불편한 진실 , 외면하고픈 현실

  김기덕의 영화는 불편하다. 보는 관객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억지로 보도록 한다. 어린 시절 아름답고 순수했던 추억이 아닌 나이가 들어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알고 세속에 물들고 시류에 편승해서 살아가는 장년들의 일그러진 추악한 삶을 가식 없이 특수 효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수십 년 배우 생활을 한 늙은 배우가 늦은 밤 힘들게 공연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와 얼굴에 덕지덕지 바른 두터운 화장을 콜드크림 듬뿍 발라서 지우고 깊게 패인 주름이 고스란히 화장대 거울에 비쳐졌을 때의 누추한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듯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더 나아가 회피하게 만든다.
  김기덕의 영화는 비난을 많이 받는다. 그의 영화는 정갈한 인테리어에 은은한 과일향이 풍기는 깔금한 일식집에서의 회 한 접시가 아닌 비린내 나고 오물이 깨끗이 씻겨 지지  않은 균형 맞지 않아 흔들이는 간이 테이블 위에서  날을 갈지 않아서 투박하게 대충대충  썰어 놓은 간간히 핏자국도 보이는 그런 바닷가에서 먹는 회와 같다.    
  야생성을 잃은 펫처럼 우리들은 너무나 이 사회의 시스템에 깊숙이 들어와서 살고 있다. 이 체제의 야만성, 잔인성에 분노하고 또 저항하기도 하지만 이 시스템이 체화된 나머지 익숙하고 심지어 시스템의 부재를 힘겨워 한다. 그러기에 김기덕의 투박한 ‘날 것’의 영화는 ‘구운 것’에 길들여진 우리들을 불편하게 하고 심지어 외면하게 만든다.
  불과 3주만에 1억 여원의 제작비를 가지고 김기덕이 만든 영화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우리 영화 역사상 메이저급 영화제의 최고작품상은 그가 최초라고 한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짧은 제작 기간과 말도 안되는 작은 액수의 제작비로 만든 영화의 어떤 점이 유럽의 영화인들을 매료시켰는지에 대한 호기심에 보기 불편함을 감수하고 영화를 보기로 하였다.
  영화관을 가기 위해서 시내 한복판 한 낮 이후부터 심야까지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건만 거리 곳곳에 쌓여있는 악취나는 쓰레기 봉투를 피해가면서 영화관에 갔다. 주말 아침 시내의 영화관은 한산하다. 이른 아침이라는 점과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시내라는 점이 합쳐져서 그런지 너무도 한산하다. 갓 문을 연 영화관은 버터 듬뿍 넣어 볶은 자극적인 팝콘 냄새가 관객을 반긴다. 영화의 수상 소식 직후에 찾은 영화관임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의 ‘피에타’를 찾은 관객의 숫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생활의 고단함 중첩된 고통과 모순
  
  영화의 장소는 현재 서울 한복판을 가로 지르는 청계천이다. 정확히 말하면 청계 3가 예전 아시아 극장 건너편 기계 주문 제작이나 주물 , 절삭을 주로 하는 간이 작업실이 즐비한 곳이다.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핵탄두만 없지 너끈하게 미사일도 만들 수 있다고 얘기되던 우리나라 최고의 기계 제작 기술자와 작업실이 성업을 이루던 곳이다. 그러나 대 기업의 확장과 청계천 개발로 인해서 철거가 진행되면서 기술자들과 작업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워 지난 닐의 소란스러움과 활기를 잃은 죽어가는 공간이다.
영화는 이 공간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을 대상으로 사채 수금을 하는 건달을 중심으로 진행이 된다.
  주인공 사채 수금원은 주변 기계제작소의 자영업자들에게 급전을 빌려주고 담보로 상해 보험을 들게 해서 기한 내에 갚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는 사고를 가장한 상해를 해서 불구로 만들어 보험회사에서 나오는 보상금으로 원금과 이자를 갚게 하는 아주 잔인한 사람이다.
외양은 사람이지만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다. 채무자가 혼자 있건 아니면 늙은 노모와 아니면 사랑하는 아내와 또는 자식과 있건 상관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 자리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불구를 만들어서 원금과 이자를 회수하는 그런 사람이다. 잔인하면서도 철저하게 합리적인고 계산적인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적인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이런 주인공에게 이상한 여자가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존은 경쟁의 연속이다. 말이 좋아 경쟁이지 갈등의 연속이다. 내가 살기위해서 남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 ‘승리’ 이고 ‘성공’이 된 것은 최근의 일만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출현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는 국내적인 내전 상태와 국제적인 전쟁이라는 살육과 피 흘림의 도가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한 개인의 생존은 ‘인간성’의 보류내지는 부정이 없이는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다만 보류되고 부정된 ‘인간성’은 어머니, 아버지, 자식이라는 좁고 단순한 삼각형의 도식 속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의 집단 안에서 폐쇄적이고 소극적으로 나타나면서 문제를 최소화하게 만들어 준다.

‘엄마’의 출현과 ‘인간성’ 으로의 회귀
  
  고아로 자라온 주인공에게 자신을 버린 ‘엄마’가 갑자기 등장한다. 어린 나이에 버려져서 힘겹게 살아온 주인공에게 자신을 버린 생모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주인공은 이런 엄마의 출현을 쉽게 인정할 수 없다. 주인공의 ‘엄마’에 대한 폭행과 협박, 그리고 성폭행을 암시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엄마’는 자신이 생모임을 주장하면서 주인공을 사랑으로 포용하고 인정을 요구한다. 30여년 혼자서 잡초처럼 세상의 모든 죄악과 고통 그리고 고독을 몸소 태어날때부터 태어나 인정, 사랑, 우정, 박애 , 협동, 희생 등등의 모든 긍정적 가치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그 반대의 길로만 걸었던 주인공은 ‘엄마’의 출현에 결국 ‘엄마’를 인정하고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아니 한 순간 달걀이 깨지면서 알에서 병아리가 나오듯이, 번데기가 환태하여 나비가 되듯이 비약을 하게 되고 그동안 자신의 본질을 배반하고 ‘인간’적인 모습의 ‘아들’이 된다.
   ‘엄마’는 ‘아들’이 퇴근하고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저녁을 준비하고 살뜰하게 아들의 귀가를 기다린다. ‘아들’과 ‘엄마’는 시내로 모자간의 데이트를 하고 ‘아들’은 30여년 간의 엄마의 부재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하려는 듯 선물도 하면서 일반적인 모자간의 정을 나눈다. 그러면서 주인공에게서 없던 ‘모자’간의 정 , 가족 간의 사랑이 생기게 되고 이 감정은 급기야 ‘엄마’의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으로 발전하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이전의 채무 추심을 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불구로 만들어 버렸던 한 사내가 두 모자를 길거리에서 보게 되고 이 모자를 추적하여 집을 찾아내서 ‘엄마’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서 급기야 ‘아들’은 엄마의 부재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된다.
  
인간성의 회복과 뒤이은 소멸

  집에 돌아온 ‘아들’은 엄마의 부재를 발견한다. 엉망진창으로 폐허가 되다 시피한 집을 보고 나서 뭔일이 발생했음을 감지한다. 시간이 지나도 엄마는 귀가하지 않는다. 급기야 엄마를 찾아 나선다. 그간 자신에게 원한을 살 만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원한을 살만한 사람들은 모두 이전에 주인공 아들에게 가혹한, 피도 눈물도 없는 채권 추심을 당했던 우리들 서민들이다 . 그런데 아들의 원한을 가질만한 그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다. 많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은 하나같이 비참하다. 이전에 엄마가 있기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현실의 고통과 모순이 지금에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현실의 고통과 모순이 짙게 느껴질수록 엄마의 부재에 따른 고통과 불안은 가중된다. 급기야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고 엄마를 찾아서 이전에 빚을 받기 위해서 채무자를 건물에서 밀어 불구로 만든 강변의 신축 건물 공사장으로 찾아간다.
강변의 이 장소는 엄마가 죽으면 묻어달라고 했던 곳으로 표시를 하기 위해 이전에 엄마와 소나무를 심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건물에 도착한 아들은 건물위에서 위협당하는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와 모습을 보게 되고
무룹을  꿇고 상대방에게 용서를 빌고 엄마의 돌려달라고 한다. 그러나 엄마는 결국 건물에서 떨어지고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엄마를 묻은 아들은 자신의 손에 불구가 되어 폐인처럼 살아가는 전 채무자가 모는  뻥튀기를 팔러 집을 나서는 출근 트럭에 자신을 묶고 생명을 다한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 타이틀은 올라간다.
  엄마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잊혀졌던 아니 없었던 인간성을 회복함에도 엄마는 죽고 만다. 엄마의 소멸로 그치지 않고 인간성의 자각과 회복과 동시에 주인공 아들 역시 자살을 통해 소멸한다. 오히려 인간성의 부정했을 때 그리고 자각하지 못했을 때 오히려 아들은 자기 식대로 당당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성에 대한 자각과 회복은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되었다 . 엄마의 죽음 이전에 짧았던 순간의 행복을 뒤로 하고 하나밖에 없는 엄마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아름답고 숭고하고 고귀한 인간성은 이 사회에서 보존되기 어렵다. 보존은커녕 깨지기 쉬울 뿐만 아니라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의 생명도 앗아가는 독이 될 수 있다. 비정하고 무자비하고 잔인한 이 사회에서 인간성의 회복과 발현은 치명적이다.

김기덕의 보편성, 김기덕의 상업화
  기존의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대체로 문제를 나열하는데 치중을 하고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데 인식했다. 그러나 명백히 베니스 영화제에서의 수상을 목표로 해서 만든 것이 분명한 이 영화 ‘피에타’에서는 어느 정도 관객들에게 문제의 나열뿐 아니라 답을 제시하고 있다. 김기덕 감독이 변한 것이다! 사채 문제, 철거민 문제, 기독교를 매개로한 종교의 문제를 제시하면서 아울러 모성, 가족애, 희생, 사랑 등등의 보편적인 해답을 제시하면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얻었다. 그리고 이런 보편성이 베니스 영화제의 심사위원들에게 충분히 작동하였고 그 결과는 바로 황금사자상인 것이다. 기존의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수하지 않고 변했기에 가능했다. 이런 보편성으로의 전환은 감독의 영화에 대한 관객의 증가를 가져왔다. 즉, 상업성의 획득도 가능했다. 물론 독자들께서는 이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올 여름 개봉하여 추석 직후까지 극장에 내걸린 ‘도둑들’의 1300만 관객에 비해서 어떻게 김기덕의 영화가 상업성을 획득했다라고 얘기할 수 있느냐고 .....
명백히 게임이 되지 않는 수치이다. 그러나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영화 촬영과 배급의 시스템에서 상업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관객들의 숫자가 절대적이고 이 관객의 숫자는 영화의 내용과 관계없이 자본의 작동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김기덕 감독은 이전에는 관객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영화 ‘괴물’의 관객수에 분통을 터트리면서 관객들의 수준을 얘기했었다. 그러나 감독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관객의 수준이라고 하는 것 역시 자본의 작동에 의한 허상이고 신기루일 뿐라는 것을.
감독은 명백히 수상을 목적으로 영화를 제작했고 그의 예상이 맞아떨어져 수상을 했고 그 수상덕에 여러 극장에 걸릴 수 있었고 이 덕분에 보편성의 획득은 물론이고 상업성의 획득도 가능했다. 감독을 포함한 ‘수준 있는 관객’이 희화되는 현실이다.
  
피에다의 감동과 카타르시스

  실제 영화에서 조민수가 열연한 ‘엄마’는 이정진이 열연한 ‘아들’의 진짜 엄마가 아니다. 조민수는 ‘아들’에 의해서 가혹하게 착취당하고 불구가 되어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채무자 아들을 둔 여인이다. 이 채무자의 엄마는 복수를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채권업자 ‘아들’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히 속인다. 결국 그녀의 의도대로 ‘아들’은 ‘엄마’를 엄마로 믿고 고통 속에서 죽게 된다.
  마지막 납치되어 협박을 받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아들’을 무룹 꿇게 만드는 장면에서 ‘엄마’는 ‘아들’의 엄마가 일시적으로 되고 연민을 느끼며 갈등하게 된다.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사랑이 보편성, 종교성으로의 승화를 맛보게 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김기덕 감독의 노련함이 보이는 장면이다. 그리고 죽은 엄마를 묻기 위해서 엄마의 시신을 강가 소나무 주위를 파자 ‘아들’은 자신에게 고통당한 채무자 아들의 시신을 보게 된다. 이 장면에서 ‘아들’은 자신이 ‘엄마’의 아들이 아님을 알게 되지만 죽은 엄마와 아들의 시신 사이에 나란히 눕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 역시 앞의 장면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영화에서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채무자 중 한 가족에게 찾아가서 자살을 하게 된다.  
  피에타는 영어로 Pity와 연결된다. 연민, 불쌍함 등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피에타는 중세 유럽 기독교와 연결이 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서 내려진 아들 예수의 시신을 끌어 앉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소재로한 작품들의 주제이자 제목이기도 하다. 지금 미켈란젤로의 걸작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성바오로 성당 입구 한켠에 놓여있는 피에타가 바로 그것이다. 피에타라는 주제를 통해서 노린 목적과 효과는 무엇일까? 교회의 입장에서는 마리아의 모성을 뛰어넘는 예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었겠지만 일반 신도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자신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모성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차갑게 식은 또는 식어가는 자신의 분신 아들에 시신을 안고 한 없는 슬픔에 잠긴 어머니의 모습을 차가운 순백의 티끌하나 없는 대리석의 조각을 보면서 느끼는 숭고함은 두껍고 난해한 신학적 교리보다 더 일반인들을 기독교에 끌어들였을 것이다.  

가족, 사랑, 그리고 구원자.

  글의 앞부분에서 자본주의의 무자비성과 잔인성의 구원처로 가족의 역할을 얘기했다. 아무리 무자비한 자본가라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은 독재자라 할지라도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업자라 할지라도 가족에게는 좋은 아버지요, 어머니요, 아들이고 딸이다. 이마저도 없다면 영화의 주인공 ‘아들’처럼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나약한 존재인 인간은 시스템 속에서 자라고 만들어지고 행동하도록 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안위를 얻고자 가족에 몰두하게 된다. 이 땅의 수많은 가족들은 이런 안위와 구원처의 역할을 하고 있고 이런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시스템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인간성을 버리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지독한 역설....
  그러나 문제는 더 진행되고 있다. 이런 최후의 안식처요 구원처인 가족이 시스템 속에서 공격받고 무너지고 있다. 하루아침 사이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는 철거민들, 해고 통지서를 통해서 직장에서 쫓겨나는 가족들, 자녀의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서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수 많은 어머니들, 자신을 케어해줄 부모의 부재나 무관심 속에서 알바를 하고 세상에 남보다 먼저 뛰어들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 자식의 짐이 되지 않고자 최후의 극단적인 수단을 쓸 수밖에 없는 수많은 노인들..... 아직도 물론 가족의 역할의 중요성은 유효하지만 무너지고 있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명백하게 보였던 가족이라는 안식처와 구원처가 위협받고 있다. 지금의 가족은 교미를 하고 새로 태어날 새끼를 위해서 암컷 사마귀에게 자신의 대가리부터 먹히는 수컷 사마귀 마냥, 서로 물고 무는 순환의 형상의 두 마리의 뱀처럼 죽는 것인지 사는 것인지, 아니면 누가 먹는 것이고 누가 먹히는 것인지 헷갈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불안과 동요 그리고 붕괴의 조짐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러한 불안에 직면한 시스템 역시 대선 즈음에 서둘러 복지라고 하는 일회용 밴드를 제시하고 유권자들에게 손짓을 하면서 끈질긴 그들의 생명력을 연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오래전의 카피 문구가 생각이 난다. 아마도 유권자들의 순간의 선택을 통해서 시스템은 계속될 것이다. 기존 정당을 벗어난 새로운 정치 흐름과 운동의 아이콘으로 새로운 사람을 동원하여 유권자들을 유혹하고 헷갈리게 만들 것이고 우리 유권자들은 여기에 열광을 하고 새로운 유형의 구원자로 여기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자는 다른 어떤 이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자각에서 진정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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