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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58(2015.10.8. 발간)

 

[담론과 문화] 눈동자의 사랑과 정치

넋두리 세 도막

 

눈동자 /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1. 말년末年 땡땡이꾼의 행복

 

어디서든 고참을 넘어 갈참이 되면 조직의 일에서 열외列外하여 게으름을 피울 비공식적인 권리[?]가 생겨난다. 필자는 정년퇴직을, 아니 졸업을, 아니 제대除隊1[어쩌면 반년] 남겨둔 갈참으로서 수업 빼고 모든 학교일을 열외하는 호사를 그동안 누려왔는데 올 2학기 들어서는 그 수업마저 현저하게 널럴해졌다. 1을 맡고 있어서 자유학기제 덕을 본 것이다. 시험 부담에서 벗어났으니 내 맘대로 굴어도 된다. 요즘 그 재량권을 한껏 부려 쓰고 있다. 수업을 10분쯤 하고 나머지 시간은 아이들에게 돌려 준다. 몇 아이는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들여다 보지만 대다수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노는 데에 그 시간을 다 쓴다. 녀석들은 아마 저희 집에 있을 때보다 더 즐거울 터이고, 나는 몸이 한껏 편해졌다.

물론 이것이 딴 선생들한테도 권장할 만한 바람직한 짓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솔직히 교사노릇 그만둔 셈이지. 하지만 학교를 떠날 날이 가까워지니까 사물이 근본적으로 보이고, 그래서 극단적인 행위를 선뜻 벌일 수 있었다. 본래 근본radical은 극단radical이 아닌가.

선생은 배우고 싶다는 열의熱意를 품은 학생한테나 가르칠 수 있다. 수업 규율을 어기면 혼나므로 억지로 입 다물고 앉았는 학생한테는 제 아무리 페스탈로치라도 가르칠 수 없다. 그런데 기꺼이 배우겠다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더 근본적[극단적]인 회의는 교과서가, 교육내용이 아이들한테서 겉돌고 있는 데서 온다. 내가 맡은 교과[국어]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1년쯤 안 배운다 해도 아이들 학업성취에 별다른 표시가 나지 않는다. 또 따지고 보면 수업도 교과서 내용의 30%쯤만 추려서 가르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과과정 구성을 놓고 본격적으로 토론하는 자리에 나갈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주장할 것이다.

잠깐 공상해 본다. 내가 중학교 교육과정 편성의 전권全權을 쥐고 있을 경우를! 그럴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교과의 교과서 집필진에게 친절한 낱말풀이 내용을 교과서에 집어넣으라고 득달같이 지침을 내리는 것이다. 간단한 낱말들은 짤막하게, 그 교과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개념은 자세하게! 이거야 생각만 있으면 얼마든지[금세]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학생들이 낱말뜻을 몰라서[정확히는, 낱말뜻 알아가기가 버거워서] 교과 내용을 터득하지 못하는 기막힌 일부터 개선해야 한다. 한문교과는 국어교과로 통합하고, 획수가 적은 간단한 한자에 한정해서 가르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한자를 읽고 쓰는 일이 아니라 어떤 뜻의 말이 있다는 것을 새기는 일이다. 예컨대 를 한자로 읽고 쓰는 것은 서툴러도 좋다. 필요한 것은 비인격적, 비위생적이라는 낱말을 한글로 읽거나 귀로 들을 때 아닐not 를 떠올리는 것이다. 모든 한자어를 다 그렇게 뜻새김하는 것은 오래 걸리겠지만 흔히 쓰는 접두사나 접미사와 기본 어휘의 뜻을 새기는 것은 알맞은 부교재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다른 공상. 시험 평가를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면 나는 낱말뜻[어휘력]을 묻는 문제는 지필고사로 하더라도 독해[읽기] 문제는 구두oral 시험으로 볼 것이다. 어휘력은 얼마쯤 외우기가 필요한 것이니 그렇다 치고, 독해력은 구두 시험으로 충분히 테스트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같은 공부를 지필고사 때문에 훨씬 힘들게 느낀다. (학생한테) 교과서를 펼쳐 놓고 어떤 글을 문단마다 짚어가며 간추려 말하게 시킨다. 그것을 할 줄 안다면 그 글을 대강 읽어낸 셈이다. 지필고사는 억지로 지어낸 문제가 많다. 모든 학생에게 일일이 구두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된다. 30명 학생 중에 대여섯 학생만 시킨다. 이것, 수업 중간에 형성평가로 하면 되지, 따로 고사날을 잡을 일도 아니다. 모스크바의 버스는 승객이 버스표를 사서 탑승했는지 일일이 검사하지 않는댔던가? 어쩌다 무임승차가 들통난 승객에게 무거운 벌금을 매기기 때문에 누구도 무임 승차할 생각을 품지 않는다.

공상은 이쯤 관두고, 푼수 같은 자랑을 덧붙인다. 억지로 하는 학습노동에서 풀려난 아이들은 너무나 밝다. 자기 표현을 못하던 수줍은 아이도 활달해진다. 하루 6~7교시의 수동적인 학습시간 가운데 자기 임의재량의 시간이 1교시 주어지는 것에 대해 중1이 보이는 리액션은 아주 강렬하다. 아직 삶의 활력이 살아있을 때라서 그렇겠지. 학급 분위기가 잘 잡혀 있는 반의 아이들이 (서로 다정하게) 노는 모습은 유치원 병아리들만큼이나 예쁘다. 말년末年 교사는 놀면서 월급 타 먹고, 덤으로 회춘回春의 행복까지 누리고 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2. 미래가 도둑처럼 습격해 온다면?

 

책 몇 권 쓰는 것만 보람 삼고, 푹 퍼져서 살다 보니 세상 소식을 놓칠 때가 많다. 신문도 자세히 안 읽어서다. 그래서 최근 전태일노동연구소에서 (이메일로) 보내온 정세 문건을 들춰 보고 화들짝 놀랐다. “북한 분할통치시나리오가 신문과 방송에 버젓이 보도됐는데도 몰랐기 때문이다. 시계바늘이 거꾸로 질주해서 70년 전으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미영중러 4대 열강이 한반도 신탁통치를 합의 보았다!”던 소식이 도둑처럼 날아들었던 그때, 해방정국으로?

85일자 TV MBN뉴스에 북한지역을 4개국이 분할통제하는 방안보도가 이미 나왔다[고 한다]. 해커들에 의해 들통난 이 자료는 2010~2011년에 작성된 것이라고 하니 한참 무르익은 시나리오다. 그보다 앞서 20139월엔 북한이 무너지면 중국의 개입을 요청해야 하고, 2 휴전선이 필요하다고 미국의 한 싱크탱크가 이미 대놓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미국이나 남한 지배세력이 흡수통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지는 (무슨 보도가 나오지 않더라도) 뻔히 예상할 수 있다. 새로 달라진 것은 중국의 태도다. 그동안에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처지에 있는 중국이 지금 이대로, 남북 분단의 현상유지를 바라고 있지 않겠냐고 다들 여겼고, 그것이 흡수통일에 대해 억지력이 돼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중국도 현상 변화를 바란다면 문제는 긴급한 것이 된다.

지난 93, 온갖 신문과 TV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된 중국의 전승절 행사장 사진을 필자는 건성으로 보아넘겼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겠구나, 하고 깊이 숙고해야 마땅한데 말이다. 북한을 대표한 사람은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밀쳐 놓고, 남한 대통령을 (그것도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특별히 받들어 모신 시진핑이가 무슨 꿍꿍이 속셈을 품고 있을지, 그들이 머리 맞대고 궁리한 이른바 평화통일구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는 것을.

917일자 중앙일보[정용환 정치부장의 칼럼]는 중국의 셈속을 공공연히 알렸다. “항간에 떠돌던, 한미중러 4개국이 북한을 분할하자는 중국의 제안에서도 중국 몫으로 원산만에 눈독 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쯤 되면 중국이 공짜로 지원하는 중유重油와 식량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대북 레버리지라는 프레임도 달리 보인다. 도광양회[발톱을 감추고 실력 양성에 매진]가 끝날 때까지 북한 붕괴를 막는 시간벌기 차원이라면 등골이 오싹하지 않은가.” 전승절 전날, 그 얘기를 나눴다는 얘기다. 네이버 블로그에 올라온 중국의 분할 구상은 이렇다. 함경북도는 러시아에, 강원도는 미국[또는 미국과 일본]에 떼준단다. 함경남도와 평안북도는 중국이, 평안남도와 황해도는 남한이 나눠 갖고, 평양은 ‘4개국 공동관리밑에 둔단다. 잘들~ 노는구나!

중국 지배세력이 얼마든지 그런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낼 족속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았다. 요점은 이제 도광양회의 시절이 끝났다는 것이고, 북한 지배세력[과 국가]가 그들에게 아주 만만한 존재로 보인다는 것이겠고, 미국과 중국과 남한이 (가까운 시일 안에) 북한 붕괴작전을 공동으로 저지를 수도 있겠다는 정세의 긴박함이다.

물론 이 구상이야 중국이 저 혼자 흐뭇하게 김칫국을 마시는 것일 수 있다. 걔네가 저희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수 있는 유일 패권국은 아니니까. 하지만 미국과 중국이 배꼽만 맞는다면 무슨 사건이든 저지를 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몫이야 두 쪽이 적당히 절충하는 선에서 나눠 가지면 될 일이니까 그게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흡수통일은 반드시 분할 점령[통치]’로 귀결된다는 섭리[?]를 되새기는 일이다.

남한 사회에는 북한 정권에 대한 혐오감이 아주 뿌리가 깊고, 여론조사에 의하면 근래 들어서 그 혐오감이 더 짙어졌다고 한다[김정은에 대해서는 감정적 거부감마저 심하지 않은가]. 진보세력들도 (조금 다른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대부분 그 혐오감을 공유하고 있다. “너희가 사회주의를 제대로 했더라면 응원해주겠지만 너무 빗나가 버려서 응원하고 싶지가 않구나!” 북한 지배세력을 비판하고 혐오하는 것이야 그 근거가 상당히 있으니까 별로 나무랄 일이 아니다. 문제는 북한 지도부를 벌레 보듯 싫어하는 사람들은 무슨 급변사태가 벌어져도 팔짱을 끼고 먼 산을 쳐다보기 쉽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중국이 무슨 일을 작당할 때에는 당연히 (남한과 북한) 민중의 동태를 살핀다. 그들이 그런 작전을 공공연히 떠벌일 때에는 두 쪽 민중의 반대와 저항이 별것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는 얘기다. 그들의 판단이 옳은지 모르겠다.

또 공상의 나래를 펼치자. 그들의 시나리오가 별다른 저항 없이 관철된다면 어찌 될까? 독일에서 통일과정을 주도했던 정치가가 얼마 전 말한 바에 따르면[중앙일보 인터뷰], 독일은 95% 통일이 완수됐는데 나머지 5%는 동독사람들의 무너진 자기존중감 문제란다. 자기들 인생을 헛살았다는 자기모멸감을 지우는 일이 참 더딘데, 이 일이 앞으로 15년쯤 걸릴 거란다. 그런데 내 직관으로는 남북한의 경우, 독일과는 까마득히 다른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과연 독일이 95%나 통일됐는지도 따져야 할 일이고, 더군다나 우리도 독일과 비슷할 거야.”라는 자기최면은 참으로 경솔한 지적知的 희롱이다. 구구하게 설명할 겨를은 없지만, 한반도에서 흡수통일은 재앙으로 귀결될 것이고, 북한 민중의 무너진 자기존중감은 회복될 길이 아예 없으리라. 나름으로 존귀한 민족 주체를 버팅겨 왔다고 자부심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이 한갓 버러지[무젤만] 같은 존재, 아니 어디에도 발 디딜 땅이 없는 투명인간[정체성을 잃은 인간]으로 전락할 터이니 말이다.

북한 민중은 그렇다 치고, 남한 민중에겐 이 사태가 어떻게 다가갈까? 사람은 아프리카 벌판에서 풀을 뜯는 사슴이 아니다. 사슴이야 저와 같은 무리의 일부가 사자밥이 돼도 아무 스트레스 없이 살아가겠지만 사람은 그런 거대한 사건에 구경꾼이 되고서 멀쩡할 수 없다. 옆엣 이웃이 민적民籍 없는 프롤레타리아로 추락하는데도 멀거니 뒷짐을 진 사람은 자신이 그와 똑같은 억압에 노출됐을 때, 자기를 방어할 정신적인 힘이 솟아나지 못한다. 남한 민중은 도덕적으로 황폐해지고, 정치적으로 전혀 무기력한 존재로 오그라들 것이다. 남한 노동[민중] 운동도 무사하지 못하다. 변혁적인 사회운동이 씨가 마른다.

돌이켜 보자. ‘자본 그 자체에 대해 별다른 의심[회의] 없이 자유민주주의가 옳다고 속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남한 주도의 강제 통일에 대해서도 할 만한 일이라 두둔할 것이다. “걔네, 민주주의 아니잖아? 좀 강제로라도 (우리나라로) 접수할 수 있지, !” 그런데 흡수 통일은 반드시 분할통치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정치에는 딴 행위자[곧 중국]가 있고, 그 상대방과의 힘겨루기를 통해 원래의 생각[구상]은 수정을 겪어서다. ‘자유민주주의 동네로 불러들이자!’는 아름다운[?] 명분은 통일의 대업大業에 초대하려는 우리 민족[곧 북한 민중]의 일부를 포기해도 좋다는 무자비한 실용주의로 스스럼없이 변질된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민족주의 이념의 등에 사시미 칼을 꽂는다. 현대 세계체제를 주름잡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벌거벗은 본색이 드러난다. 중앙일보가 분할 통치시나리오에 대해 고개를 젓는 이유는 그래서다. 자기들의 지배를 민족이념으로 윤색해야 지배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데 흉물스럽게도 그 정당성에 흠집을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터무니없는 짓거리가 벌건 대낮에 벌어질 때, 우리 남한 민중은 제 목소리를 얼마나 크게 낼 수 있을까?

아마 시진핑이가 우리도 힘 좀 쓴다.”며 제 멋에 겨워 내놓은 제안이야 (남북한의 민중이) 쉽게 물리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국주의 열강이 머리를 맞대고 또 무슨 다른, 기기묘묘한 작전을 다시 들이밀지 모른다. 동아시아의 정치지형은 제국주의 열강이 침 흘리며 아시아대륙으로 달겨들던 19세기말과 많이 다르지 않고(중국의 처지가 그때와 좀 달라졌다는 차이는 있지만), 한반도의 정치지형은 한민족의 민족주권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던 앵글로색슨 족속[처칠과 루즈벨트]의 시대로 도로 돌아갔다. 우리는 제국주의의 시대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인류는 세계대공황의 한 복판을 통과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비극은 소극笑劇으로 반복된댔던가? 그건 자본주의 사회가 상승 국면을 이어가던 19세기 얘기다. 지금 21세기에 반복될 때에는 참극慘劇이 된다. 갖가지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대중영화들을 떠올려 보라.

비관悲觀하고, 또 비관하라! 그래야 가까스로 낙관의 틈새를 찾아낼 수 있다.


3. 종교와 과학, 이 둘을 동시에 비판해낼 범주가 필요하다

 

교과서 밖에서 배우는 사회공부를 최근 펴내고서 다음 책의 주제를 떠올리던 중에 알랭 쉬피오가 지은 책 법률적 인간homo juridicus의 출현을 집어들었다. 법인류학 계통의 책인데 이 분야는 (나라 안이든 밖이든) 연구자가 많지 않아 학문적인 성취가 높은 책들 가운데 번역된 것은 이 책이 유일하다. 나이는 60대 후반으로 짐작되는 프랑스 학자인데 르장드르와 더불어 법인류학분야에 나름의 진취적인 발자취를 보태고 있다. 그 책을 읽고서 다음 써낼 책의 윤곽을 잡게 됐다. 다음 책에서 다루고 싶은 얘기는 다음과 같다.

 

인류는 종교의 시대로부터 과학의 시대로 넘어 왔다. 19세기까지는 종교비판이 절실했고, 과학이 상승하는[진취적인] 문명을 대변했다면 21세기는 과학비판이 절실한 때다. 여전히 종교[근본주의 기독교 등]가 반동이데올로기로 쓰이고 있지만 그것은 주변적인 구실에 머물 뿐이고 제도종교 자체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다. 그리고 보수반동의 사회체제를 지탱하는 으뜸 구실은 과학이 떠맡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사상의 지적 유산 가운데 과학을 비판할 잣대를 캐내야 한다. 상당수의 무신론자들처럼 종교에 대해 아예 관심을 끄고 지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종교를 비판하되 거기서 온고지신溫故知新해낼 꺼리를 발굴하고, 과학이 이뤄낸 지적知的 돌파를 기꺼이 긍정하되 과학을 통제할 사상적 지침을 세워야 한다. 종교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를 줄곧 관통하는 어떤 지적知的 길라잡이, 또는 과학이 유아독존唯我獨尊으로 놀지 못하게 감시자로 구실하는 어떤 지적知的 거점이 필요하다.”

쉬피오는 이라는 범주가 그 거점이 되어줄 것으로 여긴다. 종교의 시대에서 뽑아내야[보존해야] 할 것이 법이요, 과학과 맞세워야할 것이 법이란다.

우리는 !’하면 흔히 실정법을 떠올린다. 정의Justice와 견주어서 살피는 법은 (그 본질이 힘/폭력인) 실정법이다. 그런데 쉬피오가 말하는 법은 실정법이 아니라 그 실정법을 초월론적으로 규율하는 상위 범주로서의 법이다. ‘자연법을 떠올리면 얼추 맞아떨어진다. 일찍이 몽테스키외가 우리에게 참고가 될 말을 했다. “신의 율법, 과학의 법칙, 인류의 법률에 들어 있는 핵심loi은 똑같다.”! 근대에 생겨난 자연법 사상은 신법神法으로부터 어떤 핵심을 계승하지 않았던가.

19세기의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비판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서 은 없다는 쪽으로만 생각이 치달았다. 관념을 다른 각도에서 살필 겨를이 없었다. 신흥 부르주아들의 과학에 대해서는 진짜 과학은 우리가 하고 있소!”하고 받아쳤다. “가짜 과학이냐, 진짜 과학이냐하는 대립구도다. 은연중에 실증주의에로 경사된 엥겔스에게서 보듯이, 같은 과학 범주를 놓고서 경쟁을 벌였는데 그래서는 판연하게 차별성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한편, 20세기에 정신분석학이 생겨났다. 부르주아 과학 동네와 전혀 따로 노는 학문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과학이라 자임自任했지만, 부르주아과학 동네에서는 코웃음을 쳤다. “그거, 과학 아냐! 너희는 그저 인문학에 불과해!” 그렇다면 좋다! 대학제도가 자기 권위의 원천을 과학에서 찾고, 상업화된 과학이 온통 행세하고 있는 21세기에 정녕코 회복돼야할 것은 신학의 세속적 판본인 인문학이 아닌가?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 가치의식이 워낙 실종해 버리다 보니까 부르주아들조차 인문학을 장식품으로라도 찾게 되지 않았는가! 인문학이 튼튼하게 자라나서 부르주아 과학과 대결해 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쉬피오는 법이 과학과 맞설 것을 주문했지만, 법에 대해 별로 탐구해 보지 않은 나는 그래, 지금의 캐치 프레이즈는 법이야!”하고 확신에 차서 단언하지는 못한다. 부르주아 지배과학에 맞설 대안[의 담론]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인문학이나 윤리사상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그 핵심은 주체를 세우는 일이고, 주체가 움켜쥐고서 길을 찾을 등불을 밝히는 일이다. 부르주아 과학은 객관성 만세!’를 부르면서 대학에서 패권을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 학파는 주체와 객체를 함께 (이론으로) 담아낼 것을 추구해 왔다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루카치처럼 주체 위주로 치닫거나 알튀세처럼 구조 탐구에 파묻히기 십상이다. 그런데 학문 전략으로 봐서 다른 접근법, 이를테면 주체를 담보할 다른 범주[법이나 정신분석]를 천착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 같다. “사람들은 어찌 살아야할까?”하는 탐구영역을 과학에다가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이니 또 뭐니, 어쩌구저쩌구 과학을 빙자해서 윤리사상/인문학/법의 범주를 멋대로 헝클어뜨린 사이비 과학들이 좀 많았는가.

중고교 교과서 얘기를 쬐끔 덧붙이자. 윤리교과서에는 불교와 유교, 기독교와 유럽철학 얘기가 잔뜩 실려 있다. “종교를 그 자체로 존중하고 그 교리를 습득하라!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니라!”하는 메시지다. 학생들이 참 유식해지겠다, 젠장! 왜 이슬람교 교리는 소개하지 않았나? 열등한[못난] 종교라서? 종교 제도는 정교政敎 분리 이후, 차츰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사람의 내면을 하청 받아 관할하는[어루만지는] 옹색한 구실로 움츠러들었다. 종교 교리는 과학의 발달 이후 점점 진리 가치를 잃어갔다. 왜 종교를 역사의 눈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가? 현대의 지배세력이 지배종교를 융숭하게 받들어 모시는 까닭은 자본체제를 치장治粧하는 가리개로서 그것을 톡톡히 써먹자는 수작이다. 학생들이 기독교와 불교 교리를 놓고 무슨 토론을 벌일 거며 거기에 대해 무슨 지적知的 긴장을 느끼겠는가.

기독교/불교/이슬람교가 왜 보편종교의 성격을 띠게 됐는지 역사적으로 헤아릴 때라야 학생들은 비로소 (그것에) 관심을 품을 이유가 생긴다. 근대 사회주의 사상이 바로 (중국의 제자백가와 그리스 이소노미아 사상을 포함하여) 보편종교 사상에 젖줄을 댔다는 것을 헤아릴 때라야 학생들은 종교와 인류의 문명을 통사通史로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교과서 집필진에게는 역사의 흐름을 살피는 눈이 없다.

교과서여, 참으로 한가롭도다! 너희는 현대에 접어들어 종교가 (무섭게) 퇴색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완강하게 눈감을 뿐만 아니라[요새 누가 스님 목사들한테 찾아가 인류 앞날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는 말인가], 현대인들이 괴롭게 매달리는 신흥 종교[곧 황금숭배교]에 대해 사려깊게 살피지도 않는다. 21세기의 인류는 황금만 믿다 보니[우리가 더 긴급하게 살필 거리는 앎이 아니라 믿음이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냉소주의자가 되어서 다들 내면이 무섭게 황폐해 가고 있는데 말이다.

교과서는 종교와 과학에 경배를 올린다. 신동엽 시인의 말마따나 그 모오든 껍데기[가짜 과학/종교]는 가라!”는 깨우침이 부재不在하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이를테면 법학의 경우, 부르주아경제학의 (학문적인) 식민지가 돼 가고 있다. 인권人權을 살피는 몇몇 학자 빼고는 법을 상품계약 비슷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법경제학이 점점 주류가 돼가는 중이다. “? 그거, 별거 아냐. 시장市場만 알면 돼!” 과학이 밝혀내는 것 말고는 다 거짓부렁이라고 겁 없이 지껄이는 사람도 부지기수不知其數. 그런데 사람이 존엄한 존재이고, 이성적 존재라는 정의定義는 인류가 직관으로 깨치고 교의doctrine로 선포하는 것, 곧 법이나 형이상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 무슨 과학[진화생물학 같은 것]으로 증명해낼 문제가 아니다. 이것을 몰각한 맹문이들이 어제는 과학의 이름으로[!] 원자폭탄을 만들어냈고, 오늘은 유전자를 갖고 희희낙락 장난질을 쳐대는 중이다. 내일은 무슨 불장난을 저지르려나.

간추리자. 사람이 어떤 존재이며, 인류가 어떤 사회를 일으켜 세워야 할지는 숫자놀음에 빠져 있는 과학으로 답을 찾을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인문학의 눈을 틔우고 윤리사상을 일으켜 세워서 사람의 법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 대안 교육과정은 이 화두를 중심으로 짜여져야 한다. 아이들을 바보로 묶어 놓지 말자.

추신 : 생각거리 하나, 덧붙인다. 교실에서 우리의 교육내용을 좀더 치열하게 고민하게끔 다그치는 노래가 최근에 TV 슈스케 프로그램에서 나왔다. 홍대 앞에선 이미 유명하다는 중식이밴드의 노래를 여기 옮긴다.

여기 사람 있어요: 여기 사람이 있어 / 무너진 건물 당신 발 밑에/ 그 아래 난 살아있죠/ 부서져 좁은 텅 빈 공간에 / 날 살려줘요 제발 살려줘요 제발 이 어둠이 싫어요/ 날 꺼내줘요 제발 꺼내줘요 제발 난 숨이 막혀요 / 이미 늦었다 말하지 마요 나는 아직 숨을 쉬어요 가망 없다고 말하지 마요....

죽어버려라: 나는 일하는 사람 일을 하면 돈을 주니까 맨날 일하기 싫다 말하면서 일하러 간다 / 왜냐 월세 때문에 세금 때메 밥값 때문에 이런 의무적인 관계가 책임을 물어 / 그분은 말 한 마디를 꺼내는 게 곱지가 않아 / 그게 무슨 말이든 나에게는 마음이 아파 / 별거 아닌 일에도 민감하게 욕을 하니까 상처투성인 나의 맘 속엔 이런 주문을 외워 / 죽어버려라 죽어버려라 죽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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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4 특집1-2> 고교학점제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file 진보교육 2019.11.16 365
1243 특집2-1> 새로운 역사적 조건과 자본주의적 성장의 한계 file 진보교육 2019.11.16 186
1242 특집2-2> 새로운 시대변화 : 한국사회와 교육운동 file 진보교육 2019.11.16 129
1241 기획1> 기초학력 지원 내실화 방안의 현황과 문제점 file 진보교육 2019.11.16 336
1240 기획2> 기초학력 논란, 관점과 대응 file 진보교육 2019.11.16 181
1239 담론과 문화> 코난의 별별이야기-그곳은 소, 와인,바다가 모두 빨갛다(2) file 진보교육 2019.11.16 230
1238 담론과 문화> 한송의 미국생활 적응기-가깝지만 먼 당신, 병원. file 진보교육 2019.11.16 64249
1237 담론과 문화> 페미니즘으로 본 이야기-저 사람 페미예요! file 진보교육 2019.11.16 84
1236 [만평] 어찌할 수 없는 나(1) file 진보교육 2019.11.16 136
1235 현장에서> 2019 교실에서 쓰는 편지 file 진보교육 2019.11.16 546
1234 현장에서> 기초학력 논란, 내 아이도 미달된 상품일까? file 진보교육 2019.11.16 373
1233 [열공] 인지심리학에서 보는 주의집중 file 진보교육 2019.11.16 2070
1232 [책이야기] 시의 풍격, 풍경의 시 file 진보교육 2019.11.16 221
1231 <권두언> 변혁적 급진성을 견지하면서 대중적결합력을 강화하자 file 진보교육 2019.07.17 156
1230 특집1] 대안사회 참여계획경제에 대한 주요 논의와 모델 file 진보교육 2019.07.17 188
1229 특집2] 제4차 산업혁명의 성격과 영향 file 진보교육 2019.07.17 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