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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 문화] 타라의 문화비평

‘해무’의 바다에서 ‘명량’을 바라보다

타라 / 진보교육연구소 문화연구분과장

  2014년 여름에는 유난히 바다와 배를 담은 영화가 많았다. ‘명량-해적-해무’가 하나의 영화 제목으로 여겨질 만큼 이들 3편의 영화는 한 묶음으로 회자되곤 했다. 그런데 가장 묵직한 주제를 사실적으로 다룬 해무가 150만 관객 수에 그친 데 비해 해적과 명량은 각각 850만, 1700만이라는 기대 이상의 흥행을 보였다.
  산적과 해적들이 모여 들어 고래가 삼킨 조선의 국새를 찾으려고 해프닝을 벌이는 가벼운 영화「해적」의 흥행도 놀랍지만 작품성에서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명량」이 대중에게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데에는 이순신이라는 남다른 소재와 거대한 자본의 배급 효과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해무와 명량은 다르면서도 닮은 영화이다. 대중의 욕망의 극과 극을 표출하고 있다고나 할까? 혼돈에 빠진 공동체, 두려움과 불안, 절체절명의 위기 속 인간의 선택 혹은 결단, 생존을 위한 몸짓들에서 말이다.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에 드리운 거대한 트라우마와 뿌연 의혹의 안개들 속에서 대중들은 거리 두기와 참여적 동일시의 양 극단을 오가는 집단적 신경증을 지독하게 앓고 있다. 그런 대중들의 마음의 너울이 두 영화에 대한 선택의 갈림에서 포착된다.

  침몰하는 배를 구해내자
  검푸른 바다에 부유하듯 떠있는 한 척의 낡은 어선으로 시작하는「해무(海霧)」는 1998년 IMF외환위기가 그 배경이다. 여수 바다를 주름잡던 안강망 어선 '전진호'는 더 이상 만선의 수확을 거두지 못하고 감척 사업 대상이 된다. 배를 잃을 위기에 몰린 선장 철주는 독단적 선택으로 조선족 밀항에 가담한다.
  그러나 해경의 눈을 피해 어창으로 숨은 밀항자들이 낡은 배의 가스 유출 사고로 떼죽음당하는 사고가 터졌다. 망망한 해무[바다 안개] 속에서 선원들은 선장의 명령에 따라 시체를 칼로 난도질하여 바다로 던진다. 피로 물고기들을 유인하여 시체가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선원들은 윤리성을 상실한 채 패닉 상태에 빠진다.
  가장 인정이 많은 기관장 ‘완호’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이들의 채 타지 못한 물품을 움켜쥐고 정신줄을 놓았다. 이를 목격한 선장에게 완호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밀항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홍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욕망들의 아비규환 속에서 가족 같던 선원들 사이에 살육이 벌어진다. 풋내기 선원인 동식은 사랑하게 된(혹은 되었다고 믿는) 홍매와의 생존을 위해 배를 파괴하고, 선장 철주는 끝까지 전진호를 지키다가 결국 그의 전부였던 배와 함께 수장[水葬]된다.
「명량(鳴梁)」은 1598년 정유재란 시기 칠정량 전투에서 대패한 원균을 대신하여 다시 수군절도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단 12척의 배로 왜적선 300여척을 대파한 명량해전을 소재로 했다. 시나리오의 허술함 등 작품성 논란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서사는 단순하며 그나마 스펙터클한 해상 전투 장면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조선의 배는 판옥선이다. 구선으로 불리는 거북선은 칠전량 전투에서 다 소실되고 단 한 척 남아있던 것마저 영화에서는 배설이라는 장수가 불태워 버렸다.
  두 영화에서 ‘전진호’와 대장선(이순신 장군이 탄 배)은 모두 침몰의 위기를 겪는다. 그런데 해무에 갇힌 전진호는 내부자 동식의 파괴로 침몰하고, 회오리바다로 빨려 들어가려던 대장선은 민초들이 협력하여 구출한다. 그것도 자칫하면 함께 빠져들어 목숨조차 담보하지 못할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작은 어선들이 갈고리를 배에 걸고 맨손으로 줄을 당겨가며 대장선을 살려내는 것이다. 그럴듯한 음악 효과 하나 없이도 가슴 뭉클한 감동이 온몸으로 전달되는 장면이다.
  잔잔한 바다에 뒤집어진 채 속절없이 침몰한 세월호 영상이 강하게 각인되어 버린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가슴 졸이며 잠시 숨을 멈춘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가슴 먹먹한 순간이다. 실제로 이 영화가 세월호 이전에 나왔더라면 세월호를 사고 초기에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라는 댓글도 나왔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기적이 생겨나기를 갈구하는 대중의 열망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세월호 참극이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 앞에서 한국 사회가 부여잡고 싶은 집단적 믿음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 함께 달려들어 제 목숨을 내어놓고서라도 침몰하는 배를 끌어당기는 공동체의 협력과 모두의 생존이라는 낙관적 결말! 게다가 이것은 뛰어난 지도자의 목숨을 건 분투에 감동한 주체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행한 실천의 산물이다. “침몰하는 배를 구하라” 가 아니라 “침몰하는 배를 우리가 구해내자” 인 것이다.

「해무」의 낡은 전진호, 그리고 충파(衝破)와 백병전에도 끄떡없는「명량」의 대장선(단단한 판옥선)은 둘다 한국사회의 상징이다. 녹슨 전진호로 표상된 한국사회는 남루하고 비참하다. 반면에 대장선으로 비유되는 한국사회는 어떤 난국에도 버텨내고 불사신처럼 되살아나는 단단한 사회이다. 대중은 한국사회의 병든 민낯을 마주하기보다 외면한다. 그리고 강한 사회를 열망한다. 현실임직한 비현실의 구현! 그 속에서 잠시나마 비루한 현실을 잊고 카타르시스를 맛보고 싶은 것이다.
  불편한 진실에서 살짝 비껴나 안전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사건을 조망하기. 대중들의 이러한 욕망은 두 영화가 각각 견지하고 있는 카메라 시선에도 그대로 드러난다.「해무」는 관객이 전진호라는 배 안에 함께 탑승하여 깨진 창문 틈으로 엿보는 듯한 관음증적 시선을 활용한다. 게다가 배 전체를 개조해 만든 갑판, 조타실, 기관실 등의 공간을 흔들리며 이동해가는 카메라의 좁은 눈을 쫓아갈 때면 관객은 배 멀미로 어지럼증과 구토를 느끼게 된다.

  카메라 안이 굉장히 갑갑해요. 어디 못 도망갈 것처럼.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있을 때도 긴장하게 된다.

  마치 스크린을 넘어온 듯한 생선 비린내와 질식할 것만 같은 냉기 가스 냄새까지 맡은 것 같은 묘한 기분에 휘말리는 순간 기자는 결국 심한 배 멀미를 하고 말았다.

  시체를 난도질하는 잔인한 장면이 뿌연 해무에 가려 흐릿하게만 보였는데도 목이 베이고 베어진 목들이 나뒹구는「명량」보다「해무」가 휠씬 잔혹하게 느껴진 까닭은 이러한 카메라의 은밀한 시선 탓이리라. 그 까닭에 관객들은「해무」가 스토리 라인이 탄탄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임을 인정하면서도 주위에 쉽게 권하기는 어려운 영화로 꼽는다. 이에 반해「명량」은 치열한 해상 전투를 먼 거리에서 조망하는 시점을 취한다. 피난민들을 이끌고 뭍의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이회(이순신의 아들)의 시선에 카메라가 놓여 있는 것이다.
  폐선 직전의 전진호에 숨어 파국의 현장을 엿보는 홍매의 불안한 시선과 기적 같은 명량해전을 안전지대에서 경외감으로 바라보는 이회의 시선을 각각 참여적 동일시와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겠다. 장군선의 충파에 감동한 민초들이 전투를 도우려고 언덕을 내달려 갈 때도 이회는 구경꾼적 시각을 유지한다. 기적을 염원하며 메시아를 기원하는 나머지 백성들과 함께. 관객들은 관조하는 시선에 편안하게 자신의 눈을 맞춘다.

  죽을 각오로 나를 다 내어 던져라.
  두 영화는 모두 공동체가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주체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해무」는 선장, 갑판장, 기관장, 경구, 창욱, 동식 등 서로 다른 욕망(혹은 신념)을 추구하는 여섯 인물들 간의 각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서 “지옥 같은 상황에서 넌 어떻게 할래?” 혹은 “너는 어떤 유형의 인간이냐?” 하는 물음을 냉정하게 던진다.  배가 곧 집이며 배의 안전과 유지가 최우선인 선장 ‘철주’, 체제 유지의 명에 철저히 따르는 갑판장 ‘호영’, 인간성을 부여잡고 죄책감에 빠지는 기관장 ‘완호’, 돈을 쫓는 롤러수 ‘경구’, 성욕의 화신 ‘창욱’, 낭만적 사랑(관계)을 쫓는 ‘동식’ 은 인간 군상의 유형에 다름 아니며 이들이 벌이는 갈등의 파국적 상황에서 각 인물들의 욕망이 극한대로 펼쳐진다.
「명량」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분명하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육지의 진지며 집들에 모두 불을 놓아 배수의 진을 친 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수군들에게 이순신은 “죽을 각오로 나를 다 내어 던져라. 그래야 산다” 고 외친다. 배가 곧 집이고 집이 곧 배인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빌 디딜 곳이라고는 바다 위 나무배뿐인 수군들은 이제 모두「해무」의 갑판장 ‘호영’이 되어 생존을 위해 일심동체로 일사분란하게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지도자의 의지와 판단에 목숨을 걸고 따를 일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을 각오로 나를 몽땅 내 던져 싸우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
  “죽을 각오로 나를 다 내어 던져라. 그래야 산다” 는「명량」이 신자유주의시대의 황무지를 살아가는 한국사회 대중들에게 던지는 정언명령이다. 여기에는「해무」에서 다루어지던 의지의 맹목성에 대한 윤리적 시선 같은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배에서는 내가 대통령이고 판사고 느그들 아버지여" 라고 외치는 선장에게 항거하는 조선족이나 동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명량」에서 이순신의 출정 명령에 불만을 품고 거북선을 불태운 배설은 활에 맞아 죽는다. 탈영병은 이순신의 긴 칼에 목이 베인다. 이순신의 판단과 의지는 선한 것이자 올바른 것이므로 그의 모든 행위는 집단의 대의를 위한 것으로 정당화된다. 따라서 그의 명에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공동체의 혼돈을 일거에 해소하고 승리의 역사를 안겨줄 영웅이기 때문이다.
  이 때 집단적 주체는 그를 따라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 그의 백성이자 조력자로서 살면 되는 것이다. 그의 의지가 선한 것인지 여부나 선한 의지를 이루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사되는 폭력성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중지한 채로 말이다. 공동체의 생존과 빛나는 승리의 서사를 위해 이 모든 것은 보류되어야 한다. 개별 주체인 ‘나’로 살아가기보다는 집단적 주체로 살아가기가 훨씬 쉬운 한국사회의 현실을「해무」와「명량」의 관객 수가 입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보시게들! 내 술 한잔 받으시게
「해무」와「명량」에는 영화 안팎으로 집단적 죽음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일까? 2014년 여름의 이 두 영화는 죽은 자에 대한 씻김굿이나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위무(慰撫)로 읽힌다.
「해무」에서 선장 ‘철주’는 식사 전에 밥 한 숟가락으로 고시래를 한다. ‘창욱’은 시체더미들 속에서 ‘율녀’의 얼굴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침을 묻혀가며 닦아준다. 그리고 밀항자들의 유품은 선원들에 의해 신위(神位)처럼 태워진다. 그런데 기관장 ‘완호’는 "오매…, 우리 딸래미들" 이라고 불렀던 한 밀항자의 가족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소지(燒紙) 의식을 치른다. 타다만 유품 조각들을 부여잡고는 영매(靈媒)가 되어 산자와 망자를 오가며 한풀이 하듯 웅얼거린다.
  그러나 완호는 현실세계의 권력자인 철주에게 배의 안전(체제 유지)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씻김굿은 동식과 홍매가 한 몸이 되어 벌이는 진한 춤사위로 이어진다. 내부자와 이질적 존재의 섞임이자 타나토스에 저항하는 에로스 충동에서 비롯된 두 신체 간의 처연한 합일의 체험은 이후 동식이가 낡은 체제를 전복할 의지의 단초가 된다.
「명량」에서 이순신은 칠전량 해전에서 죽은 장수들을 꿈에서 불러낸다. 그리고는 "이보시게들! 내 술 한잔 받으시게" 라며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권한다. 잘못된 조정의 판단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억울하게 죽어간 부하들에 대한 이순신의 비통함과 깊은 슬픔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장면이다.
  사라져가는 원혼들을 버선발로 쫓아나간 그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거북선이 불타는 모습을 젖은 눈으로 목격한다. 현실적으로는 절망의 순간이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망자들의 한을 그들이 머물던 배와 함께 깨끗이 태우는 제례 의식이기도 하다. 이후 그는 부하들을 끝까지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책에서 벗어나 현실의 상실감을 비로소 받아들이고 울돌목의 물길을 살피며 전술을 구상한다.
「해무」는 우리들의 막연한 믿음을 깨고 적나라한 현실의 모습을 마치 거울을 들이대듯 집요하게 제시하므로 불편하고 아프다. 배 내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공간들과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의 사실성이 더해질수록 제7 태창호에 세월호 참극이 겹쳐진다. 원형의 어창 구멍으로 빼꼼히 드러나는 밀항자들의 얼굴과 집단질식사한 후 인기척 없는 어창의 검은 구멍, 그리고 쌓인 시체들은 한국 사회가 외면하고픈 그러나 지울 수 없는 얼룩이다.
「해무」가 죽은 자들의 씻김에 주목한다면「명량」은 살아남은 자들을 위무한다.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라고 다독이며 죽을 각오로 살면 된다고 속삭인다. 그래서 어디하나 기대하고 마음의 위로를 받을 곳이 없는 대중들은 2014년「명량」속으로 무리지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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