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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 [FOCUS] 2. 안산의 민중은 세월호를 어떻게 겪었는가

2014.07.15 18:22

진보교육 조회 수:590

안산의 민중은 세월호를 어떻게 겪었는가

권용해 (안산 00고)

광장은 시나브로 식어갔다. 날마다 천 명 가까이 모이던 촛불은 어느 새 백 명도 밑돌 만큼 줄어들어 빈 자리가 휑하다. 광장에 마련해 놓은 분향소는 누군가에 의해 불에 타 버렸다. 광장을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는 현수막도 일부가 찢기고 일부는 끊어져 처량해 보인다. 거리 곳곳에 추모와 애도의 현수막이 걸려 있던 자리는 6월이 되면서 호국보훈의 달을 홍보하는 관변단체들의 현수막이 대신 차지했다. 합동분향소는 찾아오는 발길이 뜸해진지 오래다.
[극단의 고통이 감정의 마비를 가져오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이제 충분히 슬퍼했다고 생각해서인지] 회식하는 것도 미안하다며, 요즘 같은 때에 술에 취해 안산 시내를 돌아다니면 인간 말종 취급을 받는다며, 말 한 마디도 조심스러워 하던 시민들이 어느 새 먹자골목을 가득 채우고 4월 16일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듯 보인다.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시민도 찾아보기 어렵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피로감을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도 심심찮게 보인다. SNS와 뉴스를 가득 메우던 세월호 관련 소식은 아직 실종자가 11명이나 남았는데도 눈에 띄게 줄었고 지방선거와 월드컵을 거치면서 유병언 꽁무니만 쫓던 보도마저 잘 들리지 않는다. 세월호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고민의 씨앗이 될 거라 들떴던 내 자신이 자못 민망해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애써 힘을 내서 말문을 연다.

세월호를 말하면서 안산시민대책위의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안산 지역의 시민운동 및 노동운동 단체들로 구성된 대책위는 하루도 빠짐없이 무려 67일이나 문화제를 치렀다. 그동안 광장에서 벌이던 촛불문화제를 근래 들어 주말에만 집중하고 고잔동, 와동, 선부동, 일동 등으로 흩어져 ‘동네촛불’을 통해 서명운동 중심으로 벌이고 있지만 실무를 맡은 분들의 노력만큼은 여전히 진실되고 간절하다.
촛불의 성격이 무사 귀환에서 추모로, 추모에서 진상 규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한결같이 유가족들의 마음을 보듬고 아픔을 이해하며 함께 행동하고자 했던 대책위의 진정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치적으로 비춰지지 않기를 바라는 유가족들의 뜻을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한 것도 시민대책위였고, 유가족들이 천만인 서명에 나설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준 것도 촛불을 광장에 안착시킨 시민대책위였다.
촛불문화제 진행의 실무를 맡은 안산 민예총 간부가 말했다. “촛불에 내용을 담으려고 하루도 빠짐없이 기사를 검색하며 새로운 소식을 찾아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보여줄 영상을 확인하느라 몇 번이나 반복 시청하는 과정에서 시도 때도 없이 슬픔의 파도가 몰아닥쳤다. 울고 또 울었는데 또 눈물이 나왔다....” 이런 일들이 단순 업무였다면, 행사처럼 진행해 온 집회라면 얼마든지 힘을 내서 하겠지만 이번 사태는 불면증과 소화불량에 시달릴 만큼 감정적 소모(심지어 문화제 음향장비를 컨트롤했던 기사분마저)를 극단적으로 겪었다고 한다. 두 달이 넘는 기간을 씨름했는데 몸과 마음이 버텨준 것만도 다행이라는 말이다.
지나가는 아이들의 얼굴에 영상에서 봤던 실종된, 또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 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이지 않나,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를 봐도 혹시 그애가 사라질까 겁이 나서 울컥하는 것을 되삼켜야만 했다고 하니 그분[들]에게 서명이라는 작은 행동도 선뜻 동참해 주지 않는 세태가 오죽 섭섭했으랴. ‘한겨레21’에도 소개됐지만 자동차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쓰레기를 버리는 문제로도 남편과 자꾸만 다투게 된다는 한 시민의 사연은 세월호 이후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쉽게 돌아갈 수 없는 우리 모습의 일부다.

사태가 벌어진 초창기에 시민대책위에 대한 유가족의 시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촛불문화제에서 자신들의 자녀가 언급되거나 자식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트는 것에 대해서 항의하는 분들도 계셨고 혹시 유가족의 아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아니냐고 마뜩찮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신들 누군데 이런 거 하고 있냐? 노동조합이 모여서 집회하는 거 아니냐? 거기에 우리 아이의 사연이 나오는 건 원치 않는다...”
유가족이 대책위에 마음을 열게 된 결정적 계기는 사실 정부가 만들어 줬다. 끊임없이 불거지는 의혹 속에 실제 해경이 구조한 아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구조를 가로막고 유가족들 가슴에 대못을 박지 않나, 사복 경찰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감시하지 않나...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와 모욕적인 발언들, 박근혜의 거짓된 태도는 유가족들로 하여금 더 이상 정부를, 국가를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요구를 담은 천만인 서명운동이 그래서 생겨났다. 이 서명운동을 대책위가 기꺼이 받아 안으면서 여러 진보단체들과의 결합력이 높아졌다. 유가족은 청와대 앞에서 밤샘 농성을 하고 국회로 달려가 국조 특위를 요구하고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면서부터 대책위와 성큼 가까워졌다.
이미 유가족들 사이에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행동으로 나서 줄 곳은 결국 시민운동, 노동운동 단체라는 쪽으로 이야기가 모아졌다(유가족들 중에는 당연히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노동조합’, ‘집회’라는 용어 자체를 불온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도...)고 하니 진상조사,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온 힘을 쏟는 것이야말로 여러 운동 단체들이 최우선으로 실천할 일이 아닐까? 그런데 아직껏 진실 규명이 제대로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노력이 많이 부족했다는 얘기다.
안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세월호만큼 대중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뛰어 들어야 하는 일이 달리 없어 보인다. 선량한 우리의 이웃(말 그대로 정말 이웃이었다)이 하루 아침에 영문도 모른 채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잠겨 버렸다면, 게다가 사고 원인과 관련한 숱한 의혹들이 쏟아져 나오며 은폐와 조작만 가득하다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정말 기를 쓰고 달려들어야 마땅하다.

세월호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는 사고의 원인과 관련해 쏟아지는 수많은 의혹만 보더라도 안다. 유병언만 잡으면 된다는 식으로 정권과 언론이 몰아가는 것만 봐도 무엇인가 속죄양을 만들어 내려고 그들이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쯤은 훤히 보인다. 그 아픈 유가족들이 전국을 다니며 서명을 받도록 해서도 안 된다. 고등학생 아이들의 입에서조차 ‘대한민국 자체가 거대한 세월호’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라면, 그리고 ‘뉴스는 전부 거짓말’이라는 이야기를 아이들이 할 정도라면, 진상규명이 철저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커다란 책임감을 운동조직에서 먼저 느끼고 가장 심각하고 어려운 부분에 이른바 ‘몰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질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자신의 아픔과 싸우며 거리에서 서명을 받고 있는 한 유가족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20대 초반일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렸다.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누구라도 이러한 비극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싸워 달라. 무엇이든 해 달라. 우리 유가족들이 행동에 나서는 이유는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심정에서가 아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철저히 진실을 밝혀 내고 관련된 책임자를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처벌해야지만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는다.” 그는 끝내 꺼이꺼이 눈물을 쏟았다. “함께 행동해 달라. 그래야 우리 아이의 존재가 이 사회에서 망각되지 않는다.”는 절절한 호소다.
물론 현실은 씁쓸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사태에 대해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고 있고 불편한 기억이기에 피하려 하고 있으며, 이제 그 정도 했으면 되지 않았냐고 냉소를 보낸다. 실제로 대책위 사무실로는 재향군인회 등의 보수단체로부터 항의 전화가 자주 걸려 온다고 한다. 거리에 나가 서명을 받을 때면 “왜 여기서 서명을 받고 있냐, 금수원 앞으로 가서 서명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서명을 받을 게 아니라 유병언을 잡으러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하는 비난과 비아냥을 견뎌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단원고등학교로부터 불과 지하철 두 정거장 떨어진 곳을 오가는 시민들이 말이다. 서명운동을 진행하면서 겪어야 하는 또다른 상처다.

매주 일요일마다 안산 곳곳에서 거리공연을 하며 서명을 받고 계신 분은 전교조에 대해 쓴소리도 하셨다. 법외노조만 신경쓰고 서울로 몰려 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산으로, 세월호로 결집하자는 제안을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냐는 것이다. 전교조는 정작 중요하게 싸워야 할 일에 싸우지 않고 자기들 일(법외노조를 지칭하며)만 챙긴다는 얘기다. 교사이면서 왜 제자들과 학부모들의 아픔을 헤아려주지 않냐, 안산으로 총집결하라, 전교조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세월호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라고 꾸짖는 말씀을 그저 묵묵히 들었다. 표류중인 세월호 진상조사는 그만큼 안산의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에게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의 절박한 문제였다.
지난 6월 25일 금속노조 경기지부가 주관한 촛불문화제에서는 처음으로 ‘박근혜 퇴진’이라는 구호가 나왔지만 유가족들은 박근혜 퇴진을 얘기하지 않는다. 박근혜가 퇴진한다고 해서 풀릴 문제도 아니고 일단 공식적으로는 이 사고가 박근혜로 인해 벌어졌다고 보지도 않는다. 대통령이 책임지고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라는 의미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만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최근 들어 정부의 여러 몰지각한 행태로 인한 분노가 쌓이면서 정권을 규탄하는 목소리도 나오고는 있지만 그것이 ‘대통령 물러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대책위가 정권 퇴진의 구호를 촛불 안에서 이끌어 내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난 5월 31일 손미나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된 촛불음악회에 대해서도 대책위 내부에서는 대중적으로 기획이 잘 된 행사라고 평가하였으나 일부 노동운동가들은는 못마땅해 했다. 좀 더 강렬한 정치적 구호가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갈증과 세월호 문제를 의료, 철도 민영화와 같은 사회적 현안과 연결하고픈 의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6월 25일 노동자 촛불문화제에서는 ‘박근혜 퇴진’과 함께 민영화 반대가 공식 구호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의제를 앞장서 내놓는 것이 조직된 노동자들의 역할이기는 하겠지만 세월호 애도의 분위기가 많아 가라앉은 상황에서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이제 광장을 떠나 동네로 스며들어간 촛불이 행여나 소멸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실제로 촛불의 열기가 많이 약해져 있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보면 세월호 이후 피부로 느낄 만큼의 변화가 안산에서 일어나지는 않고 있다. 지방선거에서 세월호와 관련한 민심이 반영되었다고 해석할만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고, 커다란 의식의 각성이 일어났다고 보기도 어렵다. 세월호를 세월호에 한정하고 싶은 관변단체의 책동탓도 물론 있지만 80만 안산 인구 중에 서명에 참여한 사람은 고작해야 10만명 정도라고 하니 사고를 직접 겪은 지역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모자라다.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세월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줄어만 가고 있는 형편을 안산의 활동가들도 잘 알고 있기에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마음들이 답답하다. 세월호를 세월호에 가둬서는 안 되듯, 세월호가 안산에, 그리고 단원고에 갇히게 해서도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 더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교육, 의료, 철도, 예술 등등 각 단체 별로 투쟁 의제를 담아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은데 이 일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상황이 꼭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결국 선생은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교실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세월호 이전보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더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는 눈동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드러내지는 않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또래 친구들에 대한 [산 자로서의] 미안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서명에 참여했다고 찾아와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아이들도 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정치적으로 꽤나 보수적이었던 한 동료 선생님도 어렵게 세월호 이야기를 꺼낸다. 불합리한 사회구조가 착하고 성실하게 지시에 따르던 아이들을 수장(水葬)시켰다고 분노하고는 그렇다고 말썽꾸러기들만 살아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는 노파심도 덧붙인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건강한 사회에 대한 고민과 잠재적인 자기 성찰의 가능성을 남겨준 것은 분명하다. ‘나만 잘 살면 그뿐’이 아니라 모두가 더불어 행복할 수 있어야 좋은 세상이라는 너무나 간단하고도 당연한 이치를 일깨워 줬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소박한 일, 아픈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일부터 시작하자. 그런데 유가족에게 힘이 되어줄 유일한 길은 함께 울어주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천만인 서명을 통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통해 유가족이 세월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겐 천하의 대사(大事)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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