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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기획] 교육관계로 바라보는 한국 교육현실

2012.06.20 14:55

진보교육 조회 수:1062

[기획]

교육관계로 바라보는 한국 교육현실

천보선 / 진보교육연구소 비고츠키교육학실천연구모임


* 서로에게 불행이 되는.....
요즘 많은 교사들이 아이들 때문에 힘들고 불행하다고 한다. 공부도 안하고, 설명해도 못 알아듣고, 수업까지 방해하고. 심지어 게기고, 대들고.....
아이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따분하거나 혹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업에, 온갖 잔소리에, 툭하면 벌점에......학교와 선생들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럽긴 똑같다.
서로 간에 참으로 불행한 관계이다. 운명적으로 묶여 있는데 서로에게 고통만 주는 관계라니...... 여타의 교육관계들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끼리는 제로섬 경쟁을 해야 하고,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달달볶고 속 터져 한다.

* 감내할 문제가 아닌 교육의 근본 문제
교육적 본질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상황은 그냥 하소연하고 감내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비고츠키교육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행한 교육관계’는 교육 자체의 근본위기에 해당한다. 인간발달의 제 형태와 내용은 결국 ‘사회적 관계’를 통해 형성되며, 올바르고 풍부한 인간발달은 ‘협력적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서로에게 불행한 관계 속에서 협력적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질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올바른 발달이 어려울 뿐 아니라 나아가 발달이 왜곡되기까지 한다. 이런 불행하고도 반교육적인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일그러진 우리의 교육관계들
교육관계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교사-학생 관계 그리고 학생 간 관계이다. 또한 학생-학부모, 교사-학부모, 교사 간 관계 등도 주요한 교육관계를 구성한다. 교육관계 속에서 협력적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와 조건들이 필요하다.
첫째, 교육적 목적, 방향이 공유되어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으며 상호작용의 내용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둘째, 상호존중과 긍정적 태도이다. 존중과 호감은 협력적 상호작용을 촉진하고 교육적 발달을 강화한다. 셋째, 접촉면의 확대와 상호 이해이다. 인격적인 대면관계가 형성될 때 이해가 증진되고 올바른 교육적 판단과 처방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 넷째, 의미 있는 교육적 상호작용의 실제적 진행 등이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와 조건들에 있어 한국교육현실에서 교육관계는 근본적으로 뒤틀려 있다.

1) 서로에게 고통주는 ‘교사와 학생
교사-학생 관계는 학교제도가 성립한 현대사회에서 아동, 청소년기의 발달과정을 이끄는 가장 중심적인 교육관계이다. 교사-학생 관계는 교육적 상호작용, 역동적인 근접발달영역 창출을 통해 고등정신기능, 즉 인간적 발달이라는 공동의 목표와 과제를 협력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관계여야 한다. 따라서 그 어떤 관계보다 협력성이 가장 요청되는 관계이다. 그러나 한국교육현실에서 교사-학생 관계는 협력적이기 보다 오히려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한국교육의 가장 왜곡된 문제이자 딜렘마이다.

* 관계의 목적과 의미부여가 서로 다르다.
상호존중은커녕 서로를 불신하고 폄하한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공부안하고, 못한다’며 비하하며 학생들은 ‘사교육보다 학교수업이 못하다’며 폄하한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발달의 근거와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학생들은 교육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문제의 심각성은 둘 모두 맞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과서의 양과 난이도를 따라오기 어려우며, 입시교육에서 학교는 사교육에 뒤처진다. 상호불신의 문제는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요청을 채우지 못하는 객관적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는 협력적 관계의 가장 기본적 전제인 ‘관계의 목적’과 요구가 서로 다름을 의미한다. 마치 ‘공부’라는 같은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부에 부여하는 실제적 의미가 서로 다른 것이다.  
교사들은 교과서로 대표되는 공식 교육과정과 그에 기초한 자신의 교육과정을 기준으로 학생들의 지적 능력과 태도를 평가하고 학생과 부모들은 입시교육의 효율성을 기준으로 바라본다. 서로 다른 기준이지만 둘 모두 진정한 인간발달에 목적을 두지 않은 채 관계를 바라보기는 마찬가지다.
인간발달에 대한 요구는 교육본질적 요구이기 때문에 완전히 상실되지는 않으며 잠재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한국교육현실에서 그것은 선언적, 부차적이며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더욱 주변화, 허구화된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요청과 실현 역시 거리가 더욱 멀어진다.

* 서로를 소외시키다.
입시진도교육의 많은 양과 난이도 그리고 발달결손의 누적은 교사와 학생 서로를 소외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사의 교수행위는 많은 부분 학생들의 앎과 깨달음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학생 역시 노력한 만큼의 성취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아예 배움으로부터 이탈한다. 교수와 학습이 분리된 채 서로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교수 학습의 분리, 소외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확대, 일상화되며 관계를 적대화하는 기본 요인이 된다.
교육과정을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일부는 학력사회에서 졸업 자체가 현실적 목표가 되기도 한다. 이 경우 교사-학생 관계의 모순은 더욱 커진다. 교수-학습 상황에서 행해지는 거의 모든 일이 의미 있게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접할 때 일부 교사들은 입시진도교육 대신 발달상황에 맞는 교육을 꿈꾸기도 하지만 지금의 교육시스템에서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사-학생 관계의 모순과 대립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확대되다가 고3에 이르러서는 현상적으로 가장 최소화된다. 양자 모두 입시교육으로 전일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의 양태는 가장 비정상적이다. 많은 경우 교과서도 내팽쳐지고 문제풀이식 수업이 행해진다. 자신의 입시와 관계없는 교과시간엔 다른 것을 한다. 입시를 포기한 아이들은 거의 비존재 상황에 빠진다.  
물론 교육적 상황과 요구의 다양성, 잠재적으로 작용하는 발달에 대한 지향과 노력 속에서 상호불신과 소외만이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육실제 전반에 있어 서로 다른 목적과 기준으로 서로를 불신하고 소외시키는 상황은 교사-학생 관계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기본적 요소로 작용하며 한국교육이 극복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지점이 된다.

* 비인격적 익명성, 관리-통제 관계
올바르고 구체적인 발달적 협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격적 관계 형성과 구체적인 상호이해가 필요하다. 그럴 때 제대로 된 교육적 대응과 처방을 올바로 내릴 수 있으며 학습자 역시 인격적 관계를 통해 교육적 지도를 믿고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현실은 그와는 너무 멀다. 한국교육의 거대학교-과밀학급 체제는 교사-학생 관계에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하는데, 바로 익명화와 관리-통제화이다.
과도한 학생 수는 우선 불가피하게 교사-학생 관계를 관리-통제 관계로 전화시킨다. 소인수라 하더라도 관리, 통제는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거대학교-과밀학급 체제는 관리-통제를 학생과의 관계 속에서 교사가 수행해야 할 가장 주된 임무로 승격시켜 버린다. 그리고 아이들의 다양한 상황과 욕구 속에서 갈등과 대립이 증폭된 채로 구조화된다.
또한 과도한 학생 수는 인격적 관계 형성과 구체적 상호이해는커녕 많은 아이들과 교사로 하여금 익명성의 바다에 놓이게 한다. 거대학교체제에서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다 알기는 불가능하며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도 다 알기 어렵다. 아이들도 교사들의 얼굴 정도만 아는 정도이며 수업을 가르치는 교사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소수의 교사-학생 만이 인격적 관계, 친밀성이 형성된다. 익명적 상황은 존중의 토대를 허물며 정상적 상호작용까지도 어렵게 한다.
익명화는 한국교육 핵심문제 중의 하나이다. 교수-학습에서의 교육적 상호작용을 저해할 뿐 아니라 학교교육의 전반적 조건 중의 하나가 된다. 많은 아이들이 성장과정에서부터 소위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익명적 행위를 익힌다. 학교라는 집단과 공동체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사회성이 결여되는 모순된 성장과정의 주요 조건이 된다.  

* 상호작용의 결여 혹은 고통의 각인
한국적 상황에서 교사-학생 관계에서 상호작용은 매우 제한적이다. 많은 경우 일방적인 말하기와 듣기로 진행되는데, 수업 내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입장이나 기본적으로 서로 간에 고통스런 방식이다. 대화 한번 없이 지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상호작용이 있다 하더라도 협력적 앎의 기쁨보다 잔소리하고 혼내거나 하는 고통의 경험들로 더 많이 채워진다. 혼나는 아이들도 괴롭고 혼내는 선생들도 괴롭다.
수업 외의 과정 역시 고통스럽다. 관리, 통제와 관련된 온갖 규칙들은 많은 경우 아이들의 다양한 욕구와 대립한다. 서로 갈등, 충돌하며 온갖 대립이 야기된다. 학교는 감옥! 교수-학습은 고통!이라는 관념이 고착화된다.


2) 친구인가 적인가? : 학생 간 관계

* 제로섬 경쟁
학생 간 관계는 정서와 꿈을 나누면서 발달을 함께 도모하는 동료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학력과 사회적 지위, 내신의 배분을 둘러싼 제로섬 경쟁을 벌이는 경쟁관계를 형성한다. 제로섬 경쟁은 기본 성격 자체가 적대적이다. 이로 인해 아이들은 협력과 경쟁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학생들은 발달기능만이 아니라 성격과 취향, 사회경제적 조건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다양성은 협력을 북돋는 조건이 되기도 하고, 이질감을 확대하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제로섬 경쟁의 비협력성, 적대성은 이질감을 확대하고 동료 간의 관계마저 악화시킨다. 학생 간 발달 차이와 대립의 확대는 교사-학생 간 대립으로 전화되기도 한다. 편애로 느끼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며 점수 경쟁에 대한 예민함이나 정서적 불만족과 스트레스 등이 교사에 대한 불만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 학교폭력, 왕따 : 일그러진 욕구 충족의 대상이 되다.
발달의 협력적 경험과 기쁨을 함께 채워 나가지 못하는 가운데 아이들은 취향이나 사회적 조건을 기초로 형성된 제한적 또래집단을 통해 사회적 욕구를 해소하고자 한다. 이 가운데 일부는 비사회적 의사소통과 욕구충족방식을 익히기도 하며, 일부는 개별적으로 고립된 채 지내기도 한다.
학교폭력과 왕따 등의 현상은 일부 학생 간 관계가 발달의 동료는커녕 아예 비정상적 욕구충족의 대상과 수단이 되어버린 상황을 의미한다. 최근 빚어지는 학교폭력 현상의 더욱 심각한 점은 길에서 만난 잘 모르는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생활하는 동료를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이다. 동료 간 관계에서 협력이 상실될 경우  단지 그에 그치지 않고 서로를 파괴하는 관계로 전화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한시라도 교육관계의 재구성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3) 기타

* ‘웬수가 따로 없는’ 학부모-학생
적지 않은 경우 교육문제에 관한 한 부모-아이 관계는 교사와의 관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입시경쟁에 대한 요구가 더 강렬하고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요구에 더 많은 잔소리와 조치들이 가해진다. 교사-학생 관계보다 훨씬 다기한 상황 속에서 일부는 극단적으로 관계가 훼손되고 파괴되기도 한다. 공부잘하고 말잘듣는 소수를 제외한다면 입시교육은 부모-자식 관계를 웬수로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공부잘하고 말잘듣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 교사-학부모 관계의 적대화
교사/학생 관계의 적대화는 교사/학부모 관계의 적대화로 전이된다. 발달에 기초한 진정한 교육노동의 전문성(학습자이해의 전문성)이 형성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입시교육에 대한 요구도, 교양교육과 발달에 대한 요구도, 소통과 존중의 요구도 채우지 못하며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과 폄하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더욱이 감옥학교-체벌교사에 대한 부모세대의 경험과 이미지,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부 교사들의 비인격적 대우 등이 불신을 강화한다.
이런 가운데 시장주의의 경쟁이데올로기와 교육소비자론의 만연과 분할통치전략 관철은 교사-학부모 간 대립의 확대를 야기해 오고 있다.

* 따로 노는 교사 간 관계
학생들이 배움의 동료라면 교사들 역시 교육의 동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육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행정업무에서는 때때로 협력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교수-학습에서 협력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것은 입시진도교육체제와 교육과정이 교사 간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행위가 아동과 청소년의 발달에 초점이 두어진다면 어떤 아동, 청소년에 대한 이해와 처방에서 교사 간 협력은 불가피해진다. 어떤 학생에 대한 서로의 관찰 내용과 이해를 교류하고 적절한 처방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이런 식의 협력은 현재의 교육시스템에서는 소위 문제학생에 대한 논의 및 대응에서 일부 나타난다.) 그러나 입시진도교육체제에서는 학생의 발달에 초점이 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 교수행위에 초점이 두어진다. 얼핏 생각하면 더 나은 교수방법을 위한 협력이 진행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개별행위에 초점이 두어질 경우 개별적 능력, 노력의 문제가 되고 나아가 경쟁 대상이 됨으로써 비교를 꺼리게 만들기까지 한다. 또한 행정업무를 중심으로 하는 현행의 교사조직 형태도 교수-학습의 협력을 어렵게 하는 조건이 되고 있다.


2. 교육관계 왜곡의 구조적 요인
교육관계 왜곡은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다. 객관적 관계 형성의 문제이다. 따라서 ‘서로를 존중하자’ 혹은 ‘열심히 노력하자’라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 교육관계의 적대성은 다음의 구조적 요인과 조건들을 지닌다.

1) 발달적 교육 목표의 상실 : 형식교육과정/서열적 입시교육의 모순, 대립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교육관계를 묶는 근본 목표로서 인간발달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데 있다. 그런 가운데 실제 교육현실을 규정하는 힘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제도화된 교육과정 및 교과서이고 또 하나는 서열적 입시경쟁이다. 교사는 입시교육 현실을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형식교육과정 중심으로 바라보고 행하며, 학생과 학부모는 제도적 교육과정의 현실에 놓이면서도 입시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모두 인간발달에 대한 잠재적 지향을 지닌다. 이와 같은 교육목표의 불분명함과 차이는 교육주체 간의 구조적인 혼란과 불신을 야기하게 된다.
첫째, 교육 목표의 혼란이다. 공식적으로는 보편교양을 지향하는 교육과정이지만 실제로는 입시교육이다. 어느 것이 진짜 목표인지 불분명하다. 사람들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기도 하다. 교사들도 그렇지만 학생, 학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목표의 불분명함과 혼란은 협력의 가장 기초가 제대로 형성되기 어려움을 의미하며 또한 교육적 원칙이나 방향, 기준 등을 ‘허구’적인 것으로 이미지화한다.
둘째, 보편교양교육을 지향하던, 입시교육을 지향하던 어쩡쩡한 학교교육은 학생, 학부모들에게는 어떤 요구와 과제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다. 이는 결국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 폄하를 가져 온다. 특히 대다수 학생, 학부모가 현실적으로 입시교육을 지향하게 되는데, 입시교육에 올인하는 사교육과 대비되면서 그 불신은 더욱 증폭된다.
셋째, 근본적으로 인간발달의 목표가 상실되어 있다. 입시교육은 물론이고 공식 교육과정도 인간발달에 근거해 있지 않다. 엄청난 양과 난이도를 자랑하면서 기계적, 형식적으로 교과를 배치할 뿐이다. 만약 발달을 실제적 목적으로 삼고서 대한다면 상황은 질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교과서에 반드시 매일 필요가 없이 발달상황에 맞게 교육내용을 재구성하며, 방법들도 창조적으로 창출해 나갈 수 있다. 학생, 학부모 역시 발달을 기준으로 한다면 협력적 태도를 훨씬 높일 수 있다. 물론, 목표를 공유한다고 해서 교육관계가 곧바로 행복한 것으로 재구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호 간의 노력을 통해 협력이 증대되고 상황은 점차 개선되면서 질적으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2) 교육고통의 메카니즘 : 입시진도교육/발달결손과 왜곡의 구조화
공식교육과정과 입시교육은 학교교육에서 내신(중간, 기말고사)을 매개로 교과서를 빼는 ‘진도나가기 수업’이라는 형태로 절충된다. 이는 한국교육의 전형적 방식이 되고 있다. 진도교육은 공식교육과정을 때우면서도 입시를 준비하는 기초 과정이 됨으로써 입시교육 ‘알리바이’도 부여한다.
진도교육의 현실적 과제는 매시간 수업을 통한 진도 그 자체가 된다. 가능하면 아이들의 흥미와 참여 속에 쏙쏙 이해하는 과정이 되면 좋지만 실제적인 참여가 거의 없어도 교사의 설명이 행해지면 수업은 진행된 것으로 쳐준다.
진도 교육은 진도 자체가 수업의 과제가 됨으로써 발달과 관련된 아이들의 욕구 및 조건과 대립된다. 입시교육 그리고 절충된 진도교육은 기본적으로 앎과 발달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과정이 아니다. 진도교육은 발달과정과 무관하게 진행되며 무엇보다 이전 시기부터 발달결손이 누적되어 온 아이들에게는 참여 자체가 쉽지 않다. 아이들의 발달요구 및 조건과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매시간 수업상황에서 교사는 학생들과 진도의 원할한 진행 여부를 놓고 갈등, 대립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업을 통한 교사-학생 관계는 협력을 통해 발달을 함께 도모하는 관계가 아니라 일방적인 진도나기기 과정을 원할히 하기위해 통제, 관리해야 하는 적대적 관계로 전화된다. 아이들은 수업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기 힘겨워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탈하고자 하며 교사는 이탈을 방지하고 끊임없이 방해행동을 규제해야 한다. 특히, 발달결손이 누적된 아이들의 경우 인지적 측면만이 아니라 의욕, 흥미나 자기규제력같은 정서적, 의지적 측면의 결손이 함께 누적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적대적 관계가 일상화되고 때로는 극단적으로 격화되기도 한다. 교육적으로 본다면 발달결손 학생이 더 많은 교육적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진도교육에서는 적대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진도교육을 원활하게 잘 쫓아오는 아이들조차 형태적으로는 협력적으로 보이지만 많은 경우 본질적으로는 불신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진정한 발달에 대한 욕구(예컨대, 문학이나 예술을 꿈꾸는 아이들의 욕구를 수업에서 채우기는 어렵다. 그들은 기대수준을 낮출 뿐이다.)나 혹은 정반대로 입시교육에 대한 치열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순응하지만 불만인 것이다.
교수-학습과정에서의 내용적 모순, 대립은 과다한 학생수, 과잉학습이라는 조건과 맞물리면서 더욱 증폭된다. 교사의 입장에서 관리, 통제의 필요성은 커지고 학생의 입장에서는 더욱 힘겹고 이탈의 유혹을 쉽게 느끼게 된다.

3) 거대학교-과밀학급
도시지역 대부분의 학교는 거대학교-과밀학급라는 물적 조건의 문제를 지닌다. 거대학교-과밀학급 문제는 익명화를 야기함으로써 교육관계를 왜소화하는 주요 조건이 되며 교사-학생 관계를 관리-통제 관계로 전화, 왜곡하는 불가피한 조건을 형성한다.
대학처럼 학문과 연구 등 내용적 전문성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곳에서는 규모의 거대함과 익명성이 주된 문제가 아닐 수 있으나 발달에 초점을 두는 초중등교육에서는 핵심문제가 된다.

4) 개별적 해결수단의 상실 : 교육과정통제, 평가권박탈
관료주의적 교육과정통제와 평가권박탈 문제는 개별적 해결의 여지마저 상실시킨다. 교과서를 벗어나 발달상황에 맞게 교육과정과 내용을 재구성하고자 하더라도 관료주의적 교육과정 통제와 평가권박탈은 그 여지를 없앤다. (중고교의 경우) 가르치는 교사가 가르치는 학생을 대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전 학년이 동일한 평가대상이 됨으로써 학생상황에 맞는 개별 교사의 교육내용 및 평가재량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입시교육의 엄연한 현실 속에서 입시의 기초가 되는 ‘교과서’를 벗어날 수 있는 여지 역시 사실상 없다.


3. 교육관계 재구성을 위해

*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교육관계 왜곡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한국교육현실에서 교육관계는 감옥학교-체벌교사로 이미지화 되었듯 적대적이었다. 군사독재시절 교사-학생 간 적대성은 폭력으로 나타났다. 체벌금지 등으로 최근 물리적 폭력성은 완화(?)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불신과 폄하가 심화되어 내용적 적대성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물론 교사-학생 관계 등 제 교육관계와 상호작용이 오직 불신과 적대, 경쟁과 고통, 무의미한 행위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상호 존중과 믿음, 앎의 기쁨을 함께 맛보는 순간들도 많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교육관계가 발달을 추구하는 협력적 상호작용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회적 관계도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우정이 깊은 친구나 사랑하는 연인사이도 때때로 갈등과 대립이 있다. 그러나 한국교육현실은 그러한 교육적 본질을 무너뜨릴만큼의 왜곡 상황에 놓여 있으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적대적 요소가 협력적 요소를 압도하는 비정상 상황에 놓여 있다.

* 이렇게는 못사는 것 아닌가?
오래된 구조적 문제라 함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람들은 적응해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뒤에서 서로 욕하기, 상황 회피하기, 참아내기, 딴일하기, 부분적 의미에 만족하기 등등. 고교 일부 선택교과에서 거의 아무도 듣지 않는 수업을 열강하는 교사나, 불편한 책상에 엎드려 거의 하루 종일 잠을 잘 수 있는 어떤 아이들의 놀라운 생태적 적응력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사람들은 그저 살아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말로 이렇게 계속 살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학교를 탈출하는 아이들. 성적과 학교폭력 때문에 자살하는 아이들. 아이들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학교를 떠나는 교사들.... 적대화되어버린 교육관계의 왜곡과 파괴는 임계점에 와있다고 보여진다.

1) 적대적 교육관계 : 발달을 방해하고 공동체의 발전을 저해한다.
교사-학생 관계는 물론이고 교육관계 전반이 적대적 상황으로 변질된 것은 비단 당장의 힘겨움, 일상적 고통의 차원만이 아니라 교육의 근본과제인 ‘인간발달’ 과정이 훼손, 왜곡됨을 의미한다.  

* 발달 자체를 저해하고 왜곡한다.
적대적, 익명적 관계 속에서는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발달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협력적 발달의 모든 단계와 과정을 방해하고 왜곡한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거나 잘못 이해하게 하며, 적절한 교육적 판단과 처방을 어렵게 하며, 효과적인 근접발달영역 창출을 배제한다. 교육적 상호작용 자체가 어렵고 심지어 때로는 거부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종의 시스템차원에서 대규모로 발달결손이 야기된다. 또한 발달결손에 대한 처방이 제 때 그리고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누적된다. 그리고 발달결손의 누적은 적지 않은 경우 사회성의 결여 등 발달왜곡으로 전화된다. 비협력적 나아가 적대화된 교육관계는 현재 한국사회가 목도하고 있는 대규모적인 발달결손, 발달왜곡의 근본적 지점인 것이다.

* 교육과 학습을 고통으로 각인한다.
발달지향적 본질을 지닌 인간에게 있어 본래 앎과 깨달음은 즐거움이며, 협력은 함께하는 기쁨인 것인데 적대적 교육관계 속에서는 배움이 고통으로 각인된다.
배움에 대한 고통의 이미지는 끊임없는 배움속에서 지속적으로 발달하는 전생애적 발달을 저해한다. 한국사회 성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이 같은 이미지는 현재의 교육현실에서 새로운 세대에게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 비공동체적 인식과 태도를 형성한다.
협력적 경험을 익히고 체화하지 못함으로써 비공동체적 인간이 양산된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 협력에 무능(협력 역시 중요한 고등정신기능이며 인간적 역량 중의 하나이다.)한 사회구성원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왜곡된 교육관계에서 체화된 인간관계에 대한 적대적 시각과 태도는 사회적 관계 일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로 확장된다. 내가 살기 위해선 다른 사람을 따돌리고 밟아야 한다는 관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서의 사회 관념 등이 형성된다. 적대적 교육관계는 개개인의 발달을 방해할 뿐 아니라 공동체 형성과 민주주의 발달도 저해한다.

2) 교육관계 문제는 교육의 근본문제
교육관계에 대한 새롭고 근본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그 동안 많은 논의들이 교육의 중심문제를 내용과 기능의 차원만에서 바라봐 왔다. 정작 내용과 기능이 실현되는 실제적 과정, 즉 교육관계의 문제는 등한시 하거나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해 온 것이다.
또한 관계 문제를 바라보더라도 교사와 학생 간의 대립적 관계를 숙명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모든 인간관계란 의례 그런 것으로 생각해 온 경향이 있어 왔다. 인간관계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교육관계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발달을 도모하는 교육이라는 실천은 협력적 관계 속만 비로소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협력의 관점을 교육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일반으로 확장해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며 사회적 관계 역시 새로운 차원에서 재구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적대’에서 ‘협력’으로의 교육관계 재편을 통해 성장과정에서 협력의 태도와 실천 그리고 함께 발달하는 기쁨을 경험해 나가야 한다.

3) 교육관계로 바라보는 교육혁명
교육관계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한국교육의 구조적 재편은 더더욱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교육관계는 교육시스템의 구조적 차원에서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관계의 새로운 재구성을 통해 적대와 고통에서 벗어나 협력과 즐거움의 관계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교육관계의 본질 회복인 것이며 관계의 발전적 변증법일 것이다. 협력적 교육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의 변화가 필요하겠지만 필요조건으로서 핵심은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인간발달이라는 본연의 교육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입시교육이 폐지되고 발달에 입각한 교육과정을 수립해야 한다. 그래야 발달적 목표가 실제화될 수 있다.
둘째, 접촉면을 늘리고 인격적 관계맺기가 가능한 소인수학급, 작은학교로의 재편이다. 도시에서 작은 학교로 재편하는 것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소인수학급은 충분히 가능하다. 서울지역의 혁신학교인 선사고에서는 교과가 아닌 담임-학생 관계의 소수화라는 매우 부분적인 변화만으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만큼 접촉면이 넓어지고 그에 따른 상호이해가 증진되면서 교사-학생 관계가 전반적으로 개선되었다고 한다. 이번 대선국면에서 학급당 학생수 20명 의제는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의제라 생각된다.

그러나 입시교육폐지와 소인수학급, 작은학교로의 재편은 아직 당장의 변화는 아니다. 당장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오래된 구조적 문제라는 점에서 당연히 똑 부러지는 방법은 없다. 그래도 고통과 적대성을 완화하기 위한 몇 가지 노력은 필요하고 가능하다. 우선은 앞서 제시한 두 가지 과제를 포함한 교육혁명의 기치를 더 높이 세워서 한시라도 앞당기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육적 관찰의 노력으로 상호이해를 조금이라도 높여나가는 것-이해한만큼 관계는 개선된다. 그리고 가능한부분에서 교과서를 벗어나 아이들의 발달상황에 맞는 교육실천을 행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이 쌓여야 제도적 틀이 바뀔 때 협력적 관계로의 재구성을 실제로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팁 하나 더, 협력의 비고츠키교육학의 관점으로 상황을 새롭게 바라보고 조금씩 구체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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