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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6호 (2017.10.16. 발간)



[담론과 문화] 정은교의 포토에세이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정은교(진보교육연구소 회원)







1. 윤회냐, 해방과 초월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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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은 살아있음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생명을 맛보고(느끼고) 싶어 가지가지 춤을 추었다. 한반도에 살아온 우리 조상은 신을 맞을 때, 재앙을 겪거나 꼴볼견의 세상에서 해방되고 싶을 때, 고단하게 노동하거나 질펀하게 놀 때 춤을 추었다. 제천祭天과 벽사辟邪, 또 보릿대/멍석말이춤과 액막이/살풀이춤과 원효의 병신춤(무애무), 화랑의 풍류風流와 춘앵전春鶯傳과 또 무엇무엇... 그런데 당신은 신()나게 살고 있는가? 어느 몸이든 할 말이 참 많다. 당신의 지친 몸과 마음에 춤으로 말을 걸어 보라.

 

   사람은 끝없이 윤회輪廻의 바퀴를 굴리며 살아간다. 인과因果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서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력이 비약적으로 커질 때도 있다. 해탈解脫과 득도得道와 성화聖化와 죽음 충동의 발현도 해내지 못 하라는 법은 없다.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조지훈의 승무’)” 당신은 지금 제 자리를 헛되이 맴도는 윤회의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의기義氣가 하늘로 솟구치는 해방과 초월의 춤을, 별빛을 우러르는 춤을 추고 있는가?

 

 

 

2. 단비가 내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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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오는데 떡갈나무 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원두막으로 가서 소낙비를 그을 수밖에. 그러나 원두막은 기둥이 기울고 지붕도 갈래갈래 찢어져 있었다. 소녀가 들어선 곳도 비가 새기 시작했다. 소년이 수숫단을 날라다 덧세우고 소녀에게 손짓한다. (수숫단 속에) 소년이 들어서자 그의 체취가 확 풍겨왔다. 소녀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소란하던 수숫잎 소리가 뚝 그쳤다. 밖이 멀게졌다. 도랑 있는 곳에 와보니 흙탕물이 엄청나게 불어 있었다. 소년이 등을 돌려 대자 소녀가 순순히 업혔다. 걷어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았다. -황순원의 소나기

 

   하늘에서 단비가 내려온다. 이를 받아먹고 땅에서는 무성하게 풀이 돋아난다. 그 풋풋한 풀을 한 아름 받아먹고 우람한 소가, 또 그 고급진 한우韓牛를 받아먹고서 두 발로 걷는 사람이 육덕肉德지게 자란다. 요컨대 비rain는 생명의 시원始原이다.

   비는 또 에로스다. 아프로디테가 본디 물(바다 거품)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냐. 황순원의 소설에서 소년 소녀의 몸과 마음을 바투 맺어준 것도 비(소나기)였다. 소녀는 그때 붉덩물과 소년의 체취가 밴 옷을 저승까지 갖고 갔더랬지. 알몸으로 비를 맞는 (사진 속의) 여자도 물 만난 물고기처럼 풍성하고 그래서 에로틱하다. 에로스여, 부디 문명文明에 억눌리지 말기를.

-안산 우음도에서-

 

 

3. 남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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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얼굴을 무시로 들여다 본다. 그러다가 심지어는 나르키소스(나르시스)처럼 미쳐버리기도 한다. 제 얼굴 다음으로는 엄마 얼굴이 강렬하게 끌린다. 어느 어린이는 가장 받고 싶은 상은 울엄마 얼굴이라는 가슴 뭉클한 시를 썼다. 병들어 이 세상과 작별한 제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자꾸자꾸 떠오른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하지만 사람의 윤리는 낯선 남들the others과 옷깃이 스쳐야 비로소 싹튼다. 그의 얼굴을 힐끗이라도 쳐다봐야 그에게 마음이 끌린다. “(내가 모르는) 누가 변을 당했다!” 그 소식만 들었을 때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찾아가서 그의 얼굴이라도 봐야 가까스로 도와야겠구나하고 마음이 동한다. 낯선 남과 만나 그에게 (쬐끔이라도) 마음을 건넬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타인)은 신에게 나아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관문關門이다.

 

 

4.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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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이란의 어느 시골 초등학교. 집에 돌아온 아마드가 숙제를 하려고 가방을 여는데 아뿔싸, 친구 네마자데의 공책이 제 가방 안에 들어 있다. 조금 전 선생님의 꾸지람을 듣고 훌쩍이던 친구의 모습이 불현 듯 어른거린다. 아마드는 친구가 너무나 눈에 밟혀 그의 공책을 돌려주려고 집을 나선다. 그런데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아무리 수소문하고 다녀도 친구의 집을 찾을 수 없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내 친구 집이 어딘가. 얼마 뒤의 한국. 도시에 살던 어린 상우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산골에 홀로 사는 외할머니댁을 찾았다. 엄마가 석 달 간 그를 맡긴 것이다. 외할머니는 말도 못하고 귀도 먹었지만 한없이 너그럽다. 투정을 부리던 상우가 그 사랑을 점점 깨닫는다. 이정향의 영화 집으로(2002)’. 같은 무렵, ‘서태지와 아이들은 집을 나간 청소년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노래를 불렀다. “난 내 삶의 끝을 본 적 있어. 내 가슴 속은 갑갑해졌어. 내 삶을 막은 것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 (...)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자 이제 그 차가운 눈물은 닦고 COME BACK HOME!”

   아이에게 집(가족)은 그의 우주다. 상우의 할머니와 엄마는 그의 신! 아마드와 그의 친구 네마자데가 우정으로 맺어질 때 두 가족은 (마을) 공동체로 넓어진다. 서태지네는 집에서 떠나가려는 가출 청소년들을 안타까이 불러 모았다. 옛날엔 무당이 했을 일을 그들이 맡았다.

   한때, ‘개인을 찬양하고 공동체를 가벼이 여긴 시대가 있었다. 그랬던 까닭이야 있지만 요즘 그 흐름을 도무지 걷잡을 수 없게 돼서 문제다. 사람들이 낱낱의 원자原子로 쪼개질수록 자본의 돈벌이(이윤 추구)가 더 수월한 탓에 그리 됐다. 인류 사회의 으뜸 과제는 그 눈먼 흐름을 슬기롭게 누르는 것일 터인데 권력을 누리는 엘리트들은 그럴 생각과 철학이 도통 없다. 바보상자 TV는 달콤한 이야기와 화면으로 혼밥족 혼술족들을 달래기 바쁘다. ‘나 혼자 산다미운 오리새끼어쩌구저쩌구....

 

   다시 간절하게 컴백 홈의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옛날식의 가족이든 현대에 알맞은 새 가족 형태로든 아무튼! 집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은 아이와 청소년만이 아니다.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5. 내 유년의 윗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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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 삼십 단을 이고 /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의 엄마 걱정

 

   ‘가난만큼 끈덕지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주제가 또 있으랴. 세상의 가난 이야기를 죄다 풀어 놓자면 그 보따리로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고도 남을 게다. 옛날 어느 어린이가 가장 쉽게 풀어놨다. “울 엄마 이름은 걱정이래요. 여름이면 물 걱정, 겨울이면 연탄 걱정. 일년 내내 쌀 걱정. 낮이면 살 걱정 밤이면 애들 걱정. 밤낮으로 걱정걱정... 울 엄마 이름은 걱정이구요, 울 아빠 이름은 주정이래요. 내 이름은 눈물과 한숨이지요.” 어느 옛 아비도 시름 깊었다. “....방안 하나 가득 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김관식의 병상록’)”

   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한 집 아이들이라 해서 꽃 말고 밥만 찾았겠는가. 빈민촌 담벼락에 싸구려 물감으로 태어난 저 소박한 꽃이 수선화와 양귀비, 전설에 나오는 우담바라꽃 못지 않게 화사하다. 

-서울 후암동에서-

 




6. 쓸쓸한 너의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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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 서랍장을 열고 나왔다가

밤이면 / 다시 서랍장 안으로 들어가서

차곡차곡 쌓인다 / 층층이 쌓여 잠든다 -김은영의 아파트 1’

 

하수구는 오줌보 / 화장실은 큰창자

어느 것 하나 제 구실 못하면

아파트는 끙끙 앓는다

우리 식구들 갑갑해진다 

-김은영의 아파트 2’

 

   80년대 말에 가수 윤수일이 노래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나라 곳곳에 아파트 단지가 우루루 들어서던 때다. 지금의 中年들이 그때 술 한 잔씩 걸치고 노래방에 직행할라치면 다들 목청 높여 따라 불렀다. 얼핏 들으면 달콤하게 들리겠지만 영락없이 가짜 노래다. 그때 다들 돈벌이(재테크)에 눈이 멀어 부동산 열풍에 휩싸인 한국인들한테 아파트는 도무지 정한情恨의 장소로 다가갈 수 없었다. 서울시 부산시 밤하늘에 별빛이 사라진 것이 언제부턴데 별빛 타령인가.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서울에 놀러 왔다가 충격을 받고 한국말을 배워서 제 충격을 풀이하는 책을 썼다. “프랑스에서는 실패한 주거 모델인 대단지 아파트가 어째서 한국인들을 유혹했는가?” 주택이 줄곧 유행상품으로 취급되어서는 서울은 결국 하루살이 도시가 돼버릴 거라고 그녀는 진단했다. 아파트의 일그러진 반영- 현실이 일그러져 있는 만큼, 그 감각적 반영도 일그러지고 흔들려야 어울린다

-안양천에서-

 




7. 붉음의 빈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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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기 중반 인도 야유타국 공주 허황옥은 붉은 돛과 기를 단 배를 타고서 경남 김해의 가락국(가야)에 왔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가리발디 무리는 붉은 셔츠를 입고서 국가 통일에 떨쳐 나섰다. 크리스찬은 붉은 술을 따를 때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렸고, 옛 아시아인은 붉은 팥죽을 뿌려서 귀신을 쫓았다. 석가모니는 제자들더러 예불할 때 붉은 옷, 홍가사紅袈裟를 입으라고 일렀고 2002년 월드컵 때는 수많은 한국 청년들이 붉은 악마가 됐다. ‘삼국지의 충신 관운장의 얼굴빛은 붉었고, 정몽주도 붉은 마음(일편단심)을 노래했다. 심지어 박근혜와 새누리당도 붉은 색을 즈그덜 상징색으로 삼았다. 긴 얘기 관두자. 붉은 태양이 사라지는 날 인류(지구)는 멸망한다. 붉음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 아니냐! 그런데 근대(현대)를 주름잡은 힘센 지배층 나릿님들께서는 그 붉음이 싫다며 줄곧 서슬 퍼렇게 사시미 칼을 휘둘렀다. “우리 빼고 다 빨갱이다앗!” 그래서 겁 많은 민중은 붉은 색깔만 눈에 띄어도 지레 화들짝 놀랐다. 흑흑. ‘빨강, 너를 지켜주지 못해 정말 미안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철없는 청춘도 부모의 자리에 앉고 나면 듬직한 어른이 된다.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사물의 성격도 달라진다. 백 년 전 화가 뒤샹이 가게에서 변기便器를 사다가 미술관 안에 들여다 놓고 이거, 예술작품이다!”하고 뻗댄 적 있다. 동료 화가들이 떨떠름하긴 했지만 수긍했다.


   어두운 방 안에 탁자와 의자가 단촐하게 놓여 있다. 아니, 아무도 없고 빈 자리만 거기 있다. 우리는 거기가 비어 있을 때라야 거기 앉았던 사람의 존재를 더 실감한다. 부모가 별세하신 뒤에 그 은혜를 새록새록 느끼는 자식처럼. 그러니까 빈 자리야말로 존재의 기본 형식이 아닐까. 만물이 있기 전에 그 자리가 먼저 있었다. 불교는 을 으뜸 화두로 삼았고 기독교 쪽도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죄다 비우고 나서야 보편종교로 올라섰지(케노시스).

우리의 감관感官에 붉음을 선사하는 빈 자리- 이것으로 족하다. 무엇이 더 필요하랴. 빈 의자 뒤쪽으로 어느 새 후광後光이 은은하다

-문래동에서-

 




8. 세상을 깨닫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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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장화를 벗으려고 했다

비명소리보다 먼저 복숭아뼈가 신음을 토하고

으드득, 무릎뼈가 튀어올랐다

부러진 홍두깨처럼 아무런 감각도 없는 발을

어떻게든 장화에서 꺼내려고

그는 안간힘을 썼다

하늘에서 벼락이 치듯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발은 꿈쩍도 않고 대못처럼 박혀버렸다

숨을 아주 깊이 들이마시고

핏발 선 눈을 천천히 감고

털썩, 엎드려 가늘게 떨다가

그는 비로소 죽은 듯이 투항했다

그러자 너덜너덜 허벅지만 남기고

저 혼자서 롤러 밑으로 걸어가는 발

끝까지 그의 장화를 신고 가는 발

-임성용의

 

   문학 공부는 남들the others에 대한 공감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학교 커리큘럼에는 훌륭하게(!) 적혀 있다. 정말 그러한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려거든 흐리멍덩한 것 말고 정신 번쩍 나는 것을 갖고 해봐라. 지금 (그의 발이 아니라) 내 발이 대못처럼 박혀버렸다. ‘(너덜너덜 허벅지만 남기고) 내 발이 저 혼자서 롤러 밑으로 걸어가는 광경을 두 눈 똑똑히 뜨고서 바라본다. 뭐라고 울부짖어야 하나?

사진에 실린 동네는 재개발구역의 하나다. ‘는 길을 스쳐 지나가는 행인이 아니라 거기서 수십 년 살아온 토박이다. 내 이웃들의 보금자리가 다 뜯겨나가는 광경을 우리 집 안에서 바라본다. 이제 우리 차례다. 내 심정이 어떨 것 같은가

-서울 신길동에서-




9. 걸어라,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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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2년 여름, 프랑스의 마르세유 의용군들이 가자, 조국의 아들딸들아. 영광의 날이 다가왔다.”고 노래 부르며 튈르리 궁에 쳐들어갔다. 왕이 쫓겨나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때의 행진곡 라 마르세예즈가 지금도 프랑스 국가國歌로 불린다. 1930년 봄, 영국 총독부의 소금세 신설新設에 항의하여 간디와 그의 친구들이 바닷가로 길을 떠났다(‘소금 행진’). 세금 착취에 맞서 스스로 소금을 생산하려고! 그리하여 인도 민중이 깨어났다. 1934년 가을, 중국의 홍군紅軍은 항일抗日과 사회변혁의 근거지를 찾으려고 장정長征에 나섰다. 만 킬로미터 남짓의 거리를 1년이 넘게 걸어서 중국의 오지奧地 옌안延安에 다다랐다. 1963년 여름, 미국의 흑인 20만 명이 노예해방 백주년을 기리고자 전국 곳곳에서 워싱턴으로 행진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내겐 꿈이 있다고 감격스런 연설을 남겼다. 그리고 2016년 겨울, 한국에서는 적폐 청산을 부르짖는 촛불들의 거대한 진군進軍이 벌어졌다. (드물게도) 2백만이 넘는 민중이 한 날 한 곳에 모여들기까지 했다.

 

   가슴 벅찬 역사는 수많은 사람이 어깨 겯고 함께 걸을 때 탄생한다. 오늘도 내일도 거리를 걸어라! 그것이 역사를 창조하는 노동이다. 가끔은 발길을 멈추고 신명나게 춤을 춰라! 거기서 드높은 사상思想과 예술이 우러난다

-서울 종로에서-





10. 이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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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흰 구름 솜구름 탐스러운 애기 구름

짧은 셔츠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 땀 비지 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四季

 

   19701113,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 전태일이 제 몸을 불살랐다.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그는 반지(화폐)와 총칼(폭력)’을 겁내지 않는다며 저 세상에 가서도 가엾은 이웃을 돕겠다고 다짐하는 유서를 남겼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해마다 그 날이 되면 전태일을 따르는 노동자 대회를 열었다.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는 전태일재단과 봉제 박물관이 있다. 평화시장의 옷노동자들이 가까운 이곳으로 일터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옷을 만들어 동대문시장에 납품했다. 거기 채석장 절개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집들을 본 적 있는가? 조선총독부가 거기 돌들을 죄다 캐갔더랬다. 행여나 지진이 난다면 그 집들이 성냥곽처럼 구겨져서 추락할 것이다.

   평화시장의 나이 어린 여공들은 실밥 먼지 때문에 폐병을 달고 살았다. 호된 기침 끝에 빠알간 피를 뱉어냈다. 요즘 창신동 사람들이 폐병을 피하게 된 변화는 거저 생기지 않았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창신동의 어느 봉제 공장





11. 한 여자가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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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말 들어 전세계 여성들이 자식 많이 낳는 것을 관두기 시작했다. 요즘 220개 나라 중 절반이 2.1명보다 적게 낳는데 그러면 인구人口가 줄어든다. 그 중에서도 한국이 가장 꼴찌다. 1980년대 들어 2명 밑으로 떨어졌고 지금은 1.25명이다. 왜 문제인가? 일할 사람(=자본이 고용할 대상)이 줄고, 상품을 사줄 소비자가 줄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경종警鐘을 울리기 때문이다. 노령화도 겹쳐서 앞으로 젊은이들 살림의 주름살이 크게 늘어난다. 왜들 적게(또는 안) 낳을까? 사회복지가 향상됐다지만(경제 선진국이 덜 낳는다), 임금노동자로 심하게 착취당하는 형편에 자식 건사하기가 다들 힘겹다. 한국 청년의 절망이 가장 크다. 인생의 앞날에 안개만 자욱해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취업도 내집 갖기도 마침내 인간관계와 희망마저 포기하는 청년이 생겨났다(7포 세대). 나라의 지배층이 아이 좀 더 낳자고 아무리 떠들어도 (너희끼리 떠들라며) 꿈쩍을 않으니 이를 출산 파업이라 아니 부를 수 없다

 

   한 여성이 (다행히도 삶이 쬐끔은 유복하여) 임신에 나섰다. 그런데 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는 한 마을이, 아니 한 나라가 필요하다. 그녀의 생리와 태교와 출산을, 태어난 아이의 양육과 성장을 돕는 것은 한 세상을 돌보는 성무聖務. 그거 돌봐주지 않는다면 사회는 없는 셈이고(그저 정글뿐이고), 국가도 간판을 내려야 옳다. 지금의 사회와 국가는 믿을 만한가? 그 임신은 위험천만하고 무모한 짓이 아닌가? 생태계는 죄다 오염되고, 밥벌이는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 멀쩡히 자랄 것인가?

 

   한 여자가 위태롭다. 미래의 가족을 부둥켜 안은 맨 주먹 알몸뚱이의 여자가 몹시 위태롭다. “오늘도 무사히!” 핏빛 노을 속에 한 세상이 위태롭게 흔들거린다

-문래동에서-





12. 쌓이는 파편 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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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천사angel’라 불리는 클레의 그림이 있다. 그는 자기가 바라다보는 어떤 것으로부터 막 멀어지려는 참이다. 날개도 펼쳐진 채,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다. 역사歷史의 천사는 이런 모습이리라. 그는 줄곧 과거만 쳐다본다. 일련의 사건이 나타난 곳에서 그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본다. 파국은 산산조각 난 파편들을 끊임없이 쌓아서 천사의 발 앞에 내동댕이친다. 그는 멈춰 서서 죽은 사람들을 깨우고 산산조각 난 것들을 이어붙이고 싶다. 하지만 낙원에서 폭풍이 불어와 그의 날개에 걸린다. 바람이 너무 세서 날개를 접을 수 없다. 폭풍은 천사가 등 돌리고 있는 미래로 그를 쉼없이 몰아가고 파편더미가 하늘 높이 쌓인다. 우리가 진보進步라 일컫는 것이 이 폭풍이다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

 

산리쿠 해변에서 유품 찾는 일을 하던 어느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자는 이렇게 말했다. “딴 사람이 보면 그저 건물 잔해일 뿐이겠지만 나뭇조각이나 파편 하나도 당사자한테는 귀중한 재산이었어요. 그러니 내 손가락은 갈고리예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을 모으는 거지요. 전에는 틀니도 있었어요. 이 사람 살아 있을까. 작고 귀여운 신발을 주웠을 때는 눈물이 났습니다. 이 아이 지금 어디 있을까. 모두 방진 안경 속에서 눈물 흘리며 작업했어요.” 

-이소마에 준이치가 쓴 죽은 자들의 웅성임

 

   저 무섭게 낡아버린 철판은 후쿠시마 원전原電의 다 타버린 원자로 노심일지 모른다. 세월호의 썩어버린 배 밑창일지도 모른다. 아니, 20179월초 허리케인 어마가 강타해 버린 카리브해 섬나라의 무너져 내린 어느 건물의 잔해일지도 모른다. 문명을 쌓아 올리기는 더딘 일이지만 어긋나고 부식腐蝕되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파편더미 밑으로 새 풀이 돋아나기만을 끝끝내 기다려야 할까. 그러기 전에 한 세상은 끝난다

-문래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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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 담론과 문화> 디지털 성폭력과 청소년 성교육 file 진보교육 2020.08.17 176
1290 담론과 문화> 예의와 윤리 file 진보교육 2020.08.17 59
1289 담론과 문화> 코로나 교단일기 file 진보교육 2020.08.17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