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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0(2016.05.09. 발간)

 

[담론과 문화] 정은교의 몽상록

비상벨 그리고 헤겔

 

정은교 /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1. 이야기 하나 : 비상벨을 울려라

 

여러 날 전에 지회 출범식에 출석했다. 그 날, 뒤풀이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이것저것 떠올린 생각을 여기 되옮긴다.

송원재가 법외 노조의 현주소에 대해 짤막하게 발제를 했다.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직권면직 문제가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정권의 탄압을 견딜만하다는 요지였다. 그리고 분회장들이 돌아가며 자기 학교 사정을 털어놨는데, 그냥저냥 굴러간다고 소심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몇 군데 분회는 나름의 활력을 뽐내기도 했다.

출범식 자리의 분위기만 놓고 보면 전교조는 아직 안녕하시다. 하지만 뒤풀이 자리로 걸어가는 길에 (해직된 적 있는) 한 분회장이 내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어두웠다. 어느 조합원은 분회 모임에 나오라고 요청했더니 그런 부담을 주면 탈퇴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더라나. 젊은 세대는 끊기고 전교조가 결국 말라죽지 않겠냐고 그는 전망했다. 그러니까 공식 자리에서는 애써 활기찬 얘기들을 나누고, 그런 분위기로 미뤄볼 때 전교조가 당분간 큰 탈 없이 굴러갈 것이 예견되지만 사석私席에서 주고받는 감회는 이것과 많이 다르다는 얘기다. 지회에 얼씬도 하지 않는 분회()들의 존재를 잊으면 안 된다.

전교조가 하는 일이 제법 있다. 혁신학교도 꾸리고, 세월호 추모도 열심히 하고! 하지만 그런 활동이 전교조가 당장 가라앉지 않게 버팅기는 힘은 되어주지만 새로운 힘이 싹트게 하고 그래서 젊은 교사들을 전교조로 끌어들이게 해줄 것 같지는 않다. 전교조가 활동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전교조 신문을 돌리고 있다. 분회장 맡길 사람은 없고 총무 맡은 사람한테 부담 주기가 싫어서 올 여름, 퇴직할 때까지 내가 돌릴 생각이다. 그 일이 내게 고역인 까닭은 무늬만 조합원인 사람이든, 소속감을 품은 조합원이든 기대감을 품고 전교조신문을 받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다. “이번에는 무슨 소식과 읽을거리가 실렸나하는 기대감 말이다. “전교조는 이런 투쟁을 벌이고, 이렇게 주장한다.”하는 얘기 빼고, 솔직히 무슨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글이 얼마나 될까. 심한 비판일지는 모르지만 제목만 (번개같이) 들춰보고 밀쳐버릴 조합원이 대다수 아닐까?

 

세상 모든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자

 

내게도 전교조가 새로 활력을 얻을 길이 무엇인지, 뾰쪽하게 내놓을 말은 없다. 하지만 전교조를 확실히 사수死守할 길은 알고 있다. 우선 소속감을 품은 조합원들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관심을 품고, 우리가 옳게 추구할 방향이 무엇인지 늘 감각을 곤두세우는 것!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얘기를 무늬뿐인 조합원이나 일반 교사들과 나누고,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일깨워 주는 일! 요컨대 본대있게 참교육을 해내는 것! 이런 노력들이 쌓이다 보면 젊은 층의 교사들을 주체로 세우는 일, 곧 전교조로 끌어들이기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전 국민의 관심을 끌었을 때, 전교조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세상 소식이 실렸어야 한다. “약한 인공지능이 20년쯤 뒤에는 개발될 것으로 예견되는데 그럴 경우, 직업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란다. 강한 인공지능[사람과 똑같은 로봇]이 개발될지 어떨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그럴 경우, 휴머니즘 자체가 위협받는 윤리학적 위기가 찾아온다. 당장은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정보통신기업이 40%에 달하는 엄청난 이윤을 긁어모으며 괴물로 커가고 있어서 인터넷독점 문제가 정치의제로 제기돼야 한다. 몇 년 전에 유럽의 젊고 패기 있는 친구들이 대안 인터넷[이더리움]’을 개발했고 한국의 기특한 두 고등학생이 잊혀질 권리를 실현하는 SNS ‘하루를 개발했다. 정보자본주의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자.”

언론은 뭐라고 떠들었는가? 자본을 돕는 중앙일보는 케케묵은 늙은이 이어령의 입을 빌려 사람과 인공지능의 상생相生을 떠들었고, 진보개혁언론 경향신문은 일자리가 사라질 걱정을 옳게 짚었다. 하지만 경향신문도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라는 알파고가 꼭 개발될 일이었는지, 그게 자본한테만 좋은 일이 아니었는지 날카롭게 들이대지는 못했다. 자본을 돕는 기술문명과 정면으로 맞서자는 깨우침에는 미달했다는 얘기다. 그 얘기, 써줄 필자를 찾으려고만 한다면 찾을 수 있었을 터인데 편집실장이 그런 궁리를 했는지 모르겠다.

 

시리아 난민 사태가 불거졌을 때 독일에서 철학책을 쓰는 한병철이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도 시리아 난민 사태에 대해 관심을 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 있다. 보수언론인 중앙일보마저 난민 사태, 남의 일 아니다라고 말했다. 인류사회 전체로 놓고 보면, 그것[난민 사태]은 아주 커다란 문제인데 전교조신문에 그 얘기가 실렸어야 하지 않는가? 그저 휴머니즘을 호소하는 소박한 얘기가 아니라 그게 현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빚어낸 사태라는 짤막한 진단과 더불어! 세상에 대한 그런 깨우침을 늘 던져줘야 전교조 조합원들이 전교조를 사수死守해야겠다는 마음을 더 다질 것 아닌가? 시리아난민과 관련한 무슨 사회적 실천은 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세상공부를 시켜줄 거리는 쌔고 쌨다. ‘후쿠시마 사태를 딛고 일어서려는 일본인들의 안간힘을 들려줘도 좋고, 이른바 한류韓流의 앞날을 비판적으로 진단하여 이것이 상업문화를 얼마쯤이라도 개혁하지 않고서는 오래 가지 못 한다하는 일깨움을 줄 수도 있다. 내가 ‘IS를 두둔한 교사로 일부 극우세력한테 공격을 받았는데 경찰조사에서 혐의 없음으로 끝났다. 이 마녀사냥 소식을 들은 교사들이 제법 많을 터인데 짤막한 뒷얘기를 전해 줘서 그게 마녀 사냥이었음을 폭로해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요새 나다라는 인문학잡지를 만드는 친구들이 주변에 재정난을 호소하고 있는데 이것도 알려줄 소식이 아닐까? 이태 전에, ‘인문학 협동조합이라고 대안적인 학문공동체가 출범했다. 이 소식도 전파할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작년 말에는 대중가수 아이유의 노래 제제를 둘러싸고 한동안 입씨름이 벌어졌는데 이것도 실어볼 가치가 있었다. ‘표현의 자유를 숙고하는 사회공부가 될 뿐 아니라,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 하는 흥미로운 국어공부 거리[곧 독자가 작중 인물을 감정이입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1~2학년들한테 이 얘기를 일러줬더니 다들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진보교육연구소는 몇 백 명의 회원들한테 세상정세 일러주고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회보를 펴낸다. 그런데 이런 정도[규모]의 의식화 작업만으로는 전교조를 버팅길 힘이 든든히 생겨나지 못한다. 모든 조합원들이 그 얘기를 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전교조신문이 달라져야 한다. 언제부터였는가 전교조에서 보내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있는데, 아마 모든 분회장()에게 보내는 것일 게다. 제안을 하나 하자면, 그 문자메시지에 위원장의 결의만 담을 것이 아니라 커다란 이슈가 생겼을 때 그 핵심이 되는 앎을 전해주는 것은 어떨까 싶다. 가령 알파고 뉴스가 온 국민의 궁금거리가 됐을 때, ‘정보자본주의에 관해 일깨우는 얘기[위에 적어놓은 내용 정도]를 발송한다든지. 모든 조합원한테 건네는 전교조신문에 온갖 얘기를 다 담을 수 없다면 분회장급한테 건네는 소식전달 통로라도 따로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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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는 자본주의 붕괴론을 믿었다. “공황이 벌어지면 자본주의가 무너질 거야. 그럼 사회주의로 가는 거지, !” 이러구러 전 세계의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볼품없이 쪼그라든 요즘은 사람들 대부분이 붕괴론이 희망에 불과했다는 것을 수긍한다. 하지만 좀 더 신중해진 형태로 이긴 해도 우리한테는 붕괴론이 남아 있다. “지금 사회가 폭삭 망해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새롭게 사회운동을 일으킬 거야!” ‘사회주의가 올 것이라는 다짐은 성급한 것이었지만,사람들이 정신을 차려서 어떻게든 정치政治를 되살려낼 것이라는 기대마저 성급한 것은 물론 아니다. 개혁이 됐든 혁명이 됐든 지금의 자본주의 지배세력과 맞장뜰 사회세력이 커가야 하는 것은 절대적인 요청이 아니겠는가. 진박眞朴(전두환 노태우 밑에서 영화를 누린) 김종인과 (‘민주세력인 적도 없었던) 안철수가 저희들끼리 찧고 까부는 지금의 정치를 멀거니 구경만 하면서 어찌 우리 사회의 희망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자. 지금 반전反轉은 일어나고 있는가? 무슨 폼 나는 반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없이 휘몰아가는 자본주의 기술문명의 흐름에 대해 그거, 아니다!’, ‘대안기술을 한번 만들어 보자!’하는 토론이라도 쬐끔(!) 벌어지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대학은 발빠르게 문학과대신에 스토리텔링학과, ‘정보처리학과대신에 빅데이터학과가 들어서는 판인데, 초중고 과정에서는 문학교육과 과학기술교육의 커리큘럼을 놓고 어떤 고민들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조합원들이 그렇게 세상의 큰 흐름에 대해 알아보는 토론시간이라도 갖고 있는지를 묻는다.

한국의 사회운동이 내리막길에 접어든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직 반전의 흐름이 싹트고 있지 못한 까닭은 우리가 바닥까지 추락하지 않아서일까? 혹시 바닥까지 추락한다 해도 사람들이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니까 가장 옳은 정치적 방침은 (어딘지도, 언제인지도 모를) 바닥으로 떨어질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바닥이라고 똑바로 직시하는 것이 아닐까? 제주도에 미국의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 지금이 바로 바닥이다.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사람 일자리의 절반을 뺏어갈 것이 예견되는 지금이 바로 바닥이다. 수많은 난민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한국 사회의 불행에만 관심을 가두고 살아가는 지금이야말로 바닥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일자리도 변변히 찾지 못하고 헬조선에서 살아갈 것이 점점 분명해지는데도 우리가 허망한 입시교육의 틀 안에서 소소한 개혁실천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가슴 설레는 참교육의 전선戰線이 변변히 세워지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캄캄한 바닥이다!

비상벨을 울려라! ‘무늬만 조합원들한테도 우리의 간절함이 가 닿을 수 있도록 비상벨을 힘차게 눌러라. 다들 일제日帝 치하治下 민족학교의 교사들이 사명감을 품고 교단에 섰듯이, 인류 앞날의 선구자로서 참교육의 나팔을 불 수 있도록 벨을 눌러라. 전교조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현실을 돌이킬 수 있도록 다들 비상벨을 눌러라. 눈앞의 전교조 일에만 눈길을 가두지 마라.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고 거리낌 없이 말하려면!

 

2. 이야기 둘 : 헤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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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칸트와 더불어 근대 독일 관념론철학의 두 기둥을 이루고 있다. 윤리학에 관해서는 그가 칸트만큼 길게 말하지 않아서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 (지나가는 얘기로) 짤막하게만 서술돼 있다. 하지만 인류의 학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므로 그를 길게 소개해야겠다. 먼저 교과서에 서술된 것을 옮긴다.


<<헤겔은 1770(독일 남쪽에 있는)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나 조숙早熟한 천재 셸링, 불우한 낭만주의 시인 휠덜린과 함께 튀빙겐 대학에서 공부하고 1801년 예나대학 교수가 됐다. 정신현상학을 썼고, 뒤이어 엔치클로페디논리학을 펴냈다.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가서 국가철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절대적 관념론 철학자다. 변증법에 의해 절대 이성에 다다를 수 있다고 했고, 국가를 절대이성이 구현된 것으로 봤다. 윤리와 관련해, 그는 가족생활에서 얻은 인륜, 곧 사랑과 양보, 배려와 헌신, 상호성과 이타利他주의 등이 시민사회를 원활하게 작동시킨다고 봤다>>


그런데 (‘교학사에서 펴낸) 교과서는 그의 사상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오락가락한다.


<<형이상학적 사고의 기본원리를 최고의 형태로 표현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와 비견된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는가 하면, 그가 단지 전체주의를 옹호하고 읽기가 거의 불가능할 만큼 난해한 글을 쓴 인물일 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아무튼 헤겔은 그 이후에 등장한 여러 사상가들이 헤겔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기 사상을 만들어간 점에서 오늘날까지 매우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남아 있다.>>

 

요컨대 그는 대단한 학자다!’아니다!’라는 두 의견이 엇갈린다고 했는데, 그럼 교과서 집필진의 생각은 어느 쪽인가? 전자라면 후자의 (손쉽게 내뱉는) 얘기를 생각 없이 소개할 일이 아니었고, 후자가 맞다면 교과서에 굳이 그를 소개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니체나 하이데거의 얘기가 나치즘[파시즘]으로 뻗어갈 구석이 있다고 비판되는 만큼 그렇게 단정지어서 헤겔을 비판하는 얘기는 드물다. 또 그가 글이 난해하다고 흉이 잡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공허하다고까지 비난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런 얘기를 하는 쪽은 유럽철학을 소 닭 보듯해온 영미 철학자들일 터인데, 그 얘기가 맞다면 그가 영향력 있는 사상가라는 평가는 틀린 것이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한때 영미 철학자들 중에 헤겔을 죽은 개처럼 업신여기거나 플라톤에서 헤겔까지 싸잡아 전체주의라 비난하는 돼먹지 않은 자들이 꽤 많았지만 요즘은 그런 풍조도 다소 사그라들었다. 유럽에서는 20세기에도 그의 영향을 받은 학자가 적지 않다. 미국 유학생들 중에는 학문의 사대주의자[친미주의자]가 많은데 영미 학자들이 저 잘 난 맛에 떠드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옮겨오면 안 된다. 교과서 집필자는 학문의 흐름에 대한 앎이 좀 어둡다. ‘헤겔이 여럿의 비판 대상이 될 만큼 무엇을 갖고 있었다.’는 논평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학자들이 있을 만큼 영향력이 더 컸다. 예컨대 현대 생물학자 중에는 생명의 개념과 관련해 헤겔한테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도 있다. 철학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큰 비중으로 다루는 까닭이 그의 얘기가 다 맞아서인가? 주된 철학 개념틀[형상론]을 처음으로 내놓았고, 지금도 곱씹어야할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는 공부를 신학에서 시작했다. 그는 기독교를 옹호했지만 그의 신학은 무신론으로의 길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 ‘성령론만 들이판 점이 이를 말해준다. 성령Holy Spirit이란 (성스러운 영혼을 받아들인)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당연히 부활을 포함해 예수의 모든 기적奇蹟을 부인했다. 이 시대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영혼 불사不死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 교의에 담긴 옳은 뜻이 근대 국가에서 어떻게 실현될 지에만 주로 몰두했다.

그의 첫 책 정신현상학참된 것은 전체라는 말로 시작한다. 전체론holism은 한 기관[정신, 언어, 생물, 사회 등]은 그것의 구성요소들을 통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whole holism.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고, 기관 전체가 낱낱의 부분들을 결정한다는 것으로 (근대 자연과학의 주된 접근법인) 환원주의와 상반된다. 이를 개개인한테 전체[곧 국가]에 복종할 것만을 다그치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 읽는 것은 터무니없는 트집이다. 개개인만 있을 뿐 사회[국가] 전체의 운명 따위는 신경 쓸 것 없다고 팽개치는 원자론적[=극단적]인 개인주의자[자유주의자]들이 그런 트집을 잡는다.

정신현상학은 과학적 인식에 이르는 의식意識의 경험에 대한 책이다. 감정적 확신의 가장 단순한 것에서 절대지[=절대적인 것에 대한 앎]에 이르기까지 의식[생각] 형식의 만화경[萬華鏡 : 갖가지 무늬를 보여주는 여러 거울]을 펼쳐낸다. 우리의 앎은 주관 정신으로부터 객관 정신을 거쳐 절대정신으로 나아간다. 책의 목표는 주관[자아]과 객관[세계], 또 나와 우리의 일치[=상호주관성]를 이뤄내는 것이다.

이 책에 들어 있는 한 대목,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와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여러 후학들한테 큰 감명을 주었다. 노예의 실천 활동[살림살이]에 의존해서 오로지 군림[지배]하기만 하는 주인master’은 점점 노예나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추락하고, 제 몸뚱이를 부려 써서 주인을 먹여 살리는 노예slave’는 자기의 힘과 가능성을 문득 깨닫고 주인[주체적인 존재]으로 올라서는 변증법[=반대되는 것으로의 뒤집힘]을 그가 세밀하게 서술했는데 이는 위/아래 신분차별을 걷어치운 근대 시민혁명의 드라마를 철학적인 앎으로 재현再現해낸 것이다. 그런데 이는 1791년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 섬[지금의 아이티’]에서 흑인 노예들에 의해 현실에서 실천됐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가장 근본적으로 실현해낸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아이티.

 

시민혁명 : 이성의 실현

 

헤겔의 역사철학의 요지要旨는 간단히 말해 절대자[절대적인 것]로서 이성이 인류 역사에서 꾸준히 실현돼 왔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를 만들어내는 힘이 이성이었다고까지 단언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욕구[소망]를 충족하기 위해 설령 비합리적으로까지 행동한다 할지라도 그 전체적인 결과는 이성의 실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이성의 간계[잔꾀]’라 한다. 그는 유럽의 역사를 훑어보고서 사람들의 자유의식이 차츰 높아져 왔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헤겔이 청년 시절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맞았던 프랑스[또는 유럽] 시민혁명이 그 선명한 증거였다. 그는 인류역사를 들뜬 낙관樂觀의 눈길로 바라봤다. 계몽주의 사상운동이 유럽을 휩쓸던 시절이었다.

헤겔의 뛰어난 점은 모든 학문을 하나로 아우르는 (학문) 체계system를 만든 것이다. 세계 전체를 보는 눈은 그런 체계에 의거할 때만 깊어진다. 가령 우리는 생물학의 철학에 대한 앎이 없이 윤리를 저울질하기 어렵다. 요즘 유전공학자들이 갖가지 실험[인간복제 따위]을 벌이려고 하는데 유전공학과 생물학, 정신과학[인문학]을 통합된 눈으로 살피지 않고서 어찌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는 모든 도덕적 존재[곧 사람]는 유기체organic body이기도 해서다. 현대 학문들은 전문화specialization의 방향으로 도도하게 치달았고, 저마다 내 잣대로만 세상을 보겠다.”고 환원주의[가령 모든 학문의 수학화]의 깃발을 내걸었는데 이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가 헤겔의 학문 체계다. 그는 개념의 선험적[경험 이전의] 체계를 다듬어서 플라톤의 이데아의 우주를 근대 version으로 고쳐 썼다. 물론 그가 다듬은 이론틀의 상당 부분은 결함투성이여서 비판받아야 마땅하겠지만 모든 학문을 하나의 체계로 짜야 한다.’는 그의 문제의식을 내버려서는 안 된다.

 

학문 체계와 개념의 변증법

 

플라톤의 핵심어가 이데아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이 형상[에이도스]과 실체[우시아]라면 칸트는 자아[초월론적 주관]일 것이고, 헤겔은 개념Begriff이다. 헤겔의 책 논리학에서 논증 절차는 곧 모순적인 것으로 드러날 어떤 하나의 규정[존재 곧 있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는 새로운 범주 하나를 들여오게 하는데, 최초의 범주에 대한 규정적인 부정[반대적인 대립]만이 새로운 범주일 수 있다. 이 새로운 범주[무 곧 없음]에서도 모순은 또다시 드러나고 이는 또 다른 새 범주[현존재 곧 거기 있음]의 도입을 요청한다.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어떤 모순도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규정[절대이념]에 다다를 때까지 지속된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이 현실 사물들의 역동적인dynamic 운동을 읽어내는 앎의 도구라면, 헤겔의 변증법은 개념들이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를 추적하는 앎이다.

그의 변증법dialectic을 두고는 말이 많았다. 실제로 이 낱말을 좀 마구잡이로 쓴 탓에 비난을 스스로 불러들였지만 그가 모순율[AA 아닌 것이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 규율]을 부정한 적은 없다. 그는 개념이 일면적이고, 자기를 반대하는 개념의 상대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전제前提를 회복하지 못할 때 모순적이라고 여길 뿐이다. 이를테면 순수한 존재[있음] 개념은 모순적인데, 그것이 아무런 규정이 없음을 의미하지만 그런 의미 자체에 의해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규정된 것으로서 현존재개념은 단순한 있음보다 앎의 진보이다.

아무튼 그는 개념의 변증법을 써서 가장 단순한 개념으로부터 가장 포괄적인 개념에로 논증해간 덕분에 전통 형이상학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힌 이른바 신의 현존재 증명의 문제를 해결했다. 과 맞짝이 되는 그의 논리적 개념이 절대 이념이다. 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근거 세우기인 바, 헤겔은 절대 이념을 연역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도착 지점으로 정했다. 과거의 신증명들은 신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 주장에 반대하는 주장이 이미 자기의 주장을 전제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종의 귀류법reduction to absurdity을 써서 절대자[절대적인 것]가 있음을 밝혔다. “유한자[유한한 것]가 있지 않다는 것이 바로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의 절대적[객관적] 관념론은 개념경험주의[=개념은 경험한 것을 서술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만으로 세상을 알 수는 없다는 것, 개념은 선험적 구성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 실재reality 자체가 개념적으로 틀이 짜여 있다는 믿음이다. 이는 세계가 신적神的인 사상[생각]들의 표현이라는 옛 종교신앙을 새롭게 바꿔낸 이론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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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대기 : ‘변증법개념은 두 가지 쓰임새가 있다. 첫 번째는 자연과 인간사회, 사유[생각]의 일반적 운동과 발전법칙에 대한 앎이다. 생각[헤겔]이든, 사회[마르크스]부정의 부정양에서 질로의 전환을 이뤄내며 모순 속에서 운동한다. 그런데 어떤 것들이 서로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고 파악한다 하여 모든 것을 다 알아낸 것은 아니다. 두 번째는 범주들의 변증법적 서술이다. 서로 동떨어진 채 서술되는 범주들의 내적 연관성을 분명히 하는 것! 이는 몇몇 특별한 방법[예컨대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기]을 갖다 쓴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니다. 대상의 이모저모를 면밀하게 살펴서 그에 걸맞게 비판해내야 한다. 그러니까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서술이 무엇인지는 그 서술들을 다 읽고 나서야 알 수 있다.

 

국가가 시장을 규제하라

 

칸트도 그랬지만 헤겔도 나름으로 자연과학을 탐구했다. 그의 유기체론은 현대 생물학에 견줘 손색이 없다. 유기체의 본질 징표[형태, 동화, 재생산]에 대한 통찰이 그렇다. 빛의 특수한 지위와 관성의 원리에 대한 그의 통찰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미리 내다본[짐작한] 것이라고 한다. 두 학자의 선험주의[=경험 이전의 조건 탐구]는 독일의 자연과학을 영국의 그것보다 더 강력하게 ‘(상대성이론이 보여준) 생각 실험과 보편적 원리에 대한 이론적인 반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헤겔은 법철학 요강에서 자기 시대의 정치적 변화를 지진계처럼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프러시아[당시의 독일]가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뒤 (나폴레옹의 요구에 따라) 단행한 사회개혁의 방향 설정에 지혜를 보탰다. (‘전체주의의 싹을 보인다.’고 칼 포퍼가 그를 함부로 비난한 것과 달리) 그는 독일 민족주의가 꿈틀대는 것을 비판했고, 실질적인 정의론正義論을 다듬었다.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 이래로 들어선 독일 국가는 칸트와 헤겔의 법이념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는 국가 이전의 자연법을 인정하고 시민사회의 형성을 부르짖었다. 그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시장의 자기조절적인 힘을 수긍했다. 그는 자유주의 국가를 머릿속에 그린다. 다만 존 로크의 야경꾼 나라로 국가의 임무를 한정하지 않았다. 가족은 특수한[자기들끼리의] 이타주의altruism, 시민[부르주아] 사회는 보편적인 이기주의egoism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내버려두면 골이 깊게 패일) 빈부 격차를 국가가 나서서 규제하고 감독하지 않는다면 시민사회는 어김없이 빈부 격차를 키우고 이른바 천민the humble들을 배출하기 마련이라고 그는 짚었다. 그의 문제의식을 더 키우면 사회국가[또는 복지국가]’의 개념이 나온다.

그의 국가관[자유주의 국가론]21세기에도 적용될 만큼 충분히 선진적인 것인지는 따로 따질 문제다. 그 논쟁점이 아니라도 그는 세상을 파악하는 데서 헛발을 짚은 대목이 많다. 이를테면 세계평화를 위해 국제연맹[국제연합]’ 같은 국제기구가 필요하다는 칸트의 제안을 묵살한 것이라든지, 인류 역사를 살피면서 유럽 아닌 딴 대륙의 역사를 단칼에 깎아내린 것들은 그의 앎에 군데군데 허물이 있음을 말해준다.시민혁명 해내지 못한 사회는 죄다 엉터리야!”라는 단순 논리! 헤겔의 시대는 근대화 과정에 들어서는 초창기여서 근대 사회의 진취적인 모습이 주로 눈에 띄고, 그 근대성이 허약한 구석도 많이 갖고 있다는 데에는 눈길이 잘 가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미네르바[지혜]의 부엉이는 흔히 뒤늦게 황혼녘에야 날아오르기 일쑤다. 우리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헤겔보다 2백 년 뒤늦게, 다시 말해 근대화 과정이 다 벌어진 뒤에 태어난 덕분에 우리는 그의 학문의 어디어디가 허술한[틀린] 대목인지를 잘 안다.

 

사후事後의 관점 생성 속의 진리

 

그의 역사철학을 좀더 살피자.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글에서 우리는 그가 세상을 어떤 목적이 실현되는 곳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저 씨앗? 참나무라는 목적을 향해 커 나갈 거야! 우리는 폴리스적=정치적 동물이라는 본질을 갖고 있으니[그렇다고도 볼 수 있고, 아니라고도 볼 수 있는데], 폴리스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향해 덕virtue을 쌓읍시다!”

헤겔도 마찬가지로 목적론자다[그 점에서 비판받는다]. 그는 이미 벌어진 일들을 해석하는 입장[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잖아? 그거, 인간 역사가 이성을 향해 움직인다고 하는 목적을 실현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는 개념들을 잘 부려 써서 그런 결론을 내렸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기는 하다. 그의 논리와 개념틀이 매우 정교하므로. 하지만 곧바로 논쟁점이 튀어나온다. 그가 한쪽은 잘 봤지만 다른 쪽은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가 좋은 쪽[이성의 실현]으로 갈지, 나쁜 쪽으로 갈지 니가 어떻게 아냐? 지금껏 흐름이 괜찮았다 해도 앞으로는 엇나갈 수도 있는 것 아냐?” 헤겔이 그럴싸한 체계를 세우니까 키르케고르가 대뜸 대들었다. “체계는 참 좋은데, 거기 사람[주인]이 어디 있소? 이미 벌어진 일 갖고 나중에 해석하는 것 말고, 앞으로 뭘 만들어 가야 할지를 궁리합시다! 체계 속에 갇힌 진리 말고 생성生成 속의 진리를 찾읍시다!” 사후事後의 관점이 아니라 사전事前의 자리에 서자는 주장이다.

덧대기 : 옛날에 벌어진 일을 나중에 읽는[해석하는] 사람은 허튼 허구fiction에 빠져들 수도 있다. 이를테면 전통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 옆자리를 차지하기로 다 설계돼 있었다. 정말 그런가? 나중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을 뿐이다.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들만 해도 그를 훌륭한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볼 뿐이지 성자聖子, 곧 신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사전事前의 자리에 서면 어떤가? 예수가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 못 박힐 시점time만 해도 기독교가 태어날지 어떨지 아무도 몰랐다. 그때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리지 않았던가. 바울이 문득 깨닫고, 베드로가 절절히 뉘우친 뒤에야, 그래서 어떤 신적神的인 깃발을 들어 올리자고 여럿이 모여 사생결단死生決斷의 결심을 내린 뒤에야 기독교의 싹이 차츰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탄생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우연적인) 사건이다. 또 무릇 종교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 한에서 존속할 따름이다.

 

그의 예술론도 잠깐 살핀다. 칸트가 모든 것을 괄호 안에 넣고 미학적 관심에만 몰두하라고 권유하는 형식주의 미학이라면[그 시절의 예술가들은 이런 노선에서 해방감을 맛보았다], 그는 내용을 따져 묻는다. 예술은 이념의 감성적 표현이라고! 거기 종교와 철학이 담겨야 한다고! 인류의 절대 정신을 나타낼 길은 그 셋[종교, 철학, 예술]이므로 그 셋이 하나가 돼야 한다고! 그는 옛 그리스예술이 객관성[세계]과 주관성[자아]의 놀라운 조화harmony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가장 윗길이라고 칭송한다. 상징적인 예술은 세계에, 낭만적인 예술은 자아에 너무 쏠려 있어서 감동이 덜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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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을 복권하라!

 

헤겔은 후학들한테 어떻게 계승되었는가?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철학]이 물구나무 서 있다며 자신이 이를 되돌려 놓겠다고 다짐했다. 역사적 유물론의 눈길로 세상을 살피겠다는 얘기다. ‘관념 먼저, 현실 나중이 아니라 현실 먼저, 관념 나중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순서는 뒤바꾸었지만 아무튼 모순된 것을 타개打開해 나가는 앎의 지혜로서 변증법의 핵심은 물려받은 셈이다.

헤겔을 가장 긍정적으로 읽어낸 후학으로는 슬라보예 지젝[1949~]이 꼽힌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흔히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이고, 헤겔은 관념론자라고들 생각하는데 헤겔의 많은 내용이 유물론적이고 마르크스 얘기의 많은 부분이 관념론적이다. 헤겔은 프랑스혁명에 감격했고, 그것이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로 이어졌는데도 아무튼 자유 이념의 진보에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프러시아국가는 관료주의로 함몰되고 말았다. 그가 맞닥뜨린 정치현실과 21세기 우리들의 현실이 무척 비슷하고 고민거리도 비슷하다. 사회정치적 교착상태[뒤엉켜 빠져나오지 못하는 지경]에 놓인 우리한테 헤겔은 영감을 준다. 헤겔의 복권이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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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회슬레[1960~ ]는 헤겔의 학문 체계 자체를 더 보강된 형태로 세우려고 애쓰는 학자다. 객관적 관념론이란 논리적이고 이념적인 것의 절대성이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고 증명될 수 있다면, 오직 그것만이 현실적이고 절대적인 원리로 궁리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논리적이고 이념적인 것이 칸트의 주관적 관념론에서처럼 한갓 주관적인 사유원리[초월론적 주관]일 수만은 없고, 객관적으로 그 자체의 존재 영역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단다[앞서서 플라톤이 그런 생각을 했다]. 객관적 관념론의 핵심 명제는 가언假言이 아닌 선험적인 앎이 있고, 그것의 법칙들은 동시에 현실의 법칙들이라는 것이다. 가언假言이란 만일 이러하다면 저럴 것이라는 if의 문장이다. 그는 이 명제를 변증법적 모순을 통한 간접증명이라는 간단한 방식으로 증명했다.

그의 설명을 옮긴다. 객관적 관념론은 회의주의[해체론]와 상대주의 이론이 판치던 20세기에는 죽은 개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간주됐다. 자연과학[경험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관념론은 우르르 무너지고, 실존철학과 논리실증주의와 언어분석 같은 백화百花가 꽃피어났다. 그런데 이 앎들은 자기 학문의 남다른 단초[端初 ; 출발점/계기]를 근거 지을 수 없다는 결정적인 결함들을 피하지 못했다. 경험론은 경험을 앎의 유일한 기초라 여기는데, 그 원리는 경험에서 끌어낼 수 없고 경험될 수 없으니 경험론에 의거해서 근거 지을 수가 없다. 칸트는 경험이란 언제나 어떤 것이 어떻게 있는지를 보여줄 뿐, 왜 그것이 다르게 있지 않고 바로 그렇게 있어야만 하는지는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유물론도 여러 영역[분야]에서 귀중한 앎을 내놓기는 했지만, 자기의 근거 원리인 물질이나 물질의 법칙을 유물론적으로 근거 짓지 못한 채로 전제前提할 뿐이다. 칸트의 선험론 철학의 경우도 현실이 주체의 선험론적 형식[지각하는 도식圖式, 범주형식, 언어구조]을 통해 주어진다고 하는데 그런 선험론적 제약들이 어디서 비롯되며, 다른 선험론적 제약들은 없는지 등등의 근본 물음이 뒤따라야 한다.

요컨대 모든 철학은 자기 생각을 논증을 통해 펼쳐야 하고, 그래서 논증 가능성[곧 논리학]을 전제한다. 그런데 논리학은 오직 논리학만을 전제한다. 논리적 원리들의 타당성을 근거 짓자는 요구는 (그 자체가 논리적 관계인) 근거 짓기를 통해서만 대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 원리는 논리적인 것이다. “논리학도 갖가지가 아니냐? 그러니까 가언假言이 아닌, 제약 없는[절대적인] 논리학은 있을 수 없는 것 아니냐?”하고 반박하는 사람은 의미론적 차원에서 반박하려는 것을 (그리고 오직 그것만을) 반박의 수행적 행위 속에서 절대적으로 전제前提해 버려서 이른바 수행적 모순에 빠져 든다. 그러므로 앎의 기초가 되는 논리 구조가 원리로서 결단코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어떤 명제는 그것이 화용론話用論적인 자기모순 없이는 논박될 수 없고, 그것의 타당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증명될 수 없을 때 최종 근거지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회슬레는 헤겔 이론을 보강하는 대안으로서 그의 학문체계를 다시 다듬는 것 말고도 (객관성과 주관성을 종합하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범주를 더 들여올 것을 주장한다. 칸트와 헤겔 이후에 새롭게 앎이 쌓인 영역이 바로 상호주관성[우리]’이다. 헤겔도 우리를 말하기는 했지만 이를 근본 범주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쉽게 말하자면 철학적 대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대화를 통해 철학을 가르쳤는데 후배 학자들은 논문이나 자기성찰의 글쓰기로 치달았다. 이는 객관과 주관의 분열을 말해 준다. 학자들 동네야말로 대화를 통해 자기가 아는 것의 벽을 넘어설 필요가 절실하다.

덧대기 1 : 윌슨과 최재천을 비롯해 사회생물학자 몇몇이 ‘(여러 학문을) 한데 아우르자<통섭>을 슬로건으로 들고 나온 것도 학문간 분화分化의 극복을 외친 점에서는 옳지만 그 주장은 그들이 (인문 사회과학의) 생물학으로의 환원을 단순 무식하게 외친다는 사실과 정면충돌한다. 뇌과학과 진화생물학을 주축으로 한 학문 통합은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 ‘환원!’환원 반대!’는 줄곧 같이 가야 한다.

덧대기 2 : 현대 자본체제가 엄청난 정보 자료[데이타]를 쏟아냄에 따라 철학[이론]을 우습게 여기는 얼치기들이 많이 늘어났다. “Google이 모아 놓은 거대 자료를 분석하고, 거기서 패턴[유형]을 찾아내면 된다. 자료들을 서로 견주면 되니까 무슨 가설假說을 세운답시고 꼼지락거릴 것 없다. 인과 관계도 따질 것 없고 상관관계만 찾으면 된다. 어쩌구...” 그들은 이제 플라톤이든, 헤겔이든 다 내버려도 된다는 투다. 그런데 그들이 뽐내는 Big Data(!)라는 것은 그냥 알아두는 것뿐이다. 그리고 철학[이론]이란 그저 실험으로 검증[반증]하는 가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이런 눈길로 보자.”는 근원적인 결단이요, 계산할 수 없는 생각이다. 이미 있는 모든 것들을 과연 그 말이 맞는가?’하고 늘 캐묻는 일이다. 철학[이론]의 임무는 앞엣 얼치기들이 인류 문명의 앞날을 어찌 위태롭게 만들지 두 눈 부릅뜨고 파헤치는 일이다. 뷔토르[프랑스 문학가]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이 (근래 들어) 경제위기만이 아니라 정신의 위기도 겪고 있다. 수많은 책이 쏟아지지만 정신이 멈춰 있고, SNS가 무척 활발해졌지만 엄청난 소음[시끄러움]만 만들어낼 뿐이다.” 21세기의 인류는 사회적인 좌표座標를 잃은 채 눈먼 힘[경제권력]에 휘둘려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다.

덧대기 3 : 당위[윤리]를 존재[경제] 위에 근거 지을 수 없으므로 공리주의는 틀렸다고 했다. 그런데 당위와 존재, 이 둘을 갈라놓기만 해서는 윤리학의 실현을 보장할 수 없다. 칸트도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던 것이다. 객관적 관념론자 회슬레는 당위와 존재가 완전히 갈라서서도 안 되고, 오히려 존재[경제]가 당위[윤리]로부터 생겨나려면 이 둘이 이념적/규범적 영역에 의해 원리 지어진 두 가지라고 가정假定해야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댔다. 아무튼 열쇠는 드높은 윤리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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